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12 - 비단 박물관을 구경한후 걸어서 소주 박물관을 지나 졸정원으로!
2023년 10월 26일 쑤저우 북광장 커운짠 (客运站) 정류소 에서 遊(유) 1 버스를 타고
3정거장인 북사탑 北寺塔 The North Pagoda 에 내려서 손권이 어머니를 위해
건립했다는 절을 구경하고는 7~8분을 걸어서 쑤저우 비단박물관 으로 찾아갑니다.
현대적 멋진 건물인 苏州丝绸博物馆 (소주사조박물관) Suzhou Silk Museum 은
비단을 제조 하는 전과정과 제품등을 진열한 곳으로 무료입장 이라 즐겁습니다.
비단,즉 견직물(絹織物) 은 누에나방의 고치 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만든 섬유로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또는 금(錦) 이라고 하며 비단(緋緞), 명주(明紬) 라는 명칭으로도 쓰이는데,
비단 박물관을 뒤로 하고는 걸어서 북사탑을 지나 좌회전을 하여 지도를 보며 졸정원 을 찾아갑니다.
쑤저우(苏州 소주) 에는 쑤저우역과 쑤저우베이역 이 있고 내륙의 쑤저우항 은
중국내에서 유명한 항구이며 버스는 여름과 겨울철에는 2 또는 3위안이고
봄, 여름은 1위안이라 저렴하며.... 쑤저우 지하철은 모두 7개의 노선 이 있습니다.
쑤저우는 아열대 기후로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추우며 도시 북쪽으로는 양쯔강 이 흐르고,
주변에 타이호, 양청호, 진지호 등 여러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끼고 있으며.....
동쪽으로 상하이, 북서쪽 난징, 전장, 창저우, 우시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후저우, 항저우가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경제력이 장쑤성의 성도인 난징과 비슷한 수준이고 관광산업과
공업 이 발달되어 있으며 미국의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 코스트코 (开市客) 점포가 후추구에 중국본토
에서 두번째로 세워졌고 중국산 전기버스 모델 하이퍼스 시리즈의 버스 제조회사인 하이거의 본사 가 있습니다.
쑤저우(소주) 는 상고시대에 월족의 일파인 백월족(白越族) 의 땅이었으며 상나라 말기에는 희성
주씨의 수령 고공단보(古公檀父) 의 아들인 태백(泰伯) 과 중옹(仲雍) 이 현명한 계력(季歷)
에게 양보하고자 섬서성 기산의 주원을 떠나 남쪽으로 달아나 장강 이남의 고소(姑蘇 소주)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구오(勾吳) 혹은 공오(工吳) 라고 칭해지는 오(吳)나라 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간왕 15년(기원전 585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나라 군주인 수몽(壽夢) 이 칭왕
을 하고 패권을 다투던 초(楚) 나라를 견제하려는 진(晉) 나라의 지원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수도로서 기능을 시작했으니.....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부차 가 다스리던 오나라 입니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으로 주영왕 12년(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이르러 성벽 을 쌓기 시작했고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 가 즉위하면서 고소성을 새롭게 고쳐
쌓았다는데.... 주원왕 3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 의 영역에 듭니다.
주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 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 이 되었으니, 초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에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 의 봉토 가 되었고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 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과 항연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었습니다.
교통체증이 매우 심한 삼거리에 도착해서 다른 관광객들을 따라 도로를 건너가니 저만치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선 것이 보여 마눌에게는 줄을 서라 이르고는 혼자 앞으로 나가서 뭐하는 줄 인지 살펴 봅니다.
보자니 쑤저우 박물관 에 입장하는 줄인데..... 쑤저우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인
호구(虎丘)에서 출토된 유물 들을 전시하는줄 아는데.... 오나라 왕
합려에, 손권등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호랑이 언덕에서 나온 유물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휴대폰 을 꺼내 들고 있는 모습인데 입구에 도착하면 휴대폰에서 QR 코드 를 보여
주고 들어가기에 조금 뒤로 물러나 줄에 선 사람들에게 입장료 가 있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니까 청년은 대뜸 나에게 인터넷에서 신청 을 했는냐고 묻기에 안했다고 말하니...
입장료는 없지만 인터넷 쑤저우 박물관 사이트에 접속해 오늘 날자
입장객으로 신청을 해서 보는 것처럼 휴대폰에 QR 코드를 받아 와야 한다고 말하네요?
저 QR 코드 는 코로나때 우리나라와 일본 출입국시에도 많이 쓰던 것인데..... 기존의
바코드가 상품명과 제조회사등의 정보만 담은데 비해 URL 과 사진, 동영상
정보 등을 담은 QR 코드는 1994년에 일본의 NTT 도코모 라는 회사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기특한 것이 저 일본 회사는 특허권 행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전세계의 국가나
단체, 기업 및 개인들이 공짜로 저걸 사용하게 해주는데.... 일본인들은 그 외에도
이모티콘과 비슷한 이미지 자체가 문자인 이모지 를 만들었고 자신을 찍는
셀카 에다가 인스턴트 라멘, 가라오케와 게임 소도쿠 등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쑤저우 박물관 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녀 청년들 이란
것이 놀라운데.... 문득 동아일보 이건혁 기자 가 시문에 쓴
“‘애국 소비’ 열풍에 토종 득세... 고가 해외 브랜드도 맥 몾 춰”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인구 14억명의 세계최대 내수 시장 으로 한때 한국 최대 화장품 수출국 으로 꼽혔던 중국이 최근에는 해외
브랜드의 무덤 으로 변하고 있다. 자국 브랜드를 선호하는 궈차오(國潮·애국 소비) 경향이 짙어지며
중국 토종 브랜드의 점유율이 높아졌고, 경기 침체로 인한 소비 위축이 화장품 시장으로도
번지면서 중국에서 프리미엄 전략을 유지해 온 글로벌 뷰티 브랜드들의 판매량 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13일 유로모니터와 KOTRA 등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화장품 시장 판매 상위 10대 브랜드 중 중국 업체는
4곳 이다. 바이췌링(百雀羚), 쯔란탕(自然堂), 포리야(珀麗雅), 웨이눠나(薇諾娜) 등 한국인
에겐 생소한 브랜드 들이 일본 SK-Ⅱ, 미국 라메르 등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보다 많은 판매량을 보였다.
중국 화장품 브랜드의 약진은 곧 글로벌 브랜드의 부진 으로 연결됐다. 중국 중저가 색조
시장 강자로 군림했던 메이블린 은 갈수록 점유율이 하락하자 지난해 중국 내
오프라인 매장에서 완전 철수 했으며 베네피트 도 중국 백화점 매장에서의 판매를 중단했다.
지난달 미국 화장품 업체 에스티로더가 2분기(4∼6월) 영업적자 를 냈는데, 중국 등 아시아 지역 면세 매출이
부진한 데다가 중국 내 판매 회복세가 예상 보다 더뎌 재고 해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국 애국주의 소비 는 자국 브랜드 선호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심기를 거스른 국가 제품을 적극적으로 배척
하는 행태로도 이어진다 .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해
한한령 (限韓令·한류 제한령) 이 내려지자 중국 수입 화장품 1위를 차지하던 한국산 화장품 판매는 급감 했다.
헤라, 에뛰드하우스, 이니스프리 등 중국에서 인기를 얻던 한국 화장품 브랜드는 현지 사업을 접거나 축소
해야했다. 지난해 중국의 블랙프라이데이에 해당하는 광군제 때 주요 쇼핑몰의 화장품 카테고리
에서 한국산 판매량은 2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 최근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결정한 뒤에는...... 중국 내에서 일본 화장품이 주요 불매 운동 리스트에 올라갔다.
최근 중국 소비시장이 빠르게 위축 되고 있다는 점도 해외 화장품 브랜드들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중국 국가
통계국에 따르면 7월 중국 화장품 소비 금액은 247억 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 줄었다. 지난해
12월 이후 7개월 만에 마이너스 로 돌아선 것이다. 같은 달 중국 전체 소비가 2.5% 증가한 것과 대비 된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중국 토종 브랜드에 중저가 시장 을 내주더라도 프리미엄 제품 에서의 경쟁력은
유지하는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경기 침체로 중국 내 소비 여력이 줄어들면서 고가의 해외
브랜드 화장품 판매량이 먼저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중국에서
일부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프리미엄 제품 판매가 극히 저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 전했다.
이에 최근 중국 정부가 단체 관광객(유커) 한국행을 허용 하면서 중국인들이 다시 한국산 화장품을 쓸어
담을 것으로 기대 했던 한국 업체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달 30일 중국에서
인기 있는 한방 화장품 브랜드 ‘더 히스토리 오브 후’ 의 대표 제품 ‘천기단’ 을 13년 만에
재단장(리뉴얼) 했고,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 제품 중 인삼 성분을 담은 고가 라인인 ‘진설’ 을 선보였다.
유커와 중국인 내수 시장까지 염두에 둔 신제품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중국에서 최고로 대접 받았던 한국 화장품의 전성기 가 다시 돌아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라며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시장에 접근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마눌에게 줄에서 나오라 일러 다시 도로로 나가 조금 더 걸으니 졸정원으로 착각 하기 쉬운 건물이 보이는
데... 실제로 옛날 처음 쑤저우에 왔을 때 졸정원에 입장한다고 티켓을 끊어서 들어간게 바로 이곳 입니다.
그런데 들어가니 무슨 건물들이 나오고 전시되어 있는게 기독교도인 홍수전 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 당시 사진과 그림에 유품으로.... 놀라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충왕부” 라더라는? 그래 왠일인지 입장료가 터무니 없이 싸더라는....
1. (십)계명을 준수할 것
2.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를 구분할 것
3. 사소한 규율이라도 위반하지 말 것
4. 상관의 말에 복종하며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할 것
5. 합심단결하여 전장에서는 물러나지 말것
또 지휘를 위하여 홍수전은 천왕(天王) 에 오르고 각 간부를 오군주장(五軍主將) 에 봉하니 양수청
이 중군, 소조귀가 전군, 풍운산이 후군, 위창휘가 우군, 석달개가 좌군 주장을 맡았습니다.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살해하는 행위를 반역에 준하는 중죄로 다스렸으니
태평천국군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 했는데, 이홍장의 상군을 지휘하던 영국군 찰스 조지
고든 은 여기 쑤저우 를 공략할때 항복하는 대가로 태평천국군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했는데
이홍장은 몽땅 처형 하는 바람에 고든은 격노해서 이홍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날뛰기도 합니다.
그라고는 드디어 동쪽 줘정위안 拙政园(졸정원) 에 도착해서는 줄을 서서 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가니
세상에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라? 입추위 여지가 없으니 한발자국 떼기도 어려운데,
졸정원(拙政园) 이란 이름에서 문득 동아일보에 실린 이준식의 한시 한수 "낙향의 꿈" 이 떠오릅니다.
누렁소 사고 농사일 배워, 숲속 샘물가에 초가집 지으리.
늙어서 살날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몇 해라도 산속에서 지내고 싶네.
높든 낮든 벼슬살이란 한바탕의 꿈, 시 짓고 술 마실 수 있다면 그게 곧 신선.
세상만사 다 가치가 늘어난대도, 늙고 나니 내 문장은 한 푼어치도 안 되는구나.
(買條黃牛學種田, 結間茅屋傍林泉. 因思老去無多日, 且向山中過幾年. 為吏為
官皆是夢, 能詩能酒總神仙. 世間萬事都增價, 老了文章不值錢.)
―‘사직으로 위안을 삼다 (사직자천· 辭職自遣)’ 유기 (劉基· 1311∼1375)
남 보기에 멀쩡한 지위를 제 발로 걷어차고 낙향하는 이 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표적 사례가 위진(魏晉) 시대의 도연명, 그는 쌀 다섯 말의 녹봉(祿俸)
때문에 상관에게 굽신대지 않겠다면서 한 고을의 수장 자리를 박차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대 제(齊) 나라 왕을 보좌하던 관리 장한(張翰) 의 행보 또한 그 못지않게 파격적이었다. 낙양에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 땅 소주(蘇州) 의 순채국과 농어회 가 그립다며 홀연 벼슬을 내팽개치고 고향을
향해 수레를 몰았다. ‘일신상의 사유’ 운운하는 어정쩡한 가식에 비하면 외려 진솔하고 당당 하다고 해야할까.
시인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의 책사(策士) 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인물. 역사가들은 그를
한고조 유방(劉邦) 을 보좌한 장량(張良), 삼국시대 유비(劉備) 를 도운 제갈량(諸葛亮) 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런 그가 벼슬살이에 회의가 들면서 낙향 을 시도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과거 그와 갈등을 빚었던 한 재상이 황제에게 그의 불충(不忠)을 무고 했고, 결백을
증명 하기 위해 그는 서둘러 조정으로 복귀 해야 했다. 시인이 재낙향한
것은 중병 으로 죽음을 앞둔 말년. 시주(詩酒) 의 즐거움 은 더이상 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