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창시한 파성 설창수(7)
필자가 지난 금요일 저녁(2008. 10. 24)에 부산여대 다촌문화관에서 설송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때 부산에 있는 남강문우회 회원 11명이 축하차 자리를 같이 해주었다. 서울에서는 이유식, 부산에서는 정재필, 최만조, 성종화, 김상남, 이문형, 허일만, 정대수, 강원희, 송민수, 장소지 등이 그들이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 2차 모임을 부산여대 근처 어느 밥집에서 가졌는데 여류 장소지만 빠지고 다 모여 진주 남강에 어린 추억담을 나누었다. 자연히 개천예술제와 파성, 그리고 파성이 주재하던 <영문> 등에 대해 구김없는 전설같은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 자리에 있던 문인 중에는 정재필, 성종화, 허일만이 <영문>에 글을 실었었다는 후일담을 곁들였다. 이 중에 누가 마산의 이광석도 <영문>에 글을 올렸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자리를 파하기 전에 필자는 파성의 총애를 받았던 성종화로부터 그의 신간 도서 2권을 받았다. 집에 돌아온 필자는 다음날 새벽 그의 저서 ‘잃어버린 나’(성종화 시문집)와 ‘늦깎이가 주운 이삭들’(성종화 수필집)을 손에 쥐고 무슨 보물을 감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권 중에서 시문집을 즉석에서 내리 읽었다.
시문집은 모두 4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와 2부는 시편들이고 3부와 4부는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 1부는 중학 3학년에서 고1까지의 작품들(53년~54년)이고 2부는 고2에서 졸업 후 2년에 이르는 기간(55년~58년)에 쓰여진 시편들이다. 필자의 첫 인상은 또 하나의 최계락을 보는 것 같았다. 조숙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밀도있는 표현이나 군더더기 없는 서정에서도 그러하다. 어째 이런 시인이 1958년 이후 붓을 놓았던 것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단정한 시의 흐름을 둑을 쳐서 막았던 것일까?
그의 이력을 들쳐 보았다. “일본 오오사카에서 출생. 진주고 졸업(1957). 검찰청에서 근무(1967~1983). 법무사 개업(1984년~ ). 대광법무사 합동법인 대표 법무사와 부산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을 거침. 제6회 개천예술제 백일장 장원(1955). 영문 동인. ‘시와 수필사’ 수필부문 신인상(2007)”으로 되어 있다. 검찰직 공무원이라는 직종이 많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 문인들 중에서 판검사나 법무 계통 종사자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필자의 친구 중 조희래 판사(현 변호사)가 있는데 나만 보면 “친구야, 내가 딱딱해 보이지? 자네의 감성과 정서적인 면이 부러워” 하고 말했었다.
어쨌거나 성종화의 학창시절 작품들은 진주문단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인다. 무슨 무슨 작가들의 잊혀진 면면들이 자료 발굴 대상이 되곤 하지만 성시인에게서 처럼 제 기초로 반듯한 작품 세계를 드러내 보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등꽃이 지는 오후였다 // 탑이 / 바람을 머금고 // 또 / 풍경은 울었다 // 배암처럼 / 내가 탑에 기대어 / 희어 가는데 // 마치 / 노을에 취해 모란이 지듯 / 가슴으로는 전설이 진다 // 탑에 구름이 걸렸다” 이 작품은 진주고 2년(1955) 때 ‘학원’ 9월호 우수작 입선작으로 뽑혔다. 그는 학원 문단의 촉망받는 시인이었다. 2부에 실린 시들이 거의 학원에 뽑혀 실렸었다. 당시 그와 어깨를 겨루던 학생들이 유경환, 황동규, 김종원 등이었다.
‘잃어버린 나’의 산문부에 실린 수필 <작은 인연>에는 시인 유경환과의 얽힌 인연이 기술되어 있다. 육군 병참학교 신병 접수를 받고 있던 성종화의 눈에 신병의 신상명세서 한 장이 클로즈업되었다. 학원파(조폭이 아님)의 한 시인 유경환이 5.16 후 뒤늦게 군대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때 성종화는 유경환을 육본 병참감실로 충원해 보냈다. 이후 유시인의 동서였던 장준하 '사상계' 발행인 댁에 초대되었다. 그는 제대만 하면 '사상계' 기자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그 뒤 사상계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