|
프랑스식 세탁소
정미경
지잉 지이잉……
등 뒤에서 쇠 울음소리가 들린다. 오븐은 완전히 차가워질 때까지 저렇게 몇 번을 울어댈 것이다. 조리대가 붙어 있는 쪽 외벽은 단열이 시원찮다. 2월도 막바지인데 여전히 밤의 기운은 차다. 르와조는 고개를 돌려 오븐을 바라보았다. 번질거리던 기름기와 쏘스의 얼룩을 말끔히 닦아낸 오븐 위로 길이 잘 든 조리기구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프라이팬, 국자, 주전자, 거품기…… 르와조의 눈에는 그것들이 웃고 찡그리고 안달하고 때론 꾀를 부리기도 하는, 생명이 있는 존재들로 보인다. 바깥 기온이 낮아서 급격히 식을수록 오븐은 더 다급하게, 더 여러번 울었다. 그랬다. 아직은 봄이 아닌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이제는 무디어진, 습기 찬 발의 축축한 차가움이 오늘 새삼스럽다. 여느 날 같으면 집으로 돌아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워놓고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막 담그고 있는 시간이다.
샤워라도 하는 게 나을까. 그 생각이 스쳤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조리대와 오븐 사이, 눈을 감고도 옮겨 다닐 수 있는 이 자리에 너무 오래 서있어 연골이 닳은 채 서로 닿아버린 무릎뼈와 왼쪽보다 명백히 굵은 오른팔이 그러하듯, 온갖 음식과 식재료와 향신료와 흘린 땀이 뒤섞인 이 독측한 체위 역시 자신의 일부였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지하철에 타면 옆에 선 사람들은 꼭 르와조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르와조는 두 손을 둥글게 겹쳐 들어올려 아끼듯 숨을 들이마시며 냄새를 가늠해보았다. 그해의 첫 송로버섯을 매입할 때처럼, 세 번쯤 숨을 들이쉬고 나자 뒤섞여 있던 냄새들이 가닥가닥 나누어졌다.
가장 강렬한 것은 역시 쇠 냄새. 그건 르와조가 일생을 함께했던, 지금은 잘 닦인 채 조리대 서랍에 누워있는 칼의 냄새이기도 했고 그의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단단한 열정의 냄새이기도 했다. 어쩌면, 쇠로 된 칼 이전에 이 두 개의 손 자체가 르와조에겐 만능의 칼이었다. 저울이었고 측량자였고 재료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었다. 조리대 위에 놓인 재료를 한번만 쓰다듬어보면 그게 얼마나 싱싱한 것인지, 혹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포기해야 할 재료인지 금방 알아내는 손이었다. 르와조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딱딱하지만 섬세한, 손금과 칼자국과 불에 덴 흔적이 아로새겨진 손바닥, 자신의 전부가 담겨있는 지도였다.
언젠가부터 르와조에겐 레시피가 소용이 없어졌다. 재료의 분량, 불의 세기, 향신료의 궁합 따위에 대한 기준 말이다. 자신의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만으로 어떤 토질에서 채취한 시금치인지, 바닷물에서 나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난 홍합인지, 이 닭을 끓이면 얼마나 구수한 국물이 뽑아질지, 얼마나 더 끓여야 뼈에서 힘줄이 살짝 분리되는 순간이 올지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다섯 개를 얼마만큼 오므려야 티스푼 하나 분량의 설탕을 집을 수 있는지, 아직 불 위에 있는 스테이크의 겉면을 눌렀을 때 어떤 느낌이 미디엄의순간인지를 손가락 스스로 기억하고 있었다. 르와조는 그랬다.
사랑할 때조차 손을 아꼈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여자의 살결도 그해 처음 나온 통통하게 살진 흰 아스파라거스를 쓰다듬을 때 손바닥으로부터 시작하여 온몸으로 번지는 짜릿함보다 더한 쾌감을 주진 못했다. 르와조와 세상 사이엔 오직 이 손이 있다……
이게 뭐지?
나는 거기까지 읽다 말고 페이지를 뒤로 휙휙 넘겨 글의 마지막장을 확인해보았다. 생소한 저자 이름과 처음 보는 책 제목, 그리고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축약하여 싣는다는 각주가 달려있었다. 긴 글은 아니었다. 여섯 장이 조금 못 되는 분량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보니 이 원고가 포함된 종이 묶음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여름호 사보의 가제본이었다.
오늘 출근이 조금 늦었다. 미스 조는 잠시 자리를 비운 모앙이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지런하고 매사에 눈치도 빨랐다. 바닥은 말끔히 닦인 채 물기가 마르고 있었고 막 환기를 했는지 실내 공기는 신선했다. 싹싹한데다 애교가 넘쳐 비서로서는 더 바랄게 없었다.
미스 조가 돌아오면 정확한 스케줄을 다시 짚어주겠지만 오전시간엔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을 것이다. 그 인터뷰 기사 역시 이 사보 어느 곳엔가 실릴 것이다. 그리고 표지사진은,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되겠지. 두어 번 사양을 했다. 좀 우습지 않겠나? 차라리 장기근속 직원들 단체사진을 싣는 게 어떨까? 편집장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업이 시작된 지 십주년 되는 기념일이니 한번쯤은 재단의 얼굴을 드러내도 좋은 시점이다, 내실로 보나 대외적 이미지로 보나 비약적 성장을 이룬 장본인인 건 둘째 치고, 후원한 기업이나 개인들이, 아 이 사람 내 돈 날로 먹게 생기진 않았구나 생각하게 해야 한다면 거기에 대해선 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자줏빛 양란꽃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좀 전에 들어설 땐 못 보았는데. 취임 삼주년 축하와 대륙물산이라고 적힌 리본이 가지에 매달려 잇다.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손가락을 맞비벼 살짝 문질러보았다. 수분이 빠지면서 탱탱한 느낌이 가신 꽃잎은, 싱싱한 젊음이 한풀 꺾인 여자의 팔뚝 안쪽을 쓰다듬을 때의 감촉을 닮았다. 손가락에 닿는 그 느낌에 왜 느닷없이 미란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꽃 이파리를 들어 코 아래 대보았다. 말라가는 꽃잎에서 무슨 냄새를 기대했을까. 조화처럼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그걸 쓰레기통에 바로 던져버렸다. 그나저나 뜬금없이 요리사 이야기라니, 싶었지만 편집장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기획했을 것이다. 행정직원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알면 거품을 물 연봉을 약속하고 초빙한 사보 편집장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제목 빼곤 모든 걸 바꿔야 합니다. 사실 제작비나 발송료만 들지 이걸 누가 뜯어보기나 하겠습니까. 바로 재활용감이지요.
그는 과월호 몇 권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듯 가재미눈을 뜨고 휘리릭 넘겨보더니 조근조근 말했다.
요즘은 기부도 패션이에요. 쇼핑하고 다르지 않아요. 서울에만 장애인단체가 백군데가 넘습니다. 필이 꽂히게 해야 한다는 거지요. 명품 카탈로그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런 찌라시 들여다보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징징거리거나 하며 누가 듣고 있겠습니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잖아요. 화려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구요.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무겁지 않으면서도 지적인 자극을 놓치지 않는, 기다려지는 사보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예산회의에선 반대의견이 절대적이었다. 자선단체가 소박하게 소식지 정도면 되지 무슨 사보씩이나 발행하느냐고, 그럴 헛돈이 있으면 어려운 데를 한군데라도 더 도와야 한다며 다들 도끼눈을 떴다. 나는 그런 감각이니 여태 그 자리밖에 못 오르지 않았느냐는 말을 꾹 누르고 기업이든 개인이든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들은 십년이 가도 늘 같은 꼬라지라고, 그렇게 창의적 발상 없이 나가다간 우리 단체가 조만간 자선사업의 수혜자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문을 막아버렸다.
창간호는, 기대를 넘어 환상적이었다.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 외형적 변화도 그랬지만 컨텐츠의 매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참에 소식지에서 그대로 가져온 제목마저 바꿀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권두 인터뷰의주인공이 표지모델을 겸했는데 격투기선수로 성공한 재일교포 청년이었다.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가 쑥스럽다는 듯 소탈하게 웃는 모습은 남자인 내 눈에도 관능적인 흡인력을 파악 풍기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외딴 섬의 보육시설에서 단발머리 소녀를 근육질의 팔로 감싸 안고 찍은 그의 사진이 나왔는데 웃는 모습이 닮아 진짜 오누이처럼 보였다. 이어지는 인터뷰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매 맞으며 번 돈을 가치 있는 곳에 쓰는 기쁨을 알려준 재단 측이 고맙다고 고백했다.
방문하는 사람마다 한부씩 집어가는 바람에 사보는 동이 나버린 다음부턴 유가지로 변경해야겠다는 농담을 하며 우리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우려와 달리 제작비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사보에서 다룬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스폰서 요청을 하면 그들은 흔쾌히 비용 처리를 해주었다. 반대 의견은 흔적 없이 쑥 들어가 버렸다. 나 개인적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미스 조와 사보 편집장은 지난해 동시 발령을 받았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아니, 내게도 조직에도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표를 던져야 될지도 모른다고 마음은 먹고 있던 때였다.
힘들게 넘겼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죽을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체가 설립된 지 십 년이었고, 내가 실질적으로 경영을 맡게 된 게 삼 년 전이었다. 말이 자선재단이지 우는 소리 해가며 국고에서 지원받아 근근이 버티는 형국이었다. 전임 이사장은 번듯한 계획만 세울 줄 알지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회의 때마다 내가 몇 가지 구체적인 공략 대상과 접근 방식을 제시했고 덕분에 간신히 고비를 넘기는 일이 수차례 이어졌다. 그대로 가다간 재단 자체가 다른 곳에 흡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임 이사장의 임기가 끝나고 내가 새로 신임되자 마흔 중반에 이른 내 나이를 염려하는 소수의견도 있었지만 사실 대안이 없었다. 너무하세요. 귀밑머리라도 좀 희게 염색하세요. 여직원들은 차마 이사장님 소리가 안 나온다며 그렇게 애교 섞인 항의를 하기도 했다.
내부 승진 케이스인 내게 재단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세부사항은 내 손바닥의 손금보다 빤했다. 발령장을 받기 전부터 나는 공격과 세부 명세를 명확하게 정리해서 그쪽 홍보부로 보내주었다. 이래저래 미루는 곳은 밥 한번 사겠다며 면담을 요청했다. 만나면 후원자나 기업에 대한 홍보자료를 보여주면서, 차별성 없는 기업 이미지 광고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빌 게이츠 보세요. 독과점이다 심지어 적 그리스도다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마누라가 어린이 자선재단 사업을 제대로 해나가자 이제 아무도 그런 소리 꺼내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물의를 일으킨 기업이 있으면, 사태가 잠잠해질 무렵 선을 이었다. 기업 이미지 개선에 관한 구체적 사례를 들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거절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사회구조적으로도 기부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이비지 상승에다 세금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 보니 우는 놈 동전 한닢 던져주듯 하던 태도도 달라졌다. 나라든 구멍가게든 지도자가 정말 중요하다는 말이 직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자선도 사업이라, 일을 공격적으로 하다 보니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상한선이 있는 법인카드와는 별개로 사업진행비가 필요했다. 내 교류의 반경은 커졌고 만나는 사람들의 품격에 따라 쓰임새도 커졌다. 상장 기업의 홍보부장을 삽겹살집에서 만날 순 없었다. 내가 요구한 건 아니었다. 먼저 통장을 만들어 가져온 건 행정실장이었다. 짐짓 난색을 지어 보이자 혼내듯 그랬다.
이사장님이 너무 궁색해 보이는 것도 재단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이 정도 유도리는 있어야 품위 유지도 하실 테고, 신경 쓰이시면 가끔 직원들한테 회식이라도 한 번씩 해주세요.
책상 위에 놓인 통장을 바라보다 행정실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능구렁이 같은 놈.
지난 사내 체육대회 때 행정실장이 제 아내와 노란색 노끈으로 다리를 묶고 이인삼각 경기를 하던 모양새가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이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조그맣고 튼튼해 보이는 아내와의 보폭을 맞추려 비지땀을 흘리는 그 모습을 보자, 내가 했던 자선 중 가장 괜찮은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긴 했다. 무심한 뒷모습이란 너나없이 얼마나 쪼잔한 것인가. 불과 얼마 전에 사내에서 얼마나 큰 스캔들이 터졌는지 모름으로써 저 세 여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너나없이 껴안고 사는 일곱 가지 대죄를 굳이 까발릴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선, 어떤식으로든 눈물겹도록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상궁 늙은 게 동궁마마 은근히 군기 잡듯, 행정실장이 근무 연수 높은 걸로 내게도 슬쩍 어른 노릇 하려 든 적도 있었지만 그 오지랖도 화려한 스캔들과 함께 끝나 버렸다.
재단 내에서 행정실장의 반목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건 애초에 기싸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동갑인데다 근무 연수도 비슷한 두 사람은 매사에 차돌처럼 부딪쳤고 불꽃이 일어났다. 여자인 복지실장과 남자인 행정실장이 속궁합을 맞춰본 적은 없겠지만 겉궁합이 저렇게 안 맞는다면, 부부라도 갈라서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둘 다 상대방 얘기가 나오면 얼굴부터 하얗게 질리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쳐다보기도 피곤했다. 어르고 달래서 어렵게 화해 자리를 마련한 것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러나 매번 술잔까지 부딪쳐 놓고 헤어져서는, 다음날 곧이어 또 전화가 왔다. 그 여자 때문에 제가 병을 얻었습니다. 부정맥에다, 긴장성 고혈압이래요. 나야말로 스트레스성 두통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천적 앞에서 먼저 약점이 잡힌 건 행정실장이었다. 어느날 출근하니 복지실장이 여자 주임 둘과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지실장의 얼굴은 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가요. 아니 우리는요, 저런 사람과 같이 근무 못하거든요. 정말 제 입으로 이런 얘기 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민미란하고 하루이틀 된 사이가 아니에요. 어쩌면 뻔뻔스럽게 직장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는 모텔을 들락거려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우릴 전부 우습게 본 거지. 너무 너무 불결해서……
민미란이라면, 내 방 비서였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나는 복지실장의 속사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은 피를 다 쏟아낸 것처럼 창백해졌다. 그녀의 결론은 둘 다 당장 사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미란은 나가 있으라고 한 모양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세 잔 부었다. 그러고는 뜬금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 손에 하나씩 건네주었다. 마시세요. 물을 단숨에 마신 복지실장이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자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실장님. 그건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고, 충분히 면직사유가 됩니다. 행정실장은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참 나, 철이라곤 없는 사람이네. 그런데 실장님.
복지실장은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 옆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을 내버려 두고 땅바닥에 쪼그려앉아 꼬챙이로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돌멩이가 날아다니는 그 급박한 순간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쓰신 겁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썼다는 그 사실만이 이천 년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뭘 쓰셨을까요?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참 궁금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는 없습니다. 이천년 전 일이니까요. 이천 년이라니, 참. 저 같은 사람은, 짐작할 수도 없는 시간입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세 사람을 잠시 쳐다보았다. 복지실장의 얼굴에 핏기가 조금 돌아와 있었다. 나머지 둘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잔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지요. 너희 중 죄 없는 사람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다 아시는 얘기겠지요만, 핏발 선 눈으로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제 발치에 힘없이 돌을 떨어뜨리고 흩어져갑니다. 간음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곱 가지 대죄에 속하는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행정실장은 아내와 아직 어린 딸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미스 민은, 더구나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터뜨리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동시에 몇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한번으로 끝나지만 정신적인 죽음은 일생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광장에 둘만 남겨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엎어져 흙투성이가 된 여인에게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돌아가 다시는 죄 짓지 말라. ……그 창녀는 돌아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우리는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할까요? 저는 실장님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닫혀 있는 창문 밖으로 지나는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 실내는 조용했다. 복지실장은 사내 성경공부반을 몇 년째 인도하고 있었다. 뜻밖의 내 반응에 일단 돌아가긴 했지만 완전히 수긍한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두 사람을 바로 불러들였다. 그리 영리하지 않은 인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순간일 것이다. 두 사람은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목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나이가 몇 살입니까? 실장님, 사생활이니 이래라저래라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정치적인 올바름 정도는 가장할 수 있어야지요. 근처 이 킬로미터 반경 내에선 붙어다니는 모습 다신 들키지 마세요.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한시적인 관리자일 뿐인데요. 그리고, 여자들 이길 생각하지 마세요. 사소한 일에 져주면 얼마나 인생이 편해지는지 아직도 몰라요?
행정실장의 얼굴은 상한 홍시 색깔이었다. 민미란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물만 똑똑 떨구고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참 취향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손가락 마디에 쩐 냄새가 나도록 인색하고 꽉 막힌 행정실장도 그렇지만 거의 듬직하다 싶은 몸매의, 복지재단 아니면 언감생심 비서실에 근무할까 싶은 민미란까지, 둘 다 누군가의 환상의 대상이 되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도대체 어디에 끌린 걸까.
얼마 안 가 두 사람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데 대해 복지실장이 다시 떠들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게 사실이냐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해요, 사실은요. 복지실장은 몇 년째 날이 을씨년스러울 때면 어김없이 입고 나오는 갈색 재킷을 훌렁 벗었다. 행정실장 얘기만 나오면 순간적으로 발열하는 증상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제가 오늘부터 갱년긴가봐요. 그렇다면 그녀의 갱년기는 행정실장이 가져다준 질병이겠지. 재킷을 벗었는데도 이마에 땀까지 촉촉이 배어났다. 여자들이란 참. 전과 달리 싸늘한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봅시다. 결국, 그 인간이 혼자 먹는 데 대한 분노 아닙니까.
그녀의 얼굴이 더 뻘게졌다.
아니 이사장님,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틀렸습니까? 그 사람이 먹는 거 저도 알아요. 좀 먹긴 하지만 따오는 후원업체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닌 말로 실장님은 뭐 하나라도 끌어온 게 있습니까? 인센티브를 따로 챙겨주진 못해도 자기 월급 써가며 일하랄 수는 없잖아요. 제 말은, 큰 틀에서 생각하자는 거지요.
그후로 행정실장은 견마지로를 다했다. 내가 새기라 하면 이마에 칼자국이라도 새길 기세였다. 뭘 바라고 그렇게 처리한 건 아니다. 그 나이에 제 마누라 벗은 몸밖에 보지 못한 게 뭐 그리 내세울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일상이란 허깨비 같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두렵고 무거운 것이어서, 제 몫의 그것을 다시 지기 위해서 그는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간 눈치였다. 따로 알아본 적은 없었고 체육대회 때 그와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됐나보다 했다. 그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은혜 갚은 까마귀 노릇을 한번은 하고 싶었을 것이다. 통장은 그의 마음에 충성심이 북받쳐 오른 순간의 결정체였겠지만 나로서도 간절히 필요했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행정업무로 머리가 센 실장이 적어도 투명성을 최우선해야 할 회계 처리를 그렇게 데데하게 해놓을 줄은 몰랐다. 나 역시 치밀하지 못했다. 재단을 맡은 이후 내가 이루어낸 것들에 꽤나 도취되어 있었고 그 정도는 관행일 뿐 범법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이 터진 후에 직원들이 감사기관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었을 때 한 일련의 증언들을 보면, 그들은 정직하고 무능했던 전임 이사보다는 내가 낫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정직이라는 것은 무언가 다른 형용사와 합쳐지면 힘을 잃는 개념이었다. 정직하고 무능한 사람, 정직하고 답답한 사람,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 정직하고 게으른 사람…… 이렇게 하위 개념과 결합하면 그건 아무 힘을 쓰지 못했다. 감사기관에 마지막으로 소환되었을 때, 책상 앞에 날 앉혀놓고 노트북에 내 진술을 기록하고 그걸 프린트하고 거기에 손도장을 찍게 했던 남자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랫사람들을 참 잘 두셨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러더군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재단의 재정을 탄탄하게 확대했고 절차상 서툴게 처리된 부분이 있다 해도 비용을 사적인 데 사용하지는 않을 분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렇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내 계좌를 추적하고, 요 몇년 사이 급격하게 불어난 재산에 대해 복잡한 검증을 시작해야하는 수고를 감당하기엔 내게 씌워야 할 혐의가 너무 미약한 것 일수도 있고 또 한편으론 그 액수란 게 이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비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 사안에 이르기엔 너무 적어서일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그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았다. 첫 조사를 받기 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피며, 혹시 지병이 있으십니까? 심장 쪽에 이상이 있진 않은가요? 조사 중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해지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이제부터 네 목을 조르겠으니 각오하라는 듯, 사람 질리게 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니 늦은 오후였다. 점심때 안에서 설렁탕을 시켜주긴 했지만 국물만 두어 숟갈 뜨고 말았다. 그사이 비가 내렸는지 보도는 얼룩덜룩했고 차도와의 틈엔 빗물과 나뭇잎이 뒤섞여있었다. 빌딩 사이로 부는 차가운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안에서 땀을 흘렸는지 살갗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큰길 쪽으로 걸어 나오다 분식집에 들어가 매운 라면을 시켰다. 아무 맛을 모르겠다싶더니 몇 술 뜨자 그 지독히 매운 국물이 미치도록 당겼다. 잘게 썬 청양고추 째 뜨거운 국물을 퍼먹자 몸 안의 한기가 사라졌다. 처음 불려갔을 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차가운 빛의 형광등 아래 앉아 있으니 몸의 어딘가에서 핏줄이 탁, 탁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 같았다. 한번 조사를 받고나오면 일 킬로그램씩 체중이 내려갔다. 라면 그릇이 바닥을 보이고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발가락 끝까지 퍼져나가던 싸구려 포만감이 지긋지긋해 이후로 라면은 입에 대지 않는다.
“어머, 나오셨어요?”
내가 나온 걸 몰랐는지, 불쑥 들어서던 미스 조가 깜짝 놀란다. 지난 생각에 빠져 있던 나 역시 그녀 목소리에 깨어났다.
“일찍 안 나오셔도 되는데!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를 보냈거든요.”
양복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나간 걸 몰랐다. 눈치 빠르게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받아들고 충전기에 연결했다.
“편집장님이 아침에 인쇄소에 들를 일이 생겼다고, 한 시간 늦추어달라고 하셨거든요. 어떡해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호들갑스럽게 자책하는 모습이 밉지 않다.
“뭘 어떡하긴. 일하면서 기다리면 되지.”
몇 개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에 답을 하는 사이 구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실내에 커피 향이 번진다. 오전 주에 급하게 처리할 일은 더 없다. 편집장과 인터뷰를 하고 나면 같이 점심을 먹게 될 것이다. 미스 조가 출근하면 이렇게 실내에 커피 향이 퍼지는 것처럼, 재단의 일들도 시스템화 되어 모든 게 순조롭게 굴러갈 것이다. 떨어진 꽃 이파리 하나 때문에 쓸데없는 상념이 길었다. 커피를 마시다 아까 읽다 만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마르셀.
마르셀.
엄마는 르와조를 부를 때면 언제나 잠깐의 시차를 두고 두 번씩 불렀다. 르와조는 빤히 들리는 곳에 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끔찍이 싫었다. 막힌 홈통을 뚫는다며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던 엄마는 발을 헛디뎌 떨어진 후로 허리 아래쪽을 움직이지 못했다. 르와조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누나는 이웃마을에 사는 공무원과 결혼했고, 형은 큰 도시로 나가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떠난 후로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자식은 저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렸어. 평생 고달프게 살 거야. 엄마는 형을 저주하는 만큼 르와조에게 집착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름을 불러댔다. 그렇게 두 번을 부른 후 르와조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바로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형이 그랬던 것처럼 그 눈물의 바다에서 멀리 달아나기엔 르와조는 너무 여렸다. 집안일은 넌덜머리가 났다. 엄마의 끝없는 잔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해야 했고 감자를 삶아 으깼다. 피 묻은 고기를 주물러야 했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씻어 냄비에 안쳐야 했다. 엄마는 누운 채 소리소리 질러가며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르와조가 꾀를 부리는 걸 귀신 같이 알아내곤 했다. 감자 껍질을 그렇게 깎아내면 입에 들어갈 게 남아나겠다. 어디서 훔쳐오기라도 하든지, 더 잘게 다져라, 제발. 오믈렛 밖으로 양파가 걸어나오는구나. 소금을 또 한 주먹 집어넣기만 해봐라. 한 솥 다 퍼먹게 할 테다……
음식을 만드는 건 소년에게 너무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다. 전쟁을 치르듯 불과 싸우며 가까스로 식탁을 차려놓고,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다 놓고는 르와조는 매번 꾸물대며 뒷정리를 했다. 왼손으로 포크를 움켜쥐고 그악스레 음식을 밀어 넣는 엄마와 같이 먹기가 싫었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죽음이란, 그러니까 열세살짜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하루에도 세 번씩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상태였다.
르와조는 열일곱살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소리치지 않아도 르와조는 알아서 끼니를 준비했다. 늘 그렇듯, 그날 아침에도 르와조는 세수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3월이 왔지만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나오면 한기가 오싹 들긴 마찬가지였다. 전날 밤에 먹다 남은 수프 냄비에 물을 한 컵 부어 불을 켜놓고는 눈곱을 떼어냈다. 마룻바닥으로도 떨어지고 냄비 속으로도 떨어지는 눈곱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딱딱한 빵을 잘라 접시에 담아 놓고는 수프를 휘휘 저었다. 물을 좀 많이 부었는지 유난히 멀건 수프를 보며 불을 세게 올렸다. 냄비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수프가 갈색을 띠며 오그라들었다. 지난여름 만들어 놓은, 너무 조려 검은빛이 도는, 그래도 제법 감칠맛이 있다고 엄마가 칭찬한 산딸기잼을 덜어놓고는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그리했듯 간격을 두고 두 번 불렀다. 엄마, 엄마? 아무 기척이 없었다. 맨발에 닿는 마룻바닥의 냉기와는 다른 한기가 가슴을 스쳤다. 르와조는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엄마를 만져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몸은 도마 위의 닭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만둔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르와조는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엄마가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자신이 엄마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수프의 맛이 떠올랐다. 밍밍하고 멀겋고 미지근했던.
나는, 미란이 죽어 있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전해 들었을 뿐이다. 이틀째 출근을 하지 않았고 전화도 꺼져 있었지만, 죽음은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지방에 있는 본가에도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하자 직원 둘이 집으로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그곳에서 119로 연락을 했다 한다.
흘려놓은 내 흔적은 없을까?
침대에 누운 채 죽어 있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머릿속을 날카롭게 찌른 생각이었다. 그 나흘 전 마지막으로 갔을 때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을 드나든 이후 처음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안도감이 뒤를 이었다.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다며 놀랐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말 낮에 그녀의 집에 놀러가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놀다 왔다는, 서무부에 근무하는 동갑내기 미스 오도 어떤 자살의 기미도 못 느꼈다고 말하며 턱을 달달 떨었다. 탕수육까지 같이 시켰거든요. 미스 오는 그 말을 두 번 되풀이했다. 탕수육이 생에 대한 긍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어쩌면 미란이 그날 늦은 오후 내가 찾아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날 우리가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다.
둘 다 혹은 둘 중 하나가 부서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겠지. 둘 중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지. 당연히. 그런데, 그 둘 중 하나가 자기 쪽이 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그렇다면 차라리 둘 다, 쪽을 선택할 것이다. 기쁨보단 고통에 동반자가 더 필요할 테니.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정하는 문제는 어떨까.
사실 누가 그 자리에 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가피하게 제단에 놓여야 한다면 단죄되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누군가 희생양이 되었다면 그건 그 자신의 죄의 단독성 때문이 아니다. 죄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인가. 오래된 종교의 경전에서도 보았듯 오히려 가장 순결한 자가 제단에 오르곤 하는 것이다.
미란은, 참 애매하다. 끝까지 버텨줬더라면, 이렇게 모든 게 잠잠해졌는데. 미란이 죽기 전 만났던 시사주간지의 기자는 하루 먼저 나에게도 찾아왔었다. 감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이미 질문 받았던 걸 그는 다시 묻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경험이라고 제법 맷집이 생겨 있었다. 기금의 집행과정에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경비가 개인통장으로 흘러나간 게 사실인가? 외부 기부금을 직원들 복지 명목으로 마구 풀었는데 선심성 행정을 넘어 집단 부정이 아닌가? 지난해 기부금의 총액과 집행된 액수 사이의 공백이 큰데 규명할 자료가 있나? 나는 지난번 조사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여 조리 있게 대답했다. 일개 주간지 기자가 개인 금융거래의 내역을 확인할 길은 없을 것이다. 추측기사를 이래저래 떠든다 한들 열흘만 지나면 모든 게 잠잠해질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해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분히 말했다.
이런 일이 그렇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지요. 투명한 게 목적이라면, 그것도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런 얘기 제 입으로 하긴 그렇지만, 처음 멋모르고 떠맡고 보니 참 암담했습니다. 번지르르한 껍데기를 빼면 아무것도 없더군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은 쉽지요, 천만 원짜리 시계를 손목에 휘감고 무소유의 행복을 떠드는 인간을 보면 저는 속으로 경멸합니다. 집단 최면 속에 사회적 약자들을 푹 담가놓겠다는 사악한 이기주의죠. 제가 공격적인 경영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게 핵심입니다.
기자는 내 얘기를 다 듣고도 여전히 찜찜하다는 듯 돌아갈 때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미란을 따로 만나자 한 그는 좀 더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자신이 볼 때, 미숙한 회계처리가 아니라 구조적인 횡령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사장이 실질적으로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압력을 행사했나, 미란이 진땀을 흘리며 자신은 회계업무를 하지 않아 잘 모른다 고개를 젓자 다시 물었다 한다. 민미란 씨는 이 일에 핵심적 역할을 한 행정실장과 특별한 관계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그건 지난 일이고 최근엔…… 미란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말끝을 흐릿하게 잘라먹는 건 미란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할 지점에서 자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의 관계를 그 기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얘졌다.
그 사람이 날 빤히 쳐다보며 그 얘길 하는데, 정말……
소파 옆 바닥에 무릎을 모아 세운 채 앉아서 미란은 또 그렇게 말끝을 잘라먹고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문질러댔다. 무릎 아래쪽이 시커멓게 착색되어 보기 흉했다. 정말…… 그 뒤에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을까. 거뭇한 무릎은 보기에도 흉했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도 했다. 그녀는 뭔가 해야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도리어 말끝을 자르고는 꼭 그렇게 무릎을 문질러 댔다. 이를테면, 결혼해야지. 눈을 찬찬히 뜨고 좋은 사람을 찾아봐. 지금이야 괜찮지. 나이 들고 아프기라도 해봐. 너 외로워진다.
나는 자주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 있는 관계가 절대 아니라는 걸, 내가 널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내게 어떤 기대도 가져선 안 된다는 걸 일깨워주곤 했다. 미란은 그러겠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오면서, 그렇게…… 하며 말끝을 흐렸다. 언젠가 그러는 날 빤히 쳐다보며, 서툰 농담이라도 하듯 나쁜 사람, 이라고 했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함께 먹은 밍밍하고 멀건 수프 맛 같은 걸 생각한 게 아니라 혹시나 바닥에 흘러 있을지도 모를 내 머리카락이나 체액을 근심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더듬어보았다. 한 사람만 십자가를 지고 지나갈 수 있다면 굳이 다 나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얘기도 했던 것 같고.
뭐, 이사장님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만 하면 문제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네 생각이지, 누가 네 말을 믿어주겠냐.
제 무릎을 문지르고 있는 이 여자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뜨면 내 인생 여기서 끝이다. 사회적으론 사망선고지.
그렇게만 말하고 나는 일어났다. 그날 어둑한 복도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비닐봉지에 싸인 중국음식 그릇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른 르와조는 작은 가방 하나만을 들고 빠리로 갔다. 처음 가본 큰 도시였다. 가난한 중국인들이 몰려 사는 수아지 거리 근처에 방을 구해 들어갔다.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부엌일 밖에 없었다. 감자 껍질을 순식간에 벗기거나 시든 양파와 당근으로 스튜를 끓이는 것, 그리고 접시를 닦는 일. 그토록 끔찍해 했던,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부엌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 싸구려 식당에 자리를 잡은 건 요리가 아니라 청소일이었지만, 바쁜 시간엔 재료를 다듬는 일도 같이 도와야 했다. 어느날 주방장이 닭을 토막 내는 그의 옆을 스치며 한마디 했다.
칼을 잡을 줄 아는구나. 요리 해 본 적 있어? 저 새끼들은 입만 살았지 감자 하나를 제대로 못 깎아.
그의 보조로 일하게 되었지만 급료는 청소할 때와 같았다. 르와조는 장사가 끝난 후 뒷설거지를 자청했다. 청소를 해놓고는 남은 재료로 새벽까지 실습을 했다. 주방장이 만드는 쏘스를 눈여겨보았다가 똑같이 해보았다. 맛을 보고, 그가 만든 것보다 낫다고 느껴져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던 생선 요리 외엔 자신이 주방장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때 르와조는 삐갈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옮겼다. 요리사만 일곱 명인 제법 큰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처음엔 불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고기와 생선과 야채를 다듬어야 했다. 칼이 스친 자리에 피가 배어나왔고 손바닥은 몇 번이나 허물을 벗어 지문이 사라져버렸다. 엄마의 욕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퍼런 위계질서에 코도 홀짝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스튜에 넣을 농어를 다듬는 날이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방장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해왔고 혼자서 몇 번이나 실습도 해보았다. 아가미 바로 아래쪽에 칼을 찔러 넣었다. 긴장 때문에 주춤거리긴 했지만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심스레 칼을 그어 내리고 있은데, 갑자기 도마 위로 칼이 날아왔다. 하마터면 왼손 팔목의 힘줄에 박힐 뻔했다. 주방장이었다.
생선 배 하나 가를 줄 모르면서 요리를 하겠다고? 고양이가 뜯어 먹다 남긴 모양새로 테이블에 내놓을 거야? 칼을 톱처럼 움직이면 결이 다 찢어지고 비린내가 심해져서 버려야 돼.
걸핏하면 칼을 던졌지만 사실 그에게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생각하고 있을 때 르와조는 해고되었다. 제멋대로 음식을 한다는 게 이유였다. 젤라틴에 생선을 넣어 차게 식혀 내놓은 테린에 가오리를 넣어봤을 때 손님들은 계산을 하면서 모두들 그 맛에 대해 한마디씩 칭찬을 하고는 돌아갔다. 손님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제 솜씨를 질투하는 것이라고, 르와조는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재료를 만지면, 끝없는 상상이 펼쳐져 주체할 수 없었다.
상젤리제에 있는 르 사부아에서 일할 때 비로소 음식 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나드는 손님들의 품격부터 이전 식당과는 달랐다. 음식이 나갈 때 홀을 잠시 훔쳐보면, 그곳은 그랬다. 꽃 핀 봄밤과도 같은 비일상적인 공기가 부유하고 있었다. 르와조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일상적인 느낌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의 비밀은 무엇일까. 르와조는 그걸 알아내고 싶었다. 서빙하는 웨이터의 걸음걸이와 표정까지 살폈다.
불타오르는 르와조.
사람들은 르와조를 그렇게 불렀다. 좋은 뜻은 결코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칼을 전진 주방장을 미워했지만, 그 자리에 이른 후엔 자신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르와조의 주방에 두 개의 화덕이 있어. 그러나 르와조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가장 엄격하게 대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절반쯤 남아서 주방으로 돌아오는 접시는 늘 르와조 앞에 놓였고 그는 그 음식을 찬찬히 먹어치웠다. 누군가 이미 잘라 놓은, 그의 침이 튀었을, 싸늘히 식어 있는 음식을. 르와조가 원한 건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 쏘스까지 말끔히 닦아 먹은, 비어서 돌아오는 접시였다. 요리에 관한 한 사소한 잘못에도 화산이 푹발하듯, 숯불을 끼얹듯 화를 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였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것이지. ‘불타오르는’이라고 불린 이 남자처럼, 나 역시 이 사업을 맡은 후 내 안과 바깥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뒤에서 욕을 하는 것도 안다. 직원들이 감사에서 내 편을 들어준 게 아니라 내가 일을 수행하는 방식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미친 파도처럼 밀려들던 그 어려운 고비들은 이제 다 지나갔다. 요즘은 일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폭죽처럼 떠올랐다. 이를테면 광고와 기부가 결합된 형식 같은 것도 도입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과도기가 지나면 적립식 기부를 제안해볼 생각이다. 펀드만 적립하는 게 아니라 선의도 적립할 수 있다는 걸 깨우쳐 주어야 한다. 이런 일일수록 마지못해 하는 모양새보다는, 미처 몰라서 못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의를 자기에게조차 확인시키고 싶어 한다.
나는 미스 조를 불렀다.
“이 옷 괜찮아?”
사진 촬영이 있을 거라고 편집장이 말했다. 과소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구두 한 켤레를 사도 괜찮은 걸 구입한다. 자선단체에서 일한다고 자선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여선 안 되니까. 내 머리끝부터 구두까지를 찬찬히 훑어본 미스 조가 고개를 급하게 끄덕인다.
“너무 멋있으세요.”
미란이라면, 고지식하게 내 말을 받아, 예, 하고 그만이었을 것이다.
행정실장과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 그 관계의 누추함을 비웃었으면서 왜 미란과 그렇게까지 가버렸을까.
행정실장은 미란과의 일을 제 마누라 빼고는 다 알게 되고, 오늘 잘릴까 내일 잘릴까 피를 말리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도 전 제 인생에서 미란을 무 자르듯 잘라냈다. 복지실장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이참에 보직이라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로선 그랬다. 그 자리는 누가 와도 마찬가지였다. 애매한 용처의 큰돈을 만지면서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은, 바보 외엔 없다. 이미 덜미를 잡힌 행정실장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란을 그대로 둔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머리 검은 짐승은 은혜를 모른다지만,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인간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별한 재능이 필요 없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란은 말수가 적었다. 은근히 따돌림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내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 직원이 아는 줄 뻔히 알면서, 행정실장과 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하는 사무실 서무직으로 내려 보내면, 역시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터였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게 내 인격이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내가 죽으라 하면, 내일 이사장님 스케줄마저 체크해 놓고 죽을게요,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둘의 관계라는 게 나로서도 참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미란은 날 존경했다. 그 존경의 대부분은, 아마, 둘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행정실장이 허겁지겁 끌어다 붙인 내 이미지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이사장님께 더 이상 누를 끼쳐선 안 된다고, 내 머리 뒤로 금빛 후광을 둘렀겠지. 이후로 행정실장은 이 방에 들어올 일이 있어도 미란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참 초라해 보였지만 초라함이란 정서 역시 그런 내연의 동기가 되기엔 좀 약하지 않을까. 굳이 찾아보자면, 그녀의 눈빛과 태도가 내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한번씩 내릴 때마다, 기온은 가파른 계단을 걸어 내려가듯 뚝뚝 꺾였다. 가을과 겨울이 뒤섞이고 있었다. 이제 외투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르와조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는 걸 보았는지 엘리베이터에 탄 누군가가 올라가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보니 가끔 마주친 적이 있는 아가씨였다. 축축한 공기 때문인지 눈 아래쪽으로 화장이 꺼멓게 번져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친한 사이라도 된다는 듯 여자가 물었다.
늘 이렇게 늦나요?
거의요. 이 시간에야 일이 끝나니까요.
공손하게 대답하는 르와조를 보며 여자가 장난스레 푹 웃었다.
뭐하는 분이세요? 음, 내가 맞혀볼게요.
르와조를 빤히 바라보며 여자는 확신한다는 듯 외쳤다.
요리사.
그 명랑함은 과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어떤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르와조는 그만 수줍게 웃었다. 르와조는 그랬다.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여자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제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알아챘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자는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실비. 르와조도 제 이름을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비는 제 손목을 들어올려 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르와조, 혹시……열두 시 십 분에 누군가를 위해 수프를 끓여본 적이 있어요?
르와조는 고개를 저었다. 밤늦은 시각 주방에서 수프를 끓인 적은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럼 지금 한번 해보실래요?
식당은 문을 닫았어요.
제 방에도 부엌이 있어요. 좁긴 하지만.
왜 그 방에 가게 되었는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요리를 해주러 갔다기보다는, 화장이 번진 여자의 눈과 쓸쓸한 미소에서 찢어지는 슬픔의 기색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실비는 냄비와 밀가루를 꺼내더니 부엌 여기저기를 부산하게 뒤지다 곯은 양파 하나를 달랑 꺼내놓았다. 고기는 혹시 없나요? 실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선반에서 캔으로 된 치킨 스톡을 하나 꺼냈다. 캔은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은 요리에 인스턴트 재료를 쓰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버터와 밀가루를 갈색을 띠기 직전까지 볶다가 물을 부어 끓어오르자 치킨 스톡을 넣었다. 그 사이 다져서 볶아 놓은 양파도 집어넣었다. 굳이 맛을 보지 않아도 르와조는 냄새만으로 음식의 질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건 개수대에 바로 쏟아버려야 할 맛이다. 르와조는 두 개의 접시를 꺼내 끓인 물로 냉기를 가시고는 수프를 나누어 담았다. 실비는 스푼으로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 한 방울이 수프 그릇에 떨어졌다. 그래도 쉬임 없이 먹었다. 수프를 먹는 사람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 같았다. 빈 접시에 스푼을 내려놓으며 실비가 르와조를 쳐다보았다. 초록과 회색이 섞인 신비스러운 눈동자였다.
행복한 맛이에요.
르와조는 비로소 수프를 떠 먹어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이번엔 르와조의 접시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르와조 역시 수프를 먹으며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오래전에 죽은 엄마 때문에. 엄마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밍밍하고 미지근한 수프 때문에. 한번도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요리를 한 적이 없었지.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회초록빛 눈과 마주치는 순간, 르와조는 제 안에 쌓여 있는 외로움의 두께를 깨달았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밤마다 수프를 끓여 주겠다고, 회초록빛 눈동자에 맹세했다. 주방에서 일을 할 때도 머릿속으로는 그녀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요리의 레시피들이 끝없이 떠올랐다. 실비 없이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깨뼈가 시렸다.
언제나처럼 늦은 밤에 르와조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실비는 떠나 버렸다.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그러나 당신이 만들어주던 싸바랭의 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고도 적혀 있었다. 르와조는 난해한 요리의 레시피를 읽듯, 되풀이하여 편지를 읽었다.
실비와는 요리 때문에 사랑에 빠졌고 요리 때문에 헤어졌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싸바랭의 맛이었다. 싸바랭은 디저트를 만드는 요리사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모든 싸바랭은 다 다르다. 싸바랭은 그만큼 섬세한 것이다. 어느 산지의 밀가루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갈았는지, 체에 몇 번을 내렸는지, 사용된 달걀의 크기, 생크림의 농도, 그리고 만드는 동안 얼마나 차가움을 유지하는지, 장식용 딸기조림에 넣는 게 브랜디인지 꼬냑인지에 따라 매번 미묘하게 다른 싸바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비 싸바랭.
싸바랭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실비를 위해 르와조는 오직 자신만의 싸바랭을 만들어 실비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다들 그러듯 기성품을 쓰는 대신 최상급의 야생딸기를 구해 손수 조림을 만들었다. 신선한 달걀과 생크림과 우유로 만든 치밀한 크림 위에 조린 야생딸기를 듬뿍 올렸다. 사랑한다는 말 때신 차갑게 식힌 싸바랭을 실비 앞에 내려놓곤 했다. 싸바랭? 실비는 속삭이듯 그 이름을 부르며 스푼으로 입에 떠넣는 첫 순간이면 눈을 살며시 감았다. 회초록빛 눈동자 위로 커튼처럼 천천히 내래오던 속눈썹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르와조는 밤의 주방에 혼자 서서 엉엉 울었다. 그날은 오븐이 르와조의 울음소리를 늦게까지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자, 애써 멈추려하지 않아도 눈물이 잦아들었다. 자정 무렵, 이제 혼자가 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어떤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녀는 떠났지만, 실비 싸바랭은 남았다. 그걸 먹고 싶어서 정기적으로 식당에 오는 손님도 있었다. 르와조는 여전히 실비 싸바랭을 디저트로 준비하지만 이젠 거의 실비를 떠올리지 않는다. 어쩌면 르와조는 한번도 실비에게 자기의 전부를 주었던 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실비가 떠난 건, 같이 할 수 없는 저녁 시간이 아니라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르와조는 시간이 흐른 후에 생각했다. 요리만이 르와조의 영혼이었고 그의 전부이며, 바로 르와조 자신이란 걸 실비는 르와조보다 먼저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미란을 위해 라면 한 그릇도 끓여본 적이 없다. 그녀가 영원히 떠났을 때 눈물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혼자가 되었다고 행복해지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부재가 날 고통스럽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오늘 자꾸만 미란이 떠오르는 걸까. 그녀와 내 삶이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한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러니까, 그날이었을 것이다. 작년 추석을 앞두고 서해안의 섬에 있는 장애인 시설 운영 심사를 나갔던. 그렇게 많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직원 열 명을 데려갔다. 기왕 미니버스 하나를 움직이는데, 내가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 있게 하나라도 더 데려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행정실장과 미란도 같이 갔지만 내내 투명인간 대하듯 하는 행정실장을 보며 미란이 안됐다기보다 미련해 보였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질 것이지. 명절 직전의 서해안도로는 예상보다 정체가 극심했다. 차는 몇시간째 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가 다 저렸다. 나들목 근처와 국도로 빠져나왔다. 휴게소라 부르기도 어려운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모두 화장실부터 들렀다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캔커피나 음료수를 마셨다. 보이진 않아도 바다가 가까워선지 투명한 공기 속에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입자라도 섞인 듯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미란이 차로 가더니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주섬주섬 꺼내놓는데 보니 호일에 싼 김밥 열 줄, 검은 점이 지나치게 생긴 바나나 몇 개, 풋사과 세알, 크림빵과 팥빵 몇 개였다. 누가 먹는다고, 심란하게. 난 속으로 생각했다. 섬에 도착하면 생선회를 준비해 놓기로 했는데. 비닐봉지엔 일회용 접시와 천냥 하우스에서 산 듯한 조악한 과도까지 하나 들어 있었다. 제일 어린 김해용이 환호를 했다. 누나, 언제 이렇게 준비했어요?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미란은 또 조금 웃었다. 어쨌거나 먹을 걸 보자 다들 좋아하긴 했다. 미란은 접시를 몇 개 펼쳐놓더니 바나나 껍질부터 벗겼다. 거뭇한 껍질과는 달리 속살은 뽀야니 깨끗했다. 그걸 동전 모양으로 똑똑 잘라 접시 가장자리에 방 둘렀다. 김밥 포장을 벗기고는 또 바나나 안쪽으로 조르르 줄을 세웠다. 크림빵과 팥빵은 한입에 넣기엔 좀 작다 싶은 크기로 조각을 내더니 가운데다 쌓았다. 우와. 김해용이 김밥 하나를 집어 맛을 보았다. 어? 맛있다! 미란은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으응, 내가 싼 건 아니고 동네 김밥집서 샀어. 우리 어릴 땐 바나나가 진짜 귀했는데. 에이, 실장님 옛날 사람이네. 난 바나나 먹고 자랐는데. 미스 민 아니면 우린 전부 굶어 죽었어. 나불나불…… 내가 보기엔 그랬다.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하며 김밥을, 바나나를, 팥빵을 집어 먹고 있었지만 사실 그 태도들은 고마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은근히 티 나지 않게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지 미란은 저는 먹지도 않고 재빠르게 사과를 깎아 접시에 올려놓고 있었다. 무심히 보고 있는데, 그 손가락이 내 살갗 위에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적인 상상은 아니었다. 내 몸 위에서 손가락이 그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인다면 졸음이 살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오꾜오의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손 마사지 가게에서 등을 맡기고 있을 때의 간지러움 비슷한 촉감. 그 손을 홀린 듯 쳐다보았으나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미란은 빵봉지를 정리하고는 바닥의 비닐봉지를 들어올려 요구르트를 꺼냈다. 다섯 개씩 포장된 요구르트가 네 줄이었다. 접시는 금방 비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김밥을 씹고 있는 행정실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없는 질투심을 아주 약간 느꼈다. 미란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로선 심심풀이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뺨이 살짝 상기된 미란을 보며,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게 별로 없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이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닭 국물 수프든 라면이든 그녀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실비가 떠나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랫동안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종일토록 서서 일을 한 덕분에 르와조의 목은 이제 거북의 그것처럼 굳어버렸고 종아리엔 꼬불거리는 혈관이 튀어나와 겨울 대구의 배를 열어젖히면 쏟아지는 곤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흉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이 르와조를 괴롭혔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지난 생이 마치 한 권을 천천히 넘기듯 그렇게 지나갔다고 르와조는 생각했다. 그래서,
르와조는 무언가를 추억하듯 섬세하게 가늠하여 숨을 들이쉬었다. 축축하고도 달콤하고 짭짤한 냄새. 이것은 르와조가 여태 다루어 오던 소금과 설탕과 쏘스의 맛이 공간 구석구석 퇴적된 냄새일 것이다. 그 짭짤한 냄새 뒤로 달달한 여운이 이어진다. 음식을 조리하며 가장 행복했던 건 역시 간을 보는 순간이다. 딱 알맞은 간을 맞추는 그 순간 음식은 비로소 완성된다. 알몸의 여인에게 몸매에 꼭 맞춘 중국 비단옷을 막 걸쳐주는 것과도 같이 그 순간은 자족적이고 황홀했다. 소금이 주었던 숱한 기쁨의 순간들을 생각하며 르와조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소금 그릇을 꺼냈다.
동그스름한 사기 그릇.
르와조는 지금 자신의 가슴을 쇳덩이처럼 짓누르는 고통을 잠시 잊는다. 제 손바닥에 맞춤처럼 푹 안기는 그릇의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표면이 매끈하게 정리된 소금은 연한 분홍빛이다. 이억년 동안의 비와 바람과 추위를 응축하고 있는 히말라야의 암염. 야크를 모는 고산족만이 갈 수 있는 산정의 소금 호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파낸 이 분홍빛 소금만을 사용해 온 지 오래됐다. 소금뿐이랴. 르와조는 늘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해 요리하지 않는 시간을 거의 사용했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서 그랬던 건 아니다. 자신의 혀가 용납할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송로버섯이 처음 나올 무렵이면 미리 예고를 하고 한 사흘 식당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전쟁에 나서는 심정으로 프로방스로 달려갔다. 오랜 단골이 내놓는 게 시원찮으면 냉정하게 고개를 젓고는 시골 장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발정 난 돼지를 데리고 송로를 찾는 산꾼들을 쫓아 산비탈을 뛰어다니다 사정없이 구른 적도 있었다. 돼지는 나무뿌리 근처에서 송로 향을 맡으면, 미친 욕정에 사로잡힌 듯 불타는 눈빛으로 땅을 파헤였다. 자칫하면 순식간에 그놈이 꿀꺽해버릴 위험도 있지만 질 좋은 송로를 찾는 데는 돼지코만한 게 없었다. 언젠가는 뜨내기로 보이는 건달에게 최상급 송로를 흔적 없는 현금 거래조건으로 헐값에 사들인 적도 있다. 훔진 게 분명했다. 오랜 단골들에게 비싸지 않고도 기가 막힌 송로버섯을 맛보이기 위해 기꺼이 죄를 저지른 셈이다.
캐비아 역시 마찬가지다. 요리를 먹는 사람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아찔한 식감과 풍미를 가진 걸 고르다 보면 적자가 날 줄 알면서도 최고급 흑해산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검은 진주라고 부르는 건, 눈부시게 반짝이는 형상보다는 가격 때문이지 싶다. 소소한 부재료들을 다룰 때도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식용 허브나 파프리카 한 개도 자신의 기준에 맞는 걸로만 골랐다. 그렇지만, 푸아그라에 대해선, 르와조는 중립적이었다. 중립적이란 건 열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나눌 때의 실비의 속살처럼 보드랍고 기름진 푸아그라를 르와조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억지로 사료를 처먹여 만드는 그 기형의 간이 고통이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면 르와조는 혀 위에서 무너지듯 녹아내리는 푸아그라 무스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르와조로선, 재료를 거의 사랑했다고나 할까.
일본 사람들처럼 날생선을 먹는 것도 아니면서 르와조는 요리에 쓸 생선은 가능한 한 낚시로 잡은 것을 고집했다. 얼음에 채워 도착한 생선박스를 열면,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밀어넣어 낚싯바늘부터 확인하고 뽑아내었다. 그러고는 생선들을 물속에서 헤엄칠 때의 모습처럼 나란히 세워서 보관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본성을 거스르지 않게 하고 싶었다. 바닥에 닿아 한쪽 살이 납작 눌린 대구를 르와조는 혐오했다. 바다가 가까웠다면 새벽마다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으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대구를 생각하자 한 남자가 떠오른다. 바뗄이란 괴팍한 놈이 있었지. 프랑쑤아 바뗄, 사백년 전 당대 최고의 요리사였던 그는 어느 귀족의 잔치에 수석요리장으로 초빙되었다. 많은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정원에는 거대한 식탁이 줄지어 차려졌다. 호사를 극한 잔치는 사흘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바뗄은 마지막 날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 향락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성의 뒤편으로 조용히 걸어 나가 인적이 드문 숲 언저리에서 자살했다. 마르쎄이유 항에서 보내기로 한 생선—정확히 어느 종류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이 약속한 시간을 지나서도 도착하지 않아 마지막 코스가 되는 그날의 만찬 준비에 차질을 빚은 것이 까닭이었다. 새우의 관자와 생성살이 듬뿍 든 부야베스 대신 담백한 단호박 수프를 끓이거나 넙치구이 대신 송아지갈비를 내놔도 뭐랄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르와조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바뗄인 듯 선명하게 깨달았다. 갑자기 르와조의 피돌기가 격해졌다. 난, 최선을 다했어, 늘.
매번 그렇게 속을 태우며 구한 재료를 또 어떻게 관리했던가. 선도가 떨어질까봐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주방엔 난방을 하지 않고 버텼지. 여름엔 또 얼마나 힘들었는가. 뜨겁게 내가야 할 음식이 식을까봐 아예 에어컨을 달지 않았다. 좁고 불편했지만 온도 편차가 없는 북향의 부엌을 고집했다. 추위와 습기로 발은 늘 악성 습진을 달고 살았는데, 그랬는데……
격해지는 마음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르와조는 귀이개 모양의 수저로 소금을 한 숟갈 덜어 혀 위에 올려놓았다. 금세 침이 가득 고인다. 짠맛은 강렬하나 부드럽게 퍼져간다. 호수 밑바닥에서 잠들어 있던 기나긴 시간동안 쓴맛은 사라지고, 그 어떤 재료의 맛과도 다투지 않는, 우아한 염기만 남았다. 소금과 침이 저절로 섞이어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자, 이윽고 혀뿌리에서 달콤함이 밀려든다. 르와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미소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이 히말라야 소금은 늘 믿음직스러웠지. 그리고,
이 짭짤함 끝에 고여드는 달콤함이란 지금 르와조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따스한 피의 맛이기도 하겠다. 소금의 맛을 음미하며 르와조는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도 잊고 있진 않았다는 듯 조리대 옆 선반에 오려놓았던 붉은 표지의 책을 끄집어 내려서 냅킨을 끼워놓은 곳을 펼쳤을 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르와조는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지난달 발행된 이 가이드북은 르와조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둘. 별은 두 개였다.
르와조는 말을 잃었다. 손님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오랜 고객들의 충성도는 대단하여, 르와조보다 더 불타오르며 화를 냈다. 주말엔 서너달 전에도 예약이 어려운 것도 여전했다. 르와조 자신이 이 별에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던 것도 아니다. 발표가 날 무렵이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긴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무심해졌다. 르와조 자신이 별 셋을 받았을 때조차 그 기쁨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르와조는 그 가이드북을 발행하는 회사에서 만든 타이어가 장착된 자신의 차를 더 이상 타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올 때면 십일 년 동안 타온 암청색 씨트로앵을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곤 했다. 분노는 아니었다. 그 타이어에 새겨진 로고를 보는 순간, 매번 처음처럼 선명한 고통이 가슴을 죄어왔다.
오늘 저녁 준비했던 전채는 테린이었다. 지루한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르와조는 이 요리로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곤 했다. 고기 대신 담백한 생선이 끌리는 계절이기도 했고 마침 마르쎄이유에서 보내온 아이스박스 안엔 싱싱한 가오리가 들어 있었다. 거래한 지 십 년이 가까운 도매상은 르와조가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알아서 계절에 맞는 최상의 재료들을 보내왔다. 스팀에 찐 가오리를 차게 식혀 틀에 넣고 절여서 가늘게 저민 오이를 위에 얹었다. 삶은 소의 콩팥을 다져 조금 뿌리고는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녹인 젤라틴을 천천히 부었다. 마지막으로 바질 이파리를 그 위에 올렸다. 바질 특유의 향이 배면 가오리의 쫀득한 흰 살은 제 맛의 최고치를 이끌어낼 것이다. 요리사로서 르와조의 명성에 불을 붙인 바로 그 요리였으나, 투명하게 굳어가는 테린을 바라보며 르와조는 자신이 젤라틴 속 그 가오리처럼 느껴졌다.
젤라틴이라…… 그렇다면 오늘, 새삼스럽게 날 둘러싸는 이 점액질의 느낌은 무엇일까.
차를 한 잔 마시고 가도 될까?
섬에서 돌아오던 날, 나는 방향이 같은 미란에게 집에 내려주고 가겠다 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뜻밖에도 그녀는 선선하게 그러세요, 했다. 뜻밖에도, 라고 말하긴 좀 그렇다. 그녀가 날 신뢰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그것만도 아니다. 미란은 그랬다. 추악한 스캔들 속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내가 자리를 걸고 자신을 막아주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씽크대에 잇대어 놓인 이인용 식탁에 앉아 별 말 없이 커피를 마시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엄지 아래의 볼록한 부분과 손금이 새겨진 곳을 쓰다듬었다. 내가 운명을 읽어주는 사람이라도 되듯 미란이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복지실장이, 그녀가 장애인 의무고용으로 들어왔다고 말한 기억이 났다. 생명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물어보았다.
어디 아픈 데가 있나?
미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그녀는 고개가 한쪽으로 늘 기울어져 있었다.
손금에, 그런 게 나와 있어요?
응.
아프다기보다도, 어떤 증후군이에요. 임신을 하기가 어렵고, 목도 약간 기울고.
그래?
몸속에 미량원소가 과잉 분비돼서 그렇대요. 눈도 좀 튀어나왔고,
잘 모르겠는데?
왜요, 저는 콤플렉슨데.
조그맣게 말하는 게 아이 같은 태도였다. 미량원소라니, 그 말은, 배꼽 아래 점이 있다는 말보다 왠지 더 외설적으로 들렸다. 내가 그녀를 안고 제 몸 속으로 들어갈 때도, 그녀는 제 운명을 읽어낸 사람에게는 그래야 한다는 듯,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가 얘기한 그 원소의 이름을 나는 바로 잊어버렸다. 약간 기울어진 목의 각도처럼 어딘가 한구석이 부족한 듯한 느낌. 그게 연민을 불러왔다기보다는 쉬운, 뭐가 쉬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만만하게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는 역시 그랬다. 누군가의 환상이 되기엔 많이 부족했다.
지잉.
오븐이 이제 한풀 꺾인 쉰 목소리로 운다. 아주 오래 서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닌가 보다. 늘 그랬듯 발목 아래가 시려온다. 길게는 육 개월 이상 예약된 손님들은 어떡해야 할까. 하지만 죽어버린 후의 일까지 생각해야 한다면 사람이란 통 죽을 수가 없을 거야.
자주 쓰지 않는 그릇들을 넣어 두는 상단의 찬장은 문을 열어도 안이 들려다보이진 않는다. 르와조는 뒤꿈치를 들고 손을 올려 선반을 더듬었다. 엽총은 참 복고풍으로 크기도 하다. 언젠가 송로를 공급해주던 오랜 단골 에르베의 초대를 받아 프로방스로 딱 일주일간 휴가를 갔을 때 마련한 것이다. 마치 해마다 그곳으로 휴가를 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후론 바쁘기도 했거니와 사냥엔 소질도 관심도 없어 다시 꺼내본 적이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전쟁이라도 치르러 나가는 사람처럼, 참 많이도 준비를 했었지. 종아리를 감싸는 각반과 수직의 암벽도 걸어오를 수 있다는 산악회는 딱 한번이라도 사용했지만, 화약통과 위급용 소형 수류탄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르와조는 그때 그곳에 가서도 딱 하루 그를 따라 산을 헤맸을 뿐이다. 사냥이라니.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일은 처음이었다. 다음날부터 시골 장터를 헤매며 낯설고 신선한 재료들을 구경하거나 초라한 식당에서 송로를 듬뿍 올린 오믈렛을 맛보며 도대체 이 가격에 이 요리가 가능한 산지의 장점에 탄식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돌아왔다. 에르베는 올해도 기온이 뚝 떨어진 어느 늦가을, 첫 수확한 송로를 옆에 두고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한 후에야 내게 더 이상은 그게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아! 르와조는 깜빡했다는 듯 벽에 나란히 붙은 스위치를 돌아보았다. 기름기에 누렇게 절은 것들 중에서 유독 맨 위의 것만이 새것처럼 하얗다.
오래전, 처음 내 식당을 열 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세탁소 건물은 위치도 그리 좋지 않았고, 좁은데다 구조도 식당으론 문제가 많았다. 그걸 헐값에 매입해서 사포로 마루를 깎아 니스를 칠하고 벽엔 회를 칠했다. 무엇보다도 주방 공간이 불편했다. 길고 좁은 게 꼭 기차 모양이었다. 뭐 어때.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식당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외벽에 조그맣게 붙어 있던 세탁소 간판을 보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색의 네온간판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처음 오픈하던 날 스위치를 올린 후, 정전이 됐을 때 외엔 간판의 불은 한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똑.
맨 위의 스위치를 내리자 동시에 가슴속이 암전되었다. 순간,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 그 이름을 르와조는 잊지 못하는 연인의 이름처럼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프랑스식 세탁소……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르와조가 알고 있는 많은 요리사들이 별을 받기도 했고, 그 개수가 줄어들기도 했고, 아예 리스트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르와조에겐 쇠 화살촉처럼 치명적인 것이 가슴뼈에 와서 박혔다. 그 화살촉이 꿰뚫고 있는 것이 무언지 깨닫는 순간, 르와조는 어려운 가설을 막 증명해낸 수학자처럼 길게 숨을 쉬었다. 손바닥에 닿는 총신의 차갑고 매끄러운 느낌에 집중하자 그날 이후로 르와조를 괴롭혔던 증상들, 수시로 열이 치밀어오르고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다 까닭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하던, 혀와 목이 타듯이 말라 찬물을 삼켜야 했던, 무언가가 명치에 딴딴하게 박혀 있는 것 같은 증상들이 드라이아이스처럼 천천히 휘발되었다.
코앞에서 날아오르는 뇌조 한 마리도 명중시키지 못하는 솜씨였지만, 이 총의 사용방법은 너무 간단했다. 얼음에 채운 넙치가 도착하면 늘 그랬든, 오른손으로 개머리판을 들어 무게를 가늠한 후 수평이 되도록 왼손으로 총신을 들어올렸다……
“편집장님 오셨는데요?”
미스 조 목소리에, 읽고 있던 기사에서 퍼뜩 눈을 떼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기사는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편집장이 먼저 들어서고 사진과 편집 일을 겸하고 있는 김해용이 따라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거기서 늦게 끝난데다 길까지 막혀서요. 해용이가 외부 출장이 있어서 사진 촬영부터 먼저 했음 하는데요.”
편집장이 들어서자 양쪽으로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고 맞바람이 드나드는 듯 실내가 금방 활기로 가득 찬다. 그가 시키는 대로 책상 옆의, 창밖 풍경이 왼쪽 어깨 뒤로 보이는 지점에 비스듬히 섰다. 지난주에 새로 사 입은 양복이 어쩐지 불편하고 신경이 쓰인다.
“이 옷 괜찮나?”
“재킷 라벨이 살아 있네요. 그 스타일 아무나 못 입습니다.”
김해용이 카메라를 준비하는 동안 편집장이 사보 묶음을 집어들었다.
“아하, 이거 읽고 계셨구나. 재밌지 않으세요?”
재미. 나는, 르와조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 마음속에 생겨난 어떤 정서를 더듬고 있었다. 갑자기 스위치가 내려진 방에서 옆에 누운 누군가를 더듬듯. 안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것이 모호해진 순간의 느낌을. 편집장은 대체로 나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러나 재미, 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재미…… 있네. 근데, 이 사람은 결국 죽는 건가?”
“마지막 부분을 못 읽어보셨군요. 요리가 요즘 트렌드잖아요. 라이선스를 맺고 있는 잡지에서 지난해 연재한 겁니다.”
“이 남자는, 왜 죽는 건가?”
편집장이 아까 내 양복을 바라볼 때만큼이나 신중한 표정으로 펼쳐진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그것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별 하나 때문에 죽는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 말입니다. 별 때문이 아니라 별이 사라지면서 그 사람 마음속의 무언가를 건드렸겠죠.”
“무언가를? 그게 뭔데?”
편집장은 이번엔 미간에 주름까지 만들었다.
“제 생각엔…… 무언가, 부끄러웠던 게 아닐까요?”
“부끄러웠다…… 수치를 느꼈다고 모든 사람이 죽는 건 아니지. 좀 이상한 사람이라구.”
“사람은, 때로 그렇잖아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죠. 그게 사람이든 요리든. 뭐, 그렇다면 그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넓게 보면 그게 우리 사업의 본질이기도 하구요.”
미란을 마지막 보았던 저녁. 언젠가 내 앞에 행정실장과 나란히 섰을 때처럼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르팍을 문지르며, 무언가, 불편했다. 나는 미란의 팔을 잡고 달래듯 말했다.
그만해라.
울지 말라는 건지, 무릎을 문지르지 말라는 건지, 그녀의 삶에 던진 화두 같은 건지, 나도 모를 말이었다. 그녀의 팔 안쪽은 어린 쥐의 배내털처럼 보드라웠다. 그 느낌에 놀라 얼른 팔을 놓았던 것 같다. 한번도 내 앞에서 무언가를 우겨본 적이 없는 그녀가, 약간 튀어나온 눈으로 날 바라보며 우기듯, 앞뒤를 잘라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 먹게 말했지.
사람들이 뭐라건…… 내겐 좋은 분이세요. 그거면 된 거죠.
표정도 분위기도 자연스럽다며 김해용이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플래시 불빛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움직였고 실내의 풍경이 흔들렸다. 색 바랜 양란 한 송이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꽃을 떨군 가지가 한 번 두 번, 고개를 흔들다 멈춘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만 이 사람들이 나갔으면, 싶다. 막 떨어져 내린 꽃잎을 주워 치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