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한 장 넘기며/전성훈
호미로 막을까 쇠스랑으로 막을까 가는 세월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세월은 그렇게 떠나가고 탄력 잃어버린 낡은 가죽처럼 이마와 목에는 주름살만 한 줄 두 줄 늘어간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한 줌씩 빠지는 머리카락도 아쉬워 거울을 들여다보니 어느 틈에 소갈머리가 훤히 드려다 보인다. 조만간 외출할 때는 모자를 꾹 눌려 쓰고 다녀야하나 보다.
엊그제 2021년 신축년 새해를 맞이한 것 같은데 후다닥 두 달이나 흘러가고 벌써 3월이다.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어쩌자고 눈치도 없이 이처럼 세월만 앞서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탓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 주변과 소통도 못하고 있는데 야속한 세월만 저만치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부리나케 잰 걸음으로 달려간다. 무정한 세월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제아무리 멋대로 하고 싶은 짓을 다하는 인간이라도 화살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흐르는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시간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 그러기에 세월의 본성을 알아차린 옛사람이 가는 세월 탓하지 말고 사람의 도리를 단단히 엮어두라고 말했나보다.
우리 동네 야산, 초안산을 바라보니 봄날의 모습을 찾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다. 지금도 겨울의 잔재가 남아 생기 없는 거무칙칙한 모양이 만연하다. 작은 숲길이나 좁은 오솔길도 지난 가을에 떨어져버린 푸석푸석한 낙엽들만 쌓여있다. 하지만 3월 중순으로 들어서면 봄이 정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조금씩 실감하게 된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봄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그토록 잔인하고 혹독한 겨울공화국의 억압 속에서도 새 생명을 잉태한 숭고한 몸짓은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차디찬 땅 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토로하지 않고 온 몸으로 온전히 맞고 맞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견디어낸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누가 손짓하거나 부르지 않아도 새싹은 앙증맞은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만삭의 엄마 품에서 고고의 소리를 지르고 아기가 세상에 나오듯 자연은 스스로 소생한다. 자연의 변화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는 마음의 눈도 열리게 된다.
3월 초하루 날 달력 한 장을 넘기며 작은 상념에 빠진다. 요즘에는 달력을 거는 집이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 한 장씩 달력을 넘긴다고 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무뚝뚝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편리한 스마트 폰으로 스케줄을 관리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종이 달력을 넘기고 달력을 뜯어내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지나간 날의 사연을 아스라한 기억 속에 간직하고 다가올 날의 설렘을 기대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2월 달력을 내리고 3월 달력을 쳐다보며 집안의 대소사를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그려본다. 달랑 달력 한 장 떼어낸다고,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날이 지고 달이 바뀐다고, 사람의 삶이 확 변할 리 없지만 3월이 되면 봄이 오고 모든 게 새로이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2월 달력 한 장 떼어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나가고 떠오른다. 한 해 두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삼스럽게 세월이라는 어휘에서 조금씩 초조해지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자주 손에서 책을 놓고 거실 밖을 내다본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스스로 이렇게 저렇게 내 삶의 궤적을 엎어보기도 뒤집어 보기도 거꾸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틈엔지 마음이 가라앉고 담담한 심정이 된다. 하루하루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더없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될 수 있으면 욕심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싶다. 봄이 오는 길목을 마주하면서, (2021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