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역사정의실천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연대
일본 육군사관학교 |
만주(중앙육군훈련처 , 만주육군군관학교) | ||
23기(1911) |
1명(항일) |
봉천1기-2기 |
1명 |
봉천3기 |
1명 | ||
26기(1914) |
13명(2명 항일) | ||
봉천4기(1936) |
8명 | ||
27기(1915) |
22명(2명항일) | ||
봉천5기(1937) |
17명 (3명:일본육사 편입) | ||
29기(1917) |
2명 | ||
30기(1918) |
1명 | ||
봉천6기(1939) |
2명 | ||
42기(1930) |
1명 | ||
45기(1933) |
2명 | ||
49기(1937) |
2명 | ||
봉천7기(1940) |
6명 | ||
50기(1937) |
2명 | ||
52기(1939) |
2명 | ||
53기(1940) |
2명 | ||
54기(1940) |
3명 |
봉천8기(1941) |
3명 |
55기(1941) |
3명 |
봉천9기(1943) |
3명 |
56기(1942) |
4명 |
신경1기(1943) |
13명(6명:일본육사 편입) |
57기(1944) |
3명 |
신경2기(1944) |
11명(4명: 일본육사 편입) |
58기(1945) |
6명 |
신경3기(1945) |
2명(모두 일본육사 편입) |
신경4기(미임관) |
2명 | ||
59기(미임관) |
3명 |
신경5기(미임관) |
5명(모두 일본육사 편입) |
60기(미임관) |
6명 |
신경6기(미임관) |
11명 |
61기(미임관) |
8명 |
신경7기(미임관) |
4명 |
소계 |
87명(임관63명) |
|
89명(임관67명) |
즉 일본육사(1910-1945년) 입학자는 87명으로 연평균 2.4명이었고, 그 가운데 임관자 63명 연평균 1.75명이었다. 그 가운데 5명만 망명해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만주국 장교(1932-1945년, 봉천군교, 신경군교, 군수학교) 임관자는 67명으로 연평균 4.8명이었다. 이 가운데 1명만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어찌되건 한 해 8도에 한 명도 배출하기 어려운 것이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였다.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웠기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혈서를 써서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임관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열하지역에서 항일세력을 색출 ‘소탕’하는 임무에 종사했다.
3. 간도특설대와 백선엽
백선엽은 임관 후 자무쓰(佳木斯) 부대에 잠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옮겨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 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직전 간도특설대 본부가 있는 명월구(明月溝)로 돌아갔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귀환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간도협조회, 신선대와 함께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세력을 탄압한 삼대 악질조직 중의 하나이다. 간도협조회는 주로 전향한 항일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던 군 외곽 특수조직이었고, 신선대는 경찰 산하 특수조직이었던 반면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정규 특수부대로 당시 만주국 최강, 상승의 무적부대로 불렸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송석하, 김찬규(김백일)이 부대 창설 핵심요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 최후까지 근무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간도특설대 해산업무까지 종사한 인물이다.
일제 당국이 조선인만으로 특수부대를 만든 것은 당시 (북)간도(동만주) 일대가 조선인항일유격부대의 최대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1932년 연길현 항일유격대대가 설립한 이래 1933년 3월에 화룡현 유격대대가 창설되는 등 1933년 초까지 북간도지역에서 항일유격근거지 도합 10개가 창설되었다. 조선인 항일유격대는 만주, 조만국경을 넘어 조선에까지 무장 출몰했고, 이에 맞서 일제는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동만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하여 전후 3차례 되는 대규모의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만항일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거쳐 1935년 8월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발전해 일만 군경들과 교전했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사건을 일으킨 후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침략에 나섰다. 이에 맞춰 일제는 대중전쟁(対中戦争)에 있어서 병참기지라 할 만주의 ‘치안’을 한시바삐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36년에 이미 『3년치안숙정계획을 제정해 관동군, 만주군, 헌병, 특무, 경찰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동북지역의 모든 항일역량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의 일부 병력(전원 조선인)이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일시 점령한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일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조선인 유격대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을 없애고,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제압한다는 취지 아래 간도특설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간도성은 80%이상의 주민은 조선민족이고 그들은 본래부터 일본군은 물론 중국인으로 편성한 만주국군에 대하여서도 비협조의 태도를 취한다. 만약 일만군경(日満軍警)들이 출동하여 ‘토벌’을 하여도 비단 반만항일세력(反満抗日勢力)의 정보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격대방면에서는 늘 사전에 토벌대의 정보를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국군은 오히려 새로 조선인만으로 편성된 부대를 설립하여 정보수집임무를 맡게 하여야 한다”
특설부대의 설립은 일제가 조선인 밀집지역인 간도지역을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다스린다”는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 목적은 백두산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반만항일투쟁을 진압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특설부대는 1940년대에는 중국 열하,하북성 일대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항일투쟁을 진압하는데도 종사했다. 간도특설부대는 일본침략자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전문적으로 항일련군, 팔로군 그리고 재만 조선인의 반일운동을 탄압하는 가장 악질적인 조선인 친일군사조직이다.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매년 1기씩 7기까지 모집했는데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표 3> 간도특설대 근무 조선인 장교 중국 측 조사자료 추가 조사 중앙육군 훈련처 강재호 이원형 박봉조(4기) 金燦奎(金白一)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석희봉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5기) 김용기(6기) 최남근 최재항 趙某(豊田)(7기) 태용범(8기) 백선엽 윤수현(9기, 간특1기출신) 육군군관학교 이재기 김묵(2기) 기타 1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기타 2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 許樹屛 국경감시대 金大植(해병 중장) 方得官(육대령) 洪淸波 간도특설대 제1기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 崔炳革(육대령) 金龍虎(육중령) 李龍星(육대령) 李龍(육소장) 金忠南(해소장) 기타 3 金龍周 朴春範 曺昌大 車虎聲(육대령) 金忠九(육대령) 柳益祚(육중령) 朴春植(육소장) 洪性台(육대위) 李東郁(육대령) 廉鳳生(해병대령) 吳南洙(육중령) 金萬玉(육대위) 金鍾洙(육대위) 李東和(육중장) 朴蒼岩(육준장) 朴泰元(육준장) 李白日(육준장) 申然植(육준장) 任忠植(육대장) 軍醫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79명
간도특설대는 성립된 날로부터 해산될 때까지 일제 패망 때까지 일본군과 합동 또는 단독으로 간도(연변)지구, 열하성 지역, 허베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나 되는 토벌을 감행하였다. 매달 평균 한 번 이상 ‘토벌’에 나간 셈이다. 그들이 잔혹하게 살해한 항일전사와 무고한 민간인은 도합 172명에 달하며, 이것은 특설부대 인원 4사람당 한사람씩 살해한 것과 같다. 그들에 의해 체포된 자와, 강간, 약탈, 고문당한 자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국내에서는 간도특설대가 죄행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면을 빌어 중국공산당 당국이 간도특설대의 죄행에 대해 조사한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1) 연변지구에서의 활동(1938. 09 ~ 1943. 09)
가 시기 간도특설대의 주요 임무는 조직을 강화하고 작전능력을 배양하는 한편 주요 역량을 집중하여 장백산맥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조선인,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안도현의 大沙河・北十騎河・迷魂陣・西北岔, 연길현의 二靑脊・天寶山・老頭溝, 왕청현의 天橋嶺, 화룡현 등에 병력을 집중하여 楊靖宇・金日成・崔賢 등이 지휘하는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토벌활동은 連에서 선발된 우수 대원 중심으로 조직된 便衣隊를 각 농촌에 침투, 항일연군의 행적과 민심을 정탐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수비대와 함께 항일연군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항일세력과 관련 민간인을 학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동안 10여 회의 토벌작전이 감행되었다.
1939. 04. 00(음) 대장 梁川의 지휘 하에 제1기 신병들을 동원하여 두 차례에 걸쳐 안도현 十騎街 부락에서 훈련 토벌 실시
1939. 05. 00(음) 南湖頭일대에서 항일연군 陣煥章 부대 토벌과 10일 여 동안의 수사 활동 실시. 일본수비대 山田중대와 함께 안도현 西北岔 북부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梁川과 山田의 직접 지휘 하에 산나물을 채집하던 민간인 학살. 일본수비대와 함께 안도현 北十騎街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수행 중에 항일연군과 교전
1939. 07. 01(음) 天寶山일대에 부대원 전체를 투입하여 일본수비대와 함께 항일연군 추적, 항일연군 시체를 훼손하는 만행 자행
1939. 00. 00 안도현 大沙河에서 항일연군과 전투. 일본수비대 富本중대와 간도특설대 대원 16명이 항일연군에게 사살. 梁川이 지휘하는 지원부대 토벌활동 감행
1940. 03. 00(음) 圓部次郞이 특설대대장으로 임명된 후 안도현 西北岔산림지구에서 수 차례의 토벌작전 감행
1941. 01. 00(음) 안도현 大荒溝 동북지역에서 항일연군에 대한 토벌 실시. 항일연군 여군 4명 체포을 체포하고 이 중 2명 살해
1941. 03. 00(음) 특설대장 圓部次郞의 지휘 하에 안도・화전・돈화 등 3개 현에서 항일연군의 색출작업을 실시. 2명의 항일연군 체포
2) 열하성 유수림자 지구에서의 활동(1944. 02 ~ 1944. 07)
간도특설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기로 특설대 전병력을 집중하여 유사림자 주변 약 60리 이내의 각 촌락에 대하여 잔혹하게 소탕활동 전개하였다. 특히 정보반의 활동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 간도특설대의 공식적인 토벌활동만 28회에 달했고 22명이 살해되고 14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정보반을 운영했는데, 정보반의 활동은 특설부대 부관처에서 전문적으로 정보를 관리하는 군(장교)관 한명이 지휘하였다. 정보반 각연에서 13명의 골간분자들을 뽑아 조직되였으며 또한 정보수집 편리를 위해 변절분자중 약간 명을 흡수하여 정보수집 활동을 진행하였다.
정보반의 임무는 주로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보 수집이었다. 그 주요한 임무는 팔로군 명칭, 번호, 지휘관 성명, 부대장비, 전투력, 활동지역, 활동규율, 민병정황, 군사사상 동태 등이다. 두 번째는 반공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집결시켜 놓고 팔로군을 토비라고 무함하였다. 그리고 군중들더러 교통호를 파지 말며 민병조직에 가담하지 말고 팔로군에게 양곡을 주지 말라고 얼음장으로 놓기도 하였다. 특히 팔로군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고 팔로군의 물자를 발견하면 즉시 받치거나 보고하라고 위협하였다. 세 번째는 체포된 팔로군과 혁명군중을 직접 심문하고 우리의 군정인원과 군중을 체포, 살해하며 기타 정보활동을 한다. 그들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주로 다음과 같다. (1)특설부대 정보반 대원이 화장을 하고 마을에 들어가 직접 정보를 수집한다. (2) 한 곳에 갈 때마다 당지의 경찰과 특무기관을 연계하여 팔로군과 민병의 활동 등 정보를 수집한다. (3) 토벌 중 포로가 되었거나 부상을 입은 팔로군과 지하공작원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얼리는 수단으로 정보를 얻는다. (4) 투항하거나 변절한 팔로군을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5) 군중을 집결시켜 반공선전을 한 후 그 가운데 일부 청년들을 검거하여 체포해서는 위협하고 고문을 하는 등 수단으로 정보를 얻거나 그들을 이용하여 하부 정보망을 구축한다. (6) 강제적으로 매 촌마다 정기적으로 서면상 혹은 구두상으로 정보를 제공하게 한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팔로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특설부대는 전체 대오 혹은 련(중대)을 단위로 유수림자 주위의 약 60리 이내의 각 촌락에 대하여 잔혹하게 소탕을 하였다.
1944. 01. 00(음) 馬營子 일대에서 토벌작전. 1명을 살해하고 1명 체포
1944. 02. 15(음) 유수림자 서쪽에서 간도특설대 전원이 참여한 대대적인 토벌작전 실시. 西南溝 부락에서 2명의 팔로군 사살하고 팔로군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민간인 1명을 학살하고 7명 압송. 또한 李營子 앞산에서 팔로군과 교전, 2명의 팔로군 사망
1944. 02. 19(음) 보병 2連 金松의 인솔 하에 李營子・譚營子지역에서 팔로군에 대한 정탐 활동을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1944. 02. 20(음) 김송의 지휘 하에 孫營子 부근에서 매복작전을 수행하고 팔로군 1명 사살
1944. 02. 00(음) 김송의 지휘 하에 유수림자 이남의 15리 정에 위치하는 마을을 습격하고 민간인 1명 학살
1944. 02. 01(음) 李營子 서북지역 房框子溝에서 팔로군 습격하고 팔로군을 숨겨준 주민 폭행
1944. 02. 00(음) 유수림자 이북 30리의 한 마을 습격
1944. 02. 00(음) 柴田의 지휘 하에 유수림자 일대에서 2명의 팔로군 체포
1944. 03. 06(음) 팔로군을 가장한 정보반을 小西溝庄에 투입하여 민간인을 상대로 팔로군 정탐. 이후 김송의 지휘 하에 마을 주민을 이용하여 팔로군 추적. 이 과정에서 孫國棟 등 주민 학살
1944. 03. 00(음) 체포된 張風義와 張風陽의 심문 내용을 근거로 김송의 지휘 하에 鐵匠溝 甲長의 집을 수색한 뒤 갑장 학살
1944. 03. 00(음) 보병 2連 반장 김동호의 지휘 하에 육수림자 서쪽 30리 지역 토벌
1944. 03. 23(음) 제1連의 便衣隊 7~8명이 유수림자 王英子 지역에서 팔로군 정황을 정찰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1명 학살
1944. 03. 00(음) 유수림자 敖牛溝에서 팔로군에 대한 토벌활동 중 민간인 폭행
1944. 03. 00(음) 보병 2連 대원들, 牟營子 서남쪽 北溝門子村에서 팔로군 토벌 중 민간인 폭행
1944. 03. 28(음) 機迫連 대원들, 二道杖子에서 팔로군 토벌 중 민간인 학살
1944. 04. 00(음) 유수림자 서남쪽 30리에서 변복한 팔로군 2명 체포
1944. 04. 00(음) 柴田의 지휘 하에 平泉 이남 한 마을 습격, 팔로군 흔적 조사
1944. 05. 00(음) 秋葉隊가 謝家杖子 지역에서 주둔하면서 마을 약탈
1944. 05~06(음) 機迫連 대원들, 유수림자 서쪽 4,50리의 한 마을 약탈
1944. 06. 00(음) 牟營子 부근에서 주둔할 때 南台子 일대 주민에게 팔로군 행적을 추궁하면서 폭행
1944. 06. 00(음) 유수림자의 서남쪽 20의 한 마을에서 팔로군 1명 사살
1944. 06. 00(음) 유수림자 지역에서 신원불명의 민간인 잔혹하게 학살
1944. 06. 00(음) 孫營子의 牌長 李典堂을 팔로군으로 의심하여 총살
1944. 07. 00(음) 三道溝 일대에서 상인 4명을 팔로군으로 의심하여 체포, 이 중 1명 살해
1944. 00. 00 유수림자 20리 지역에서 길가던 행인을 팔로군으로 의심하여 살해
1944. 00. 00 보병 1連 대원들이 제6기 신병들을 인솔하고 유수림자 이남의 약 20리 지역의 마을 토벌. 민간인 학살
3-1) 하북성 석갑진 지구에서의 활동(1944. 07~1945. 01)
하북성 密云顯 石匣鎭과 平谷顯 일대에서 활동한 것을 말한다. 連을 단위로 하여 석갑진 일대 100리 이내의 大水峪, 田各庄, 史庄子와 평곡현의 鎭羅營 등의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수집된 정보를 근거로 팔로군 유격구을 비롯한 항일세력을 파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만군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紅槍隊 및 헌병과의 공동작전을 자주 수행하였다. 이 시기 공식적인 토벌작전은 총 34건이 되며 39명이 살해되고 62명이 체포되었다.
1944. 07. 15(음) 懷柔顯 일대에서 팔로군의 습격으로 피해를 당하자 北台上庄과 東流水庄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 감행. 민간인 폭행과 살해. 숨어있던 팔로군 2명 살해
1944. 07. 20(음) 석갑진 동남쪽 15리의 東田各庄에서 토벌 실시. 신원 불명의 민간인 1명과 마을 주민 1명 살해. 주민 21명 체포, 고문
1944. 07 27(음) 석갑진 남쪽 24리의 黃各庄 일대에서 토벌 실시. 인근 마을에서 양식 수탈. 민병 1명 살해, 주민 21명 체포
1944. 07. 00(음) 석갑진 동남쪽 10여 리의 東田各庄 일대에서 토벌작전 중 팔로군과 교전. 특설대 대원 1명 사망, 1명 부상. 팔로군 2명 사망, 3명 부상.
1944. 08. 01(음) 특설대 3개 連 공동으로 석갑진 동북쪽 東庄禾村에서 토벌작전 실시. 마을 주민 2명 학살, 4~5명 체포
1944. 08. 05(음) 석갑진 동남쪽 東田各庄에서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팔로군 행적 추궁. 주민에 대해 폭행과 고문 자행, 주민 1명 사망
1944. 08. 10(음) 석갑진 동쪽 松樹峪 일대에서 토벌작전. 주민들에게 폭행과 고문 자행
1944. 08. 00(음) 석갑진 서북쪽 50여 리의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노인 1명 살해
1944. 08. 00(음) 석갑진 동쪽 60,70여 리의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 살해
1944. 08. 15(음) 석갑진 서북쪽 30여 리의 半城子 일대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1명 체포
1944. 08. 17(음) 석갑진 서북쪽 30여 리의 團山子 일대 마을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1명 체포
1944. 08. 00(음) 석갑진 서북쪽 40여 리의 史庄子에서 토벌 실시. 마을 노인 1명 살해
1944. 08. 28(일) 석갑진 서북쪽 40여 리의 半城子 일대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 살해
1944. 08. 00(음) 석갑진 서남쪽 30여 리의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2명 체포
1944. 09. 01(음) 석갑진 남쪽 康各庄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3명 사살
1944. 09. 02(음) 석갑진 남쪽 鎭羅營 일대에서 팔로군 1명 사살
1944. 09. 00(음) 석갑진 서남쪽에서 민간인 2명 학살
1944. 09 17(음) 석갑진 남쪽 庄頭峪村에서 토벌 실시. 마을 간부 1명 학살
1944. 09. 20(음) 석갑진 서북쪽 陳家峪 일대에서 토벌 실시. 20여 채의 가옥 방화, 주민 3명 학살
1944. 09. 00(음) 보병 2連 석갑진 서북쪽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마을 주민 1명 고문 후 살해
1944. 09. 20(음) 석갑진 서북쪽 香山峪雙山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1명 체포
1944. 09 30(음) 석갑진 서북쪽 田庄에서 팔로군 1명 체포
1944. 09. 00(음) 석갑진 서북쪽 30여 리의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마을 주민 2명 학살
1944. 10. 00(음) 석갑진 남쪽 庄頭峪村에서 토벌 실시
1944. 10. 12(음) 보병 1連 석갑진 서북쪽 30여 리 일대에서 토벌 실시. 팔로군 2명 체포
1944. 10. 13(음) 보병 3개 連 합동으로 邵庄子 일대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 부상
1944. 10. 14~16(음) 田庄 일대의 팔로군 근거지 습격. 팔로군 식량 노획
1944. 10 20(음) 정보반 伊原의 인솔 하에 석갑진 북쪽 王家會・高嶺屯・放馬峪・下河・南香水峪 등 마을에서 팔로군 가족 유린
1944. 10. 00(음) 석갑진 남쪽 50,60리의 한 마을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 학살
3-2) 하북성 사집진 지구에서의 활동(1945. 01~1945. 08)
1945년 1월부터 일제가 투항하기까지는 주로 河北省 司集鎭(지금의 司各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4년 팔로군의 일부 병력이 山東省 방향에서 冀東地區로 북상하자, 關東軍과 北支那方面軍은 1945년 들어 이곳에 정예병력을 배치하기로 하고 만주국군 가운데 1개 사단의 冀東派遣軍 곧 鐵石部隊를 편성했다. 간도특설대도 여기에 포함되어 1945년 1월 열하성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河北省 冀東地區로 南下하여 司集庄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는 철석부대의 독립보병대대로서 일명 鐵人部隊라는 代號가 붙여졌다. 간도특설대는 사집진 일대 60리 이내의 高庄・任六庄・蘭它里・坋城・甛井庄・張仙庄・百各庄 등의 마을이 이들의 활동무대였다. 정보반이 제공한 정보를 근거로 각 마을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부녀자 강간 등 각종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시기 간도특설대의 공식적인 토벌작전은 36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103명이 살해되고 62명이 체포되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하자 간도특설대는 金燦奎(金白日)의 인솔 하에 금주를 거쳐 심양으로 도망간 후 해산하였다.
1945. 01. 15(음) 大賈庄, 吳庄, 四賈庄 마을을 포위하고 토벌 실시. 주민들을 한 곳에 집결시키고 민병 2명을 학살
1945. 01. 00(음) 사집진의 동남쪽 張庄에서 토벌을 실시.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고문
1945. 02. 00(음) 사집진의 서쪽 賈林子에서 토벌 실시.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고문
1945. 02. 00(음) 사집진 남쪽 四賈庄 일대에서 토벌 중 민간인 1명 학살
1945. 02. 00(음) 사집진 동남쪽 木溝府에서 토벌 활동 중 가옥 3채 방화
1945. 02. 08(음) 사진집 동남쪽 東庄에서 팔로군과 교전. 팔로군 2명 사살
1945. 02. 00(음) 사진집 일대에 炮樓를 수축하기 위해 四賈庄 마을 등의 가옥을 소각
1945. 03. 08(음) 사집진 북쪽 甸子村에서 팔로군과 교전. 팔로군 40여 명 희생. 任六庄에서 10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마을 주민들을 폭행, 고문
1945. 03. 10(음) 任六庄에서 팔로군 부상병 수색. 12명의 팔로군 체포, 주민 4~5명 살해, 마을 주민들을 고문
1945. 03. 23(음) 사집진 동남쪽 甛井庄 일대에서 토벌 활동 실시. 周各庄에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마을 주민들을 고문
1945. 03. 24(음) 甛井庄 일대에서 간도특설대 대원 1명이 팔로군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주민 12명 학살, 가옥 방화, 40여 명의 부녀자 및 노약자들 들에게 고문 자행. 張山庄에서 4명의 주민을 학살
1945. 03. 00(음) 사집진 서북쪽 盟各庄 일대 토벌. 팔로군 1명 체포
1945. 03. 00(음) 東夏庄 일대에서 토벌 중 팔로군 1명 사살
1945. 04. 04(음) 사집진 남쪽 許各庄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을 학살하고 부녀자 강간과 재물 약탈
1945. 04. 14(음) 사집진 북쪽 庫司庄 일대에서 토벌 활동. 주민 1명 학살. 東一六庄에서 토벌 실시. 주민 1명 학살, 6명 체포. 學旺庄 일대에서 팔로군 1명 사살
1945. 04(음) 一六庄 일대에서 토벌 활동 중 주민 1명을 학살하고 주민들 고문
1945. 04. 15(음) 사집진 북쪽 庫司庄에서 토벌 활동 중 15~16여 명의 주민들을 고문
1945. 04. 16(음) 木溝府에서 토벌 활동 중 마을 주민 1명 학살. 蘭它里村에서 마을을 포위하고 팔로군 2명 사살, 2명 체포.
1945. 04. 19(음) 사집진 서북쪽 油盤庄에서 토벌 활동 중 마을 주민 1명 학살. 사집진 남쪽 四賈庄에서 토벌 활동 중 마을 주민들 고문, 민병대장 등 2명 학살
1945. 04. 21(음) 사집진 서남쪽 西一六庄 일대 토벌. 주민 1명 학살
1945. 04. 23(음) 사집진 남쪽 榮各庄 일대를 토벌 중 팔로군과 교전, 팔로군 1명 사망. 인근 마을 64채 가옥 소각. 영각장 동쪽의 趙各庄 마을에서 팔로군 수색 중 주민 1명 학살
1945. 04. 27(음) 사집진 동북쪽의 東新庄 일대를 토벌 중 부녀자 2명 학살
1945. 04. 28(음) 東一六庄 일대에서 팔로군 1명 체포 후 살해
1945. 05. 02(음) 東小營村에서 토벌 활동 중 인근 마을 주민 1명 학살
1945. 06. 19(음) 사집진의 북쪽을 토벌하고 돌아오는 중에 李庄 마을에서 한 노인 학살
1945. 04. 07(음) 사집진 북쪽 左庄 일대를 토벌 하던 중 인근 마을의 촌간부 2명과 팔로군 통신원 1명 체포한 후 통신원을 총살
간도특설대는 항일세력 탄압만으로도 마당히 역사의 준엄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각종 민간인 고문과 학살, 부녀자 강간, 방화와 약탈 등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집단이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사례 1> 1939년 5월, 경박호 남호두일대에 이르러 항일연군에 대한 일제의 토벌을 위해 열흘동안이나 이 지역에서 수사활동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특설부대 일부는 일본수비대와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 북부지역에서 항일부대를 수사하던 중 야채를 채집하던 여성을 총칼로 찌른후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죽였다.
<사례 2> 1939년 7월, 특설부대는 “천보산금광”이 항일연군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수비대와 연합하여 이틀 동안 항일연군을 추격하였는데 도중에 한 항일연군 전사의 시체를 발견하고 잔인무도한 특설부대는 그의 간을 오려냈다.
<사례 3> 1944년 4월, 특설부대는 40여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유수림자에서 약 50리 떨어 진 곳에서 팔로군공작인원을 습격하여 무선전대 공작인원 4명을 체포하고 무선전 하나를 약탈하고 팔로군 전사 한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특설부대는 또 이 마을의 牌長을 불러놓고 군칼로 찔러 죽였다. 특히 梅原이란 日本軍医는 이 패장의 머리를 베여 가져다가 가마에 넣어 끌인후 머리통을 자기의 사무실의 책상에 놓았다. 또 그해 5월, 특설부대는 유수림자에서 한 40여세 되는 사람을 잡아서 사격장에 끌고 가 산 사람을 목표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밤중에 謝家杖子부근의 부락에서 부녀들만 보면 강간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하였다.
<사례 4> 1944년 10월, 특설부대는 정보반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라 석갑진에서 약 20리 떨어 진 부락을 덮쳤다. 이 마을에 팔로군식량과 복장이 매장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특설부대는 이 마을에서 식량 40여 포대와 신발 40여 켤레, 그리고 소 3마리를 잡았다. 도중에 또 팔로군 한명을 칼로 살해하였다. 동년 음력 8월1일, 특설부대는 다시 석갑진에서 동쪽으로 약 60리 떨어 진 東庄禾村에서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감행하였다. 날이 밝자 이 마을의 사람들은 특설부대가 온 것을 발견하고 도망을 쳤는데 특설부대가 마구 총을 쏘아 민간인 한명이 총에 맞아 죽고 한 임신 부녀는 총에 다리가 맞고 수수밭까지 겨우 기어갔는데도 토벌대는 잔인무도하게 그녀의 배를 찔러 태아까지 흘러나오게 하였다.
<사례 5> 1944년 음력 7월 27일, 그들은 당지의 경찰들과 배합하여 黄各庄에 가서 식량을 빼앗았는데 21명 군중을 체포하고 농회주임을 살해하였다. 9월, 특설부대는 석갑진에서 약 30리 되는 곳에서 몽고기병과 함께 팔로군을 토벌하였다. 이 교전에서 특설부대는 참패하였다. 화가 치민 특설부대는 주둔지로 돌아오던 중 20여 호나 되는 무고한 백성들의 집을 태워버리고 두 명의 백성을 칼로 찔러 죽였으며 마을의 돼지 두 마리를 잡아 갔다.
<사례 6> 1945년 3월, 唐山부근인 石守鎮에 주둔한 특설부대는 팔로군을 토벌하던 도중 팔로군 환자 6명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에게 매일 고문을 들이 대다가 나중에는 여의치 않게 되자 그들 모두 살해하였다. 같은 해 5월, 藤井대장의 지휘 하에 특설부대 각 련에서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사를 하였는데 2명의 武工인원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팔로군과 교전하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 2명의 무공인원의 머리를 베여 제사를 지내였다.
1943년 만주국은 간도특설대 175명의 대원에게 만주국 국무원명의로 된 武功章, 景勛章, 柱國章 등을 주었는데 1945년 3월 21일, 만주국 국무원에서 수여한 각종 훈장의 통계를 보면 그 가운데 조선인은 167명, 일본인은 8명이었다. 간도특설대는 부대가에서 나오듯이 시종일관 일본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했으며, 그 잔악한 행위는 지금도 연변 현지 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일제는 간도특설대 운용을 통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실시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간도특설부대가-
한편 일제 당국은 실전 경험을 쌓은 간도특설부대의 하사관들 가운데 우수 분자를 육군훈련학교에 입교시켜 장교로 복무케 했다.(<표 3> 참조) 충성과 능력을 보인 이들이야말로 가장 “충성스런 천황의 개”들이었기 때문이다.
4. 왜 백선엽을 기념하는가 : 범죄의 재구성
1948년 9월 출범한 반민특위는 해체될 때까지 약 1년간 682건을 조사하여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며,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28건에 지나지 않았다. 기소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실제 처벌받은 자는 거의 없었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제1공화국은 오히려 친일파를 비호했고 친일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득권을 장악했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안타까운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친일파들은 친미와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의 파쇼적 사고방식을 새로운 생존의 무기로 삼고 지금껏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다.
먼저 친일파들 중 상당수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친일문제가 흐지부지되자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덮으려 했다. 일부는 과거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만 내세우고 친일파로 변절한 이후의 행적을 감춤으로써 독립투사로 행세해 오기도 했다. 지금도 국립묘지에는 일제 밀정이나 헌병보조원 등 삼십 여명 이상의 친일파가 독립투사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버젓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은 분단과 좌우 대립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나 정통성을 반공에서 찾았다. 대한민국이 오랜 항일 투쟁과 반파시즘 투쟁의 역사 위에서 건설되었다고 할 경우 자신들의 친일 행적은 치명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한민국은 피로 물든 좌우투쟁 위에서 건설된 반공국가라는 점을 강조했고, 이 전제 위에서 이들의 ‘반공주의’는 곧 애국으로 치환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일제 시기 일제의 走狗로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것마저도 반공애국투쟁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강력한 반공국가가 존재하는 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 반공애국투사로서 그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이들은 반공을 대한민국 정체성으로 내세워 자신의 친일범죄를 반공으로 덮으려고 한다.
한편 친일파 숙청이 실패한 덕으로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온 자신의 기득권을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계, 재계, 관료집단, 문화, 언론, 학술, 교육계 등에 실력자·원로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이나 방어조직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금기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나 양심적 인물들은 대한민국에서 배제되었고, 한 사회의 존립기반이 될 최소한의 가치관과 역사의식마저 무너졌다. 정의는 칼을 쥔 자의 것이며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의 편이라는 자조적인 역사인식마저 확산되었다. 더구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상당수는 이승만의 정적 또는 ‘용공’으로 몰려 수난을 당했고, 그 후손들 대부분은 극도의 어려운 생활은 해야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향신문사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후손의 학력과 경제 상태를 조사한 결과 설문 대상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60%가 고졸 이하의 학력에다 직업도 없이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이어진 친일옹호 세력들은 각종 기념사업과 숭조사업을 전개하고, 친일파를 21세기 민족의 지도자상으로 치장해 후세들을 세뇌시키려 하고 있다. 그 핵심이 최근의 박정희기념관, 백선엽과 김백일 동상 건립, 백선엽 다큐멘터리 제작 등이다.
심대한 친일행위자이자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을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난 만주국 장교들은 전혀 과거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김석범의 경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들 만주군인 출신은 일제 압제 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 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혈맹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타향인 만주에서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밑에서 철석같은 훈련을 거듭하여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건국 40유여년(有餘年)이 된 오늘날 50여명의 장성급과 다수의 영관급 고급장교가 배출되어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에 공헌하였다.”
김석범을 비롯한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해방 전 자신들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서 복무한 행위를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것으로 포장했다. 진실로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오만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1944년부터 복무했던 ‘영예로운’ 鐵石部隊의 이름이 떠올랐는지 ‘철석’이라는 낱말을 연거푸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자랑스럽게 만주국군 출신들이 대한민국에서 50여명에 달하는 장성급 군인이 되었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에 공헌”했다고 내세운다.
그의 말처럼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군대의 중추가 되었다.(<표 4> 참조) 군대뿐만 아니라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정치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휩쓸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권력과 군부를 장악하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독재와 반민주로 시름해야 했다.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서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백선엽이 조선인특설부대원으로 한국인이 포함된 항일무장부대를 탄압했으며, 이것이 일제의 ‘이이제이’식 식민통치에 빠져든 것이었음을 인정했지만,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인 언급에 그쳐 역사적 책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표 5> 대한민국 역대육군참모총장(제1공화국-제3공화국 시기)
더구나 그는 올해 6월 6일 전ㆍ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한 보수 진영 인사들로 구성된 `선진통일연합'이 창립대회를 열자 여기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적화통일을 막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20만 특공대가 우리를 넘보고 있는데 남남갈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선진통일연합은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이 주도고 보수층 인사 1만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세력 결집의 매개체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보수세력이 반공 등을 내세워 다시 한 번 권력을 창출하려는 데 그 상징으로 백선엽을 부각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는 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대한민국기념관은 사실상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독재의 오욕의 라인을 대한민국의 정통성 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치장하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1945년 8·15광복절 대신 1948년 8ㆍ15 ‘건국절’(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더욱 기념해야 한다고 떠든다. 즉 일제로부터 독립한 날을 얘기하면 일제시기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방 후 3년간의 좌우투쟁을 거쳐 세워진 대한민국 건국절이 진정한 기념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 일제시기 친일행위를 해방 후 반공으로 덮어버리고자 한다. 이 대 반공투쟁은 건국투쟁으로 바뀌고 건국투쟁은 애국투쟁 곧 건국공로자로 둔갑하는 논리가 건국절에 숨어있다. 이들 말대로라면 해방 공간 우익폭력배도 건국공로자, 애국투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를 마구 휘젓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라고 부르고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이인수라는 양자가 느닷없이 4`19 희생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사죄’하는 기만극이 나오고, KBS는 815특집으로 이승만을 5부작으로 방영할 계획이다. 반공을 국시로 다시 만들어 친일논란을 없애기 위해 백선엽을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에 공영방송까지 나선 것이다. 박정희기념관도 하반기에 개관한다고 한다.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하되 그 내용을 안보의식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으로 고치겠다고 한다. 안보는 사실 반공이며 자랑스러운 역사란 이승만-박정희 되살리기이다. 어린 세대에게 학교 교육을 통해 낡은 사고와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시켜 자신의 미래의 세력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내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사의 죄인을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범죄의 재구성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다. 권력과 기득권 유지에 눈이 멀어 역사마저 제멋대로 고치고 역사의 죄인을 역사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이 범죄의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다. 범죄는 다시 단죄를 받을 것이다.
* 지난 2011년 6월 20일에 열린 <공영방송 KBS 이승만 백선엽 찬양방송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에서 발제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