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들은 참 다르다. 예전에 손으로 쓸 때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컴퓨터를 사용해 두드리는 지금도 그렇다.
예전에야 글씨 잘 쓰려고 많은 노력들을 기울였고 글씨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까지 있었다. 서예학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방법만 따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던 것이다. 글씨는 곧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그랬을 것이다. 사실 글씨체를 보면 사람을 안다는 소리가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니까. 나만 해도 야무지지 못한 내 글씨체 때문에 속상해하곤 했다. 손에 힘이 없어서 라고 변명하곤 했지만 그 글씨가 곧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글씨에 신경을 가장 쓰는 때는 아마 고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한 반에서도 친구들 중에서도 잘 쓰는 아이 못 쓰는 아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누구나 글씨 잘 쓰는 아이를 부러워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글씨도 잘 썼고 그런 만큼 칭찬도 많이 듣기 마련이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글씨 잘 쓰는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때는 근사한 샤프 펜슬이 부러웠고 예쁜 볼펜, 독특하거나 비싼 여러가지 글쓰는 도구들이 부러웠다. 누가 뭘 사면 나도 사고 싶어 안달했고 써보고 싶어 만지작 거렸다. 고급 만년필은 더욱 부러웠다. 아마 선전이었을 테지만 누군가 파카 만년필을 윗도리 주머니에서 꺼내 쓰는 모습이 그렇게 근사해보일 수 없었다. 지금 아이들은 들어도 뭔지 모를 파카만년필, 몽블랑 만년필, 그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던 것이다.
갈수록 편한 필기구가 나오고 요즘 아이들은 모두 샤프 펜슬 아니면 이런저런 볼펜을 쓴다. 우리 때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좋은 펜들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글씨와는 인연이 멀다. 물론 잘 쓰는 아이는 여전히 있지만 그다지 큰 신경을 안 쓰는 듯 하다. 아이들 뿐 아니다. 나 역시 글씨에서 멀어졌다. 나 뿐 아니라 우리 세대 모두가 그럴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자연스레 글과 멀어지는 것이다. 아니 읽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더라도 쓰는 일과는 인연이 없으니 글씨 때문에 열등의식 느낄 일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 쓸 일이 생기면 무수히 망설여졌고 몇 번 연습하고 나서야 쓰곤 했다. 그랬어도 역시 불만이었다. 연습했다고 해서 내 글씨체가 어디 갈리도 없고 더 힘없어지고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되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악필이 되었을까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가 생겼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후, 다시 공부 할 기회가 생겼다. 소르본에 다니면서 무수히 많은 글씨를 써야 했던 것이다. 이때 글씨는 지금 보아도 한결 예쁘다. 반듯하고 침착하며 힘이 있다. 필기체로 썼는데도 예쁘고 단정하다. 왜 그럴까. 시간이 많았다. 당시엔 글을 쓸 때 바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은 늘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는 글씨에 대한 주의를 일깨워주었다. 과제를 낼 때면 어디에다가 어떻게 써서 내야 한다고 어른인 학생들에게 늘 잔소리를 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좋은 학생이었던 나는 최대한 그의 가르침을 지켰고 노트 또한 네모 칸이 쳐진 노트를 사용했다. 선생은 그런 것까지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시시콜콜이. 그 때 알았다. 아, 그래서 글씨가 그랬구나.
그랬는데..그랬는데....
돌아와 직장을 잡았다. 모든 일이 눈이 핑핑 돌만큼 빨리 돌아갔다. 느긋하게 글씨체에 신경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서 빨리 요점만 적어야 했다. 글씨체가 망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빨리빨리....어딜 가나 빨리빨리..몇 년 그렇게 지나고 보니 그야말로 괴발개발이 되었다. 급한 마음이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면 요즘은 어떨까. 그렇게 개발새발이라도 창피당하는 기회가 별로 없는 것이 모두 컴퓨터를 사용하는 덕분이다. 컴퓨터로 써서 인쇄하면 되니까. 악필이라는, 참 조잡하다는 말을 들을 기회가 많이 사라져서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글씨를 못쓰는 모든 사람은 나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컴퓨터에게 인쇄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모두가 같은 글씨, 모두가 개성없는 글씨체를 사용하니까. 한데...그게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영리해져 다양한 글씨체를 만들어낸다. 아는 사람은 안다. 글씨체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예민하고 정보에 민감하며 영리한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용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느낌을 줄 줄 안다. 나처럼 둔감한 사람이야 원래 만든 이들이 설정한 바탕체를 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딸아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누군가를 위해서 뭘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그 안에 글씨가 들어가야 했다. 딸아이는 그 글씨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바꾸었다. 내가 택한 글씨체는 지나치게 활달하다거나 명랑하다거나 내지는 여려 보인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내가 이해 못할 평을 내리면서 내가 택한 글씨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결국 자기 딴에 어울린다 싶은 글씨체를 넣어 그걸 만들었다.
나는 딸아이만큼 예민하지 못하다. 그래서 글씨체를 보고 그 느낌을 확 잡아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민한 이들은 느낄 것이다. 누군가 택한 글씨체를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사실 특이한 글씨체는 특이한 느낌을 준다. 그 글씨체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손으로 쓴 글씨만큼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또 글씨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차이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택한다는 것뿐...참 좋은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참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첫댓글 지두 글씨 참 못쓰는데 컴때문에 다행여유~ ㅎㅎ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동지네요. ^^
천재는 악필이래서 열심히 노력하여(?) 겨우 악필로 명성을 올리는 중이었는데, 컴이 나오는 바람에 그만 천재는 고사하고 백재(?)도 못 되고 말았어유 ㅠㅠ...
옛날엔 글씨를 참 잘 쓴다고 칭찬도 받았는데 지금은 정말 학생들에게 부끄러운 글씨입니다. 내 플래닛에 엊그제 글씨체를 한양체인가로 바꿨는데 나도 예민한 사람인가?(갸웃)
당연히 예민한 분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껴요? (그 사진, 박주가리 사진 아직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컴~문화가 아무리 발달해도 요즘 아이들도 글씨쓰기에 신경을 쓰면 좋겠어요. 펜혹의 의미와 가치를 알면 좋겠어요. 제가 고리타분한 건지 모르겠지만...
예. 예.예(쩔쩔쩔) 다행히 딸아이는 저보다 낫지만 아들아이는 그야말로 괴발개발...
아, '개발새발'은 '괴발개발'을 잘못 쓴 낱말임.
전 이래서 행복하다니까요. 차암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알려주시니...
'바람재정거장' 772번 보세요.^^*
글씨 잘 쓴다고 선생님 대신 칠판에 적기도 했는데.......아, 옛날이여!^^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