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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9일 주일예배 2부 _ 요한복음 12장 9-1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 만세!)
오늘 본문은 슈퍼갑과 슈퍼을의 갈등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다툴 수 없도록 탁월하게 강한 나라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지배했던 영역은 인도 직전의 모든 소아시아, 영국 스페인 유럽 전체입니다. 로마가 다스리지 못한 대표적인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다스리지 못한 이유는 로마가 시간이 없어서 오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슈퍼갑인 로마제국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대표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로마제국이 없었다면 로마제국보다 훨씬 작은 6-7개의 나라가 비등한 나라가 계속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강력한 슈퍼 갑이 모든 나라를 지배해서 비무장 지방자치단체로 만들어버린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강력한 나라가 힘이 비등한 나라들의 각축보다 훨씬 더 평화역학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자유경쟁체제는 분열의 다이내믹을 너무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인생전체를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관에서 중세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가 가장 문화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풍성했습니다. <중세의 가을>이라는 하위징아 같은 책에 보면 중세가 단일한 신앙 단일한 문명권 단일한 세계 아래 적어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중세 사람들의 삶이 너무 느렸고 풍성했고 마음씨가 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당을 지으러 간다, 그러면 중세 사람들 대부분이 1년 며칠 동안 날연보를 해서 대부분이 노동봉사를 했습니다. 노트르담 같은 사원을 지으려면 오늘날 건축비로 발주하면 돈으로는 지을 수 없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노트르담 사원은 자원봉사자의 노동으로 지어졌습니다. 노트르담 사원만 그렇습니까? 스트라스부르그, 쾰른 대성당 등 대부분 유럽의 중세 대성당은 사람들의 노동봉사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에 보면 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노동봉사에 능했고, 보통 유럽 마을의 한 석수장이가 오늘날 맨해튼의 최첨단 예술가보다 실력이 더 낫다, 할 만큼 유럽이 풍성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슈퍼 갑으로써 로마제국 등장 이전에 모든 나라들의 각축을 정돈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섭리사적으로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등장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지배를 괜찮다고 견뎠던 나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로마제국은 속주를 다스릴 때 10분의 1정도만 내면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지방토착왕조를 다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10분의 1 속주세를 굴욕감을 가지고 대항한 나라는 딱 하나, 이스라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시대 때 전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일대에서 가장 큰 성전을 가진 나라 이스라엘, 성전의 규모가 400미터 300미터입니다. 400-300미터정도의 거대한 직사각형이 성전 경내입니다. 이렇게 넓은 성전은 로마에도 없고 아프리카에도 없고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민족주의적 종교 감정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은 로마가 다스리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슈퍼갑인 로마의 이 체제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믿었던 사람들, 즉 로마제국의 압제나 옛날 토착왕조의 압제나 똑같다고 느꼈던 대부분의 나라들과 달리 로마제국의 슈퍼 갑 같은 압제가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훨씬 고귀한 대우를 받은 사람만이 느끼는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고귀한 차이, 그건 바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는 차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면 로마의 지배는 그냥 괜찮은 수준의 압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직접 소속된 백성이었기 때문에 로마제국 같은 강력한 이물감을 느끼게 만든 나라가 지배하고, 지배하는 그 나라를 위해서 조공을 바치고 속주세를 바치는 모든 체제가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일대의 로마 속주의 대표자로써 항쟁을 개시한 겁니다. 그런데 그 항쟁의 머리말에 이스라엘 자유농민들, 이스라엘 샤론평야 갈릴리 평야, 므깃도 평야, 이스라엘 곡창지대에 있는 농민들의 오래된 예언자적 전통을 가지고 오순도순 형제자매처럼 살던 강력한 동아리, 강력한 결속감을 가지고 살던 농민정서가 저항감의 요새였습니다. 그 저항감의 요새 한복판 나사렛에서 예수가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로마제국처럼 압제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을 자라면서 보았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순전히 피카소같이 상상의 산물로 만든 게 아닙니다. 그가 어렸을 때 보았던 형제자매끼리 오순도순 사는 공동체적 정서, 그것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심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건 마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농민들 안에 있는 영생 공동체적 정서를 맛보고 나서야 러시아 농민들의 미래에 메시아적 집단이 될 것을 예견한 소설을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톨스토이가 말합니다. 내가 러시아 농민들의 뿌리 깊은 영생 우애 협동 고난을 겪는 정신들,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쟁을 하지 않고도 참아내는 수도원적 분위기, 그것을 내가 만일 맛보지 못했다면 나는 무정부주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톨스토이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이유는 러시아 농민들은 정부가 필요 없이 정부가 필요 없이 너무나 자율적으로 사랑이 가득 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바로 생시몽, 오웬, 푸르동 같은 무정부주의자가 나옵니다. 무정부주의자가 되려면 농민이 정부, 공무원이 필요 없이 오순도순 사는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무정부주의 사상이 빨리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것을 본 겁니다. 예수님께서 척박한 갈릴리 안에서 로마의 압제만 본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 아래에서도 여전히 꽃피는 사랑을 본 것이고 영생의 교제를 본 것이고 인자한 농민들을 본 것이고 웬만한 고난을 자기의 힘으로 견뎌내면서 그래도 남을 비난하지 않는 착한 마음씨를 많이 본 것이 예수의 자양분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 말종들 틈 사이에서 컸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수직적으로 초월적으로 받아서 인간 말종과 전혀 다른 돌연변이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변방에 속한 이스라엘 자유농민 공동체에서 어렸을 때 싱싱한 감수성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혔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그런 시적인 명상을 하려면 공중의 새 같은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우애 공동체를 몸서리치게 경험해야만 시적인 명상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기 힘듭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얼마나 초조한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집을 갖지 못한 비참함을, 그래서 황지우가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이렇게 시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가보시면 아십니다. 갈멜산 이스라엘 평야와 갈릴리 곡창지대를 보고 나면 예수님께서 너무 멋진 아열대 지방에서 청소년 시대를 보냈구나, 그걸 알게 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갈릴리를 두 번 정밀 탐사하고 나서 내린 결론입니다. 물론 이런 책이 나옵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쁜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이런 우애를 경험했다는 것, 톨스토이의 경험을 했다는 것, 조금씩 연구로 밝혀내고 있는데 저는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있는 자생적인 우애 공동체 안에서 나왔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예수님이 오천 명의 무리를 놓고 먹이는 장면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일만 데나리온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빚을 탕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채탕감 운동, 원소유주 땅 되찾아주기 운동, 값없이 병 고쳐주기 운동, 결혼식장 포도주 절단 났을 때 몰래 만들어주기 운동, 이런 것을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민원을 많이 해결하셨습니다. 12년 동안 모든 의료보험을 다 내고 특진의사를 찾아가도 낫지 않았던 사람 몰래 고쳐주기,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가정불화에 빠진 사람 유산상속하지 못한 것 혼내서 고쳐주기, 간질병 걸린 어린 아이 고쳐주기, 예수님께서 착한 운동을 정말 많이 하니까 갈릴리 일대가 다시 한 번 예수를 중심으로 전 재산을 바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감화를 끼쳤느냐면 헤롯 분봉왕의 동생 마나엔까지 예수님 사랑의 포로가 됐습니다. 헤롯분봉왕의 동생 마나엔 플러스 헤롯 분봉왕의 재무부장관 구사와 그의 아내까지 포섭됐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가 너무나 파장이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로마제국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로마제국이 우리를 아무리 압제해도 압제의 틈새에는 사랑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고 우리가 우애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뼛속 깊이 박애로 가득 찬 사람들의 동아리가 필요합니다, 로마제국은 죽음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독수리 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시체처럼 바뀌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독수리 문양을 하고 와서 뜯어 먹는 겁니다, 우리가 독수리 문양을 한 로마제국 10군단과 6군단이 진짜 필요 없게 만드는 길은 다시 한 번 싱싱하게 사랑과 우애가 살아 있는 공동체, 5천 명씩 잔디에 앉아서 나눠먹는 영생공동체의 회복이야말로 로마제국을 진짜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자유인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로마인은 누구를 다스립니까? 두려움에 가득 찬 압제적인 체제를 두려워하면서 형제자매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욕망에 들끓는 사람만 로마제국을 무서워합니다. 참 자유인은 로마제국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날짜 잡은 분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로마서 8장까지 가야 해, 죽을 날만 남았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분이 아니었고 살려고 하신 분이었고, 갈릴리 일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시키려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 나오는 겁니다. 아무리 대기업이 우리를 비정규직으로 몰아내고 우리를 취업 안 시켜주고 우리를 따라지신세로 대우한다 하더라도 여기는 여전히 빈틈이 남아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협동조합, 비정규직 사랑연대, 100만 원 이하 월급 받는 사람들의 마을, 옛날에는 100만원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옛날에 백만장자 엄청 큰 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100만원 받습니다. 오늘날 비정규직을 89대 11로 나누어서 우리를 사람취급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받지 못한 사람끼리 모여서 계속 서로 사람으로 인정해줘야 합니다. 너는 사람이다, 사람 너는 비정규직이지만 원래는 사람이다, 이게 <이반데니스비치의 하루>라는 솔제니친의 소설에 나온 유명하고 오래된 아주 고귀한 19년째 감옥 사는 사람, 새로 들어온 간수가 있는데, 간수가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면 존엄한 죄인이 돼야 합니다, 존엄한 죄인이 되고 일도 존엄하게 해야 하고 밥을 먹을 때도 게걸스럽게 먹으면 안 되고 서로 모자를 씌워주고 모자를 벗겨주고 음식을 서로 음식을 핥으면서 동물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고귀한 영혼처럼 보여야만 간수가 여러분을 압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간수의 압제보다 더 절제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존엄성을 계속 고취 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감옥의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방법입니다. 신영복 씨는 글을 계속 썼습니다. 본회퍼는 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도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나르시스적 열정에 사로잡힌 만큼 면도를 했습니다. 감옥에서 자기를 존대하며 자기들끼리 사랑을 계속 나누어야만, 이놈들은 내가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동물들이 아니네, 고귀한 영혼이네, 재발견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아무리 이 사회가 열악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막 같다고 할지라도 서로 사랑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고, 우애와 사랑과 친절과 협동은 어떤 것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은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심과 미운감정을 고취시키는 그 에너지 대신 사랑 가득 찬 공동체를 구성하여 나누어주고 돌보아주고 얼싸 안아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운동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진짜 참 길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갑과 을의 비대칭성이 사라지고 연봉 얼마 받는지도 사라지고, 지금 좋은 옷인지 나쁜 옷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보통 사회에서는 금방 구분이 됩니다. 저건 이마트, 저건 현대백화점, 압구정동에서 산 것 일산에서 산 것 다 드러나요. 상표만 뜯어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옷가지고 코멘트하지 않아요. 왜 목사님 항상 이마트에서 사요, 현대백화점 있잖아요, 이렇게 시비 거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좋은 줄 알고 그리고 옷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핸드백도 쳐다보지 않고, 동창회만 가면 핸드백 쳐다보고, 야 이거 어디서 샀어? 중국서 샀어. 짝퉁인데 진짜 같지? 교회라는 건 세상질서를 바꾸어버리는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교회는 오로지 믿음으로 존엄을 회복한 자유인의 동아리로서 이 세상의 모든 야수적인 경쟁과 질서들에 피해 입은 우리들의 실존을 재활 복구시키는 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원래는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제가 장신대 다니면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자매 전도사님 옷이 제일 나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 사람에게 코멘트를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어디서 샀어요? 농담으로 그러기도 하고 진담으로 그러기도 했습니다. 그 자매는 몸이 자그마했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이 옷 입고 우리 교회 못 가요, 너무 초라해요, 우리가 볼 때 제일 좋은 옷이었습니다. 그 교회가 서빙고동 일대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이거 입고 가면 도저히, 그래서 빨리 집에 오고 싶답니다. 너무 옷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요. 차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남자들, 여기 우리는 서민다움을 자랑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차가 얼마나 큰가, 얼마나 주차하기 힘든가, 그리고 대부분 체어맨과 에쿠스를 탑니다. 대개 교수들도 20년 되면 체어맨과 에쿠스를 탑니다. 분명히 빚이 많이 있을 텐데, 이 사람이 타고 다녀요. 아반떼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모두 갑과 을의 예민한 축소에 수해를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도 힘에 대한 숭배가 일어나고 열등감 있는 을의 위치를 순식간에 반전시킬 길이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표적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로또를 사기도 하고, 내 자녀가 표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 나 지금 15년째 비정규직이만 내 아들은 서울 법대 갔어, 어쩔래? 우리 형님은 삼성 다니지만 아이들은 삼수하고 있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갑과 을의 관계, 공부 잘했던 형의 자녀는 공부 못하고 B급 공고 나와서 김해에서 현대중공업 다니면서 간신히 했는데 애가 막 서울대 들어가고, 얼마나 통쾌하겠어요? 이런 일종의 표적이라는 것은 갑과 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표적을 구사하신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우리는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일단 말씀을 매우 잘하셨지만 표적도 잘 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굉장히 감동 받았을 겁니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걸어가게 하시고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 베를 감았던 나사로가 나는 천국 보았다며 선전하고 다니면 그런 장면의 예수님은 얼마나 사무치게 우리가 애모할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세 번이나 그렇게 하고도 자기를 은닉하셨습니다. 자기를 감추었기 때문에 개인기가 강하다는 걸 전혀 모르시고 겸손하게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와 차이가 납니다. 38년 된 병자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과 나사로는 구약 좀 아는 사람은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인 걸 금방 압니다. 구약 좀 모르는 사람은 김회권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digital한 숫자 38은 언제 의미가 있느냐? 구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신명기 2장입니다. 38년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방황을 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 영적 무기력 상태를 의미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집단적 불순종과 무기력 상태에 빠진 하나님 백성을 가리킵니다. 38년 된 병자 대표적인 영적 무기력 상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능력이 원천 박탈된 그 환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셨으니까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고치실 것을 암시한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이사야 42-46장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내 종 소경된 자 이스라엘, 이 말에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소경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습니다. 에스겔 37장 11-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덤에 갇혀서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중얼거리면서 식물적 무기력 상태에 있는 것, 물론 식물한테 미안합니다. 식물도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완전한 무기력 상태, 식물인간이라는 말 쓰지 맙시다. 식물 자체가 그런 말에 쓰이면 안 됩니다. 식물은 절대로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야생적 생명력으로 뻗어갑니다. 저도 식물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question mark가 뜹니다. 식물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떨까? 완전한 무기력 상태, 총체적 무기력 상태, 희망이 없고 무덤 속에 있는 것과 방불한 사람,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개인을 세 명 고침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집단 갱생시켜서 로마제국과 대칭관계, 또는 우위관계에 있을 수 있는 희망을 준 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호산나, 호산나 할 때 ‘나’는 please라는 뜻입니다. 제발, 호산나는 이사야와 똑같은 어근입니다. 이사야 호사나, 이것은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야사아 하면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영탄문인데,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런 말입니다. 이것은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순례객들이여, 거기에 왕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시편 118편에 지방순례객들을 레위인들이 맞이할 때 했던 교창의 환영곡을 예수에게 인용함으로 갑자기,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왕이라는 단어를 말함으로써 갑자기 분위기가 격앙됩니다. 왕이라는 말은 쓰면 안 되는 말입니다. 왜? 진짜 왕이 있는데 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왕이 있는데 또 왕을 찾으면 그 왕은 큰일 날 왕이죠. 님을 찾은 사람이 님을 찾으면 안 되잖아요. 변산 해수욕장에 가서 저하고 장용운 교수와 이강희 선생, 기혼자가 갑자기 자기 아내 남편을 앉혀 놓고 기타를 치면서 내 님은 어디에, 임이 옆에 있는데 임마누엘로 와 있는데 또 다시 임을 찾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나 지원 자매님이나 다른 모든 미혼 자매들은 종말론적으로 내 님은 어디에, 계속 찾아야 합니다. 변산반도에서 찾아야 하고, 인천에 가서 찾아야 합니다. 님에 대한 갈구가 기혼자에게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왕이 있는데 또 다시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왕이라는 말을 군중 모두가 내뱉자 너무나 큰일 난 거죠. 진돗개하나가 발령된 거죠.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주장하시느냐? 예수님을 왕이라고 소리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것도 구약 좀 아는 사람은 방금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임을 알고 스가랴 9장에 나오는 왕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권을 극단적으로 축소시켜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왕으로서의 이상왕, 그 왕이 이스라엘의 나귀 타고 오는 왕입니다. 나귀타고 오는 왕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활과 창과 병거를 부수는 평화의 왕입니다. 그게 바로 스가랴 9장 전체가 말한 왕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왕은 우리를 지배하러 오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짜 자유를 열망하느냐? 자유는 내가 매 순간 내가 책임지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게 자유입니다. 이건 너무 너무 심각한 겁니다. 매 순간 결단하고 심사숙고해서 행동하는 게 자유인데 그런 능력을 되돌려 주려고 오시는 겁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봤던 러시아 농민들, 푸르동 같은 무정부주의자가 봤던 이미 영생의 자율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러시아 농민다움, 갈릴리 농민다움의 그 공동체는 압제자가 필요 없습니다. 민법과 형법이 필요 없어요. 왜? 이웃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해버렸기 때문에, 로마서 13장 8-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인간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설정해놓고 그런 죄를 지으면 이렇게 벌준다고 하면 부정적 법조문은 이웃을 위해서 자기 몸을 종처럼 바치는 사랑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민, 갈릴리 농민들의 영생추구적인 공동체 모습 안에는 자유가 있고 어떤 압제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유케 한다는 말은 그겁니다. 공권력 필요 없이, 무서운 국세청과 검찰청 필요 없이 영생의 시민질서, 자유질서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 그런 걸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확보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이 말은 국가공권력을 최소화시키는 왕이 바로 왔다, 국가적 권익을 불필요하게 만들면서 개개인을 영으로 충만하여 뼛속깊이 충만한 자유의 사람 만들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제가 <넬라 판타지아>를 참 좋아합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우리가 옛날 <미션>이라는 80년대 영화에서 가브리엘 오보에가 만든 그 노래에 가사말을 붙인 겁니다. 나는 환상 속에서 바른 세상을 봅니다, 구름처럼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을 봅니다, 뼛속깊이 박애로 가득 찬 사람들을 봅니다, 나는 환상 속에서 밤을 봅니다, 환상 속에선 밤도 낮처럼 밝습니다. 서로 돌보면서 자애로 가득 찬 세상, 이 세상을 나는 꿈꿉니다, 이것이 <넬라 판타지아>의 가사 내용이죠. 그런 자유, 이렇게 서로 뼛속깊이 박애로 가득 찬 사람이 가득 차면 법이 필요 없기 때문에 자유가 오는 겁니다. 마무리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러 왔습니다. 자유케 하러 왔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 새끼 타고 오신 자유를 우리를 영접하지 않고 강력한 왕을 영접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나라의 국민 되기를 원하고 강력한 회사의 family가 되기를 원하고, 강력한 조직의 일원이기를 원합니다. 내가 좀 약해도 강력한 조직의 일원이 되어 한 몸이 되어 내가 강해지는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그 무엇을 원합니다. 내가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애롭게 사는 능력을 구현함으로 말미암아 강해지려고 생각하지 않고, 강한 외부적 무엇에 나를 일치시킴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집단주의적 자유사상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죠. 에리히 프롬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게 바로 그걸 말합니다. 왜 계몽주의의 발상지였던 독일이 히틀러 같은 야만적이고 문명퇴행적인 엄청난 폭군 앞에 굴복했는가? 독일 사람이 자유를 포기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이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 같은 강력한 마술적 표적을 행한 600%의 인플레를 고쳐주고 실업상태를 해결해주는 강력한 요술방망이 같은 정책을 휘둘렀던 히틀러에게 모든 자유를 양도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1897년에 교육칙어가 나오고 나서 일본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들에게 일본 국민 전부 다 자유를 양도했습니다. 자유를 양도하고 나니 처음에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빈 점령, 1939년 폴란드 점령, 점점 파이가 커졌습니다. 독일 사람들 자부심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41년부터 러시아 전선에 700만 800만 900만, 열여섯 살까지 전부 다 군대에 가게 됐습니다. 강력한 국가, 강력한 무솔리니가 뉘른베르크에서 40만 명 데리고 나치당 할 때는 박수를 쳤는데, 그때는 독일 모두가 집단적으로 자유가 커졌습니다. 전쟁 배상금 안 물어, 그리고 독일이 좋아졌습니다. 그런 엄청난 강력한 왕이 독일 국민들의 자유를 크게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모든 독일 국민의 재산과 인민의 목숨을 다 국가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강력한 왕을 영접했을 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 나귀 새끼 타고 오는 왕을 영접해야만 고도의 주체성을 가집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스리기 원하는데, 다스린다는 말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다스린다, 자유케 된다,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스린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유가 줄어든다는 느낌이 들죠?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자마자 시퍼런 주체성과 개성이 살아나면서 나다워집니다. 여러분 나귀 새끼가 무얼 상징합니까? 왕의 품새가 아닙니다. 나귀 새끼는 무엇입니까? 왕의 아우라가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상징입니다. 나귀는 짐을 지고 가는 자입니다. 우리 죄짐을 지고 가는 예수님,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와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지배하자마자 사탄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오산리에 가서 지금 당장 볼 수 있습니다. 오산리 기도원에 가면 항시 귀신 들린 사람이 나타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목소리는 여자는 남자 목소리가 납니다. 남자는 괴성이 나옵니다. 그건 굉장히 잊힐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겁니다. 네팔에 제가 봉사활동을 갔던 고아원에 아홉 살 소녀가 귀신이 들렸는데요. 그 아이가 귀신 들리자마자 남자 4명이 3층에서 뛰어내리려는 그 아이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계획을 갖게 만들지만 주체성을 박탈해버립니다. 독일 국민전체가 귀신 들린 자가 됐고 일본 국민전체가 귀신 들린 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4-16살짜리 가미카제로 부름을 받아 2차 세계대전 마지막에 미국 항공모함으로 돌진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들입니다. 강력한 왕은 이렇게 우리를 처참하게 만듭니다. 겸손한 왕은 우리의 짐을 지는 나귀와 같은 존재, 우리 죄짐을 지기 때문에 우리가 시퍼렇게 매 순간 결단해야 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이 자유가 부담스러운 짐이 돼 버립니다. 자유롭고 싶지 않습니다. 마무리를 쉽게 해야 하는데 안 되네요. 쉽습니까? 어렵죠? 1부 때는 잘 됐는데,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는 쉽게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 표정을 보니까 점점 강의가 되가네요. 어린 나귀 새끼 타는 왕을 영접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경우는 자유가 부담스럽습니다. 자유가 부담스러운 순간 내가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나귀새끼처럼 오셔서 우리의 죄짐을 지시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생명국으로 우리를 자유케 한 후에 사랑의 능력을 충만케 한 후에 우리를 다스립니다. 다스린다는 말이 역설이에요. 다스린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말이에요. 다스린다는 말은 개성적으로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된다, 이게 바로 자유에요. 이런 나귀 새끼를 영접하면 영생이 임한 겁니다. 여러분 어린 나귀 새끼를 보고 실망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린 건 이 군중들입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우리는 힘의 표적에 목마릅니다. 무언가 큰 열세였던 힘의 관계에서 순식간에 대역전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표적숭배는 힘 숭배이고, 하나님 인격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면 아무리 압제적인 지배자가 군림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웃 사랑할 틈새는 여전히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비정규직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규직을 미워하며 살까요? 아닙니다. 우리끼리 제한된 조건에서 가득 찬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해야 하는데, 교회가 바로 그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아무리 대기업에서 실업자를 양산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모든 평탄작업을 지도하는 성령의 영역 안에서 이웃 사랑 안에서 소득 재분배가 일어나게 해야 하고, 직장 갖기를 원했지만 갖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대규모 영적복지가 일어나서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사랑이 많은 곳이구나,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시는구나, 이렇게 확신시켜주는 동아리가 바로 교회가 돼야겠죠.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을 영접하면서 참자유인 되기를 원하고 이웃 사랑을 성취하면서 율법이 필요 없는 세상 만들기를 열망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께서 강력한 군주로 히틀러처럼 무솔리니처럼 오지 않고, 우리 죄짐을 지는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처럼 축소 지향적으로 오셔서 자기 부인의 왕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 받아서 이 압제적인 세상 한복판에서 힘을 열망하지 말고 사랑을 열망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이 힘들고 때때로 아니꼽고 쓰라림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직장을 지켰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한량없는 위로를 주시고, 이 세상이 아무리 각축하면서 야수적이면서 우리가 냉정한 경쟁자가 되기를 열망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가 되고, 우애와 협동과 환대에 빠진 자가 되기를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오아시스가 되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작동원리가 작동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국교회가 이웃 사랑의 투신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쌀자루를 풀어서 빈민을 먹였던 요셉처럼 한국교회가 창고를 열어서 참새와 제비처럼 모든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겠다고 소리치는 모든 아들딸들을 먹여버리는 결단을 하게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갈릴리 농민의 영생공동체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한 데나리온 벌기 위해서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 길을 열어주시고 문을 열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온유축복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요한형제와 기선자매 사이에 이렇게 아름답고 샛별처럼 빛나는 온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가엘 천사의 호위를 받고 지상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됐습니다. 세상이 낯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온유가 이 세상에서 사랑의 불멸성을 믿고 살아갈 만큼 넉넉한 사랑의 환경이 조성되길 원합니다. 거칠고 야수적인 경쟁 한복판에 내던져지기 전에 하나님 절대 사랑, 절대확신, 절대 평화 만끽 하게 도와주시고 요한형제와 지선자매를 든든히 보살펴주소서. 우리 온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라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중보기도 & 축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중보기도가 필요한 환우들도 보내주시고, 결혼적령기에 있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는 아들딸도 있고, 미가엘 천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 땅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선물을 잉태하고 태교 중인 형제자매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여원석 형제와 채정원 자매님에게 맡겨진 아기, 이길하 목사님 정혜영 자매님에게 맡겨진 아기, 조승우 형제와 인지영 자매에게 맡겨진 아기가 우리에게 곧 태어날 것입니다. 주님 그들이 태어나는 세상은 무서운 세상이고 살벌한 세상이지만 이 무섭고 살벌한 세상을 잊어버릴 만큼 강력한 사랑의 확신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나님 우리교회가 정신 차리게 하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믿게 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게 역사하여 주소서. 귀한 산모들이 순산하도록 복을 내려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감격의 출산을 안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투병중인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부모님도 있습니다. 전진웅 형제님의 어머니, 박민지 자매님의 아버지, 박정아 자매님의 아버지,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생명의 에너지를 다 쏟고 약간 노쇠한 가운데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심겨줄 수 있도록 생활자체도 은혜롭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특별히 우리에게 맡겨진 귀한 과업들이 있습니다. 다가오는 일주일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을 믿으면서 보무당당하게 자유인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연약한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고 자유인의 이름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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