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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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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6) 온달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31 13.08.21 02: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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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무사에서 왕의 사위가 된 고구려의 용장



??온달(溫達)은 신라에게 빼앗긴 옛땅을 되찾기 위해 남정길에 올랐다가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한을 남긴 채 전사한 고구려의 용장이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나라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간 인물은 온달밖에는 없다.

??남루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며 구걸하여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했다는 효자 온달,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온달을 지아비로 섬겨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고구려의 용장으로 거듭나게 한 평강공주(平崗公主),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피로 얼룩진 삼국 쟁패사의 한 장을 풍류의 멋으로 장식하고 지나간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과도 같았다.

??고구려의 제25대 임금 평강왕(平崗王)은 평원왕(平原王)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성명은 고양성(高陽成). 양원왕(陽原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2년 뒤인 559년 3월에 부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평강왕이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평강왕의 가족으로는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왕자, 한 명의 공주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평원왕조에는 재위 7년(565년) 정월에 왕자 원(元)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고 했고, 제27대 영류왕조를 보면 ‘왕의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도 하며 영양왕( 陽王)의 이복동생이다’ 라고 했으니 최소한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제28대 보장왕조에는, ‘왕의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이라고도 하며,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건무왕(영류왕)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평강왕에게는 뒷날 그의 뒤를 이어 영양왕으로 즉위하는 맏아들 고원,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되는 고성(고건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에 의해 왕좌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된 고장(고보장)의 아버지 대양왕 등 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강대왕에게는 이 세 아들 말고도 외동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고대사를 빛낸 여걸의 한 사람인 평강공주이다.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高氏)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다만 ‘평강대왕의 딸’이란 뜻이지 그녀의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달은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받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 사연을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동북아 최강국으로서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제국은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면서 동냥하던 바보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되었을까. 과연 이러한 사건(?)이 엄격한 신분제도의 절대왕권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던 것일까. 사서의 기록을 바탕삼아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열전’ 온달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온달은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했다. 집이 몹시 가난해서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오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 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은 희롱하여 말했다. “네가 늘 울기만 하여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크더라도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으므로 꼭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달래고 꾀어도 한 번 터진 공주의 울음보는 막힐 줄을 몰랐다. 그러자 어느 날 부왕은 이런 말로 공주의 울음을 달랬다.

???“오냐 오냐. 자꾸만 그렇게 울어라. 그렇게 울면 널 어떤 사내가 아내로 데려갈까보냐.????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이 다음에 커서 좋은 신랑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린 줄 알아??? 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고다니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 석에게 시집보내고 말 터이니라!”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바지. 바보 온달이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공주의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때 평양성 하부(下部)에는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매우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으니 늙고 눈먼 홀어미는 성도 이름도 없었고,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의 아들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해서 사람들이 온달이라고 불렀다. 우리 옛말에 100을 ‘온’이라 하고 산을 ‘달’이라 했으니 온달이란 수많은 산처럼 장대한 몸집의 사내란 뜻이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이를 한문자로 옮겨 쓰면서 온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본편의 주인공인 온달 장군을 봉성 온씨(鳳城溫氏)들이 문중의 도시조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로 덧붙인다.

??어쨌든 온달 모자가 사는 형편은 매우 가난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몹시 가난하여 날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를 헤매며 밥을 빌어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온달이 산처럼 장대하고 당당한 체격을 지닌 젊은이였다면 하다못해 산에서 땔감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건축공사장에서 인부로 일을 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들어가 군인 노릇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하고 힘 좋은 젊은이가 굳이 바보 소리까지 들으며 구걸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전설에는 온달이 숯을 구워서 팔았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온달이 걸식을 해다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온달의 이름은 평양 성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대궐까지 들어가 대왕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공주가 울 때마다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로 울음을 그치게 했던 것이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참말처럼 들리기 마련인가. 날이면 날마다 울면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는 마침내 평강공주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되었고, 그렇게 해서 온달이란 이름이 공주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꽃다운 열여섯 살이 되었다. 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대왕은 공주의 혼처를 물색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은 이 대목에서 대왕이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고씨라면 고구려의 왕성이니 평강대왕이 동성 동족간의 혼인을 시도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본래부터 5개 부족간의 유대를 혼인관계를 통해 굳게 다지기 위해 족내혼을 금지시켰던 까닭이다. 좌우간 사건은 공주의 혼사 이야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부왕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공주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시겠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어요? 소녀는 골백?????? 번 고쳐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사와요!”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둔 사내라도 있다는 말이냐?”

???“폐하께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르지 아니하셨어요?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이 다음에 크면 온달의 각시로 주마고 안 하셨어요? 그러고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겠다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소녀는 죽어도 온달을 낭군으??? 로 섬기고자 하나이다!”

??그제야 대왕은 공주의 말이 실없는 농담도 아니고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해 대궐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쳤다.

???“예끼,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년 같으니! 네 어찌 그토록 방자하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는고? 너는 대고구려의 황녀가 아니냐? 그럼에도 어찌하여 미천한 거렁뱅이의???? 각시가 되겠단 말이냐?”

???“대고구려국 천자이신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사와요? 저자의 이름 없??? 는 필부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대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씀을 하??? 시오리까? 소녀는 대왕폐하의 딸인 까닭에 폐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더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하나이다!”

??말꼬리가 잡힌 데다가 말문까지 막혀버린 대왕이 분노에 못 이겨 냅다 고함을 질렀다.

???“고얀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너같이 못된 년은 애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아라! 아, 썩 나가지 못할까?”

??그렇게 하여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지니고 대궐을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부족하여 고귀한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하여 화려한 대궐을 등졌을까. 추측하건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름없는 궁중 생활이 싫어 넓디넓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잘 울면서 큰 아이는 원래 고집이 센 편이 아닌가. 그리고 평강왕에게는 부인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공주의 생모는 제1왕비로서 일찍 돌아갔고, 계모인 제2왕비가 저세상으로 먼저 간 어머니 자리를 차지하자 매일같이 떼쓰고 울면서 자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는 평강왕은 젊은 후비에게 한창 사랑을 쏟고 있는데 공주가 계모라고 싫어하며 따르지 않았으며, 그 결과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자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대왕이 공주를 쫓아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쩌면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이름을 들어오던 온달을 만나고 싶어서 대궐을 몰래 빠져나가 온달을 만나보았으며, 그렇게 몇 차례 만나다가 마침내 정분이 싹터 남몰래 사랑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 풍속은 남녀가 무리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즐긴다’고 했고, <남사>에서도 ‘고구려는 가무를 좋아하여 국중(國中) 읍락에서 남녀가 무리지어 밤마다 노래하고 즐긴다’고 했다. 그렇게 놀다가 눈도 맞고 마음도 맞으면 서로가 짝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옛날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의 경우도 중매쟁이가 따로 없었고 양가 부모의 합의가 없었음에도 쉽사리 혼인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열전’은 공주가 홀로 궁에서 나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공주가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노모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공주는 온달의 노모에게 온달이 간 곳을 물었다. 온달의 노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기 뉘시우? 내 아들놈은 가난하고 못생겼으니 귀인이 가까이할 사람이 못된다우. 지??? 금 댁의 몸냄새를 맡아보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구??? 려! 틀림없이 귀한 분 같은데 누구에게 속았기에 여기까지 찾아온거유? 내 아들놈은 굶주??? 림을 면하려고 느릅나무 껍질이라도 벗겨오겠다며 산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우.”

??공주가 기다리기 무료하여 집뒤로 난 길을 따라 산밑으로 갔더니 마침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공주가 온달님이 아니시냐고 묻자 온달이 걸음을 멈추고 내가 바로 온달이라고 대답했다. 공주가 찾아온 사연을 자초지종 이르고 나서 그대의 아내가 되고자 한다고 말하자, 온달이 듣고 얼핏 생각하기에 이것은 영락없이 여우가 둔갑하여 홀리든지, 아니면 도깨비가 놀려먹는 짓이 분명했다. 그래서 공주를 향해 왕방울같은 두 눈을 부라리고 쇠북이 깨지듯 커다란 목소리로 골짜기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네가 과연 사람이야 귀신이냐? 이제 해가 지니 내게 덤비는 것을 보니 너는 사람이 아??? 니라 여우나 도깨비가 분명하구나! 물러가지 않으면 단매에 때려죽이구 말 테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산길을 타고 내려갔다. 공주가 울면서 쫓아갔지만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내다보지도 않았다. 공주는 사립문 밖에 쪼그려앉은 채 그 밤을 샐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공주가 또다시 온달 모자에게 애원과 하소연을 되풀이하며 함께 살기를 청했다. 그러자 온달의 노모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의 말씀이 진정인 줄은 알겠사오나 보시다시피 내 아들이 천하고 못생겼으니?????? 어찌 금지옥엽의 배필이 되겠나이까? 또한 이처럼 집안이 누추하고 가난하니 함께 사실???? 수가 없을 것이외다!”

???“오마님께선 아무 걱정 마시라요! 온달님이 몸 튼튼하고 마음 착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 시요? 가난쯤이야 어찌 이겨내지 못하갔시요? 우리 세 식구가 몸과 마음을 합쳐 즐겁게??? 살면 그뿐, 그저 이 한몸 받아주시고 한평생 버리지만 말아주시라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평강공주는 온달의 색시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어쨌든 ‘바보’ 온달은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결혼이지만 고구려의 부마, 곧 대왕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온달이 정녕 바보는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대왕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불같이 노해 당장 목을 치고 공주를 잡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공주는 출궁할 때에 가지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다. 집을 사고 땅을 사서 노비들로 하여금 밭을 갈게 한 공주는 온달도 더 이상 놀고먹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한 온달을 고구려의 그 어떤 사내보다도 더욱더 날쌔고 용감한 장수가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터를 고르고 마구간을 세운 다음 온달에게 돈을 주고 저자에 나가서 말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때는 거의 해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으므로 고구려 사내로서 불구자가 아닌 다음에 말도 못타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서쪽으로는 툭 하면 중국 오랑캐들이 요하를 건너 침범해왔고, 남쪽에서도 신라와 백제가 틈틈이 쳐올라와 괴롭혔기 때문에 고구려는 늘 강병을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군마는 국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당시 고구려에는 키가 3척밖에 되지 않지만 매우 힘이 강해 군인을 태우고도 험한 산길을 잘도 오르내리는 삼척마(三尺馬) 또는 과하마(果下馬)라는 말이 유명했다. 공주는 궁중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대부분 명마라고 할 수 있는 국마(國馬)들을 많이 보고 타보아서 말을 고를 줄을 알았다. 그래서 온달에게 이렇게 말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마장(馬場)에 가시면요. 장사치들의 말이 아니고 꼭 나라에서 내놓은 국마를 사오시라???? 요. 말라깽이도 좋고 다리 저는 말도 좋으니 꼭 국마를 사오시라요, 알갔시오?”

??그리하여 온달이 시키는 대로 마장에 가서 병들어 보잘것없어 보이나 나라에서 못쓰겠다고 내놓은 말을 사왔는데, 과연 공주가 손수 먹이고 정성껏 돌보니 금세 건강을 되찾아 늠름한 준마의 모습을 되찾았다. 온달은 그로부터 자고 일어나면 말달리고 활쏘고 창검 휘두르며 열심히 무술을 익혔다. 그리고 그동안은 일자무식으로 학문과는 담쌓고 살아왔으나 밤이면 공주로부터 부지런히 글공부도 했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대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온달이 그 대회에서 공주가 가꾸어준 그 말을 타고 그동안 연마한 무술 솜씨를 한껏 발휘하니 말달리기도 으뜸이요, 활시위를 당겨 쏘면 쏘는 대로 모조리 잡는지라 보는 사람마다 놀라 혀를 내둘렀다. 그의 눈부신 솜씨는 마침내 대왕의 눈에도 띄어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어허, 근래에 보기 드문 용사로다! 저기 저 황소처럼 억세고 범처럼 날쌘 사내가 어느???? 부에서 온 누군고? 이리 데리고오도록 하라. 내 친히 만나보겠노라.”

??그렇게 해서 온달은 생전 처음으로 장인인 평강대왕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 이리 가까이 와보라. 네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는고?”

???“네이! 이 천한 것의 이름은 온달이라 하옵고 하부에 사는 줄 아뢰오!”

???“아니 뭐라구! 네가 바로 그 바보 온달이란 말이냐? 세상에 이럴 수가!”

???대왕은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바보 온달 바보 온달’ 하다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빼앗아간 바로 그 녀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아비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대궐을 뛰쳐나간 공주에 대한 분이 덜 삭고 화가 덜 풀렸음인지 대왕은 그 자리에서는 온달을 자신의 사위로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으니, 그것은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군대가 요동으로 침범해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쳐들어온 나라가 후주(後周)라고 했는데 이것도 틀린 기록이다. 후주는 고구려가 망한 다음인 서기 951년부터 960년까지 존재한 중국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였고, 실은 선비족(鮮卑族)의 한 갈래인 우문씨(宇文氏)가 세운 북주로서 556년부터 581년까지 겨우 25년간 지탱하다가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에게 망한 하루살이 제국인 것이다. 중국 북방을 석권하여 한때 강성을 뽐내던 이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노략질하러 쳐들어오자 평강대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의 들판에 나아가 적군을 여지없이 물리쳤다.

??이때 범처럼 사납고 날쌘 용사가 있어서 스스로 선봉이 되어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용감하게 오랑캐들을 무찌르니 싸움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하는데 그 용사의 전공이 단연 으뜸이었다. 대왕이 불러보니 이번에도 또 온달이 아닌가. 대왕이 그제서야 무릎을 철썩 치며 이렇게 소리쳤다.

???“바보, 아니 온달아! 과연 너는 내 사위로다! 내 이 자리에서 너를 고구려의 대형(大兄)??? 으로 삼겠노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중국의 사서들에는 온달의 이름이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동사강목>에는 온달을 대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평강왕 19년(577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온달은 순박한 성격의 하급무사였다가 인재등용의 무대인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와 북주의 침략을 격퇴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당시 고구려 군부의 신진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평강공주와 눈이 맞아 몰래 한 연애 끝에 대왕에게 발각되어 공주가 궁에서 쫓겨나 동거를 하다가 마침내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이란 벼슬까지 받게 된 것은 아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온달 내외는 그때부터 더 이상 도성의 변두리인 하부에서 살지 않고 상부로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또 평강왕 28년(587년)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에도 온달의 가족은 상부의 귀족들과 함께 이주했을 것이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년)에 쌓은 새 도성으로서 고구려의 천도는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남천한 지 159년 만의 일이었다.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 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온달의 장인이요 공주의 친정아버지인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돌아가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위?진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일어서 천하를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로서도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북쪽 요하 방면의 방어도 문제지만 근래들어 팽창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치거리였다. 등과 배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대왕은 남당에서 어전회의,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온달이 이렇게 말했다.

???“신 온달이 아뢰나이다. 이제 수나라 오랑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지 얼마 안돼 또다??? 시 대군을 일으키려면 쉽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방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보나이??? 다. 그동안 후방의 적을 제압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인가 하나이다.”

???“신라를 먼저 치자는 말이구려? 하지만 군사를 양분하면 힘도 그만큼 쪼개질 것인데 그??? 래도 괜찮겠소?”

???“폐하,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인바 신라 간적?????? 들에게 빼앗긴 이래 그 땅의 백성이 늘 통분히 여기며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두고만 보리까?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옵시고 군사를 맡겨주신다??? 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옛땅을 회복하여 대왕의 심려를 덜어드리고자 하나이다!”

??그 자리에는 영양왕 8년(598년) 수 문제의 30만 대군과 영양왕 12년(612년) 수 양제의 백만대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주역인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를 비롯하여 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명장과 대신들도 배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온달 장군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으므로 그날 국가안보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기로 결론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궐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온달은 아내 평강공주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출전을 알리고 작별을 했다. 그때 눈먼 홀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사랑하는 평강공주와 귀여운 자식들과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온달은 이렇게 맹세했다.

???“들어라, 고구려 무사들아!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다!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다물리지 못한다면 내 결코 살아서 돌??? 아오지 않겠노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하여 질풍노도처럼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갔다. 이때 온달이 되찾고자 출전한 계립현 이서, 죽령 이북, 고현 이내는 오늘날의 강원도 지방 대부분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은 40여 년 전인 양원왕 7년(551년) 9월이었다. 그해 고구려는 왕위쟁탈전에 따른 후유증이 채 가라앉지 않은데다가 돌궐족의 침략을 받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궐군이 신성과 백암성을 포위해 요동이 위급하자 왕족인 고흘(高訖)이 출전하여 돌궐군을 무찌르고 4천여 명을 포로까지 이끌고 개선했지만, 그 틈을 노린 백제의 성왕(聖王)이 고구려 남부의 10개 성을 쳐서 빼앗았으며, 뒤이어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또다시 이를 암습하여 탈취한 것이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여세를 몰아 연합전선을 펼쳐 함께 북진한 백제군이 수복한 한강 하류 지역까지 탈취?장악함으로써 이후 삼국 혈전사를 주도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온달이 거느린 고구려의 남정군이 어떤 지역을 거쳐 아단성에 이르렀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근래 일부 사학자는 오늘의 한강 하류인 서울 지역은 신라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온달의 부대는 강원도 내륙지방인 철원- 춘천- 홍천- 원주- 신림- 주천- 영월- 단양으로 진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대신 온달군의 남정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군의 일부가 한강 쪽에서 양동작전을 펼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진격을 거듭한 온달의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에 이르렀다. ‘열전’ 온달편은 이렇게 전한다. ‘드디어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다면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아단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백제의 옛성터 아차산성(阿且山城 : 峨嵯山城)으로 비정해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했다. 아차산성을 온달의 전사지 아단성으로 추정하게 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旦)과 아차의 차(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부회의 결과요, 두 번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즉, 온달의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한 구절을 들어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를 오늘의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측한 것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보아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란 대목은 없다. 아차성은 백제 책계왕(責稽王) 원년(288년)에 사성(蛇城)과 함께 쌓은 것인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 침공을 받아 백제의 도성이 함락될 때에 개로왕(蓋鹵王)이 참살당한 곳이다.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되는 말이니,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곧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다. 남한강 상류를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강을 끼고 늘어선 충주?청풍?단양?영춘?영월 등지는 하나같이 고구려의 대 신라 방어요충으로 산성과 봉수터가 잇달아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에서 ‘내성군(奈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 영월군이다. 그 영현은 셋으로 자춘현(子春縣)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 영춘현이라 부르고…’ 한 바로 그곳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단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같은 건치 연혁이 기록되어 있는데, 옛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산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현재 사적 제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제261호인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활고개?진거리?쉬는돌?비마루?대진목?군관나루 같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기록에는 온달이 유시에 맞아 죽었다고 했으나 웬만한 강궁이 아니고서는 고구려 장수의 철갑을 뚫지 못했을 것이니 그것은 어쩌면 신라 진흥왕 19년(559년) 신득(身得)이 발명했다는 신무기, 즉 성위에 설치하여 덫으로 화살을 쏘아갈기는 노포(弩砲)에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했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는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은 채 전사하자 너무나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략>이란 책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밤을 새워 달려온 평강공주가 관머리를 부여잡고 “국토를 못 찾고야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님이 아니 돌아가는데 나 또한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하고 애통하게 울부짖다가 쓰러진 채 영영 깨어나지 못하자 군사들이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내외를 그 자리에 합장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최근 단양군에서 온달묘라고 주장하며 관광자원화하려는 고구려식 적석총이 어쩌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 맞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2km 지점인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4호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당시 아단성전투에서 온달이 전사함으로써 온달 자신은 물론 고구려가 실지회복의 한을 풀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신라와의 옛 국경인 남한강 상류 일대는 회복했으므로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것은 틀렸다는 새로운 설도 있다.

??어쨌든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고구려 여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장군의 진정한 사랑은 오랜 세월을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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