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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도에서의 일본 침략범죄 특히 「朝鮮報國隊」에 대해
사토 쇼진 佐藤正人
1、 國民國家일본의 역사는 타지역과 타국침력의 역사
2、 해남도에서의 조선인 강제로동
3、 해남도로 일본군병사로서 보내진 조선인
4、 해남도에 연행된 조선인 여성 대만인 여성
5、「조선보국대朝鮮報国隊」
①、「보국대」란
②、「조선보국대」학살
③、 지금도 해남도섬에 묻혀 있는 조선인
6、任일본의 국가범죄의 역사적책임
資料 海南島에로의 朝鮮人連行・「朝鮮報国隊」「朝鮮村」
1、國民國家일본의 역사는 타지역과 타국침력의 역사
국민국가 일본은 1868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민국가형성의 과정에서 일본은 식민지와 점령지를 확대했다. 국민국가 일본의 역사는, 타지역·타국침략의 역사이었다.
1895년4월, 「日清講和条約」에 의해 청국은, 일본에 대만· 澎湖列島·遼東半島 및 3억엔을 넘기게 됐다. 이 때, 미야코宮古·야에야마八重山지역 (미야코지마宮古島, 이시가키섬石垣島, 이리오모테도西表島, 요나쿠니도与那国島な등)도 일본 식민지로 여겨졌다.
1904년2월8일 일본 육군 (「한국 임시파견대韓国臨時派遣隊」)이 조선의 인천에 상륙하고 그 다음날 일본해군이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은 「청일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선전포고」없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선전포고」는 2월 10일).
1905년2월 국민국가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했다. 일본이 독도를 약탈하고 대한 제국을 식민지화 (「을미보호조약乙巳保護条約」수락 강요)한 것은 헤레로학살·마지마지학살의 시기이었다. 일본의 독도 점령은 국민국가 일본의 영토 확대의 일환이며 아이누모시리アイヌモシリ 식민지화, 류큐왕국琉球王国 식민지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영토화, 대만·펑후도澎湖島 식민지화, 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 식민지화, 미나미도리시마南鳥島 일본령화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1905년11월 일본정부는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정규군의 점령 하에서 내정권, 재정권, 경찰권을 침해되어 외교권을 빼앗겼다.
「청일전쟁」전후에서 「러일전쟁」전후에 이르는 시기는 미국의 하와이·사모아 식민지화,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다호메이·사모리제국식민지화, 독일의 동남아프리카·마셜 제도 식민지화, 일본·미국·영국·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이탈리아 8개국 연합군의 중국 침략(義和団전쟁)의 시기이었다.
동아프리카 민중이 마지마지전쟁을 싸우고 있던 1906년, 조선에서는 반일의병이 중심이 되어서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제1차 조선독립전쟁). 몇 년에 걸치는 투쟁 속에서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들고 습격하는 일본의 군경에 의해 일본측 문서에 의해도 1만7000명을 넘는 조선민중이 살해되었다 (朝鮮駐箚軍司令部『朝鮮暴徒討伐誌』1913年、附表第二). 조선민중이 제1차 독립전쟁을 싸우고 있는 시기에 대만민중은 1895년 이후 항일반일무장 투쟁을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1910년 6월 22일 일본정부는 拓務局官制를 공포했다. 여기에는 「拓務局은… 대만, 가라후토樺太, 한국에 관한 사항을 統理한다」고 되어 있어 이 시점에서 이미 조선은 대만, 가라후토와 마찬가지로 「統理」의 대상으로 되고 있었다. 그 2개월 후인 1910년 8월에 대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작 후 바로 1914년8월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10월에 독일이 식민지였던 미크로네시아지역 (「마셜제도」, 「Mariana 제도」, 「캐롤라인제도」)을 점령하고 12월에 군정을 실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있어서 제1차 아시아태평양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시기에 대만에서는 원주민족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제1차 아시아태평양전쟁과 대만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1914년에 대만전쟁으로 전사한 일본군병사는 66명, 일본인경관은 71명이었다 (靖国神社社務所『靖国神社忠魂史』第5巻).
1919년에 제국주의제국은 국제연맹을 이용하고 독일에서 빼앗은 토지를 서로 분배했다. 일본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던 태평양 제도 가운데 적도이북의 모든 섬의 「통치」를 국제연맹에서 「위임」받아 해군이 군정을 계속했다. 1922년 4월에 일본정부는 군정을 폐지해 「南洋庁」을 설치했다. 「南洋庁」은 아이누모시리 식민지 기관인 북해도청과 같이 내무성이 관할했다 (1935년에 일본 拓務省내에 「남양군도개발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1936년에 조선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会社에 상당하는 국책회사인 남양척식 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会社가 설립되었다).
일본은 1931년 7월에 오키노도리시마沖之鳥島라 명명한 2평방미터의 방치해 두면 수몰하는 암초를 일본의 영토로 했다. 현재 일본의 최남단으로 여겨지고 있는 암초(沖之鳥島)의 주위 50미터를 콘크리트로 매웠다.
1931년 9월에 일본은 중국 동북부·몽골 동남부에의 무력 침략을 시작하고 1932년 3월에 「만주국満洲国」을 위조하고 지배지역을 확대했다.
1933년 1월 1일에 일본군은 장성長城을 넘어서 중국 河北省에로의 군사침략을 시작했다.
1935년 12월 25일 일본정부·일본군은 괴뢰 「冀東防共自治政府」를 만들고, 1937년 7월 7일의 「盧溝橋事件」후, 1937년 12월 14일에 화북에 괴뢰「임시정부」를, 1938년 3월 28일에 華中에 괴뢰 「유신정부」를 만들고, 1940년 3월 30일에 중국의 점령지역의 괴뢰정부를 통합해서 「중화민국중앙정부」를 만들었다.
1938년 12월 23일 일본정부는 해남도의 아득히 남방 베트남 동남쪽·보르네오섬 북방·필리핀의 팔라완섬 서방에 있는 「신남군도新南群島」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내각회의 결정을 하고 천황 히로히토는 12월 28일에 이를 승인했다.
1939년 2월 0일에 일본 육해군이 해남도 침략을 시작했다. 1940년 7월 26일 일본정부는 내각회의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대동아의 새 질서大東亜の新秩序」를 세우는 것을 국가의 기본방침으로 하는 「기본국책요강基本国策要綱」을 결정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말라야의 고타바루, 필리핀의 다바오, 하와이의 진주만을 거의 동시에 기습 공격하고, 제2차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태평양의 많은 섬이 전장이 되고 많은 주민이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죽었다.
1943년 5월, 일본천황 히로히토와 일본정부 및 일본군중추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스마트라섬, 자바섬,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 등을 「제국의 영토로 결정」했다 (「大東亜政略指導大綱」).
1945년 1월 18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이후 잡아야 할 전쟁지도의 대강」을 결정하고, 19일에 「帝國陸海軍作戦計画大綱」을 히로히토가 승인(재가)했다. 이 대강은「본토결전本土決戦」에 대비해서 오키나와를 미군과의 전장으로 하는 것을 명기하고 있었다. 그 50일후인 3월 27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을 시작하고 이후 3개월 동안에 대부분의 오키나와 민중이 미군과 일본군에 죽음을 당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일본에의 항복 요구의 최종선언)을 수락했다. 이날의 밤 녹음한 「종전의 조칙終戦の詔勅」에서 히로히토는 아직도 제2차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쟁목적을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이었다고 하면서 「충량한 爾臣民 忠良なる爾臣民」에 대하여 「신주의 불멸神州の不滅」을 믿을 것을 요구했다.
2 해남도에서의 조선인 강제로동
일본기업은 일본 점령하의 해남도에서 일본군과 함께 자원을 약탈하고 주민을 학대하고 조선이나 대만·중국 대륙각지에서 연행한 사람들을 혹사하고 폭행 죽음·사고사·병사·아사시켰다. 일본기업의 경제침략은 일본군의 군사침략과 결부되어 있었다.
1926년 이후 조선에서 대규모 수력발전소나 비료공장, 유지공장, 화학공장, 화약제조 공장, 대두조미료제조공장 등을 경영하고 자원·노동력을 약탈하고 있었던 일본질소日本窒素는 1940년4월부터 해남도에 침입하고 해남도 서부의 石碌鉱山의 철광석약탈을 시작했다.
「조선보국대朝鮮報国隊」들은 일본군용 비행장건설, 항만건설, 철도·철교건설, 特攻艇格納用洞窟건설 등을 했고, 石碌鉱山이나 이시하라산업石原産業이 경영하는 田独鉱山에서도 일했다.
田独鉱山에 세워져 있는 「田独万人坑死難砿工紀念碑」에는, 「조선, 인도, 대만, 홍콩 및 해남도 각지에서 연행되어 온 노동자가 여기에서 학대되어 혹사되어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3、해남도로 일본군병사로서 보내진 조선인
1943년 7월 27일 일본정부는 「칙령」 제608호로서 「해군 특별지원병령」을 내보냈다.
그 제1조에는,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은 제국신민인 남자로서 해군의 병역에 복무하기를 지원하는 자는 해군대신이 정하는 데로 銓衡한 후에 특별 지원병으로 채용하고 해군병적에 편입한다」고 씌어져 있었다.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은 제국신민인 남자」는 당시 국민국가 일본이 식민지로 여겼던 조선과 대만의 「남자」이었다. 「해군특별지원병령海軍特別志願兵令」은 조선이나 대만의 지사나 경찰서장이 16세∼21세의 조선과 대만의 청년을 강제적으로 「특별지원병」이라는 일본해군의 병사로 만드는 「칙령勅令」이었다.
조선에서 「해군특별지원병령」 (「칙령」제608호)이 1943년 8월 1일에 시행되고 나서 2개월 후인 10월에 최초(제1기)의 「지원자」 1000명이 진해鎮海의 「조선총독부해군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하고 6개월간의 「훈련」을 받은 뒤 「해병단」에 입단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정부·일본군은 장기간 「훈련」하는 여유가 없어지고「조선 총독부해군지원병훈련소」를 폐지하고,「훈련」없이 바로「지원자」를 「해병단」에 입단시켰다.
해남도에 일본해군 병사로서 오게 된 최초의 조선인은 「진해해병단」에 입단한 「해군 특별지원병」의 제1기생이었다. 이 사람들이 탄 남방을 향한 배는 대만과 필리핀의 사이 바시해협에서 침몰하였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마닐라를 경유해서 베트남의 사이공에 가고 사이공부터 해남도로 갔다. 그들이 해남도에 상륙한 것은 1944년 중간이라고 생각된다.
1939년 2월에 해남도에 기습 상륙한 일본해군은 무력행사를 집중적으로 하는 「Y작전」을 9회 하고 항일반일무장 부대를 제압했고, 항일반일투쟁의 심화를 저지하려고 주민학살을 되풀이했다 (「Y1작전」:1939년2월∼11월, 「Y2작전」:1940년2월∼4월, 「Y3작전」:1941년2월22일∼3월31일, 「Y4작전」:1941년8월9일∼8월30일, 「Y5작전」:1941년11월25일∼1942년1월25일, 「Y6작전」:1442년6월, 「Y7작전」:1942년11월∼1943년6월, 「Y8작전」:1943년12월에서 1년간 단속적으로, 「Y9작전」:1944년 12월).
일본해군은「Y작전」 기간뿐만 아니라 6년 반 동안의 점령 전 기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해남도 각지에서 주민학살, 촌락파괴, 방화, 폭행, 약탈, 인권침해를 거듭했다. 「해군 특별지원병」의 제1기생이 해남도에 일본해군 병사로서 상륙한 것은 일본해군이 해남도에서 「Y8작전」을 하고 있는 한가운데였다고 생각된다.
1946년5월에 일본 육군소장 富田直亮(第23軍司令官田中九一代理)의 이름으로 내놓은 제23군 사령부의 「상황보고」 (일본 방위 연구소도서관소장)의 별표제1 「華南地区第二十三軍隷属(指揮)下部隊(海軍部隊及居留民을포함)人員一覧表」에는「해남도지구」의 육군부대는 68명, 해군부대는 3만3475명, 거류민은 1만1935명, 계4만5478명이며, 육군부대는 전원이 「내지적内地籍」, 해군부대는「내지적」 1만7674명, 「대만적」 1만5068명, 「한적」 733명, 거류민은, 「내지적」 5214명, 「대만적」 5488명, 「한적韓籍」 1233명이라 씌어져 있다.
여기서 당시 해남도에 있었던 조선인은 733명+1233명=1966명이었다고 돼 있다.
1944년 11월부터 일본의 패전까지 해남경비부사령장관이었던 오가게이지로伍賀啓次郎가 귀국 후, 1946년 4월 10일자로 일본정부에 제출한 「귀환보고서」 (일본 방위 연구소도서관소장)에는 “일본 패전 시에 해남도에 있었던 조선인의 총수는 1620명이며 그중 군인은 175명 군속은 110명 「기타」는 1335명이었다” 고 나와 있다.
거기에서는 제15경비대:군인 36명·군속 2명, 제16경비대:군인 21명·군속 4명, 요코스카 진수부제4특별육전대:군인 52명·군속 5명, 사세보 진수부 제8특별육전대:군인 22명·군속 1명, 마이즈루 진수부 제1특별육전대:군인 44명, 군수부·운수부:군속 31명, 시설부:군속 5명, 특무부:군속 9명, 기상부:군속 1명, 「조선보국대」:군속 52명· 「기타」 606명, 거류민: 「기타」 729명으로 되여 있다.
일본 패전시에 해남도에 있었던 조선인 군인·군속은, 「華南地区第二十三軍隷属(指揮)下部隊(海軍部隊及居留民을포함)人員一覧表」에서는 733명, 오가게이지로伍賀啓次郎의 「귀환 보고서」에서는 285명 (군인175명·군속110명)로 되어 있어 크게 차이가 있다.
해남도에 조선인 몇 명이 일본해군 병사로서 보내진지는 명확치 않다.
경산瓊山의 포로수용소에는 제15경비대와 마이즈루 진수부 제1특별육전대의 장병이, 삼아三亜의 포로수용소에는 제16경비대와 요코스카 진수부 제4특별육전대와 사세보 진수 부 제8특별육전의 장병이 수용되고 있었다.
오가게이지로伍賀啓次郎의 「귀환보고서」의 「朝鮮籍民ノ移管」이라고 제목 절에는
「집중안하는 거류민을 중심으로 조선인민연합회를 결성하고 한국독립광복군 편성 등을 표방 활발한 운동을 개시하고 특히 집중하는 군인군속에 이야기하기 때문에 군인군속 중 일부 사람은 일본군인군속과 함께 집결하기를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자주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1945년 10월 중순에는 제 15경비대의 특별지원병 19명이 조선인민연합회의 책동에 호응하고 연합회로 도망갔다」 (원문은 「원호」사용) 고 씌어져 있다.
해남경비부의 이름으로 1946년 3월 1일자로 내놓은 「海南島地区局地処理要報(居留民関係)」에는
「朝籍民은 終戰前에 따로 모임을 조직 안했으나 終戰後 獨立의 聲에 응하고 朝鮮人民會(이후 韓國人民聯合會라 자칭)를 조직했다. 그들은 台灣籍民에 비해 그 인원도 많아 그 대부분은 개발공사 노무자이며 지식분자이다. 그들의 일부는 온건하고 행동을 조심하고 귀환할 때까지는 일본인과 행동을 같이 하지만 대부분은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되어 종래의 종속관계를 끝내고 독립된 자기 생활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선인민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종전직후 우리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지만 11월까지의 우리 배급물자도 모두 소비하고 생활이 어려우니 중국의 식량지급 없는 식량문제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작년 12월1일 海口인민회장 등 수명은 해남해군특무부 미조구치 정무국장과 회담 시에 피살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朝鮮籍居留民에 대한 대부분의 中国側의 태도는 台湾籍居留民에 대한 것과 같으며 또 회사 종업원애 대해서도 각 회사마다 대만적 거류민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다. 鮮籍民은 종전 후 상당한 인구이동이 있어 海口에 약 170명, 楡林三亜地区에 237명이 집결하고 있다」고 씌어져 있다.
4、해남도에 연행된 조선인 여성 대만인 여성
2000년 3월 우리들은 해남도 남부의 보정保亭에서 조선인여성 박래순 씨 (1912학년)의 무덤을 방문했다. 보정현공로국保亭県公路局이 세운 묘지에는 「生於一九一二年卒於一九九五年」, 「祖妣韓国僑工来順朴氏墓」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박래순씨는 일본 군함에 태워지고 1942년 2월에 해남도 북부의 海口에 왔으며, 海口의 「위안소」에 수용되었고1943년 1월에는 해남도 남부 三亜紅沙의 「위안소」에 옮겨졌다. 일본 패전 후에도 고향에 되돌아오지 않고 保亭県의 公路局에서 일했고 1995년에 돌아가시고 보정 교외에 매장되었다.
2002년 10월 우리들은 보정에서 保亭文史資料工作委員会 주임이었던 장응용張応勇씨 (1940년생)한테서 박래순 씨 (1912년생)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장응용 씨는
「일본의 죄악사를 조사하면서 박래순 씨를 알았다. 몇 번이나 방문하고 드디어 조금 씩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으면 영사관을 통해서 이야기해 드린다고 했지만 여기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여기서 죽는다고 하셨다」고 이야기했다. 2003년 7월 우리들은 장응용 씨에게 박래순 씨가 죽을 때까지 살고 있었던 곳(보정 정현공로국숙사)도 안내받았다.
해남도에 연행되어 「위안부」로 만들어진 조선인 여성의 수는 명확치 않다. 우리들의 조사와 해남도에서 발행되고 있는 『文史史料』등의 기술을 종합하면 海口, 三亜, 石碌, 藤橋, 陵水 등의 「위안소」에 수용되고 있었던 조선인 여성은 70∼80명이다.
1945년에 일본해군 「삼아 항공대三亜航空隊」의 제2중대장이었던 楢原留次씨에 의하면, 비행장 가까이의 「쓰바사 소つばさ荘」라고 하는 이름의 「위안소」에 조선인 여성 15명이 「수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楢原留次「海軍経歴과 海南島勤務」、『三亜航空基地』三亜空戦友会事務所刊、1980年).
2003년 봄에 우리들은 경상남도 출생인 박래순 씨가 2년 7개월간 수용되던 紅沙의 「위안소」흔적을 방문했다.
어렸을 때로부터 그 근처에 살고 있었던 蘇殷貞 씨 (1931년생)는
「건물은 세개 있었다. 일반병사는 토 일, 장교는 금요일에 왔다. 일반인은 거기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조선인의 여성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긴 스커트이었다. (치마·저고리의 그림을 그리고 보여 주면서) 이것이다. 이런 옷을 입고 있었다. 조선인 여성들은 머리가 길었다. 일본인은 머리가 짧다. “아리랑”은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蘇殷貞 씨는 박래순 씨를 본 적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박래순 씨는 고향에 되돌아오지 못하고, 1995년에 해남도에서 병사했다. 같은 「위안소」에 있었던 대만의 盧満妹(1926년생)은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일본국을 피고로 하는 재판 투쟁을 1999년에 시작했다.
「간호원이 되지 않겠냐고 속아서 高尾에서 군함을 타고 해남도에 오게 되었고 紅沙의 「위안소」에 수용됐다. 거기에는 30여명의 여성이 있었고 30명이 대만인이고 조선인 여성이나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리들은 2004년2월에 박래순 씨의 고향 경상남도 함안을 방문했다. 박래순 씨 집이 있었던 장소는 공터가 되고 있었다.
盧満妹 씨는 2011년 8월에 돌아가셨다.
5, 「조선보국대朝鮮報国隊」
①「보국대」란
1942연말경부터 일본해군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조선의 형무소에서 죄수를 해남도에 강제 연행하는 책동을 시작했다. 해군의 요청에 응한 조선 총독부법무국은 1943년3월부터 조선 각지 형무소에서 수감기간이 몇 년 남은 죄수들을 선택해서 「남방파견 조선 보국대」를 조직하고 해남도에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 지배하의 조선에서 조선인을 「국민근로 보국대」로 만들고 「군사상 특히 필요한 토목건축에 관한 업무」등을 하게 하는 책동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시작 직전 1941년 12월 1일부터 시작할 수 있었지만 이 때에는 「법령에 의해 구금중인 자」는 제외되고 있었다 (「국민근로 보국협력령)제10조).
죄수를 「남방」의 섬(트럭도, 데니얀도 등)에 보내서 강제 노동 시키는 책동은 일본에서는 1939연말부터 실행되었지만 조선에서는 1943년 봄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작 후, 노동력 부족이 결정적으로 된 1943년까지 조선인 옥중자의 「남방파견」이 강행되지 않았던 것은 일본정부·일본군이 조선인의 강고한 반항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내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일본정부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공포한 것도 1943년 봄 (3월 1일)이었다 (8월1일 시행).
②「조선보국대」학살
1943∼44년에 조선의 각지 형무소에서 「남방파견 보국대」 (「조선 보국대」」의 대원으로서 해남도에 보내진 조선인 죄수들은 해남도에서 광석채굴, 비행장건설, 도로건설, 교량 건설 등에 존사하고 대부분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였다.
일본 패전 직전까지 살아 남아 있었던 「조선보국대」들은 해남도 남부의 삼아시 교외의 南丁촌에 모아지고, 군용도로건설, 군용동굴건설 등을 하게 된 뒤 1945년 여름에 죽음을 당했다. 그들의 이름은 아직 한사람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이 없어지고 나서 南丁촌은 거기에서 죽음을 당한 조선인들을 애도하고 「조선촌」이라고 개명되었다. 「조선촌」에는 지금도 죽음을 당한 조선인이 묻어져 있다.
「조선촌」에서의 조선인대학살을 마을사람들이 목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학살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숨겼다.
③ 지금도 해남도에 묻혀 있는 조선인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2002년 4월 17일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2003년 5월 5일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① 「조선촌」에 묻어져 있는 사람들의 유골의 사인을 해명하면 좋겠다 ② 「조선촌」의 유골의 처우를 국가 프로젝트로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2003년 11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협의를 하고 「조선촌」의 유골 「발굴」 준비를 진척시켰다. 유골감정인도 확정되었다. 그러나 2004년 2월 「발굴」 직전에 땅권 소유자(한국인)가 갑자기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중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9월15일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일본정부에 「“남방파견 조선 보국대”의 진상구명」을 문서로 요청했다. 이에 대해 10월 6일자로 후생 노동성 직업안정국 총무과로부터「후생 노동성에서는 「남방파견 조선 보고대」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요청에 대하여 답편할 수 없습니다」 고 하는 회답이 있었을 뿐이며, 왜 없는 지, 어떤 조사를 한 것인지 전혀 설명이 없었다.
한국 민중운동이 심화돼 가는 가운데에서 2004년 2월에 「일제강점하강제 동원피해진상구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한국국회에서 의결되어, 11월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의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국가기구로서 설치되었다.
2005년4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 원회에게 일제강점하의 해남도에 있어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학살 피해진상규명을 공동으로 하는 것, 그를 위해 「조선촌」발굴을 하는 것을 제언했다. 이 제언에 진상규명위원회는 동의했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진상규명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2005년6월23일에 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하여 하이난섬에 있어서의 일본군의 「조선촌」에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조사청구를 했다. 이 청구는 같은 해 9월 2일에 수리되었지만 진상구명위원회는 언제까지나 해남도에서의 조직적 조사를 하려고 하지 않고 「조선촌」발굴 준비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1998년 6월에서 2006년 4월까지 30여회 「조선촌」을 방문해 온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언제까지나 방치해 둘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2006년 5월 2일에 「조선촌」의 유골에 대한 첫 과학적인 「발굴」을 모임만으로 시도했다.
이는 「조선촌」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사실을 확인하고 ①매장 양식 ②매장 상태 ③사체상태 ④유골 ⑤유물상태 ⑥유물 내용 등을 해석·감정·분석함으로써 될 수 있는한 사인을 특정하고 조선인인 것인가 아닌가를 매장 양식과 매장 상태의 분석에 의해 가능한 한 밝히고 공적기관에 의한 전면적 「발굴」을 촉구하기 위해서이었다.
「조선촌」에 묻어져 있는 사람들은 유골이 되어서 일본의 침략 범죄의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조선촌」에서의 「발굴」은 일본의 침략사의 발굴, 일본의 침략 범죄의 발굴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발굴」은 중국 해남성(海南省)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2006년 7월 6일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다큐멘터리 『“조선보국대”』를 완성하고 다음날 도쿄의 고려박물관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고려박물관에서는 5월17일∼7월16일에 특별전시 『하이난섬에서 일본은 무엇을 했는가 - 전시 조선인 강제 노동·학살 일본군 “위안부”』가 개최되고 있었다.
2008년 여름 「조선촌」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개시되어 조선인의 유골이 묻어져 있는 부근에서 건설공사용의 건물 등이 건설되면서 유골의 일부가 지표에 나타났다.
2012년11월3일 「조선촌」을 방문한 우리들은 조선인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70∼80%가 두터운 흙더미로 덮어져 벽에 둘러싸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는 「秋苑陶芸園」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수목이 심어지고 대형의 도자기 항아리가 두어져 벽돌 조형의 가마, 作陶場·전시장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조선인의 유골의 대부분은 그 아래에 묻혀진 채가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벽의 밖에 남겨진 20∼30%의 토지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고속도로는 완성되고 「조선촌」은 분단되고 있었다.
일제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후에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 동원 희생자지원 위원회)은 「조선촌」 유골을 계속해서 방치해 「조선보국대」에 관계하는 진상구명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6, 일본의 국가범죄의 역사적 책임
1939년2월10일 미명 사람들이 평화로이 살고 있었던 해남도에 일본군이 기습 상륙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대만 식민지화, 조선 식민지화, 「만주」식민지화……때와 같이 해남도 침략 때에도 점령지의 확대를 기뻐하고 군사행동을 지지했다. 일본정부·일본군·일본 기업은 해남도에서도 민중을 살상하고 집을 태우고 가축이나 물건을 빼앗았다. 既耕地를 포함하는 토지를 빼앗았다. 자원(광산자원, 수산자원, 삼림자원)을 빼앗았다.
자원약탈·군용시설 건설(비행장, 항만, 도로, 철도……)등을 위해서 해남도 민중에게 노동을 강제했다. 해남도 민중을 성노예로 했다. 해남도의 자연을 파괴했다. 「히노마루」·「기미가요」·일본어를 해남도 민중에게 강요했다. 군표를 난발하고 아편 재배를 했다.
1939년2월에서 1945년8월까지의 6년반의 사이에 해남도에서 일본군·일본 기업이 살해한 아시아 민중은 일본군문서와 일본 기업 문서에 의해도 7만명이상이다.
일본의 해남도 침략의 시대는 해남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시대이었다.
일본 민중이 왜 해남도 침략을 막을 수 없었던가 하는 문제는 일본 민중이 왜 조선 식민지화를 막을 수 없었던가 하는 문제, 지금 왜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세계의 민중이 계속해서 허락하고 있는 가는 문제와 연결된다.
나는 일본 민중의 한사람으로서 해남도에서의 일본의 국가범죄를 총체적으로 상세하게 해명하는 동시에 아시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역사에 배우면서 국민국가형성 기 이래의 일본국가의 침략 책임을 추구하고 현재 일본의 다른 지역 타국침략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구조를 파괴하는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資料 海南島への朝鮮人連行・「朝鮮報国隊」「朝鮮村」
孫惠公「接見日本“和平之船”訪華団講話」、中国人民政治協商会議三亜市委員会編『三亜文史』3。
羊杰臣「日軍侵略崖県始末」,『三亜文史』4(「日軍侵略崖県及其暴行紀実」と改題されて『三亜文史』5に再録)。
陳作平「日本侵略者在崖県的罪行」、『三亜文史』5。
三亜市茘枝溝鎭人民政府「千人坑簡介」、2000年1月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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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靜美「海南島の場合(とくに「朝鮮村」と「朝鮮報国隊」について)」(2000年5月24日、ソウルでの第9次国際歴史教科書学術会議第3主題「日本에 있어서의 過去清算問題」における報告(「日帝期의 強制連行 問題에 関하여」のなかで)。『各国의 歴史教科書에 비친 過去清算問題』国際教科書研究所、2000年5月。
金靜美「海南島・「朝鮮村」で 2001年1月」、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李基允・裵相度)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会報』33号、2001年3月。
佐藤正人「三重県紀和町の紀州鉱山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の跡をたずねて」、『パトローネ』28号、1997年1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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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藤正人「日本の国境と「周辺」の歴史 日本人はクナシリ・与那国・独島・海南島でなにをしたか」、日本の侵略の歴史を知るわかやまの会『第二周年活動報告集』1999年6月。
佐藤正人「国民国家日本의 領土와 「周辺」」、朴慶植先生追悼論文集『近現代韓日関係와 在日同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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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靜美・佐藤正人「海南島에 있어서의 日本軍隊性奴隷制度와 強制連行・強制労働 2002年10月海南島「現地調査」報告」、韓国挺身隊研究所『2002年国外居住日本軍‘慰安婦’被害者実態調査』女性部権益企画課、2002年12月。
金靜美「国民国家日本の他地域・他国における暴力――海南島の場合――」、『東北亜歴史의 諸問題』(南陽洪鍾泌博士定年退任記念論叢)、2003年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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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勝一「中国海南島에強制連行된韓国人帰還問題 朝鮮報国隊와慰安婦를中心으로」、『解放後海外韓人의帰還問題研究』国民大学校韓国学研究所、2003年5月。
『해외 독립운동-강제징용 유적지 답사자료집』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3분과 5주제 ‘일제의 조선지배와 한민족의 대응’ 팀, 일시:2003년7월 16―22일, 장소: 중국 해남도, 광동성 광주。 (『海外独立運動・強制徴用遺跡地 踏査資料集』)韓日歴史共同研究委員会3分科5主題‘日帝の朝鮮支配と漢民族の対応’チーム、日時:2003年7月16―22日、場所:中国海南島、廣東省広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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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金靜美、佐藤正人、小谷英治)「海南島2004年12月~2005年1月 あらたな共同作業をめざして」、『パトローネ』61号、2005年4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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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藤正人「海南島と“カラフト”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真相糾明」、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李基允・裵相度)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会報』41号、2005年5月。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海南島2006年5月 「朝鮮村試掘」にいたるまで、そして、それから」、『パトローネ』67号、2006年10月。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制作『《写真集》日本の海南島侵略と抗日反日闘争』写真の会パトローネ、2007年2月。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編刊『会報』創刊号、2008年2月。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国民国家日本の海南島侵略犯罪史認識と伝達」、大阪人権博物館編刊『大阪人権博物館紀要』第10号、2008年3月1日刊)。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編刊『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創刊号、2008年8月。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編刊『会報』第2号、2009年2月。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編刊『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第2号・第3号、2011年2月。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編刊『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第4号・第5号、2016年5月。
佐藤正人「국민국가 일본의 침략와 대결하는 민준운동」、『역사와 책임』5号、民族問題研究所、2013年8月。
斉藤日出治「海南島における日本人の「学術調査研究」と植民地責任」、近畿大学日本文化研究所編『否定と肯定の文脈』風媒社、2013年3月。
斉藤日出治「「戦後」という日本社会の歴史認識 海南島の住民虐殺と沖縄の強制集団死との結び目から見えてくるもの」、近畿大学日本文化研究所編『日本文化の明と暗』風媒社、2014年3月。
中共海南省委党史研究室編『海南省重要革命遺祉通覧』(「全国革命遺址普査成果叢書」第22巻)、海南出版社、2014年3月。
朱振华捜集整理『血和泪的记录 海南万宁月塘村三月廿一日惨案专辑』月塘村、2014年8月。
中共海南省委党史研究所室編『海南省抗日戦争時期人口傷亡和財産損失』中共党史出版社、2015年8月。
海南省文化交流促進会编『真相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17年(27次)調査足跡』南海出版公司、2015年8月。
海南省文化交流促進会著『控訴 採訪九位海南慰安婦実録』南海出版公司、2015年10月。
海南省文化交流促進会著『忘記過去意味着背叛』南海出版公司、2015年12月。
「京城刑務所假出獄関係書類」(日帝時代朝鮮の監獄の「假出獄関係書類」。「海南島派遣報国隊」として海南島に連行された人の個別の「仮出獄」にかんする京城刑務所の文書群)。
朝鮮司法保護協会『朝鮮司法保護』1941年3月、朝鮮司法保護事業令(「勅令」)。
司法省保護局「思想犯保護対象者南方動員実施要綱」(1942年8月31日付)、大久保達正他編『××社会経済史料集成』第16巻(海軍省資料16)、大東文化大学東洋研究所、1991年9月。
とうま「南方派遣報国隊の結成」、『治刑』(朝鮮総督府法務局行刑課内治刑協会発行)1943年3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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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藤宇太郎・伊東恵「対談 海南島の印象」、『治刑』1943年7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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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岡亀吉「南方派遣報国隊の錬成」、『治刑』1943年8月号。
阿部敬夫「南方通信」、『治刑』1943年10月号。
いとう生「治刑雑想」、『治刑』1943年10月号。
「治刑情報」、『治刑』1943年11月号。
藤間忠顯「回顧と展望」、『治刑』1943年12月号。
小林長蔵・藤間忠顯他「座談会 報国隊を語る」、『治刑』1944年3月号。
貴島南星(本名、貞四)「我等は挺身する」、『治刑』1944年3月号。
金本勇治「医療班の一日」、『治刑』1944年3月号。
白川興一「隊員と共に」、『治刑』1944年3月号。
古賀九郎「現地の武道」、『治刑』1944年3月号。
坂本敏夫「海南島の印象」、『治刑』1944年7・8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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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間忠顯「台湾及海南島視察記」一、二、『治刑』1944年9・10月号、11・12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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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総督府受刑者海南島出役ニ伴フ監督職員等増員ニ関スル件ヲ定ム」(公文類聚・第六十七編・1943年・第三十五巻・官職二十九・官制二十九〈朝鮮総督府四〉)1943年4月19日。
「台湾ニ於ケル受刑者構外作業ニ伴フ増員ニ関スル件」(公文類聚・第六十七編・1943年・第四十四巻・官職三十八・官制三十八〈台湾総督府六〉)1943年9月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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防衛庁防衛研修所戦史室編『中部太平洋方面海軍作戦〈1〉』(戦史叢書38)、1970年。
教誨百年編纂委員会編『教誨百年』上、浄土真宗本願寺派本願寺・真宗大谷派本願寺、1974年4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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窪田精『流人島にて』新日本出版社、1992年。
北川幸一『墓標なき島 ある受刑者の“戦争”』光出版印刷株式会社、1988年4月。
島田興生『還らざる楽園』小学館、1994年。
郡義典『マウリ・キリバス』近代文芸社、1996年。
衣笠一『海南島派遣の朝鮮報国隊始末記』(1997年補筆改定)。
江川きく(中里チヨ)「撃沈」、医療文芸集団編『白の墓碑銘』東邦出版社、1968年6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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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来順口述、張応勇整理「不堪回首的往事 一個“慰安婦”的自述」、政協海南省保亭黎族苗族自治県委員会文史資料工作委員会編『保亭文史』第9輯(紀念抗日戦争勝利50周年)、1995年8月。
朴来順口述、張応勇整理「我被騙逼当日軍“慰安婦”的経歴」、海南省政協文史資料委員会編『海南文史資料』第11輯(『鉄蹄下的腥風血雨――日軍侵瓊暴行実録』下)、海南出版社、1995年8月。
西野瑠美子「私が看た海南島海軍病院の「慰安婦」たち 元海軍従軍看護婦の体験」、『週刊 金曜日』1997年5月23日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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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挺身隊研究所・韓国挺身隊対策協議会編『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3、図
書出版한을(서을)、1999年10月。
ドキュメンタ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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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安東MBC『紀伊半島에 감추어진 진실』(『紀伊半島に隠された真実』。1998.10.放映)。
韓国KBS『海南島의 朝鮮村』(ニュース。2000.3.放映)。
韓国MBC『하이난섬의 大虐殺』2001.3.1.放映。3・1独立運動記念特別ドキュメンタリー。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企画・制作『海南島で日本人はなにをやったか! 日本軍の海南島侵略と抗日闘争① “田独鉱山・「朝鮮村」”』2003年7月。23分。
韓国KBS『하이난섬 대학살 "조국은 그들을 두번 버렸다"』2003.9.6.放映。“追跡60分”)。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企画・制作『日本は海南島でなにをやったか』2003年10月。3分。
The Society for clarifying Crimes of the Kishu-Mine『 What did the Japanese Army do in Hainan-dao?』2004年4月。3分。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企画・制作『日本が占領した海南島で 60年まえは昨日のこと』第1版、2004年7月。65分。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회企画・制作『일본이 점령한 海南島에서 60년전은 어제의 일』2004年7月、65分。
査明紀州鉱山事実真相自治会企画・制作『日本占領下的海南島 60年前如昨昔』、2004年12月。65分。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企画・制作『“朝鮮報国隊”』2006年7月。60分。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企画・制作『海南島月塘村虐殺』新版、2008年。
新聞報道
「不能忘却的記憶――与韓国老人張達雄探訪侵瓊日軍暴行遺跡」(満国徽、華暁東記者)、『海南日報』1998年2月24日。
「中國하이난島서 한국인 학살」(朴雅蘭記者)、『朝鮮日報』1998年3月2日。
「“日帝만행 해방후 더 잔혹했다”」『佛敎新聞』1998年3月3日。
「旧日本軍が朝鮮人連行者1000人を虐殺」『民族時報』1998年3月11日。
「三亜朝鮮村的亡霊在哭泣」(邢中正記者)、『三亜晨報』(中共三亜市委員会機関報)、2000年6月24日。
「海南朝鮮村亡霊泣訴日軍滔天罪」(邢中正記者)、『羊城晩報』2000年7月24日。
「鉄蹄下的海南“慰安婦”」(連載4回。林瑩・余家亮・周楴記者)、『南国都市報』2001年12月3日(1.2)、12月9日(3)、12月10日(4)。
「日軍労工的悲惨経歴」(余家亮記者)、『南国都市報』2002年3月31日。
「韩日学者赴海南岛寻找韩籍“慰安妇”幸存者」人民网 2002年10月17日。
「“海南島の悲劇”真相は」、『北海道新聞』2003年2月21日夕刊。
「日韓学者調査日軍侵瓊史証」(連載3回。陳超・許春媚記者)、『海南日報』2003年3月28日、3月31日、4月4日。
「日韩学者第六次赴海南调查日军侵略史证」中国新闻网 2003年3月29日。
「‘하이난섬 징용’ 유족 찾습니다 재일교포·일 시민운동가 “학살 진상규명에 필요”」(양선아記者)、『한겨레』2003年5月31日。
「“這些暴行不能原諒!” ——“千人坑”纪录片回到“千人坑”」(陳超・袁鋒記者)、『海南日報』2005年1月1日。
「日軍侵瓊調査記録片在海口放映」(陳超・袁鋒記者)、『海南日報』2005年1月5日。
정미란「日軍만행 현장, 해남도 '朝鮮族千人坑'을 아시나요? 일제 강제징용 한국인 1천여명 학살·매몰 현장」、konas.net、2005年4月7日。
「『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のか』出版 日本軍占領下の実態暴く」、『伊勢新聞』2005年6月29日。
「日韓学者再次来瓊掲露日軍侵華暴行 本月13日将在三亜回新村放映日軍侵略海南島記録」(許欣記者)、『南国都市報』2005年9月9日。
「中国・海南島占領の実態暴く」(奥山隆也記者)、『伊勢新聞』2005年12月27日。
「日韓三位学者再次来海南島調査日軍侵瓊真相」(王辛莉記者)、中国新聞社、2006年3月23日。
「海南島 無念の骨探る」(佐藤純記者)、『朝日新聞』西部版、2006年4月4日夕刊。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市民や研究者らが設立へ」(中村一成記者) 、『毎日新聞』大阪版、2007年8月5日。
김경민「주목해야 할 中 해남도 해군기지」、konas.net、2008年7月2日。
「조선보국대(朝鮮報國隊)(DVD)」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調査2課記録管理팀、2008年7月15日。
「보국대(報國隊)를 아시나요?」、daum.net、2009年3月5日。
「일제 강제동원 피해상담 및 지원 문의는 110콜센터로 하세요」、konas.net、2009年8月14日。
이현오「日帝 강제학살 천인갱(千人坑) 영령 추모제 거행」、konas.net、 2010年3月27日。
「형무소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다 학살 ‘한 맺힌 유골들’ 중국 해남도 ‘조선촌’
이 증언하는 일제의 만행」(사토 쇼진)、『경향신문』、2010年7月12日。
「日本に父奪われた 朝鮮人軍属らの遺族、証言」(千種辰弥記者)、『朝日新聞』(大阪版)2010年8月22日朝刊。
「保亭:正义使者张应勇 让“活历史”发出吼声」(林莹记者)、『南国都市报』2010年12月2日。
이영찬「천인갱(千人坑)사건을 국가는 아는가? 영관장교연합회, 인천 용주사 '일제 강제학살 천인갱 영령 추모제' 거행」、konas.net、2012年3月28日。
「〔인터뷰〕하이난섬 학살 현장을 말하다」、konas.net、2012年4月1日。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서 희망의 빛이 되소서” 일제의 만행 ‘천인갱’의 진실」 『국방일보』、2012年8月14日。
「海南島の死「事実知りたい」」(多知川節子記者)、『朝日新聞』(大阪版)2011年8月30日朝刊。
「日韩学者来琼调查日军侵琼史」『海南日报』、2012年10月31日。
「日韩学者祭拜日军侵琼时期杀害朝鲜劳工“千人坑”」「中国新闻网」、2012年11月5日。
「日韓學者祭拜日軍侵瓊時期被殘殺朝鮮勞工」「中国新闻网」、中新視頻 CNSTV、2012年11月8日。
「搜集日本侵琼证据」『海南日报』、2013年11年4日。
「追寻“真相”」『海南日報』、2015年9月20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