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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세느 강이 있는 시테 섬에서 시작되었다. 아울러 그것은 곧 프랑스의 시작이기도 하다.
노틀담 대성당과 생트 샤펠 성당, 그리고 최고 재판소와 경시청은 물론 콩시에르주리(14세기 궁전)와 부유층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지역이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다. 파리의 종교적 세속적 권위의 핵심이 모두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시테 섬(Cite Island)에서 앙상한 플라타너스 나뭇가지가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세느 강변 길을 따라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과거 프랑스의 왕들이 기거하던 거대한 루브르 궁전의 옆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왕궁의 담벼락을 따라 걸어내려 가다 많은 차량들이 오가는 대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왕궁의 앞마당인 루브르 광장이 나온다.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가 인상적인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이다. 이곳 광장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듯이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이 대로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낸다.
루브르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프랑스의 영광을 이룩하고 스스로를 태양왕(Le Roi Soleil) 이라고 불렀던 '루이 14세(Louis Dieudonne de Bourbon)'의 청동상이 역동적인 용맹함을 한껏 자랑하려는 듯이 우뚝 서 있다.
루이 14세 동상을 한바퀴 돌아보고 루브르 궁전을 둘러볼 때까지는 이곳이 부르봉 왕가의 궁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건너편의 카루젤 개선문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나는 루이 14세가 아니라 또 한 명의 '태양왕'에 필적 할만한 황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역사는 그를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 1세 황제' 라고 적고 있다.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여기 루브르 궁전에 머물면서 유럽 정복전쟁에 박차를 가해 연전연승의 가도를 달렸다. 스스로 자신을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이제 자신의 업적을 기려 후세에 남겨줄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국과 황제의 위상에 걸맞는 '승리의 문'을 건설하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고 스스로 판단한 권력자(독재자)들은 저마다 '승리의 문'을 건설해 자신이룩한 영광을 후대에 영원히 지속적으로 전해지기를 고대하였다. 그래서 저마다 더 위대한 건축물을 지으려 혈안이 되었다. 거기에는 다분히 엄청난 국가의 재정과 최하층민(포로. 노예 포함)들의 피와 땀이 배이기 마련이었지만 말이다.
나폴레옹은 동시에 두 개의 '승리의 문'을 건설했다.
자신이 머무는 르브르 궁전의 정문이랄 수 있는 성문인 '카루젤 개선문'과 우릭 흔히 '파리의 개선문' 이라고 부르는 샹젤리제 거리 에투왈 광장의 개선문이다. 모두가 파리 시민들과 나아가 프랑스 시민들을 넘어서 온 유럽에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각종 행사(열병식)를 벌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래로 '승리의 문(개선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으로 개선하는 병사들에게 승리의 신에게 헌정된 문을 통과함으로써, 전쟁터에서 부득이 저질렀던 살인을 비록한 모든 죄악에서 벗어서 자유인으로 해방된다는 의미를 담아 내려져 왔었다. 나폴레옹은 루브르 궁전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며 전쟁터로 떠나는 용맹한 프랑스 군대의 출정식을 통해 충성 맹세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세출의 위대한 황제가 이번 전쟁에서도 자신을 보호해 줄것이라는 믿음을 카루젤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얻었고, 기운을 내서 전쟁터로 향했다. 전쟁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병사들은 귀국길에 에투왈 광장의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온 프랑스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다시 다음 전쟁의 승리를 다짐했던 것이다. 모든것이 최고 권력자가 의도하고 핵심을 제대로 찔렀던 결과였다.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면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숲이 펼쳐진다. 튀를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은 튀를리 궁전에 속한 정원이었으나 프랑스 혁명당시 모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정원만 복원되어 전해지고 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리느 메디치(Catherine de Medici)가 부르봉 가문의 왕자 앙리 13세에게 시집와서, 형이 죽자 동생인 앙리 13세가 즉위하고, 또 그가 갑자기 죽자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가 권력에 심취하여 스스로 여제가 되었다. 여제에 오른 카트리느 메디치가 건축해 스스로 머물렀던 궁전이 바로 튀를리 궁전이었다.
사라진 옛 영화를 그려보며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면 곧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불리는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상징인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의사인 기요틴(Guillotine)이 만들어 설치한 단두대에서 수많은 생명이 목이 잘리는 처형을 받았던 비운의 장소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이 서있는 에투왈 광장까지 길이 1.9km의 너른 일직선 도로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길이 또 있을까? 이곳이 바로 그토록 유명한 파리의 핫 플레이스라 할 수 있는 '샹젤리제 거리( Avenue des Champs-Elysees)'이다. 앙상한 플라타너스 나뭇가지 너머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매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거기에 더하여 유명한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과 영화관과 톱 클래스의 유명 자동차 전시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에투왈 광장을 지나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재건 사업의 결과로 새롭게 탄생한 신시가지 '라 데팡스(La Defense)' 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신도심의 상징은 바로 새롭게 재해석해 탄생한 새로운 개선문이랄 수 있는 '그랑 다르쉬(La Grande Arche)'라 하겠다. 옛 개선문에서 시작하여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새로운 개선문에 이르는 폭 71m의 시원하게 뚫린 일직선 도로가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도시를 동서로 가로질러 구분하면서 새로운 도시 계획과 질서에 따른 21세기형 파리를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
파리는 이렇게 철저하게 사전 계획된 도시 설계라는 핵심적 요소 위에 세워졌다. 파리의 모든것이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바로 이 일직선상의 도로 위에 놓여졌다. 주변을 흘러가는 세느강 건너편에 에펠탑과 앨발리드와 팡테온을 건설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약탈 전쟁이었다. 일부 이탈리아 역사학자들은 '프랑스군에 의한 이탈리아 강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것을 서슴치 않는다.
'이제부터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예쁜 여자들이 사는 로마로 쳐들어 간다' '정부는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하여 나는 이제 너희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가고자 한다. 나를 따른다면 너희는 그곳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고 사령관은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이렇게라도 떨어진 사기를 올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했다. 절대적으로 열세인 군대를 이끌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은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이었다. 무능한 프랑스 혁명 정부는 혼란속에 마냥 허둥대고 있을뿐,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지도 못했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희대으이 풍운아 나폴레옹은 오합지졸과 같았던 프랑스 군대를 회유하고 규합시켜서 전광석화와 같은 기세로 밀라노를 점령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노련한 나폴레옹은 자신을 믿고 따라준 군대에게 약속을 지켰다. 무한대의 약탈을 허락했던 것이다. 막 전투가 끝난 시점에 벌어진 약탈이었으니 그 참혹함이야 어찌 이루 말 할 수 있겠느냐만은......... 그와 동시에, 그 순간부터 나폴레옹의 군대는 최강의 무적 용병들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투를 치뤄 보았고 , 그에 뒤따르는 승리의 달콤함을 그들은 이제 깨달았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 군대는 연전연승하며 로마를 침공하고 마침내 이탈리아 원정에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급 병사야 기껏해서 재물이나 빼앗고 여자나 강간하고 술에 취해 행패나 부리겠지만, 계급이 높을 수록 그 약탈의 레벨은 끝도없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휘관들이 앞다투어 보물과 조각과 미술품들을 개인 마차에 실려 파리의 집으로 배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천재는 단연코 나폴레옹 이었다. 그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약탈의 명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침공 전에 이미 약탈하고 싶은 대상 물품들의 목록을 서류로 작성해 놓았을 정도였다. 곧바로 자신의 친위대를 보내 교회와 궁전과 박물관을 접수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목록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파리로 실어 날랐다. 거의 로마를 통째로 퍼 날랐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 기회에 <약탈 문화재>에 대해서 다시 거론하게 되겠지만,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2층의 (4마리 청동기마상),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반대편에 걸려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 등등이 나폴레옹의 예술작품 약탈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진 경우라 할 만 하다.
로마를 떠나면서 나폴레옹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로마에서 꼭 빼앗아 가고 싶어 끝까지 조바심을 내던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 di Constantino)' 이었다. 도대체 왜 인지 모를만큼 나폴레옹은 개선문에 유독 집착을 했다. 자신의 인생이 온통 전쟁으로 도배 될 것이고, 승리를 거둔 뒤에 자신을 따른 믿음직한 군대와 함께 온 세상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개선문을 통과해 행진하는 것을 장대한 서사시로 역사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프랑스에서부터 데려간 건축가와 해체복원 전문가들로 부터 '도저히 불가능' 이라는 판정 보고를 받게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땅을치며 통곡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 승리를 각인시켜줄 최고의 기념물이 그만 그림의 떡이 되고 만 것이다.
적어도 내 주관적 입장에선 나름 이해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이라는 것이 단독 건물로 처음부터 새롭게 제작 완성된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설계와 틀은 새로운 것이었지만, 욕심꾸러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역대 황제들의 개선문에서 맘에 꼭 드는데 새롭게 다시 만들기는 힘들것 같은 부분들을 해체하고 뜯어내서 가져다가 짜집기 해서 자신의 개선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세세하게 뜯어보면 엉성하고 서툰 짜집기가 여기저기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것들을 대충 다시 뜯어서 포장하고, 파리까지 날라다가 다시 짜맞춘다는게........ 흔히 건축에서 신축보다 개축이 어렵고, 개축보다 보수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꼭 그런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포기해야만 했던 나폴레옹이 노린 다음 전승 기념물은 '판테온(Pantheon)' 이었다. '자신의 집무실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실무자들로 부터 올라온 보고서는 '절대 불가능' 이라 적혀 있었다. 크기를 줄여서 새롭게 제작하라면 10년이면 되겠는데, 뜯어서 옮기는 일은 100년이 필요하면서도 꼭 성공한다고 보장 할 수가 없다는 보고였다.
결국, 나폴레옹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도 판테온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파리에는 세 개의 개선문과 팡테온이 분명하게 서 있다.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 Paris)는 1806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서 쟝 촬크린(Jean Chalgrin)이 설계를 맡으면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기리고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을 기리는 충혼탑의 의미를 담았다. 하여 개선문의 지지 기반에는 무명 용사의 무덤과 꺼지지 않는 불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개선문이 나폴레옹 개인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한 승전 기념탑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로마의 씨저를 흠모하고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까지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옮겨오지 못한 아쉬움을 이곳에서 풀고자 했던 것 처럼 로마 제국의 전통을 되살리면서도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능가하는 개선문 건설을 요구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민중의 저항과 평화를 상징하는 부조>에서 시작하여 점차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아부키르 전투> <아르콩 다리 통과> 그리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 점령과 이집트 정벌>을 넘어서 <아우스터 리츠 전투>와 <젬 페나스 전투>를 지나 <프랑스 군대의 무사 귀환>에 이른다. 프랑스 군대의 모든 승리와 전투에 참가한 장군들의 이름이 건물의 내부와 외부 표면에 새겨 져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전쟁터에 나폴레옹이 참여했으며 모든 전쟁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의 여신이 그들에게 행운과 영광을 내려 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폴레옹 자신이 곧 승리의 신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파리의 개선문인 것이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당하게 파리로 개선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제 1통령에 취임한다. 이어 종신 통령에 스스로 취임하고 마침내는 1804년....... 황제에 올라 스스로 '나폴레옹 1세'에 즉위한다.
황제에 오르고 나서 곧바로 파리에 두 개의 개선문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파리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에투왈 광장과 자신의 거처인 루브르 궁전 정문에 기념비적인 개선문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황제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던 만큼 두 개의 개선문 건축 공사는 박차를 가했다. 바닦 고르기를 지나 기단이 놓여졌다. 실물 크기의 프레임과 비계가 설치되었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이 새 아내 마리 루이즈(Marie Louise)와 결혼하게 되었다. 새 아내를 맞이한 나폴레옹은 두 개의 개선문을 통과하여 루브르 궁전에 입성하기를 원했다. 건축 관계자들은 서둘러 설치된 두 개의 개선문 프레임에 나무 판자를 대고 페인트로 갠버스 작업을 통해 실물을 닮은 개선문을 급조했고,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는 마차를 타고 두 개의 개선문을 통과해서 루브르 궁에 입성했다.
그리고 나서 영국과의 전쟁이 벌어 졌다.
해군이 열세였던 프랑스는 영국에 대해 대륙봉쇄령을 내렸고, 마침내 영국군이 바다를 건너와 연합군을 형성해 프랑스와 대적하는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다. 거기에다가 러시아 원정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나폴레옹은 패망했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가 탈출하여 재기를 꿈꾸며 100일 천하를 꾸미다가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그는 절해고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 당하여 그곳에서 51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나폴레옹 사후 19년이 지나서야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승인 아래 그의 유해가 마침내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는 파리의 개선문이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승리의 문을 열광하던 나폴레옹은 정작 살아서 개선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의 유해를 실을 마차가 사후 19년이 지나서야 개선문을 통과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 앵발리드(National des Invalides)에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사망한지 19년이 지난 184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개선문을 통과하여 파리 시내로 들어와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당시의 사진을 보자면 분명히 에투왈 개선문 위로 청동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리 코뮌 사태(1871년)중에 화재로 완전 소실된 튀를리 궁전의 이전 사진을 보면 에트왈 개선문과 카루젤 개선문이 튀를리 궁전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는데, 카루젤 개선문 위의 청동 조각상은 설치되어 있음이 분명한 반면에 에트왈 개선문 위의 청동 조각상은 모두 철거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나폴레옹은 두 개의 개선문을 동시에 건설토록 명령했는데, 처음부터 두 개의 개선문 위에 장식할 청동 조각상에 대해서 염두에 두었었다. 그에 관해 수많은 억측과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는데 이참에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 보려고 한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건설중인 두 개의 개선문 위를 장식할 목적으로 실질적으로 약탈해 갔다고 전해지는 두 군데의 청동 기마조각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또 실제로 프랑스 군대가 파리까지 약탈해 가지고 갔었다. 하나는 베를린의 상징이랄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이 탄 전차를 네 마리의 말이 끌고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플 대전차 경기장(이스탄불)에 설치되었던 고대 그리스 청동조각상을 제 4차 십자군 전쟁에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상단이 네 마리의 청동 말조각상을 약탈해 가서 산 마르코 대성당의 2층 테라스에 전시해 놓았던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길에 베네치아를 정복하자 마자 나폴레옹은 이 청동 기마상을 끌어내려 파리로 싣고 가버렸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이 청동기마상이 에트왈 개선문 위에 전시되었다고 소문이 났지만 이는 확실하게 틀린 말이다. 하지만 그 소문이 그럴싸하게 전해진 데는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독일로 쳐들어가서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이 이번에도 가장 먼저 서둘러 한 일이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위에 설치된 평화의 여신 청동 기마상을 끌어내려 파리로 실어 보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실어보낸 브란덴부르크 청동기마상은 실제로 파리의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져 설치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베네치아에서 빼앗아 온 청동 기마상이 에트왈 개선문 위에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당연스럽게 흘러나왔고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개연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에트왈 개선문 위에 설치된 청동 조각상은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베네치아에서 약탈해온 콘스탄티노플산 청동 기마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폴레옹은 이 기마상에 유달리 깊은 애정이 있었던듯 하다. 당시 이 기마상은 파리의 모처에 그냥 전시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루브르 궁전의 나폴레옹 집무실 근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폴레옹이 정말로 개인소장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반면에 실제로 에트왈 개선문 위를 장식했던 다른 조각품은 실재 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각가 알렉산드레 파귀에게가 '혁명의 승리(Le Trimphe de la Revolution)' 라는 청동 조각상을 만들어 실제로 설치했다.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듯한 승리의 신이 마차를 타고 폭정과 탄압을 일삼았던 무리들을 마구 짓밟고 지나가는 모습으로 만들어 졌다. 그런데 설치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불량 제작으로 인하여 설치된 조각상이 그만 무너져 내려서 결국 강제로 철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느냐?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엘바 섬으로 쫓겨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이센(독일)이 쳐들어 와서 파리를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는 카루젤 개선문에 설치했던 브란덴부르크 조각상을 회수해 가지고 가서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아울러 전쟁 종결을 정리하는 와중에 약탈 문화재 반환이 승전국인 연합군의 강력한 요구 조건으로 채택된 끝에 대부분의 약탈 문화재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청동 기마상 또한 직전 소유주인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발코니로 돌아 갔다.
빼앗아 왔던 것을 다시 원주인에게 되돌려 준 것이었지만 프랑스 인들의 마음속에는 마치 본래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처럼 허전하고 분했다. 그래서 기어코 짝퉁 복원 사업까지 벌이게 되었다. 레플리카(복제품)를 만들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 빼앗기듯 되돌려준 네 마리의 청동 기마상을 완벽하게 복제품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 '복제품이나 만드는 프랑스' 라는 조롱이 싫어서 멋지게 마차를 탄 승리의 신을 만들어 기마상에 덧붙였다. 그러고도 부족한 듯 하여 양쪽에서 말을 이끄는 두 명의 황금빛 여신상까지 만들어 덧붙인 후에 떠하니 보란듯이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카루젤 개선문 위에 설치되어 있다. 반면 에투왈 개선문은 지붕은 텅 빈채 그냥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광장에서 많은 차량들이 급하게 오가는 차도 건너편 튀를리 정원을 건너다 보면 가장 앞 쪽으로 카루젤 개선문이 보여야만 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지금엔 보수 공사를 위하여 개선문 전체에 휘장이 둘러쳐져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둘러 친 휘장의 윗쪽 끝으로 황금빛의 조각상 일부가 부는 바람에 나플거리듯 겨우겨우 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였던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 로마노(Foro Romana)에는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세웠던 수많은 개선문 중에서 세 개의 문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현재에도 남아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Arch of Constantine) 이다. 바로 나폴레옹이 분해를 해서라도 파리고 꼭 가지고 가고 싶어했던 그 개선문이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개선문이다.
다음은 파르티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 of Septimius Severus) 이다. 평소 로마 제국을 동경했고, 스스로 씨저의 후예임을 자처했던 나폴레옹은 우선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의 로마 건축양식을 파리에 재현시키고 싶었다. 하여 그는 자신의 궁전 앞마당에 놓일 카루젤 개선문의 원형을 바로 여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을 원형으로 하여 만들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은 유대민족의 반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티투스 황제가 건립한 티투스 개선문(Arc of Titus) 이다.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정말로 뜻밖에 나폴레옹은 주로 3개의 문으로 구성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디자인을 포기하고 단순하면서도 심플하게 한 개의 문을 가진 티투스의 개선문을 모티브로 에투왈 개선문을 만들도록 했다. 웅장하면서도 간촐하고 우아한 균형미를 가진 고대 로마양식의 전승 기념비를 원하고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거기에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부조와 조각들을 장식하여, 프랑스 혁명과 자신과 군대가 겪었던 하나하나의 역사적 사건들을 고스란히 수놓기를 원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아치형 건축물을 탄생하게 만들었으며, 프랑스 인들의 자존심이자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세느 강변은 온통 갈대만 무성한 거대한 습지였다. 그곳은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드넓은 늪지대와 물 웅덩이가 전부였다.
아주 먼 과거의 어느날, 자욱한 안개를 뚫고 한 무리의 용맹한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중해 인근의 모든 영토를 탐험하고 개척하기 위하여 파견된 고대 그리스의 용사들이었다. 사방으로 뻗은 내륙 깊숙한 골짜기에서 흘러들어온 물들이 마침내 한 곳으로 모여 제법 깊고 넓은 강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더 멀리 북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세느 강을 이용하기로 하고 거점 확보를 계획하던 중에 드넓게 펼쳐진 늪지대 저만치 우뚝 솟아있는 언덕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늪지대 깊숙한 곳에 나룻배를 정박시켜 숨겨놓고는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언덕에 오르니 비로소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되었는데 그 넓이가 가히 끝이 없어 보였다.
지중해 전역에 걸쳐 식민 도시를 건설해 온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강을 끼고 운하를 개척하며 야트막한 언덕을 깎아 늪지대를 메꾸어 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멀고 깊은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로로 삼을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하여 가장 먼저 이곳의 가장 높은 언덕에 그리스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몽마르트 언덕이다. 그들이 타고 온 배를 숨겨두었고 늪지대를 메꾸어 처음 선착장으로 사용한 장소가 바로 콩코드 광장이다.
광장의 한 가운데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사이에 두고 (강의 분수)와 (바다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바다와 강을 모두 정복하고자 했던 타고난 해양민족이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 의한 식민도시 건설은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이곳은 지중해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내륙 깊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그리스의 식민도시들은 모두가 지중해 연안에 건설되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동쪽 내륙 깊숙한 카즈베기 산까지 일부 식민도시가 건설되기는 하였지만, 그러자면 적어도 지중해와 연결되는 거대한 강줄기라도 있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선천적 유전인자 자체가 해양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륙 깊숙히 한참 북쪽에 위치하며, 이제 겨우 강물 줄기를 흡수한 세느 강은 엉뚱하게 북쪽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강물이었으며, 대서양은 아직 그리스인들에게는 미개척 상태의 거칠고 험난한 바다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이 덮쳤고, 동쪽에서 카르타고가 등장한 상황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오랜 내전은 결국 그리스인들을 세느 강 유역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말았다.
다시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서....... 기원 전 3세기 경에 갈리아인(Gauls)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여기에서의 갈리아인이란 켈트족(Celts)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알프스 산맥 주변에 산재해 살아가던 프랑스. 독일. 스위스 원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기원은 인도 북쪽지방에서 탄생한 백인들로 기원 전 1.000년 경 철기문화를 가진 켈트인들이 리베리아 반도(스페인)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후로 차차 북상하여 알프스 전역에 분포하게 되었다.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민족들의 이름은 전문 분야의 학자라 할지라도 복잡히기는 마찬가지다. (정말 복잡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간단하게 줄여서 요약해 본다면........ 발칸반도(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북부.체코. 폴란드)에는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아가면서 유목 생활을 해왔다. 이들 유럽 백인들의 뿌리는 인도 북방 계통에서 파생되어 나온 아리안족 이다. 히틀러가 순수 혈통을 그토록 주장했던 아리안 족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란인들과 유전 인자를 같이하는 동족이다. 아울러 이 당시에 발칸반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모든 민족을 그냥 쉽게 켈트족, 혹은 갈리아인, 혹은 골족이라고 통칭한다. 이는 모두가 로마인들이 붙인 이름이며, 일찍 문명 세계를 이루었던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너머의 모든 민족은 그저 흔하게 '야만인' 이라 불렀으며, 흩어져 있는 지역에 따라 켈트, 갈리아, 혹은 골족 이라고 불렀다. 이는 모두가 타민족을 극히 혐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에 세상에는 문명 세계인 로마인(라틴족)과 야만인(켈트족 전체) 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쪽 아시아에서 대변혁이 일어나 흉노족(여진족. 말갈족)이 급성장한 중국(한족)에게 쫓겨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발칸 반도로 대이주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발칸 반도에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해오던 켈트족 일파가 유럽 전역으로 쫓겨서 대이동을 하게 되는데 역사는 이를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켈트족 이라는 용어도 게르만 족의 일부로 변형되어 불리게 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함께 발칸반도에서 생활하던 부족 중에 투르크 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 지역으로 달아나지 않고 카스피해(이란. 사우디 지역) 쪽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달아난다. 이들이 훗날 이슬람 왕국인 오스만 제국을 이룩하게되는 오늘날의 터키인들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민족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흉노족이야 당연히 아시아 민족으로 구분 되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가 스며들었으니 바이킹으로 대변되는 노르만 족의 등장이다. 해적질이나 일삼던 바이킹이 유럽 대륙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점령하고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다.
그후, 유럽의 모든 민족들은 생존을 위해 이합집산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섞이고, 혼인 동맹등을 통하여 마구마구 섞여나가기 시작했다.
흔한 말로........ 유럽의 모든 민족들이 내세우는 혈통에 대한 정통성은 하수도에 흘러내리는 구정물이라 해도 별반 그리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종교가 개입되고, 권력과 이익에 눈이 먼 파렴치한들이 나서서 혈통과 민족과 문화를 운운할 때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물론 세계 도처에서 분쟁이 끊이질 않게되는 것이다.
역사를 신석기 시대쯤으로 되돌리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 순수 혈통이란 없다. 순수한 고유의 문화라는 것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누고 가르고 편가르기 해서 분쟁을 양산하고, 그것을 통해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고뭉치들의 장난질이 있을 뿐이다. 히틀러나 푸틴처럼 말이다.
3세기 경에 세느 강변에 다시 등장한 갈리아 인들은 시테 섬을 근거지로 삼고 부족 생활을 영휘해 나가기 시작했다.
강물에 둘러쌓인 작은 섬이 약탈을 목적으로 침입해 오는 적들이나 맹수들의 습격으로 부터 방어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섬의 둘레로 성벾을 쌓았다. 이제 시테 섬에 근거를 마련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가던 사람들이 켈트 족의 한 부족인 파리시 족(Parii) 이라하여 그들이 세운 도시의 이름을 이때부터 파리(Paris)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거듭거듭 세력을 확장해 나가 하나의 거대한 부족 연맹체로 성장한 파리는 머지않아 세계 정복을 꿈꾸던 로마의 레이더 망에 아주 성가신 존재로 걸려들고 말았다. 결국은 이 일로 인해서 파리, 혹은 프랑스가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BC. 52년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파리시를 향해 쳐들어 왔던 것이다.(갈리아 원정기) 파리시를 정복한 카이사르는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만큼 갈리아 정복 전쟁이 험난했고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페허로 변한 이 도시에 루테티아(Lutetia)란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 루테티아는 '늪' '습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나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등극과 함께 로마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지만, 갈리아 지방(루테티아)에서의 반란은 끊이질 않았으며 점 점 세력확장을 꿰하고 있었다. 이제 루테티아(갈리아)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로마 제국에게 치명적 아킬레스 건이 되어 버렸다.
결국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의 오랜 숙원이자 숙제였던 갈리아의 완전 정복을 위한 대규모 정벌에 직접 나선다.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인 <글레디에이터>의 초반 도입 부분에서 장쾌하면서도 압도적인 스펙터클 영상으로 관람객을 숨죽이게 만들었던 그 장면이 바로 갈리아 원정 전쟁을 실감나게 묘사해낸 것이다.
붉은 갑옷과 날카로운 창과 글라디우스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가 하면 기마부대와 투석기까지 동원한 로마 군대 앞에 맞선 갈리아 군대는 동물의 가죽을 걸치고 그저 도끼와 죽창을 들고 맞섰다. 로마인의 시선으로 치자면 이것은 문명과 미문명(야만)의 차이고 당연한 역사의 징벌이었다. 프랑스 인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제국의 야만적 침략이며 지도자 부재와 문명의 뒤떨어짐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치부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르크스 세르빌리우스 파이아누스 막시무스'는 샐존한 인물로 갈리아 원정에 참여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끼던 장수였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과는 별반 그리 크게 연관이 없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이후로 로마 제국은 루테티아의 통치 방식에 크게 변화를 가했다. 습지로 가득한 이 지역을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거쳐 로마제국의 갈리아 지역 거점 도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갈리아-로만 방식의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계속적으로 로마 문명을 전수 시켰다. 자연적으로 모든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제도와 생활문화권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반란은 점차 수그러져 갔다.
로마 제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동.서 로마로 분리되었지만 루테티아(갈리아)는 계속 성장을 거듭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시간이 흘러 5 세기 경에 20세의 클로비스에 의해 메르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이 성립 되었다.
루테티아는 켈트인 들의 자존심이었던 파리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파리(Paris)가 되었다.
흔히들 유리 피라미드와 루이 14세의 기마상이 있는 루브르 광장을 나폴레옹의 안뜰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의 안뜰에서 시작하여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면 느릅나무와 라임나무가 길게 늘어선 튀를리 정원 숲길을 걷게된다. 아름다운 숲길이 끝나면 룩소스의 오벨리스크가 유난히 돋보이는 콩코드 광장이 나타나고, 이곳부터는 유난히 넓어 보이는 가로수 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인 샹젤리제' 라고 목청을 돋운다. 샹젤리제가 끝나는 지점에 에투왈 개선문(파리 개선문)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모든 길은 방사선 방향으로 12갈래로 갈라져 뻗어나가지만 서쪽으로 가장 넓고 곧게 뻗어나간 도로는 파리 외곽에 해당하는 라 데팡스에서야 멈춰 선다. 약 8km에 이르는 일직선상으로 곧게 뻗은 이 길이 바로 파리의 중심 축이다. 아울러 파리라는 도시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에서 샤이요 언덕에 위치한 파리 개선문(에투왈 개선문) 사이 폭 70m에 동서로 길이 1.910m에 이르는 거리를 사람들은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Elysees)' 라고 부른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들은 '샹젤리제' 하면 '파리의 낭만'을 먼저 떠올리고 '쇼핑의 천국' 이라고 기억들을 한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파리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샹젤리제는 밤이 낮 보다 아름답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샹젤리제는 그저 파리에서 가장 낯선 번화가였을뿐이니까.
차도 만큼이나 인도도 넓직하게 만들어졌고 그 사이에 완충지대 처럼 자전거 전용도로가 확보되어 있는 파리의 도시건축 공학적인 도로망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파리 재개발을 강압적 수단까지 동원해 가면서 대대적으로 벌였던 오스만 총리의 가치관과 철학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샹젤리제는 농익은 과일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당장 한겨울의 샹젤리제는 그렇게 소문처럼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근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권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추위때문인지 오가는 인파도 그렇게 많지 않고, 낙옆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가로수만이 불어닥친 추위에 오둘오둘 떨고있다. 유명 브랜드 매장이나 영화관이나 레스토랑도 지극히 한산해 보이기까지 한다. 세찬 바람에 노천 카페도 페점 상태지만 그래도 카페의 안쪽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커피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행자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샹젤리제의 모습은 지금 사뭇 다르다. 그저 한산하고 적막해 보이기까지 할 뿐이다.
지금 누가 샹젤리제 거리를 유명 브랜드 명품 매장들로 즐비한 쇼핑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뭐래도 쇼핑의 중심은 콩코드 광장과 마들렌 성당이 마주고보 있는 생 토레노 가가 아니겠는가? 거기에다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파리 매장 대부분이 몽테뉴 가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하긴 대충 얼머무려서 그냥 샹젤리제 언저리 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백화점들이 오페라 인근에 위치해 있고, 고급 의류는 아무래도 포부르 생 토레노 가로 가야 하고, 보석류는 라페 가나 방돔 광장이 제격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샹젤리제 샹젤리제 하는 것일까?
샹젤리제가 나에게 확 와닿는 이유는 딱 하나다. 대한민국에서는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샹젤리제에는 광고판이 없다'. 이를 다시 표현한다면 '애초에 건축가가 설계한 대로 완성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존재가치를 뽐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샹젤리제다. 명품 브랜드일지라도 쇼 윈도우에 설치한 인테리어 장식 정도를 제외하고는(루이비통 외부 조형물 제외) 일체 간판이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여기 이 샹젤리제 거리를 통째로 우리나라 강남 상권에 옮겨 놓았다고 치자. 일단 1층에 은행. 핸디 폰 매장. 가전제품 매장. 고급 의류 매장 등등 등의 초대형 간판이 내걸린다. 2층에 치과를 비롯한 병원들. 학원. 미장원. 중국집 들이 저마다 눈에 확 띄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한다. 3층도 마찬가지 4층도 마찬가지...... 이제 윗층으로 올라가면 옆으로 세우는 대형 입간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건축물의 미적 감각이나 완성도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건물은 그저 요란하게 간판을 매달 수 있는 한낯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무슨 건축가의 철학이나 비전이 있겠는가? 천재 건축가 가우디나 에펠이 와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파리뿐만이 아니라 나는 유럽의 거리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간판이 없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모든 상가 건물에 휘앙찬란하게 간판들을 해 달고, 우리나라 모든 상가건물에 간판들을 모두 철거하고 난 다면....... 나는 걸어서 우리나라 팔도 도시유랑을 떠나지, 굳이 도깨비 소굴 같은 유럽의 도시들을 찾아 떠나지 않을것만 같다. 제 모습을 찾게 만들면 안될까?
지금 파리에서 가장 매력이 없는 곳이 샹젤리제 거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무래도 서둘러 떠나야만 하겠다.
명품 브랜드 매장에 별반 눈길도 주지않고 터벅터벅 앞서 걸어가던 챠밍여사가 모처럼 정지해 섰다. 한참을 쪼그리고 무언가에 몰두한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명품 자동차 전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중후함과 더불어 늘씬하게 빠진 애스턴 마틴 신형 모델에 빠진 모습이다. 007 제임스 본드가 즐겨 애용하는 명품 자동차이다. '우리 아들이 저런 자동차 타면 참 잘 어울릴텐데.......' 라고 푸념처럼 늘어 놓는다. 이거야 원. '돌아가면 죽어라 더 열심히 일해서 애스턴 마틴 하나 사서 아들 줄께' 라고 호언 장담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돌아가는대로 로또를 죽어라 살께' 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들넘이 애스턴 마틴에 잘 어울릴것 같으면......... 난 도대체 무슨 차가 어울릴것 같은데? 내 *차는 나한테 영원히 그냥 타란거여?' 하는 억한 심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온다.
불어닥친 추위를 잠시 피해보려고 카페와 패스트 푸드에 들려 보지만........ 서둘러 어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드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샹젤리제 거리를 웬만큼 지나왔다고 생각하면서 저 건너편에 오벨리스크와 나무 숲이 보일 즈음이면 높은 철제 담장이 높게 둘러쳐져 있는 황금색이 많이 들어간 예쁜 건물이 나타난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 궁( Palais de L'Elysee) 이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저어문 앞에 정복을 입은 경찰 한 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누가 이곳을 대통령 관저라고 생각하겠는가? 이사람들은 경호라는 걸 모르는 걸까? 조지아 트빌리시 대통령궁 다음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이거야 숫제 우리동네 동사무소랑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엘리제 궁을 지나 다음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하면 세느 강의 알렉산드르 3세 교로 향하는 길이다.
이 길의 양편으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하여 지었던 그랑팔레(Grand Palais)와 프티팔레(Petit Palais)가 위치해 있다. 만국 박람회를 위해서 프랑스는 그랑팔레와 프티팔레 외에도 에펠탑과 오르세 기차역 등을 지었다.
현재 에펠탑을 제외한 세 군데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미술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랑팔레는 근대 회화전이나 조각전과 같은 특별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프티팔레는 르네상스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회화나 오브제와 조각작품들을 상설 전기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곳이 현재는 내부 수리공사로 모두 폐관되어 있어서 부득불 찾아 갔음에도 발걸음을 되돌려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되고나니 당연하게 우리의 발걸음은 세느 강 건너에 있는 오르세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려니 무언가가 잡아 끌듯이........ 샹젤리제 거리에 대한 알지 못할 아쉬움이 남는다.
샹젤리제(Avenue des Champs-E'lysees)의 이름을 풀이하면 '엘리제의 들판'이 된다. 이는 다시 '용사들의 영혼이 머무는 안식처'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신화에 따르자면 '엘리제'는 죽음의 신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 세계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이 지하 세계에 하데스의 배려로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영혼들을 위하여 영원한 안식처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샹젤리제이다. 죽음 이후의 지하 세계지만 지극히 신성한 장소인 것이다. 지하 세계라 하여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 신화의 이야기가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는 암흑기를 틈 타고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영혼들이 죽어갔는데, 십자군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슬람 군인들이 전사한 동료들을 기리면서 죽은 영혼들이 엘리제의 들판에서 영원한 휴식을 얻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라와 부족을 위해 부득이 전투에서 죽어간 영혼은 샹젤리제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포로로 잡힌 십자군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성전을 영광의 승리로 이끌지 못한 책임을 물어 교회가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낙인찍어 파문 시킬것이라 생각했다. 교회에서의 파문은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군대의 사기와 전력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십자군 지휘부는 곧바로 교황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교황과 기독교 수뇌부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가막힌 묘수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옥(煉獄. purgatory) 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 천당행이냐 지옥행이냐가 이미 결정이 나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라도 곧바로 지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죄업을 만회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해서 죄를 씻고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 재물과 땅을 바치고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면 죄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오로지 교회의 유익함을 위해 날조한 것이 연옥 타령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옥에 머무는 동안에 벌인 어떤 방법으로든 죄사함을 받을 노력을 뼈빠지게 한 결과에 대해 하나님이 아닌 교회(교황)가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맞건 그르건..... 교회의 입맞에 맞으면 천당행이고 교회의 성에 차지 못하면 당장 지옥행인 것이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에 따르면........ 이런 죄사함의 결정권을 행사하던 교황과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대부분 지옥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서 모진 처벌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연옥의 개념은 오로지 가톨릭에서만 쓰인다.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연옥의 개념을 제 멋대로 만든 장본인이 그들이었다.
샹젤리제!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며 의미인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한 사람들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공간이란 표현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가 말이다.
이렇게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무참하게 학살해 버리고 말았다.
샹젤리제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에게 삼가 경의를 받치며 평안한 안식이 영원하기를 기원해 본다.
--- 다음 이야기는 시테 섬에서 프랑스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겠습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