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섬기기 어려운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죽음보다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삶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죽음에 대한 정의는 학문, 사람, 종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공통적으로는 한 생명체의 모든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모든 조직과 세포 활동이 멈추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죽음으로 정의하며,
이로 인해 호흡과 신진대사가 중단되고 부패가 진행된다. 의학적으로는 뇌와 심장 활동이 정지된 상태를 죽음으로 간주하며, 이로 인해 신진대사뿐만 아니라 언어, 개념 형성, 판단 작용이 멈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종교적으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따라 관점이 나뉜다.
유학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지만, 불교와 기독교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며,
살아 있을 때의 행실에 따라 이후의 결과가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선택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유학에서 죽음은 기(氣)가 모여 있는 상태를 삶, 흩어진 상태를 죽음으로 간주하며,
삶과 죽음을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로 본다. 공자는 사후 세계보다 현재의 삶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강조하며,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향했다. 그는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어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반영해 도덕적 삶의 기준을 조건 없는 사랑과 공공의 의로움 발휘에 둔다.
죽음에 임박한 순간, 인간은 과거의 삶을 돌아보고 감정을 추억하며,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 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구분이 흐려지며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된 상태가 된다.
장자가 아내의 죽음을 맞아 그릇을 치며 노래한 일화는 죽음이 관계의 단절인 동시에 새로운 연결임을 보여준다. 유학자들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깊은 슬픔으로 받아들이며, 이 슬픔은 관계가 끊어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특히, 죽음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들일 때 그 감정은 더욱 강렬해진다.
반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픔이 덜하다는 점에서 죽음과 슬픔은 관계의 깊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이후 자신의 주검은 타인에 의해 처리되며,
자신의 행적에 대한 평가 또한 타인의 몫이 된다.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변명하거나 관여할 기회가 없으며, 평가는 냉정하게 이루어진다.
결국, 웰빙과 웰다잉의 개념은 삶과 죽음이 도덕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살신성인이라는 가르침처럼,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기에 지금의 삶이 그만큼 중요하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