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85〉그대는 수행길에 수레를 채찍질 할 것인가?
삶과 수행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
드러난 명리는 허울 좋은 겉치레
중요한 것은 무위법 ‘진실한 마음’
당나라 때, 선사인 마조 도일(709~788)을 조사선의 개조(開祖)라 칭한다. 선사가 형악 전법원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남악 회양(677~744)을 만났다. 회양은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덕은 무엇하려고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요.”
그러자, 회양이 암자 앞에 있는 돌 위에 대고 기와를 갈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만일 나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마조가 아무 말도 못하자, 회양이 이어 말했다.
“자네가 지금 좌선(坐禪)을 익히고 있는지, 좌불(坐佛)을 익히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만일 좌선을 익히는 중이라면 선(禪)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며, 혹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일정한 모양새가 없는 걸세.”
이 이야기를 ‘마전작경(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이라고 한다. 회양이 말한 대로 무엇을 채찍질해야 수레가 나가겠는가? 유사한 내용이 <사십이장경>에도 있다.
“수행자가 도를 닦을 때, 마치 ‘맷돌을 돌리는 소(磨牛)’처럼 비록 도를 행하나 마음이 따르지 않는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 도를 닦는다면, 도를 닦는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굳이 좌선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워있든 서 있든 앉아 있든 어떤 형태로든 선이 가능하다. 또한 앉아 있는 부처 흉내를 낸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는 부처와 같은 마음 씀이 작용되어야 정각을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에 자동차가 한 대 있다. 자동차는 겉모양이 좋고, 성능도 뛰어나다. 차에 기름을 잔뜩 넣고 주차해 놓기만 하면, 이 물건은 아무 쓸모가 없다. 즉 소를 때려야 수레가 굴러가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 진정한 마음 작용이 중요한 것이다.
즉, 외부적인 형체에 관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체를 이끌어가는 투철한 마음가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죽음 직전의 환자들 이야기를 다룬 <인생수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이 암 선고를 받으면, 환자들은 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한다.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해서다. 그러다 병세가 악화되면 이들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이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후손에게 전해진 사진이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상실 너머에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과 살아있는 사람과의 따스한 마음이다. 생사를 초월한 마음을 소중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인간의 심성을 다룬데 있어서 진리와 상통하는 점이 있어서다. 형체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유위법(有爲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위법(無爲法)이다. 선(禪)이든 염불이든 주력이든 독경이든 무위법을 향해 주체성 있게 굴리는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본다. 밖으로 드러난 명리(名利)는 허울 좋은 겉치레요, 외모 또한 영혼 없는 수레에 불과하다. 그대가 진정 불자라면, 현 삶과 수행길에서 수레를 채찍질할 것인가? 소를 채찍질할 것인가? 그대의 선택에 달려있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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