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
-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고, 편안하고 정숙해야 원대함을 이룬다
[한자풀이] 澹 맑은 담 泊 깨끗할 박 明 밝을 명 志 뜻 지 寧 편알할 영 靜 고요할 정 致 이를 치 遠 멀 원
첨(瞻)은 중국 촉한(蜀漢)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이다. 제갈량이 누군가.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 주인공들인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를 도운
책사 제갈공명이다. 그의 아들 첨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능도 학습도 뛰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잘 난 아버지 덕분에 가슴 깊이 채움은 가득 있으되 스스로 비움을 몰라
불쑥불쑥 교만함이 대인관계에서 장애로 드러나곤 했다.
아이 때 똑똑하고 조숙한 아들은 성장할수록 목이 말처럼 뻣뻣해진다. 교만해진다.
교(驕)라는 한자의 부수 말(馬)이 담긴 의미가 바로 그런 거다. <노자> 9장에는 이런 명언이 등장한다.
‘부귀이교 자유기구(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지나면 길일을 골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瞻(첨)은 ‘보다,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세상을 잘 보고, 잘 관찰하라는 의미에서 제갈량이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제갈첨의 자(字)가 사원(思遠)이다.
자는 성년식을 치룬 남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통은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이나 명망 높은 귀한 손님의 몫이었다.
사원(思遠)은 ‘멀리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남들의 눈에도 첨은 한마디로 교만하게 보였던 거다.
8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계자서(誡子書)’
234년때 일이다. 제갈량이 무공으로 출전한다. 그 때, 형 제갈근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스러운 아들을
걱정하는 내용이 보인다.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들을 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가지는
마음 자락을 음미하고 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글로 보인다.
제갈첨은 지금 벌써 여덟 살이 되었고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가 조숙하여 중요한 인재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진수, <촉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난 다음에 따로 제갈량은 여덟 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그 유명한 제갈량의 ‘계자서(誡子書)’는 이 때 쓰인 것이다. 한자로 총 86자다.
그 중에 특히 여덟 자인 ‘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은 압권으로 수많은 선비들과
세인들에게 모두 경종을 울렸다. 한국의 애국지사와 지식인들도 무척 좋아했다.
대표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등이 있다.
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의 참뜻
유비를 주군으로 모신 후 2인자로서 제갈량은 평생 조심스럽게 삼가는 성격의 소유자로 살았다.
재미 중국 역사학자 리둥팡(黎東方)이 프랑스 파리에서 대만의 정치가이자 대학자인
원세빈(袁世斌)을 만나 가르침을 구하는 적이 있었다. 제갈량이 아들 첨에게 내린 계자서 한자
총 86자에서 가장 백미로 볼 수 있는 ‘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의 참뜻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어 소개한다.
몇십 년 전에 저는 파리에서 원세빈 선생의 가르침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리둥팡: “어떤 사람이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원세빈: “머릿속이 맑고 깨끗해야 큰일을 할 수 있다.”
또 물었습니다.
리둥팡: “어떤 머릿속이라야 맑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요?”
원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원세빈: “맑고 깨끗하다는 것은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해하든지 중심과 원칙이 있어서,
일의 대소와 선후를 나눌 수 있는 것이지.”
제갈량이 책을 읽으며 그 ‘대강’에 중점을 둔 것은 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이 일어났을 때 대소와 선후를 가리며 그 처리 방법을 연구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동문 친구 세 사람은 모두 그와 달리 책 속의 자구를 완전히 기억하고 암송하기를 즐겼습니다.
(리둥팡 <삼국지교양강의>, 돌베개펴냄)
대화 중에 ‘머릿속이 맑고 깨끗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은‘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과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제갈량이 평생 심득한 팔자(八字)일 것이다.
팔자를 알면 아들 첨의 운명이 자신처럼 나라를 구하는 광명으로 바뀌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었다. 전장에서 병을 얻어 죽은 제갈량에게 달갑지 않을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263년 봄이었다. 여덟 살 어린 소년 첨은 장성해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었다. 첨은 열일곱 살 때 장가를 들었다.
아버지를 잘 둔 덕분에 공주(유비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벼슬에도 올랐다.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에는 우림중랑장이 되었으며, 곧 이어서 여러 차례나 승진을 하여 야성교위, 시중, 상서복야가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제갈량처럼 군사장군이 되었다. 학문과 재능, 총명함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촉한의 수많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마침내는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으로부터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작위를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첨의 정치 영향력이 최대한 커진 거다.
그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위나라 장군 등애가 쳐들어왔다. 황제의 명을 받고,
제갈첨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선으로 내달렸다. 병사들과 함께 부현에 주둔했는데
촉한의 선봉대가 그만 무너져 패했다.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그 때 등애로부터 첨에게 편지가 당도했다.
내용인즉,
“만일 항복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으로 삼겠다.”(진수, <촉서>)
편지를 보자마자 첨은 흥분했다. 매우 화가 났다. 보검을 뽑아 편지를 가지고 온 등애의 사자의 목을 베었다.
이윽고 전투가 벌어졌다. 일설에 따르면 부하 장군이 첨에게 신속하게 나아가 험요한 곳을 점거하여
적들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첨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때 제갈첨은 싸우다 장렬하게 죽고 만다.
첨이 흥분하지 않고 침착했더라면 싸움의 양상은 패하더라도 다시 반격의 기회를 찾는 기회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사를 직접 치르기에는 첨의 머릿속이 맑고 깨끗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덟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8자 ‘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의 교훈을 평소 새기고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긴 아버지 제갈량이 죽은 지 30년이나 지난 때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점
제갈량이 처음 사회에 나온 때는 스물여섯으로 유비와 유명한 만남인 ‘삼고초려(三顧草廬)’가 계기가 됐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헤매다가 맨몸으로 융중에 정착한다.
융중에서 낮에는 직접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독서와 천하를 연구한 끝에 천하삼분계책인 ‘융중대책’을 탄생시켰다.
천하삼분이란 조조-유비-손권 3인이 정립해 있는 지배 지형을 말함이다.
이후로 군주 유비는 제갈량과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 제갈량을 제갈첨은 여덟 살 때 잃었다. 하지만 아버지 명성 덕분에 출세하고 부마까지 되었으나
혼자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재능과 총명함은 뛰어났으나 인격 수양은 별로였다.
허명(虛名)을 얻은 것은 아버지 제갈량의 후광 때문이었기에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고질적인
교만함을 고치지 못했다. 제갈량이 사방에 귀(傾聽)를 열어놓고 사람을 상대했다면
제갈첨은 사방에 입을 열어놓았을 뿐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첨은 아버지 제갈량이 내린 팔자(八字)대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거울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까맣게 잊고 날마다 달마다 호의호식으로
전혀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살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군자(君子)였으나 첨은 소인(小人)에 지나지 않았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라고
고대중국의 사상가 묵자가 말했다. 물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자기애(自己愛)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거기에서 장·단점을 취하고 버릴 수 있고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거울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첨은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운하게 전사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澹泊明志寧靜致遠(담박명지영정치원)’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원대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쯤은 동지(同志)를 구해야 한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제갈량이 유비에게 그런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교만함은 혼자 걷는 길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걷는 것이 좋다.
힘이 덜 든다.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
1.와룡 제갈량
판소리 성두본(星斗本) '적벽가(赤壁歌)'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선생이 계옵시냐."
동자가 대답하되,
"이번에는 계옵시나 초당(草堂)에서 낮졸음 아직 아니 깨시니다."
현덕이 눈을 들어 초당을 바로 보니 벽상(壁上)에 붙인 글씨
담박이명지(澹泊以明志)하고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이라 단정히 붙였구나.
유비 현덕이 선생을 찾아가서 이번에는 계시냐고 물으니까
동자가 이번에는 계시지만 풀로 지붕을 엮은 따로 떨어진 작은 별채(초당)에서 낮잠을 자고 계신다고 한다.
유비가 그 초당을 보니 그 벽에 쓰인 글이 눈에 들어오는데
담박이명지(澹泊以明志)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이라고 쓰여있더라는 것이다.
이 짧은 구절을 삼국지의 어느 부분에서 따온 것인지 삼국지를 읽어보았거나
아니면 삼국지에 대한 약간의 정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삼고초려(三顧草廬, 석 삼, 돌아볼 고, 풀 초, 오두막 려)의 장면인 것이다.
오두막을 세 번 찾아갔다라는, 즉 제갈량(제갈공명)을 모사로 모시기 위해서
유비 일행이 세 번이나 찾아가서는 간청하여 그를 맞이할 수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하는 데 있어서 도원의 결의를 맺고서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는 데서
이들은 그 지략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와룡(臥龍, 누워있는 용) 제갈량을 찾아가서 모셔오는 일을 한다.
먼 거리를 그것도 스무 살이나 어린 제갈량을 얻기 위해서 세 번이나 찾아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유비는 제갈량을 얻고서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하여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만큼 제갈량에 대한 신뢰가 깊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같은 한 명의 귀한 사람을 얻는데 있어서 이러한 노력과 수고와 애씀과
온 마음을 쏟음이 있어야하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참, 삼국지에서 출사표를 내던지는 장면을 요즘 유행하는 만화로 대치시켜본다면
고무인간 루피가 원피스를 찾아 '위대한 항로'에 들어서서 항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함께 여행을 해나갈 사람들을 모집해가는 것이 되지 않을까?
2.봉추 방통
판소리 '적벽가'는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에서 비롯된 말인데
이 적벽 대전에서 승리한 뒤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이는 봉추 방통(방사원)이다.
방통은 제갈량보다 두 살 위의 인물이다.
와룡(臥龍), 봉추(鳳雛) 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유비는 우여곡절 끝에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 둘 다를 얻은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이전에 방통은 오나라의 손권에게 먼저 찾아가서 그 밑에 들어갈 뻔 하였다.
근데 노숙의 추천을 받고 온 방통이었지만 손권이 보기에는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신뢰하는 모사인 주유를 대수롭지 않은 듯 대하자 손권은 방통을 보내버렸고
이에 방통도 아쉬울 것 없이 떠나버렸다.
손권 밑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조조 밑에 들어갈까 하고 가려던 차에
노숙이 그러느니 유비가 낫다고 하여 유비를 찾아갔다.
유비는 방통을 제대로 알아봤을까?
방통은 노숙이 써준 추천서와 유비가 써준 추천의 편지를 내놓지 않았다.
유비는 작은 고을로 벼슬을 줘서 다스리게 했는데
방통이 그곳에 가서 일은 않고 술만 마시고 지낸다는 얘기가 중앙으로 들어왔다.
장비를 보내서 방통을 잡아들이려 했지만 방통은 이깟 일 정도야 하면서
100여일 밀려 있던 일을 반나절만에 해치워버리는 실력을 발휘해 보여준다.
그제서야 방통은 자신을 추천해준 노숙과 제갈량의 편지를 내놓게 되고
유비는 웃으면서 그를 부군사로 임명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외모로서 그 사람의 재능을 판단하는 실수를 사람들은 가끔 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자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 외적으로 보이는 인상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더불어 우리의 능력은 그 보이는 인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정말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3.와룡봉추(臥龍鳳雛)
'와룡봉추'라는 말이 있는데 누운 용과 봉황의 새끼라는 뜻으로
비와 바람을 만나서 하늘로 올라갈 용과 새끼에서 자라서 봉황이 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호걸을 비유적으로 일겉는 말이다.
이런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을 유비는 얻었음에도 삼국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와룡 제갈량은 오십사 세의 나이를 살았지만 봉추 방통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활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한들 자신의 죽음을 막을 재주는 인간에게는 없다.
방통이 제갈량의 나이만큼만 살 수 있었다면 삼국의 지세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생명의 거두어가심은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는 일임을...
그리고 이 모든 국가의 흥망 성쇠 또한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닌
그분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봉추가 자라서 봉황이 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바가 없지 않은가?
4.'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앞에서 보았듯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을 상당히 변용하여 새롭게 만들어낸
판소리 성두본(星斗本) '적벽가(赤壁歌)'에도 이 한자는 등장한다.
욕심이 없이 깨끗해야 즉 마음을 비워야 세상의 뜻을 밝게 깨칠 수 있고,
평안하고 고요한 즉 심성이 안정돼야 멀리 내다보고 거기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이 탐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온갖 부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가난의 고통과
자신의 이기적인 만족에서 타인의 아픔을 생각지 않음에서 연유하는 환경오염과 같은 것들은
돌아보면 인간의 탐심과 욕심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지 않던가?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이다.
이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내적으로 일어나는 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불법적으로 가지려는 탐심이다.
이와 같은 욕심,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은 죄의 뿌리와 근원을 이룬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듯이
우리의 죄 또한 그 마음의 어떠함에서 드러나 표출되어진다.
그러하기에 또 다른 면에서 우리의 마음은 죄의 뿌리이자 근원이 되어지기도 한다.
그곳에 욕심과 탐심이 가득 들어차 있다면 말이다.
탐심은 어디서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우상숭배라고 하니까 어떤 목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는 그러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우상숭배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그 이외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고
그것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인간의 행위 전체를 일컫는 것이다.
그 우상은 돈에 대한 물욕일 수도 있고 섹스에 의한 쾌락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신분, 지위, 명예를 통해 가지고 싶은 권력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으로 그 마음이 채워져 있을 때 인간은 탐심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숭배를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욕심, 탐심이 없이 마음을 깨끗이 함에 자신의 마음을 노력을 통해서,
수양을 통해서, 철학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답을 잘 모르겠다면 그렇게 해보면 가능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해보는 시도를 했고 그에 따른 결론들을 우리는 지켜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진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의 노력으로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탐심은 자신이 버리고 버려서 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함을 통한 그 만족에서 탐심이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말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통치하고 다스리시는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자녀삼으심이로 인해
우리가 그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존재됨으로의 변화를 이루심 속에서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족함 속에서 그 부요함을 누리며 이 세상의 어떠한 소유에서 누리는 만족보다도
내가 창조자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자 됨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할 때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평안이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다.
그러한 평안이 주어진 자가 멀리 내다볼 수 있고 또한 그 멀리에 이를 수 있다.
단지 이 생의 삶의 끝에까지만 시선이 머무르는 자가 아니라
이 생의 삶을 넘어선 영원에 이르는 시선을 두게 되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맛보기에 내게 주어진 바 된 물질에 있어서 또한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며 땅에 보화를 쌓아두는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
이 말의 첫 단추를 우리는 바르게 잡아야지만 그 끝도 바르게 잠그게 될 것이다.
5.담박하다.
澹泊 담박
澹 맑을 담, 넉넉할 섬 泊 머무를 박/배 댈 박, 잔 물결 백
淡泊 담박
淡 맑을 담, 질펀히 흐를 염
=淡白 담백
'담박하다'는 '담백하다'와 같은 말이다.
담박하다라는 말은 요즘 잘 들어보기 힘든 말이 되는 것 같고
담백하다라는 말을 잘 듣게 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둘은 같은 표현이자 뜻도 같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1.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2.아무 맛이 없고 싱겁다
3.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4.빛깔이 진하지 않고 산뜻하다
요사이 담백하다라는 표현은 '맛'과 어울려서 많이 쓰이는 말이 되었고
사람에 대해서도 담백하다라는 표현을 가끔 쓰기도 하는 듯 한데
그냥 사람에 대해서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라는 용도로 사용할 때는
'담박하다'라는 말을 살려서 쓰면 어떨까 싶다.
'이 미역국 맛이 참 담백한데!'라고 사용하듯
'저 사람 참 담박한 사람이야!' 이렇게 말이다.
혼자 생각해본 시덥잖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