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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48 14.04.27 2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전]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 KBS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한국사전>의 글을 옮겨 본 것이다.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칠백여년 역사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역사의 패자가 있으면 승자가 있는 법. 그해 8월 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입성한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김춘추의 오랜 여망과 복수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며 드디어 삼국시대를 마감한 신라의 삼국통일. 이 중심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있었다.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당나라를 끌어드려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은 우리역사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실제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드린 외세의존의 역사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왜 그토록 외교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한국사전 오늘은 우리 역사상 가장 활발하고 가장 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던 김춘추 외교의 실상을 만나보겠다. (진행자의 말)


해마다 추석 이틀 전 경주의 태종 무열왕릉에서는 추향대제가 열린다. 지난 9월 23일 올해도 후손들은 김춘추의 위업을 기리는 제향을 올렸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김춘추에 대한 첫 기록은 대야성이라는 지명과 함께 나온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도독부를 설치하고 이곳을 관할했다. 천해의 자연 지형을 이용해 축조한 대야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합천 박물관 조원명 학예연구사의 말을 들어보면,


이 대야성이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약에 신라가 이 합천을 함락 당하게 되면 고령, 대구, 경산 앞까지 바로 뚫려버릴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형지세로 봐서 합천은 아주 작은 병세로도 충분히 방어할 만한 그런 전략적 요충지였다.


▶ 김춘추의 첫 번째 위기 : 대야성 패전 - 딸과 사위의 죽음 … 참혹한 대야성 전투의 기억


대야성은 백제에 대항하여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최고 요충지였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윤충 장군을 보내 이 대야성을 공격했다. 당시 대야성 전투를 기록한 비석이 지금도 합천에 남아 있다. 백제의 침공에 맞서 싸웠던 신라장수 죽죽의 비석이다.


‘신라충신죽죽지비’라고 제목이 적혀 있다.

“‘이 비문 안에 죽죽이 대야성 전투에서 어떻게 싸웠다’라는 내용이 있습니까?” (이상호 기자의 질문)

“‘꺾길 순 있어서 굽힐 수는 없다’ 이것이 자기의 아버지가 ‘죽죽’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어준 이유다. 내가 어찌 항복하겠느냐?”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끝까지 항전했다고 합니다. (조원명 학예사의 말)


백제에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한 죽죽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 그런데 품석이라는 인물은 백제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뚜렷하다. 품석은 당시 대야성의 도독 즉 성주였다.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부인과 함께 백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백제군은 품석과 부인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보냈다(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부여에 보냈다 - 삼국사기 백제보기 의자왕 2년 즉 642년을 말함). 품석은 이처럼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이는 품석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대야성 도둑 품석은 자신의 부하인 검일 장군의 아내를 탐내 빼앗아 버렸다(품석이 부하 검일의 아내가 미색이 있음을 보고 빼앗았다. - 삼국사기 죽죽열전). 이를 안 검일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백제가 쳐들어오자 검일은 그들과 내통.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이에 품석은 항복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품석과 그의 아내가 바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라는 점이었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신라 화랑들이 그들의 맹세를 새긴 임신서기석(보물 제 1411호). 화랑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목숨처럼 여겼다. 박방룡 학예연구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나라의 대란이 있을 때에는 기꺼이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하겠다, 목숨을 바치겠다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화랑정신의 얼마나 투철했던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화재이다.”


그런데 김춘추의 사위 품석은 이런 화랑정신을 외면한 체, 백제에 항복하고 만 것이다. 대야성 함락의 책임과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졌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춘추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다. 주보돈 교수(경북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면,


“김춘추 위상이 엄격히 저하되어 가는 견제와 균형이 깨어지는 상황에 당도했고, 오히려 실권할 줄 모르는 그런 위기를 맞고 있던 것이다.”


김춘추는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결단했다. 그는 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을 만났다.


“신이 고구려의 사신으로 가 그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김춘추의 말)


▶ 김춘추의 두 번째 위기 : 목숨을 건 외교길

   목숨을 건 고구려 외교 - 풍전등화의 신라를 위해 앞장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고구려행이었다.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고 그 시신까지 빼앗긴 김춘추. 개인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嗟乎 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


딸과 사위를 잃고 그 시신마저 빼앗긴 김춘추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곁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비통해 했으며 기필코 백제를 멸망시키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백제는 김춘추에게 복수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김춘추에게 정치적 위기를 불러오게 됩니다. 사위의 항복으로 인한 대야성 전투 패배에 책임과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고구려 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춘추의 정치적 결단이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진행자의 말)


경주의 통일전. 김춘추와 김유신, 문무왕 등 삼국통일의 세 주역을 모신 곳이다. 그러나 김춘추 시대 신라는 세 나라 중에서 가장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신라를 침범해왔다. 친 백제계 왜 역시 신라를 적대시 했다. 실제 왜는 신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준비하기도 했다(내목황자로 신라를 공격할 장군으로 정하고 군사 2만 5천명을 주었다 - 일본서기). 한강을 둘러싼 쟁탈전도 치열했다. 7세기 초 신라는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1)을 벌이고 있었다. 한강은 신라에게 생명선이라 다름없었다. 한강유역의 당항성은 신라가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신라는 군사력을 집중했다. 김진원 학예연구사(화성시 문화홍보과)의 말을 들어보자.


“신라가 육도를 통해서 대당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강 유역에 바로 당항성을 중심으로 해서 대당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이곳이 대단히 중요했었고, 하지만 당과 신라, 백제, 고구려 십자외교 속에서는 당으로 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해상교통지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연합하여 바로 이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다. 신라의 위기였다. 강종훈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의 말을 들어보면,


“한반도 내에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주위에 강대한 두 세력을  한꺼번에 막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군사적으로 고전을 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김춘추는 적대국가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공과 일심동체요. 지금 내가 만일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김춘추의 말)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궁전을 짓밟을 것이요” (김유신의 말)

“내 생각에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요. 만일 그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요.” (김춘추의 말)


김춘추의 고구려 행. 그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기세등등했다. 연개소문이 정변(642년)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와 끊임없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춘추가 고구려 행을 결심한 것은 당과의 관계를 염두해 둔 행보였다. 박순교 박사(김춘추 외교의 승부사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를 양면적으로 해석했던 것 같다. 만약 실패할 경우에도 김춘추는 차후 당태종과의 외교를 성공리에 이끌 수 있는 정보력을 자신이 지게 될 것이고 고구려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우므로 당태종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압박할 수 있는 그런 외교적 제스처의 일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물 됨됨이를 파악하려 했다. 그 만남은 팽팽한 긴장 속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자는 주장도 제기 되었다(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춘추는 마침내 보장왕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는 그는 고구려의 군사를 요청했다.

 

<고구려가 요구한 ‘마목현과 죽령’ 북쪽 지역>


“백제가 무도하여 신라 강역을 번번이 침략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김춘추의 말)

“지금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마목현 죽령은 원래 우리 고구려 땅이다. 그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어 줄 수 있느니라.” (보장왕의 말)


보장왕은 군사동맹 댓가로 영토를 요구했다. 즉 소백산맥 이북 옛 고구려 땅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신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 바로 한강 상류지역이었다.


“그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어 줄 수 있느니라.” (보장왕의 말)

“신은 신라왕의 명을 받들어 원병을 청하러 왔거늘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달라 하십니까.” (김춘추의 말)


▶구전동화‘토끼전’의 기원 - 김춘추의 탈출기!


협상을 결렬됐다. 김춘추는 고구려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미리 고구려 관료 선도해를 매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치밀함이었다. 김춘추를 찾은 선도해는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들려주었다. 당장의 위기 극복을 위해 거짓약속을 하라는 우회적인 충고였다. 김춘추는 이를 받아들었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드리겠습니다.” (김춘추의 말)


한편, 신라에 남아 있던 김유신도 행동에 들어갔다. 김춘추가 억류되자, 별동대 3000명을 고구려 국경에 집결시켰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고구려에 붙들려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김유신의 말)


동국대 역사교육학 교수인 윤선태의 말을 들어보자.


“김춘추가 자기에 어떤 정치적인 기반들이 와해되어 나가는 것들을 자기의 죽음을 불사하고 간 것이다. 그것은 신라를 위해서 뭔가 자기의 희생이다. 그런 어떤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진골귀족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귀지와 김유신의 무력시위로 김춘추는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고구려 행이었다.


김춘추의 목숨을 건 고구려 행은 별 성과 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 것이 하나 있다.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신라가 국가적인 위험에 처했을 때 선덕여왕과 진골귀족들은 걱정만 할 뿐 누구하나 뚜렷한 타계 책을 내놓지 놋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김춘추가 움직인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김춘추에 짧은 기록이 나온다.


“춘추는 얼굴이 잘 생겼고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일본서기>


<일본 서기>에 기록된 김춘추


고구려의 다녀온 김춘추는 또 다시 왜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왜는 백제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일본행 역시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길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그에 일본행을 감행케 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듯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외교에 몰두했던 김춘추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 수어지교(水魚之交)2) : 김춘추와 김유신


경주시 교동. 김유신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다. 김유신은 이곳 자신에 집으로 자주 불러 축국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김유신 집을 드나들 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눈이 맞았고 급기야 문희는 혼전 임신을 했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은 부도덕한 여동생을 태워죽이겠다면 마당에 불을 피웠다. 때마침 남산에 오른 선덕여왕이 이 연기를 보고 사연을 물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김춘추가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와의 결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김춘추의 사람됨을 알아본 김유신의 계책이었다.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3). 그는 법흥왕 때에 금관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귀순했다. 바로 이 가야의 마지막 왕이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신라로 귀순한 김유신 가문은 숱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신라 주류는 정통 진골 귀족들. 김유신 가문은 여전히 비주류였다. 김춘추 가문 역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유부녀 도화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비형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진지왕은 즉위 4년 만에 국인 즉 귀족들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4년 만에 귀족들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는 김춘추의 에 할아버지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폐위된 왕의 손자. 이는 김춘추4)의 정치적인 입지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강종훈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을 들어보자.


“이미 폐위된 진지왕의 혈통. 그래서 김춘추 같은 경우는 성골에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김춘추에 입장에서는 원래 왕위계승에서는 좀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신분적·정치적 한계를 지녔던 김유신과 김춘추 두 사람은 혼맥을 형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두 가문의 유대관계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진덕여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8명의 백제 장수를 사로잡은 김유신. 그는 백제 포로와 품석부부의 유골 교환을 제의했다.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우리 군주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유골이 너희 백제 옥중에 묻혀 있다.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너희들의 목숨과 바꿔가는 어떻겠느냐?” (김유신의 말)


결국 이 제안으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유골은 신라로 돌아왔다. 6년 만이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 김춘추와 김유신 앞에는 공통의 과제가 있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선덕여왕.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왕권은 불안정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왕권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윤선태 교수(동국대 역사교육과)의 말을 들어보자.


“즉 진골귀족들의 어떤 합의 속에서 왕권이 반석을 굳혀야만 안정화 될 수 있는데 가장 주류였던 진골들이 여왕의 집권에 대해서 계속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불안감을 더욱 더 짚어주는 것이 당태종의 언사였습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주변 나라의 업신 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삼국사기 12년(643)>


당태종 역시 선덕여왕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 일가를 신라 왕으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덕여왕 16년 상대등 비담이 반란(647년)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이들의 제압에 나섰다.


“반란군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군사와의 전투는 어떠했습니까?” (이상호 기자의 물음)

“김유신 장군이 가지고 있던 관군의 편제는 월성(반월성)을 중심으로 되어 있었고 비담과 염정은 이 명활산성에서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비해서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상호 박사의 대답)


“비담 등이 패주하니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은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켜 이들을 평정했다. 상대등 비담을 비롯해 반란세력은 모두 처형되었다. 구 귀족세력은 진골들도 상당수 제거되었다. 김춘추는 정치권을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했다. 이제 두 사람은 신라의 신흥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파트너와 함께 신라 정치에 중심이 된 김춘추. 하지만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다. 반드시 멸망시키리라 맹세했던 백제는 여전히 건재한 채로 신라의 국경을 끊임없이 침범해오고 있었다. 이에 김춘추는 대·당 외교에 나선다. 하지만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하던 당나라에게 한반도 동쪽에 작은 나라 신라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춘추는 나·당 군사 동맹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김춘추의 나·당 동맹 성사. 여기엔 치밀한 외교 전략과 고도의 심리전이 있었다. 당나라와 외교에 나선 김춘추. 그러나 대당외교 역시 목숨을 건 길이었다. 봉성 온씨들의 사당 사현사(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대당외교에 나선 김춘추의 목숨을 구해준 한 인물을 모시고 있다. 온군해는 김춘추의 대당외교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후손인 온영복씨의 말을 들어보자.


“해상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위급한 찰나에 재빨리 김춘추의 옷을 갈아입고 대신 죽고 김춘추는 쪽배를 타고 도망갔다.”


▶ 고도의 외교전략, 김춘추의 나당동맹

   외교지략가 김춘추, 나당동맹을 성사시키다!


대당외교길. 김춘추는 고구려 수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온군해가 대신 김춘추의 옷을 입고 대항하는 사이 김춘추는 무사히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김춘추의 당나라 행은 이처럼 위험한 길을 가야 하는 수천리 험로였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서안. 당나라에 도착한 김춘추는 당태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장안성 외각까지 내보내 김춘추를 마중하게 했다. 당시 외교 관례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태종 스스로도 김춘추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후하게 대했다. 이런 환대에는 배경이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수차례 전쟁을 치룬 상태였다. 특히 태종 자신이 직접 출정했던 안시성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전을 당한 직후였다.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태돈교수(서울대 국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일거에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하다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기전으로 고구려를 공략을 하고 또 전략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은 신라의 전략적 가치와 또 군사력에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김춘추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환대를 했던 것이다.”


당에 입장에서 고구려 군사력 분산을 위해서라도 신라가 필요했다. 태종이 김춘추 환대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을 만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춘추는 의외에의 발언을 한다. 


“지금 당나라의 국학에 수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학에 나가 유교와 관련된 수업에 참관하고 싶습니다.” (김춘추의 말)


김춘추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이라는 핵심내용 대신 유학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전략이었다. 강종훈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김춘추는 처음부터 자기가 갖고 있는 속마음을 다 내놓지 않고 상대방이 궁금해 하면서 그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말 외교관으로서는 아주 탁월한 아주 비상한 면을 갖고 있다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태종에 허락으로 김춘추는 당나라의 유교 행사 등을 참관했다. 얼핏 한가한 행보로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당에는 수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있었다. 김춘추는 이들을 만났다. 유학생들에게 당의 정세를 듣고 분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김춘추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당태종쪽이었다. 그는 결국 김춘추를 다시 불렀다. 말을 먼저 커낸 쪽은 당태종이었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당태종의 말)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더구나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고 입조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흉악한 백제를 없애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사로잡혀 바다 건너 조공도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김춘추의 말)


당태종은 나?당 군사동맹을 수락했다. 김춘추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박순교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당태종은 삼국의 주변 정치에 대해서 전언에 의존하고 있었고 실제로 소상한 정보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김춘추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정보를 들려주므로 당태종과의 협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말 그대로 국가대 국가에 외교가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외교적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당 동맹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직접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 문무왕 편에 보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당태종이 백제 땅을 신라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주보돈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신라는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외교활동과 병력을 끌어드리려 했기 때문에 사실은 백제의 확보만으로 당시 신라 수준의 만족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치밀한 전략과 심리전으로 나?당 동맹을 이끌어 낸 김춘추.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그의 여망을 실현시킬 조건은 마침내 갖추게 된 것이다.


지금 보시는 것이 김춘추의 외교 행로이다. 경주에서 평양으로 다시 왜로 다시 서해를 넘어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이렇듯 김춘추의 외교 행로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활발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나?당 동맹을 이끌어 낸 김춘추. 이것은 김춘추 외교의 승리이자, 백제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집념에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나?당 동맹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교관계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란 없는 법입니다. 나?당 동맹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 그에게는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당 동맹 결성으로 김춘추는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또한 그에게는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동지가 있었다. 날개를 단 김춘추는 빠른 속도로 신라사회를 개혁해 나갔다. 그 증거가 경주의 용강동 고분에서 나왔다. 지난 1986년에 발굴에서 의외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7C 후반에서 8C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토용, 복식이 모두 중국 품이다. 김춘추는 나?당 동맹 선고 1년 뒤 당나라의 의관을 전격 수용했다. 당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김춘추의 의도였던 것이다. 윤선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당이 신라를 믿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절차들이었습니다. 그런 절차들에 대해서 신뢰감을 주므로 인해서 신라는 결국 당에게 외교적인 파트너로서의 어떤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 태종무열왕 김춘추,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

   평생을 건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드디어 백제가 멸망하다


김춘추가 신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동안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죽었다. 신라는 새로운 왕을 결정해야 했다. 신라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 화백회의가 있었다. 진골 귀족들이 왕의 추대나 폐위 등 국가 대사를 만장일치로 정하던 의결 기구였다.


“표암(경북 경주시 동천동) 위에서 그러면 화백회의를 했다는 것이죠.” (이상호 기자의 말)

“예, 삼국유사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화백제도는 다수결 원칙이 아니고 만장일치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박혁거세를 추대하거나 아니면 진지왕을 폐위시킨 결정적인 의결 기구였습니다.” (경주 박물관 학예사의 말)


진덕여왕 다음 왕을 결정하는 화백회의가 열렸다. 바로 그 중심에 김유신이 있었다. 그는 김춘추를 추대했고 김유신의 위엄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마침내 김춘추는 신라의 왕이 되었다(654년). 신라 제 29대 왕 태종 무열왕이 된 것이다.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해 왔다. 즉위 다음 해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침공해 왔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 2년 655년).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나?당 동맹을 성사 시켰지만, 당나라의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군사를 청했으나 응답이 없자, 김춘추는 큰 근심에 잠겼다고 기록은 전한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 6년, 659년).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그의 열망은 무산되는 듯 했다. 낭보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당의 소정방 13만 대군이 출정한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목표로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계백장군이 결사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이 항복했다. 보름 후,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사비성에 입성했다. 김춘추는 소정방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왕에게 술잔을 치도록 했다. 승자의 쾌감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맹세와 복수를 이뤄낸 성취감에 젖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순간 대야성에서 죽은 딸과 사위의 모습이 떠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김춘추의 복수는 철저했다. 대야성에서 백제와 내통했던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삼국사기).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법민도 복수에 가세했다. 그는 의자왕 태자 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묻어 둔 적이 있다. 그 일로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 (삼국사기)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시 당에 야욕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에는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남아 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기념한다는 글귀다(大唐平百濟國碑銘). 당은 의자왕과 함께 만 이천 여명에 백제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백제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에 나섰다. 신라와 김춘추가 얻은 것은 없었다. 심지어 당은 신라까지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사비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실제 당이라는 세력은 백제보다 고구려보다 더 강한 세력이었다. 이들을 끌어드리고 난 다음에 그들이 어떤 형태로 행동할지에 대해서 이젠 심각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늑대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호랑이를 끌어드린 것이 아니냐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백제는 멸망시켰지만 당은 신라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춘추는 죽음을 맞이했다. 삼국사기는 ‘왕이 돌아가셨다’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지 1년만이었다.


김춘추에게 당나라는 어떤 존재였을까?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꼭 필요했지만 한편 목에 가시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결국 김춘추는 백제 멸망이후 당나라의 야욕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자신의 맹세대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한 샘이다. 이후 그의 아들 문무왕은 여세를 몰아서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통일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김춘추의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외교지략가인가, 아니면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백제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 상황을 외교로 돌파하려 했던 김춘추의 선택은 주요했다. 또한 백제를 제압하려 했던 그의 여망도 실현됐다. 적지 않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외교로서 역사를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자, 비주류에서 왕위에까지 오른 풍운아였던 것이다.


1) 7세기 초 신라와 고구려의 주요 전쟁. 북한산성 진평왕 25년(603), 우명산성 진평왕 30년(608), 낭비성 진평왕 51년(629), 칠중성 선덕왕 7년(638).


2) 즉 물과 고기의 사귐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3) 구형왕릉은 지금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 소재에 있다.


4) 김춘추의 가계도를 잠시 살펴보면

   진지왕(폐위) ―― 지도부인

                      ↓

                   김용춘 ―― 천명부인

                              ↓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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