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누구인가
아시안게임 첫 2관왕·나라사랑 사나이
고(故) 조오련 선수는 1952년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서 5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남 방죽(저수지)에서 헤엄을 치던’ 그가 수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다. 집안 심부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하계체전 수영 예선전을 보고난 뒤, ‘1등이 나보다도 못하다’란 생각이 들면서부터다.
수영선수의 꿈을 막연히 키워오던 조씨는 해남고 1학년 때인 1968년 12월 무작정 자퇴서를 내고 서울로 상경했다. 청계천 부근 간판집과 창고지기로 일하면서 종로 2가의 YMCA수영장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억센 전라도 사투리의 시골 소년은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1969년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에 수영복 조차 없이 ‘사각팬티’를 입고 출전해 자유형 400m와 1,500m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개인 혼영 200m 한국신기록을 깬 것을 시작으로 한국 수영계를 평정했다.
조씨는 양정고 2학년 때인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한국스포츠 사상 첫 아시안 게임 2관왕에 오르며 ‘아시아의 물개’란 애칭을 얻었다. 4년 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 조씨는 수영 덕분에 고려대에 진학해 배움에 대한 원도 풀었다.
그리고는 수영선수로서는 환갑을 넘은 나이인 27세에 출전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접영 200m 동메달을 따낸 뒤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는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 등 세 종목을 제외한 모든 종목에서 무려 50차례나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현역에서 물러난 조씨는 1980년 8월11일 사상 최초로 대한해협을 13시간16분 만에 횡단했다. 5·18 광주항쟁 직후였지만 금남로에선 대대적인 시민환영대회도 열렸다. 2년 뒤엔 현지 가이드가 체재비를 몽땅 갖고 달아난 와중에서도 32㎞의 도버해협을 건너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은퇴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의 수영장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을 키우려다가 가산만 축냈고, 1984년엔 해남으로 내려오던 중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도 당했다.
사고와 사업 실패로 낙담하던 조씨는 1989년 서울 압구정동에서 ‘조오련수영교실’을 열어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고인은 또 광복 60주년인 2005년, 두 아들 성웅·성모씨와 함께 울릉도~독도를 횡단했다. 지난해엔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에 성공하는 등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삶을 살았다.
故 조오련씨는 성경필사 마친 크리스천
‘아시아의 물개’ 말씀의 바다도 건넜다
30년 친구가 금고서 필사본 발견… 1997년 시작 6년간 노트 4권 분량
갑작스런 아내 죽음-독도 횡단, 수영 영웅의 고뇌·의지 고스란히
지난 4일 별세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대한해협과 도버해협만 횡단한 게 아니다. 그는 성경의 '바다'에서도 유유히 헤엄쳤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성경필사를 마친 신앙인이다.
성경통독 1회도 어려운 마당에 성경필사를 마친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행위다. 따라서 성경필사는 단순한 필기가 아닌, 신앙행위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대형 국어사전과 같은 두툼한 성경필사본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신앙과 삶의 고뇌가 녹아 있었다.
조오련이 성경필사를 처음 시작한 때는 1997년 9월4일이다. 그는 대학노트처럼 생긴 '샬롬 필사성경' 노트를 이용했다. 맨 앞면엔 '많이 깨우쳐 주세요'라고 썼다. 아마도 삶의 근원적 문제에 부딪히자 하나님의 말씀을 한자 한자 옮겨 쓰면서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았으리라. 첫 번째 성경필사는 레위기 18장21절에서 그쳤다.
그가 다시 성경필사에 도전한 것은 같은 해 11월18일이다. 성경필사는 모두 4권의 책으로 구성돼 있는데 1권 맨 첫 장엔 '급하면 돌아가라'고 썼다. 무엇인가 그를 조급하게 했나 보다. 어머니의 신앙처럼 빨리 장성하기를 바랐던 그의 소망인지도 모르겠다.
볼펜찌꺼기가 하나도 없는, 여고생의 글씨처럼 깔끔하면서도 간결한 글 맵시는 말씀을 대하는 그의 정성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오자는 수정액을 사용해 지웠는데 1664쪽 내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1권은 98년 4월13일에 마쳤는데 마지막 장에 '갈 길이 멀다'고 써놓았다. 2005년 성웅·성모씨와 18시간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횡단할 때도 이런 마음이 들었으리라.
여호수아부터 써내려간 2권 맨 앞엔 초지일관(初志一貫)을 썼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그의 글 속엔 비장함이 느껴졌다. 시편은 99년 3월18일에 마쳤는데 '부천 다녀온 날'이라고 기록해 놨다. 그는 경기도 부천에 스포츠센터를 개소하고, 2001년 부천대 겸임교수를 지낸 바 있다.
2001년 3월9일 스가랴까지 잘 써내려갔던 그는 5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그에게 평생의 친구이자 매니저이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크게 방황을 한 것 같았다. 성경필사는 중단됐고 아내의 죽음 이후 1년이 지난 4월23일에서야 다시 시작됐다. 깔끔하던 글씨에 흔들림마저 보였다. 그는 다시 필사를 시작하며 '열리든 안 열리든 두드리자'라고 써 놨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해답을 찾아 간절하게 구했을 것이다. 이후 사복음서를 거치며 다시 원래의 필체로 돌아간다.
그리고 2003년 11월18일 마침내 6년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계 22:13)라는 성경구절과 함께 '6년간 마음과 건강과 시간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이라고 적어놓았다. 필사를 마친 2003년은 그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이 된 해다.
조오련과 30년 지기로 금고 안에 고이 간직돼 있던 필사본을 발견해 본사에 가져온 곽경호(서울 도곡동 기쁜소식교회·57) 호커뮤니케이션 대표이사는 "그는 권사였던 신앙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고 회고하곤 했다"면서 "내년에 예정된 2차 대한해협 횡단도 '하나님께서 분명 나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의 뿌리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성경필사를 권했던 곽 대표이사는 "전화를 걸면 '성경 어디까지 썼다'며 자랑스러워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마음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분명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조오련은 성경필사의 결론을 책 맨 뒤에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남겼다. '베풀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