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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집회
[2017 우리의 선택 인격 회복]
1. 십계명을 통한 인격 회복(신5:6-15)
2017년 5월 5일 김치현 목사
[신명기 5:6~10]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번 집회 주제는 <인격회복>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와 계획은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나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나 새 예루살렘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나 목적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옛것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를 향한 계획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십계명은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사람을 바른 위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를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켜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된 메시지가 유대인들의 잘못 전해서 하나님을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분으로 세상에 잘못 소개가 되게 된 것이다. 유독 중동에서 난 종교들, 유대교, 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이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 지방에서 난 사람들이 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나만 옳다거나 나만 잘났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세계의 왕따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아주 괜찮다 싶어서 보면 유대인이다. 그런데 그 탁월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면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자기들만 가지는 우월감이 되면 아무도 좋아할 사람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디 나가서 우리 아빠가 최고라고 하고 다니면 다섯 살짜리 철수 취급을 받는다.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절대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된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된다면, 배타적일 필요도 편협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좋은 것이 있구나하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 민족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 씨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온 종교가 복의 근원이 아니고 이 세상에 화근이 되고 있다.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그런 폐해를 아셨지만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재해석하셨다. 율법은 축복의 원천이 되고 만민에게 복이 흐르는 물길이 되도록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을 제대로 경험한다면 우리 인생이 만민에게 축복의 물길이 되지 않겠는가. 축복의 통로가 되고 우리를 통해서 흘러내리는 것이 누구라도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런 물이 될 수가 있다. 그렇게 되자면 정말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 외에 세상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깊이 확신한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복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당연히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으로서 가는 길에 대해서 감사하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나의 그런 확신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무신론자에게는 거슬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왜 너만 옳다고 하느냐?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살아가는 방식이 정말 다양한데 왜 길이 하나라고 하느냐? 이런 물음에 대해서 우리가 대답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절대적인 길을 버리지 않고 이것을 내 인생에 길로 생각하고 산다면, 왜 그것만이 길이냐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런데 그 대답이 “다른 것은 다 우상이고 하나님만 진짜 신이며,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초기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고 다닌 사람들이 성자 취급을 받았지만 요즘 길거리 지나가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사회적 공해일 수 있다. 저 사람들이 정말 복음을 전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만족인지 뭔지 모를 정도이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듣겠는가.
이 좋은 것을, 이 복된 것을 다른 사람이 복으로 알도록 우리가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이 내가 살 길이다. 나 혼자만 이것이 세상에 없는 복이라고 알고 살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는 말씀했다.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해서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참으로 복되게 해석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내리게 하는 물길이 되기를 소망한다.
십계명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종 되었던 자리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 이 집 종이 되었다가 저 집 종이 되게 하려고 인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것을 비유하면서, 독수리가 제 새끼를 양육하는 것같이 내가 너희를 그렇게 양육했다고 한다. 독수리 새끼는 장차 하늘의 제왕이 되어야 하니까 험하게 양육한다. 둥지에 오래 있지 못하게 둥지에서 나오도록 너풀거려서 고운 털들이 다 날아가게 만들고, 새끼인데도 가시에 찔려서 나올 수밖에 없게 하고, 날다가 떨어져서 추락 직전에 받아서 다시 가지고 올라가고, 거의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그렇게 훈련을 시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독수리가 새끼에게 하듯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유의 후사가 되어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상속받을 사람으로 양육해야 되기 때문에, 독수리가 제 새끼를 양육한 것 같이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보통 축복의 과정이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민족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 여호와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 이 경험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이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냥 무조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면 왜 그런지를 설명해야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내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경험을 집단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들 역사 속에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흔적을 가진 백성이 되게 된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사람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해낸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는 상천하지에 여호와 같은 이가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오늘날 사회에 신뢰를 주지 못하고 비판받고 젊은 사람들이 떠난다고 해서 다 떠나는가?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고, 불교 믿던 사람들은 계속 불교를 믿지 잘 바뀌지 않는다. 종교적 체험이 있어서 자기 가슴속 깊은 곳에 하나님 체험의 흔적을 가지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바뀌기 힘든 자리가 생긴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나도 어릴 때 난치병이 걸려서 나중에 커서 어떻게 되려나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어쨌든 거기서 놓여남을 받고 또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병이 나아서 좋다는 것보다 뭔가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내 인생을 살리셨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살리신 분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깊이 갖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거기에 재미있다거나 만족하는 것이 생기지를 않았다. 내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그때는 막연하고 종교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이 한 번 들면 다른 것에 만족을 잘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내는 군대를 안 갔다. 옛날에 군대를 6개월짜리로 빠지게 되면 장군의 아들이라고 했고, 완전 면제를 받는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ㅎㅎ).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전방에서 군 병사들이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장교로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학을 들어갈 때부터 ROTC 지망을 생각했다. 2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고 3학년 때 ROTC 훈련이 시작된다.
그런데 2학년 때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박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때 내가 거창하게 말하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0일 동안 투옥이 되었다. 대구교회에 오니까 나와 동갑인 운동권에 있었던 형제가 있었다. 그 형제 말이 나를 본 순간 부르조아가 한 명 왔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캐나다 간다고 하니까 부르조아가 가는구나 했다고 한다. 그리 보여도 나도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사람이다(ㅎㅎ). 사실만 말하면 데모하다가 얼떨결에 붙잡혀 가서 10일 동안 구치소에 있다가 나왔다. 구속될 수도 있었는데 박대통령이 서거를 하는 바람에 다 풀려났다.
그때 왜 10일인지 생각하니까 요한계시록 2장 서머나 교회에 “장차 10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나를 두고 예언한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ㅎㅎ). ROTC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니까 데모 경력이 있는 사람은 탈락이라고 한다. 거기에 더한 말은 설사 합격을 해도 그런 사람은 최전방에 가서 아주 고생한다고 하기에 신체검사를 받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4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고 현역입영 판정을 받았는데, 대학 때 선교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다보니까 거기서 군대를 연기하고 선교 훈련을 더 받으라고 했다.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군대를 연기하기 위해서 대학원 진학을 하라는 것이다. 거기는 코스가 그렇다. 조금 열심히 한다 싶으면 군대 연기를 하라고 한다. 나는 군대생활 고생이 싫어서 장교로 가려고 했는데, 대학원 마치면 26살이 되는데 20살짜리 밑에서 무슨 고생이냐고 바로 군대를 가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군대 연기를 강권했다. 그때 마지막에 생각한 것은 내가 군대를 빨리 가려고 하는 것은 고생을 좀 덜 하려는 것인데, 군대 연기하라는 인도자의 말은 선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가. 내 편함을 위해 이 요구를 거스르는 것이 마음이 찜찜해 결국 군 입대를 연기하였다.
대학원을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뼈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허리가 좀 아프다고 나갔더니 어떻게 하다가 면제가 되었다. 군 면제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뭐냐고 물으니 “당신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 군대에 필요 없으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잘살라.”고 했다. 그때 나오면서 군대를 안 가게 되었다는 것보다, 지난 온 일들이 떠오르면서 “아~ 하나님이셨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다. 순전히 주관적이다.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는 나를 그렇게 연약한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다. 내가 ROTC를 하려고 했는데 하필 그때 데모가 일어났으며, 나는 의식이 있는 청년도 아니었는데 왜 데모 하다가 잡혀갔으며, 왜 현역판정을 받았는데 그렇게 말렸을까. 그때 나로서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관여하고 계셨구나. 당신이셨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관여하셔서 당신의 계획안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해도 나한테는 지울 수 없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인데도 못 말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성경 숫자대로 하자면 60만이 40년 동안 놀라운 일을 동시에 경험했다. 자기들보다 훨씬 강대한 민족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이것은 그들 역사 대대로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고 흔적이다. 대대로 기념하라. 네 미간에 새기고 문설주에 새기고 이마에 기록하고 너희 손목에 새기라. 자손 대대로 자식이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또 이야기를 해주라. 이런 민족적 경험이었다.
여기서 한 줄로 간단하게 말했지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는 이 말이 그들의 역사를 함축하고 그들의 절망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 지울 수 없는 흔적, 이분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멘이 되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도 아니고, 또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복이 되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사람의 올바른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주권이 내게 있지 않다. 이것을 이 말씀 앞에 시인하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주권이 없습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자리가 자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의 자리다.
이 세상에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하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보았다. 요즘 뜨는 유작가라는 분이 쓴 책이다. 글도 쉽게 잘 쓰고 내용도 참 좋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 정말 품격 있는 인생이 무엇인가?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 이렇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와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이다. 인생의 품격이 무엇인가? 무엇이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드는가? 우리는 바로 그것이 ‘인격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풀어나가면서 첫째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시작한다.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 자신의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야 된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면 더 좋은 것이 아니냐. 남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제쳐놓고 나답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라는 이야기다. 그 말을 풍부한 예를 들어서 쉽게 설명했다.
그런데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것이다.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내 인생이 정말 나의 것인가? 그것부터 검증해야 되는데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출생부터 내 인생은 자기가 결정해서 태어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물론 마지막 죽음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이번에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있어 보니, 사람에게 죽을 권리도 없다. 목숨을 연명하는 데도 의사가 인공호흡기를 꽂으면 그 다음에는 의사 마음대로 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병원에 그냥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사람에게는 태어날 주권도 없고, 죽을 주권도 없다.
그 다음에 중간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못했는가? 부모가 이 정도의 머리로 주어서 이정도 한 것이다. 교사를 하면서 IQ와 성적의 상관관계 계산을 해보니 거의 80%로 상관관계가 매우 높았다. 날 때부터 식욕이 좋은 아이들이 있고,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도 있다. 타고 난 것을 어쩌겠는가. 억지로 떠먹여서 되는 것도 아니다. 머리도 하나의 몸의 기관이니까 위나 마찬가지다. 나면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가득차서 뭘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책을 보면 머릿속으로 빨아들여야 되는 아이들이 있고,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픈 아이도 있다. 이것이 아이 잘못인가? 부모가 그렇게 낳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자기 잘못이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소질이 이런 것을 잘한다고 자랑하다 보면, 부모가 잘해서 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피를 보면 거의 그렇다. 지금은 아픈 것까지도 DNA로 확률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짜장면 먹고 짬뽕 먹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내 장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장이 약하면 그것도 안 된다. 짬뽕을 먹을 자유도 사실은 알고 보면 없을 수도 있다.
잘 생각해보면 인생의 주권이 내게 있지 않다. 이것이 진실이다. 어디서 내 주권을 가질 수가 있는가? 어차피 나는 피조물로 시작되었다면 첫 단추를 그렇게 끼어야지 인생의 마지막 단추도 맞게 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자, 내가 즐거워할 것을 하고 살자는 것은 좋은데, 마지막에 가면 “오늘 밤 네 생명을 취하리니 네 가진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이 말씀 앞에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진 거짓이 드러난다.
피조물이라는 사실, 우리를 지으신 분 앞에 선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진실인가! 주권이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고 나면, 그 다음에 내가 무엇이 되려고 했던 것, 목숨이든 자존심이든 나를 지키려고 하던 모든 것에서 해방되게 된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해방이 아니라, 내 마음 대로 산다는 거기서 해방되는 것이 진짜 해방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큰 해방 가운데 더 큰 자유 가운데 있느냐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권이 있지 않다, 나에게 하나님이 있다, 나를 시작한 분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한다. 이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인생은 자유 같지만 자유가 아니라 그때부터 수많은 것에 얽매이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시작된 혼란과 허무와 깊은 어두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깨워주는 말씀이 있어서 우리에게 빛이 되었다. 고귀한 목적을 주신 분을 만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시작이다. 다른 신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고귀한 목적을 만나는 것은 삶의 내용이 최고의 질로 채워지는 축복이다. 이 말씀을 받고 다른 것을 섬기겠는가. 억대 연봉을 주면서, 인생은 흙이다, 인격회복, 그것만을 일생 추구해달라고 우리를 부른다면, 그것을 마다하고 잡역부 일을 찾아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고도의 전문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에 고도의 전문가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면 그 외 우리 인생에 다른 것을 둘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고귀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귀한 축복이다. 예수님은 일생을 이 말씀 앞에 사신 분이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말씀하셨고(요4:3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하셨다(요9:4). 이것밖에 없는 분이었다.
이 절대적인 부름, 소명,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을 때 사람의 목숨이 가치 있어 진다. 왜 목숨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가? 내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귀한 것은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된다. 목숨이 가장 귀하다고 하면 목숨에 매여서 일생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이 목숨보다 더 큰 소명이 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큰 소명이 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 된다. 풍부에 처하나 궁핍에 처하나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풍부해도 좋고 궁핍해도 좋고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이 모든 말은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 우리 인생을 견고한 토대위에 세워주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는 귀중한 축복이 된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꼭 배타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한테 절대적인 가치가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절대적일수록 좋은 것이다.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 서면 다른 사람에게 우리 존재가 기쁨이 되고 잔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있으면 잔치가 벌어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정말 있어야 될 자리에 있으면 그런 일이 생긴다.
두 번째로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이 말씀은 너는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뭘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요즘 자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어떻게 건강을 관리할 것인가를 연구해서 좋은 것도 열심히 해먹고 몸에 좋다는 것을 다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안 되는 이류를 자매가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몸에 좋다고 먹으라는 것은 잘 먹는데, 먹지 말라는 것은 잘 안 지켜진다는 것이다. 하지 말라고 해서 하나님도 성공한 예가 별로 없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다. 또 율법도 만지지 말라, 보지도 말라고 해놓으니까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을 다 바꾸어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만들어야지 말씀이 성공할 수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면 너가 섬길 것이 없다, 이 우주 가운데 너가 섬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겠는가. 사람은 뭐라도 하고 살아야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사람을 존재감을 잃게 만드는 것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들어서 존재만으로도 참 사람이 가치가 있는 사회에 와있는 것이 다행이지 세상에 한 발만 나가도 뭘 하느냐에 따라서 값어치가 결정된다. 하는 일이 없다고 하면 눈 마주치기 싫어한다. 아무것도 위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우리에게 절대적인 한 가지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내 발아래 두게 된다. 예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말씀을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유에게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이름을 그 발아래 두시고 무릎을 굻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자기보다 커서 압도되면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사람을 메이게 만든다. 물이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물이 사람 키보다 넘어버리면 사람을 죽게 한다. 산소도 좋지만 산소가 너무 많으면 사람을 빨리 늙게 만든다고 한다. 무조건 사람 발밑에 있어야 좋은 것이지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면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된다. 무엇도 네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게 하자 말라. 이 얼마나 우리를 복되게 하는 말씀인가! 어떤 것도 네가 섬길 것이 없다. 네가 위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목적,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하나님의 모양이 되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나타낼 이것 외에 모든 것을 발밑에 두어야 되는 이것이 올바른 사람의 위치다.
중동에 함무라비 법전이나 다른 천지창조 신화도 있지만, 성경 말씀이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사람의 가치를 이만큼 회복시킨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신화는 전부 사람을 신의 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7일 동안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다른 신화에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계시라고 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서 당신의 배필이고 당신을 표현할 자로 지었다. 이렇게 가치를 격상시키는 것이 다른 데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섬기지 말라.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우리가 만유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말씀이다.
또 이것을 일계명과 함께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분이니까 우리가 형상을 만들어서는 형상 없는 분을 따라 갈 수가 없다. 그래서 광야생활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 하나님을 따라 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하면 하나님을 내가 만든 규정 속에 가두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교리라는 컨테이너 속에 가두는 일이 된다. 이런 것을 컨테이너 신학이라고 한다. 정말 하나님을 자유케 하자면 우리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된다. 어제 이랬다할지라도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경험될지 모른다.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고 그분의 어떠함을 내가 경험하는 것이다. 나보다 큰 자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이래야 돼.’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실족할 일이 생긴다. 이 교회에 와 보니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교회라고 하는 사람은 좀 걱정이 된다. 지나보면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꼭 나오게 되어있다. 물론 좋은 것이 보여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다.
교회는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도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캐나다에 가서 그런 경험을 진하게 했다. 이 십계명 말씀을 95년 여름엔가 캐나다 가기 직전에 하셨다.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형상 없는 분을 따라 가자면 우리가 아무 형상이 없어야 된다. 교회도 그렇다는 말씀을 하셨다.
캐나다에 가서 얼마 지나 몇 분이 같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했다.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다. 내 속으로 얼마나 좋았겠는가. 내가 먼저 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압력에 굴복하겠다.’고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 계획이 자동으로 서면서 모임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고, 돌아가면서 어떻게 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등, 계획이 쫘악 섰다. 본 것이 있으니까. 물론 나쁜 것은 아닌데 계획이 수립되었다.
모임을 시작했는데, 첫 날부터 제 그림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한분은 지금은 돌아가신 분인데 앉자마자 직장에서 주인과 싸운 이야기를 두 시간씩 하는 것이다. 이분은 원래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못 말리는 분이었다. 이야기를 끊을 수가 없었는데 겨우 한 분이 중지시켰다. 이제 그만하시고 김치현 형제 말씀 좀 듣자고 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했는데 5분도 못돼서 잠깐만 하더니 난데없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600만 학살을 당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성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경과 내가 말한 내용과 아무 관계가 없는 질문을 쏟아 놓으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동성연애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그 사회는 만연한 문제가 되어서 물은 것이다.
또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다가 또 이야기를 하다가 12시 정도가 되어서 끝났는데 힘이 쫘악 빠지고 너무 피곤한 것이다.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딱 한 번 모임을 한 후 들었다. 이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하겠나. 다른 목사님들이 이민 목회가 힘들다고 하더니 이래서 그러는구나, 했다. 누웠지만 피곤해서 잠도 오지 않고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가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한가? 모임을 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빠지고 피곤한가를 생각하니까 내 그림이 망가져서 그런 것이다.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교회를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형상을 만들어놓고 있으니까 첫날부터 형상이 깨어지니 힘들었던 것이다.
내 그림을 깨는 분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 되겠구나. 내가 교회에 대해서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되는구나. 그 뒤로도 피곤함을 느낄 때마다 보면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형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교회를 규정하고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 자리를 기억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한 점이 될 수도 있고, 잠깐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안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를 이렇게 쓰십시오, 교회가 이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그 어떤 생각도 가질 수 없다. 단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계획을 미리 가지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 가는 것이 힘들어진다. 계획할 수도 있고 다 좋지만, 내가 만든 형상이 있으면 하나님 이끄심에 이끌려갈 수가 없다.
계시록에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라는 말씀이 나온다(계14:1,4).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와 함께 선 사람의 특성을 한 마디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어디든지 나 있는 곳에 주님이 있고, 주님 계신 곳에 내가 있는 사람이 된다. 내 생각과 계획이 있으면 이끌려 갈 수가 없다.
중국 상해에 있다가 온 혜숙 자매가 아이가 어릴 때 캐나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 돌 지난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 열 몇 시간을 타고 날아갈 생각을 하니까 걱정이 된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하여 비행기 안에서 재우는 방법, 울 때 달래는 방법 등 별별 방법을 다 찾아보았다. 도착해서 비행기만 내리면 자기가 하고 싶은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잔뜩 고민이 되어 있다가 비행기에 탔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자마자 아이가 잠이 들어 비행기 내릴 때까지 거의 보채지 않았다. 캐나다 가겠다고 할 때부터 고민했던 것이 아무 쓸데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잘 잘 줄 알았으면 몇 번이라도 올 텐데 하고 도착을 했다. 비행기 타고 잘 자고 도착하니까 밤이다. 그런데 아이가 그때부터 안 자는 것이다. 어른들은 생각으로 밤이면 자야 된다고 생각하고 시차를 맞춰야 되니까 2~3일 고생하면 되지만 아이들은 생리대로 하니까 한 달이 지나도 시차적응이 잘 안 된다.
밤에 한 숨도 자지 않고 돌아다니니까 다른 사람들 자는데 방해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가 밤을 꼴딱 세야했다. 캐나다에 와서 돌아다닐 시간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아이는 자는 것이다. 캐나다 있는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완전히 거꾸로 되어 밤에는 아이 보고, 낮에는 피곤하여 자다가 돌아갔다.
자기가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고, 염려하지 않았던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때는 닥치니까 당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닥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고 돌아갔다.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많다. 내가 계획을 잘 세워서 한 일은 지나고 보면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한 데가 많다. 성경에 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했다. 모든 지각이 뛰어나다. 모든데 지각이 미치니까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라 간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니라 인생을 이렇게 흥미롭고 복되고 신기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주시는구나. 생각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하시는구나.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예수님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자기도 모르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아들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길을 묻는 사람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이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가 우리에게 보여 져야 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여호와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글자만 써놓고 읽지를 않았다.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읽었다. 글자를 쓸 때도 붓을 다시 씻어서 글자를 쓰고, 자기도 목욕을 하고 야훼, 여호와라는 글자를 썼다. 옆에 아도나이라고 써놓았는데 후대 사람들이 아도나이의 모음을 하나님 이름에 붙여서 읽으니까 발음이 ‘여호와’가 된 것이다. 나름 좀 연구해서 원래 발음이 '야훼’다. 공동번역에서는 ‘야훼’라고 번역했고, 새 번역에서는 그냥 ‘주’라고 번역했다. 원래는 ‘주’라고 읽는 것이 맞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지 말라는 말인가?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과 그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하고 기도하였다(창48:15-16). 이 아이들로 내 이름을 일컬어지게 하시옵소서하고 축복한 것이다. 요셉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면 그렇게 말했겠는가. 이 사람들이 야곱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삭의 후손이다. 이렇게 일컬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셨다(요17:1). 그렇게 기도하시고, 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그냥 보호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말이다. 하나님이 이름으로 보존된 사람이다.
요한계시록에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하였고(계22:4),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하였다. 이마에(가슴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 하나님이 조성하신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조성하신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일컬어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여호와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망령되어 일컬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자면 우리가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어질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로 내 이름으로 일컬어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가장 귀한 축복을 주는 것이었다. 야곱은 요셉과 그 후손들에게 자기가 가진 가장 큰 복을 주는데, 자기 이름을 주었다. 내 이름으로 일컬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로 내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이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을 알겠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새겨지고 가슴에 새겨진 사람, 이 사람이 참으로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는 사람이다.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목이 무엇인지 아는가? 삼계명과 사계명을 범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해서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한 자마다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삼계명을 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게 한 분이다. 그의 일생의 기도가 그것이었다. 또한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완성하신 분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일하지 않았으니 너도 일하지 말라는 것밖에 몰랐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다. 그래야 완성이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밖에 몰랐는데, 예수님은 완성하셨다. 어떻게 안식일을 완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 밑에는 홀어머니가 계셨다. 엄마(부모) 앞에서 요절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왜 자기가 십자가로 가야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다 흩어져버린 제자들, 오합지졸의 제자들, 남은 것이 그것뿐인데 뭘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인가?
요한복음은 항상 창세기와 겹쳐지도록(Overlap) 쓴 말씀이다.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하신 것과 같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셨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은 제자들을 확고히 세웠다거나 부모 뒤치다꺼리를 다 해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구속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그 사람으로 우리를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하게 된, 하나님을 안식하게 한 그 사람을 다시 나타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사람을 품고 원래 자리로 되돌림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밖에 없다.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안식케 했던 그 사람이다. 이탈한 모든 것을 끝내시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인간의 정욕을 다 끝내시고, 모든 것이 끝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안식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안식은 내가 쉰다거나 내가 편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고 했다(히4:10). 내 일이 끝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 끝났다. 그냥 내가 쉰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니까 정말 나는 다 끝났다. 하나도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는 다 끝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다 이룬 사람인 것이고,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사람이다.
십계명은 예수 안에서 완전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소화된다면, 편협한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유에게 복이 되는 하나님인 것이다. 인생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사람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찾는 일은 사람의 본래 자리를 되찾는 것이니까 누구에겐들 복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를 이런 자리로 이끄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늘 하나님의 크신 경륜 안에서 복된 말씀과 은혜를 누리고도 우리의 편협함과 좁음과 안일함 때문에 늘 하나님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말씀은 너무나 풍성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의 목마름을 적실 수 있는 복인 것을 예수 안에서 다시 발견케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주의 이름이 존귀케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안식이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얻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 본 모습이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