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쌓는 사람, 단을 쌓는 사람
벽을 쌓는 사람과 다리 놓는 사람(벧전2:4-9) 327장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이 있고, 벽을 쌓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리 놓는 사람의 특징은 서로 평화롭게 만들고 화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리 하나가 생김으로서 절벽과 절벽을 거뜬히 건널 수 있으며,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갈 수도 있듯이 사람들 사이에 다리 놓는 사람은 교통하게 만들고 서로 하나되게 만듭니다. 반면에 벽을 쌓는 사람의 특징은 서로 분쟁하게 만들고, 서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자기 것만 지키려는 욕심 때문에 담벼락을 높이높이 쌓습니다. 이웃 사이에 담을 쌓는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은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벽을 쌓는 사람은 이웃과 이웃 사이에 불신과 갈등과 증오심이 쌓이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염려가 있다면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청년과 노인, 인종과 인종, 남자와 여자,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종교와 종교 사이의 벽은 점점 더 높아져 가는데 양극 사이에 다리 놓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양쪽 사이에 높다란 벽만 쌓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상생(相生)이 아닌 상극(相剋)만 부추기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벽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나 자신과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꿈과 이상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벽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벽은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렇지만 벽은 보호하는 만큼 방해하며, 침투를 막는 만큼 소통도 막고, 방어하는 만큼 구속합니다. 만리장성은 침략을 일삼는 적을 막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 놀라운 성벽은 중국을 세계로부터 가두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을 쌓고 탑을 쌓는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새로운 도전을 피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가족들이나 다른 그룹과 섞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곧 무너질 바벨탑을 쌓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어설픈 하나되기로 끼리끼리 모이는 묶기일 뿐입니다.
반면에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중국 그리고 로마의 기술과 역량은 비슷했다고 합니다. 중국이 방어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이집트인이 한 사람을 위해서 피라밋을 만들 때, 로마는 개방을 위해서 15만 킬로미터의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정복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담을 허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엡2:14)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개종했지만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사람으로 아주 나쁜 평판을 갖고 있어서 많은 제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고 그의 변화에 대해서도 의심하였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사울과 사도들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행9:26-27) 세례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선지자로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였습니다.(요1:23)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은 본래 라틴어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 곧 다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다리 놓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의 다리 역할도 해야 합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담이나 벽을 쌓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만드는 사람처럼 다리 놓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은 '단순한 연락병'이 아닙니다. 연락만 하면 인간의 언어와 이해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항상 오해가 생깁니다. 다리를 놓는 사람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쪽에 가면 저쪽을 세워주고, 저쪽에 가면 이쪽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의 임무가 밟히는 것처럼 많은 고난과 역경과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기에 다리 놓는 사람은 벽을 만들어 성이나 탑을 쌓는 대신 하늘을 향한 단을 쌓습니다. 머무는 곳마다 단을 쌓고, 고백과 간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도움을 구하고 안정을 찾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셨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세워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합니다. "교사는 자신을 하나의 다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교사는 그 다리 위로 학생들을 초대해 건너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건너간 다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너진다.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다리를 만들게 하고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건너게 하는 다리입니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10일 가까이 금식을 하고, 수도원에서 내려와 시장을 통과할 때, 제자 중의 하나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시장에서 파는 죽을 막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정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죽을 먹은 제자는 고개를 숙이고, 이제는 쫓겨났구나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을 때, 프란체스코는 죽 파는 좌판에 뛰어들어 자기도 죽을 먹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도 배고파 죽을 뻔했다. 야, 너희들도 와서 먹어" 곤경에 처한 제자를 살리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세상 사이, 다리의 역할을 감당할 거룩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믿은 자로서 입은 구원의 은혜,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화합하고 어울리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세제를 섞은 물이나 비눗물 같은 계면 활성제를 넣어주면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계면활성제처럼 서로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를 가로막는 '담을 쌓는 대신 단을 쌓는' 사람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과 이웃 사이를 이어주고 하나되게 하는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지금 옆 사람의 손을 살짝 잡아보세요. 왜냐구요? 그것이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놓는 사람, 곧 브릿지빌더(Bridge builder)의 첫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08년 6월 9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