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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오디션 열풍 이대로 괜찮은가?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
일요일 밤 안방극장에서 ‘나는 가수다 시즌2’가 한창이었다.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채널고정은 기본이고 시선고정, 아니 정신고정이다. 바쁜 녹음 때문에 초침을 쪼개 쓰고 있는 나 또한 ‘당신도 봐야 된다’는 아내의 눈물겨운 배려(?)에 못 이겨, ‘가족을 넘어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순교’라고 생각하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경합이 중반으로 치닫고 있었고, 진행을 맡고 있는 가수 이은미의 노래순서였다.
환동완 뚬횄웠쥐~ 왠윌일꽈 궁굼횄웠쥐~(한동안 뜸 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혹쉬 뵹이 놨을꽈와? 눠무 돱돱횄웠쥐~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완줠부줠 횄웠쥐~ (안절부절 했었지)
환동완 못뫈놨쥐~ 숴뭑숴뭑 위솽횄웠쥐~(한동안 못 만났지. 서먹서먹 이상했었지)
혹쉬 뫔이 뷔욘횄을꽈? 눠무 돱돱횄웠쥐~(혹시 맘이 변했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완줠부줠 횄웠쥐~ (안절부절 했었지)
봠이면 촹을 욜궈~ 돨뉨웨궤 궈봭횄쮜~ (밤이면 창을 열고 달님에게 고백했지)
왜툿환 놰 쏴뢍을 돨뉨웨궤 궈봭횄쮜~ (애틋한 내 사랑을 달님에게 고백했지)
속줠웝쉬 왓풀위룰 돨뉨웨궤 훼 뒈궸쮜~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 대겠지)
(‘한 동안 뜸했었지’의 ‘이은미’ 발음버전/괄호 안은 ‘사랑과평화’ 의 원곡버전)
정말 난리 났다. 난리 났어. 낭패다 낭패. 왜 여기까지 와 버렸는가? 왜 이렇게까지 돼버렸는가? 이건 정말 모국어에 대한 모독이라기보다 희롱에 가깝다. 필자의 과장여부가 의쉼스뤕돠고 여겨쥔돠묜 ‘나가수2 이은미 6월 가수전’을 궘쉑하여 직접 들어보쉬롸~. 필자의 녹취과장과 가수의 발음과장 중 누가 더 심하게 오버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경합이 끝나자마자 인터넷 게시판과 뉴스는 그녀에 대한 뜨거운 찬사로 완존 도배다.
- 이은미 ‘한동안 뜸했었지’와 ‘얘기할 수 없어요’를 완벽하게 선보였다.
- ‘나가수2’ 이은미 화끈한 로커본능. 맨발에 가발까지 투척하는 ‘파격’, 도발적 이벤트와 ‘화끈한 무대’에 관객 뿐 아니라 시청자까지 들썩.
- 맨발에 가발까지 훌러덩 ‘나가수’ 명불허전 이은미. 사운드를 뛰어 넘는 그녀만의 폭발적인 카리스마와 퍼포먼스에 관객들 환호.
- 무대 분위기를 위해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과 가발로 스타일링을 한 점도 감상에 몰입할 수 있었던 요인.
- “역시 ‘맨발의 디바’ 이은미”, “이은미는 발라드부터 록까지 못하는 노래장르가 없는 듯”, “오늘 이은미 무대 정말 화끈하고 카리스마 넘쳤다.”
그러나 이 많은 찬사 끝에 놓쳐서는 안 될 단 한 줄의 기사(-‘나가수2’ 새얼굴 한영애 등장에도 시청률 꼴찌 굴욕-)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저렇게 전 국민이 모두 함께 뒤집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시청률은 왜 꼴찌일까? 세상은 오로지 일방통행이고, 모두가 가는 큰 길로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필자와 함께 문화 산책을 떠나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작은 오솔길이 있다.
작금에 와서 대부분의 노래대회는 하나같이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탈바꿈한지 오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로그램 자체가 살아남기 어려운 그야말로 서바이벌의 기로에 서있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보다, 더 많이 가미되고 화학조미료로 범벅이 된 음식들을 선호하듯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만 살아남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어느 개그맨이 한 동안(왜 중도하차했는지 의문이지만), 광야에 선 예언자처럼 외쳐댔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토록 광고주의 매출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니 모든 방송사는 다투어 서바이벌 대열에 나섰다. 이런 상업시장판에 가수들이 상품으로 전시되었으니, 애초부터 노래예술이라는 장르보다는 이벤트성 흥행이나 상업용 상품이미지가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가수들은 모두가 절창을 요구받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이 찢어지고 핏줄이 터지더라도 반드시 절창만이 살길이다. 고요함이나 평온함 같은 요소는 아예 처음부터 노래와는 상관이 없는 개념으로 여겨야 하고, 그런 개념으로 선곡을 한다면 발라드 보다는 록(Rock)이 대세다.
어차피 상업방송의 생리가 그렇기에 노래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라고는 보기 힘든 카리스마, 퍼포먼스, 파격, 폭발 가창으로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왜 우리말 노래를 부르면서 혀를 꼬부리고, 기름칠에 퍼머까지 해가면서 서양식으로 발음해야 하는가? 서양 로커의 흉내를 내다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꼭 그렇게 발음해야만 록의 맛이 살아난다면 아예 서양말로 노래하면 좋지 않을까?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서양말로 노래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가? 그럼에도 관객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모국어로 노래해야 한다면, 조금 멋이 덜하고 폼이 덜 나더라도 우리식 발음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서양식 발음만이 진정한 로커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혹시 문화 사대주의 혹은 신사대주의가 아닌지 한 번쯤 짚어보고 싶다. 그들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좋게 보이고 다 따라해야할 것 같은, 그래야 원조에 더욱 가까워질 것 같은 착각은 아닐까? 죽거나 까무러치기로 흉내 내봐야 어차피 ‘기막힌 짝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글로벌 시대를 맞아 우리말 오염이나 훼손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진단되는 현실을 직시할 때, 대중문화인들의 영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는 것은 시원한 발성이지 어눌한 발음이 아님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은미의 발음과장을 못 들어 주겠다고 푸념하자, 대학 새내기인 우리 집 막내가 그녀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왜 그렇게만 생각해? 혀가 짧다거나 그렇게 발음할 수밖에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을 수도 있잖아?”
“쉐솽에~. 얘 말하는 것 쫌 들어봐롸~ 내가 쇙트집을 좝고 있돤돠~ 나만 놔쁜 솨람이롼돠~ 아니거든. 내가 이은미의 초창기 음반을 세 개나 갖고 있거든. 증거물까지 확보하고 있는데 쇙솨뢈 좝으면 아니 아니 아니 되오.”
그렇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 길을 가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듣고, 품위와 격조에 있어서 한국가요 중 최상이라고 여겨져 바로 달려가 내 돈 내고 산 음반이 ‘이은미 2’의 ‘어떤 그리움’이었다. 모든 녹음과정을 미국 내쉬빌에서 했고, 10 여명의 연주자 전원과 백 보컬까지 외국인이며, 레코딩과 믹싱, 그리고 마스터링까지 외국인이 했다고 표기된 이 음반. 기존의 한국가요 녹음에서는 비용 때문에 만나기 힘든 현악기 각각의 개별녹음 덕분으로, 악기소리가 유려하게 살아올라 보컬과 어우러지는 기막힌 조화 속에서도 그녀의 모국어발음은 명료하고 명확했다. 그것이 이 음반의 백미였었다. 미국에까지 가서 녹음을 해야 했던 그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나중에 롹커로 변신을 하면서 혀 퍼머를 했는지, 아니면 막내의 견해처럼 신체 부위에 이상이 왔는지도 여전히 모를 일이다. 아는 것은 딱 한 가쥐. ‘수용자의 요구에 의해 그녀가 확실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 시대에는 가인(歌人) 혹은 예인(藝人)이면 족했는데 이 시대의 대중예술인들은 모두 다 만능엔터테이너를 지향한다. 가수 또한 모든 장르를 넘나들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진정성보다는 이미지가 중요한 세상에서 오버는 필수가 되어버렸다. 모든 연주무대는 누가 가장 오버를 잘하는지를 가늠하는 경합 장이 돼버렸고, 이 어눌한 서양식 노래 발음 또한 구체적으로 망가지고 훼손될수록 더 큰 지지를 받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살모사 껍질 벗겨 그녀의 목에 걸면(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그녀가 깜짝 놀라 내 품에 안기겠지.(물가에 마주앉아 밤새 속삭이네.)
내 품에 안긴 그녀 물가로 데려가서(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밤새 물 먹이니 밤새 오줌 싸네.(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않네.)
1970년에 윤형주에 의해 발표되어 오랜 동안 불멸의 MT송이 되었고, 대천해수욕장에는 ‘라라라’ 기념비까지 있는 이 노래를, 1972년 ‘흥사단 아카데미 수련회’에 갔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형들에게 패러디한 가사로 처음 들었을 때, 우리 모두는 포복졸도 했다. 남녀 학생들이 함께 섞여 바닷가로 놀러갔을 때, 참 잘 어울림직한 이 노래를 저렇게 뒤틀어 부름으로써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당시의 정치와 사회 상황을 뒤틀고 싶었던 것 같다. 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재미삼아 애창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 ‘과연 이래도 될까?’하는 미안함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노래를 원가수의 음성으로 듣다보면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멀쩡하게 ‘시원한 파도소리’라고 스스로 가사를 만들어 놓고, 노래할 때는 ‘쉬원한’으로 발음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할 때 우리말을 영어식으로 발음하는 현상에 대한 지적은 여러 문화평론가들이 이미 했었지만 필자가 쓴 졸고를 옮겨와 본다.
이탈리아 발음으로 내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런데 내 색시 카타리나를 어떤 신부님이 ‘캐서린’이라고 부르자 주변의 많은 이들이 ‘어머 너무 듣기 좋아요’ 어쩌구 하는 것을 보면서 목구멍에 건더기가 치미는 경험을 한 일이 있다. 주로 가난하지 않은,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많았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천주교회의 주류가 된 인간들의 모임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수작들이다. 미카엘은 마이클, 안드레아는 앤드류, 심지어 나보고 ‘토미’라고 부르는 인간도 있었는데 한껏 꼬부려 붙이는 그 발언은 정말이지 점입가경이었다. (확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었는데 그냥 ‘별 미친 놈 다 있다’는 눈빛을 던져 주는 것으로 내 기분을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영어가 좋을까?
세상에는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중국) 이 나라들 밖에 없다는 걸까?
에라. 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속들이여...
아 친구들아! 지금 미국이 망해가고 있단 말이다. 이러다 말겠지 하지 말라. 올 한 해 태풍이 안 불었다고 지구 온난화가 멈추고 기상 이변이 사라진 걸로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돔은 미국 이상으로 흥청대던 곳이었고 폼페이의 문화는 참으로 기름진 것 아니더냐. 로마는 어떠냐. 과연 지금의 미국이 ‘모든 길이 그리로 통한다’던 당시의 로마에 비견될 수 있더란 말이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변영국의 글 「미국은 일단 망해가고 있다」중에서 인용)
영어를 잘 발음해 보려고 부러 혀를 꼬부리는 작태 또한 가관이다. 좋은 영어발음을 위해 두 세살짜리 아이들의 혀 수술도 불사하는 그들은, 만약에 혀를 파마해서 발음이 굴러갈 수만 있다면 어떤 값을 내고서라도 매주 혀 파마를 할 것이다. 그러나 오호 통재라! 발음은 혀보다도 치조골과 머쓸(Muscle)이라 부르는 구강근육에서 대부분 결정된다지 않더냐. 일부러 혀를 꼬부려대면 스스로는 그럴듯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듣는 쪽에서는 정도에 따라 역겨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 좋을텐데.
FM가요프로그램에서 70년대 포크송이 흘러나오는데 윤O주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였다. ‘롸일롹(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놜~’이라고 한껏 혀를 꼬부려 발음하는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토미’생각이 날 건 또 뭐냐? 내면에 담긴 부드러움이나 섬세함이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우직한 너의 얼굴과 ‘토미’라는(어쩌면 ‘터미’일수도) 혀 꼬부라진 발음이 교차되는 순간, 나 쓰러졌다. 핸들로 엎어졌다가 경적소리에 스스로 놀라 일어나니 난데없이 앞 유리에 뭐가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정신을 차린 다음, 차를 오른쪽으로 옮기고 쓸데없이 작동된 와이퍼를 멈추고 나서도 한참을 웃었다. 아니 너무 웃다가 울었다. 에어백이 안 터진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지나가는 다른 차 운전자들의 시선집중은 물론이고, 행인이 다가와 괜찮으냐고 묻는데도 계속 웃었다니까. 나 완존 새됐어.
오래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민O경이라는 가수가 ‘이줴는 쥐(지)나간 휠(일)이야~’라고 열창하는 것을 TV로 보다가 또 쓰러졌구나. 멀쩡한 우리말을 영어식으로 혀를 꼬부려 부르다 보니 이런 웃지 못 할 발음이 나오는구나. 이 가을에 빠질 수 없는 양O은의 노래도 그렇다.
‘도무쥐 알 수 없는 한 가쥐~ 솨뢈을 솨뢍한다는 그 일. 촴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조금 과장되게 적어본 것은 솨실(?)이지만, 세심하게 들어보면 혀를 굴리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그 혀 구름에 따라 적어보면 꼭 위와 같이 되고 만다. 우리는 참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시류에 영합할 수 없어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기는 애 저녁에 글러먹은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은 돈이 아니라 황금을 준다 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니 스스로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서는 매일 매순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구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필자의 글 「영국아 너를 내 아우로 접수한다」중에서 부분발췌)
1970년대를 전후한 통키타 가수들을 통해 미국 포크송이 들어와 우리 노래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지고 장르 또한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메신저 역할을 했던 가수들이나 수용자역할을 했던 당대 젊은이들, 이른바 포크세대들 중 상당수가 학생들이었기에 번안가요 혹은 번역가요를 경우에 따라 영어식으로 발음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전통음악 장르나 올바른 발음의 가창방식을 촌스럽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것에 반대한다. 문화는 다른 것일 뿐 수준의 차이로 볼 수 없음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서양 사람들의 발음방식을 무조건 흉내 내는 것을 세련됐거나 멋스럽다고 여기는 풍조에 반대한다. 거기에 비하면 ‘총 맞은 것처럼’이나 ‘내가 미쳤어’라고 은유 아닌 직설로 뱉어낸 노래 말이 훨씬 덜 위험하고 적어도 천박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것춰뤔’이나 ‘미췄쒀’로 발음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또한 모두가 한바탕 쓰러지게 웃자고 머리를 짜내어 만들어낸 ‘고뤠~’는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 이은미가 보여준 ‘환동완 뚬횄웠쥐~’퍼포먼스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아니 꼭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코드가 담겨있다고 본다. 동료인 윤도현을 보라. 깔끔한 모국어 발음에 얹은 독특한 발성으로 얼마든지 최고 롹커로 자리매김 되고 있지 않는가. 그저 멋스럽게 보이기 위해 모두가 동경하는 서양식 발음으로 노래하던 포크세대 가수들의 버터 냄새나는 발음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좀 더 자극적이고 더 선정적인 가창과 퍼포먼스를 통해 돋보이고 싶고, 그럼으로써 좀 더 오래 스타덤에 머물고 싶어 했던 시대 또한 한 물 간지 오래다. 오히려 룰렛게임에 가까운 살아남기 경합에 서기위해 가수들은 어쩔 수 없이 더욱 크고 강하고 거친 창법을 개발해야 했고, 그것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직감이 본능을 자극하여 좀 더 새롭고 좀 더 튀는 가창과 발음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의 끝은 성대 결절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 체력이나 정신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마초나 마약이 선택된다거나, 정체성 상실에서 오는 우울증과 자살 등으로 우리는 아까운 가수들을 많이 잃었다. 삶의 문화, 살리는 문화를 두고 죽음의 문화, 죽이는 문화로 치닫는 작금의 실태를 지상 고발한다. 공동선보다 절박한 공생을 위하여 그렇다. 전 국민이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에 휘말려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소란스럽고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참아내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그만 두지 않는다면 모두가 함께 죽음의 문화로 치닫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2012.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