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일자 : 2011년 3월 23일
촬영장소 : 김해 '건설공고'
사진사 : 촌장셈(양촌재/김진수)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 퇴계 이황의
"매화시첩"중에서-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 퇴계 이황이 두향에게 보낸 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사랑했답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답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고, 두향이는 18살 때였다고 합니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선생은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고 홀로 부임하였으니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었답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그러나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 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고 슬픔이었답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드디어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어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운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고는 시 한 수를 썼답니다.
魚夢龍 月梅圖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 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이 보듯 애지중지했습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 하였답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 身 應 是 明 月 . 幾 生 修 到 梅 花).퇴계 선생의 시 한 편입니다.
선생이 두향을 단양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 말년을 안동 도산서원에서 지낼 때
어느 날 두향이 인편으로 난초를 보냈답니다.
단양에서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본 선생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습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차마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로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정화수가 핏빛으로 변함을 보고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까지 4일간을 걸어서 찾아갔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습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답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답니다
지금도 퇴계선생 종가에서는 매년 두향이의 묘를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답니다.
선생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인정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애닳은 사랑을 잊지는 않는 것이 반가의 예인
모양입니다.
前身應是明月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幾生修到梅花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壬子 正月 二日 立春>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莫向瑤琴嘆絶絃(막?요금탄절현)
<임자년 정월 2일 입춘>
누런 책 중간에서 성현을 대하고
환한 한 서실에서 초연히 앉아있네
매화 핀 창에서 또 봄소식을 보니
요금을 향해 현이 끊어진 것을 탄식하지 마오.
"눈이 옵니다"
이른 아침, 그대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바라본 하늘은 한껏 키를 낮추어 금세라도 눈을 뿌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의 짧은 전언에 내 마음엔 어느새 눈이 내리고,
내 안으로 번지는 그대의 향기에 어디선가 꽃소식이 날아들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에
자꾸만 사방을 두리번 거립니다.
문밖은 쓰라린 겨울인데 말 한 마디에 꽃을 떠올릴 수
있다니!
저 조선 중기의 '신들린 붓잡이'로
이름을 날렸던 김명국의 탐매도 속의 선비처럼 마음의 길을 따라 나서면 함초롬히 설중매 한 떨기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꽃들이 다투듯 피는
봄날을 마다하고 찬바람 매운 눈 속에 피는 매화를 보면 그 고운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으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게 됩니다.
기왕에 매화 이야기를 꺼냈으니 매화에 얽힌 퇴계 선생의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요?
평생동안 매화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퇴계는 심령의 혜안으로 매화의 특성을 투시하고, 담아한 필촉으로 매화의 신령스런 자태를 그려내어, 매화라는 단일소재로
여든 다섯 제목
(85題)에 118편의 시문을 담은 퇴계매화시첩(退溪梅花詩帖)을 남겼을만큼 매화에 특별한 애착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단양군수로 있을때의 일입니다. 여느 날처럼 하루의 공무를 마치고 처소에 들어서던 퇴계는 낯선 향내에 잠시 숨을 멈추었습니다.
어디서 나는 향기인가. 방안
을 둘러보니 창 가에 낯선
매화 화분이 놓여 있고 화분 속엔 이제 마악 꽃을 피운 옥골빙혼의 매화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퇴계는 깊이 숨을 들이켜 매화의
청향을
흠향하였습니다.
잠시 만개한 매화에 다가가 꽃향기를 흠향하던 퇴계는 사람을 불러 매화분을
가져다 놓은 이에게 돌려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기별을
받은 두향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퇴계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나으리,어찌 분매를 도로 가져가라
하시옵니까?"
"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이런
뇌물은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거라."
"나으리, 예로부터 매화는 속기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 격조가 있습니다. 비록 뼈대는 말랐으나 정신이 맑고 운치가
있으며 북풍
한설에도 곧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부디 이 매화와 더불어 심신의 안정을 유지하며 저희 고을을 잘 다스려 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고을을 다스리는 내가 백성으로 부터 까닭도 없이 뇌물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네 마음만 받을테니 매분은 가져 가거라."
두향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습니다.
" 이 매화는 제 어미가 생전에 키우던 것입니다. 어미와 사별한 후 어미를
대하듯 정성으로 제가 키워오다가 나으리께서 매화를 사랑하신단 소문을 듣고 이제야
주인을 찾은 듯 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데 어찌 뇌물이라 하십니까? 부디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내가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매화시 한 수를 또박또박 외웠습니다. 그 시는 퇴계가 단양군수로 내려오기 6년 전에 설중매를 보고
지었던 시였습니다.
"나으리가 이 곳으로
내려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시를 구해 읽으며 나으리가 매화를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리 매화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면
누가 제 어미가 남긴 분매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퇴계는 더 이상 물리칠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단양기생 두향과 퇴계의 러브스토리는 매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분매를 인연으로 각별한 사이가 된 두 사람은 풍광 좋은 단양의 산수를 거닐며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인생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습니다. 매향과 더불어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봄과 여름, 가을을 보내는 동안 새록새록
깊어갓지만
두 사람의 달콤한 로맨스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해 10월에 퇴계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가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는 그를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고 퇴계와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퇴계가 떠나가자 두향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퇴계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여겨 아예 기적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아 기적에서 면천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오매불망 퇴계를 잊지 못한 두향은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퇴계의 처지를 생각하면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인편을 보내
문안을 여쭙곤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570년 어느 겨울날, 퇴계는 방안의 매분을 가리키며 "매화에게 물 잘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진하였습니다. 두향의 올곧은 사랑을 생각하면 "오동은 천 년을
살아도 제 곡조를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제 향기를 팔지
않는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한 조선 중기 문장가였던 신흠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우리가 쓰는 지폐 천 원짜리의 앞면에는 퇴계의 초상과 함께 매화 꽃 20여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매화꽃을 손에 쥐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한 사람이 400여 년 전 퇴계에게 분매 한 그루를 선사한 관기(官妓)
두향(杜香)이였다 하면 견강부회일까요? 이래저래 청아한 매향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