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소리
안개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밤이다. 숲속을 잠식한 어둠이 창문 틈으로 쑥쑥 밀고 들어와 어느새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발밑으로 뭔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커다란 바퀴벌레다.
산 중턱의 도서관, 이 층에 있는 자료실은 삼백 평은 족히 넘어 보인다. 지금은 밤 아홉 시, 사람들은 여섯 시에 다 나갔다. 건너편 사무실도 오래전 불이 꺼져 캄캄한 복도엔 내 발소리만 건물을 울린다.
지난주에 미뤄둔 업무를 오늘은 모두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삐거덕 삐거덕….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갈수록 반복되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분명 이용자들이 모두 나간 걸 확인했었다. 이 시간이면 건물 양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이 층에선 멈추지 않는다. 비상구 철문도 단단히 잠갔는데 도대체 누굴까? 자료실 전등을 구역마다 켜고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없다.
지난번엔 누군가 숲 쪽으로 난 창문을 자꾸만 두들겼다. 무서워서 그냥 퇴근했는데 다음 날 보니 산비둘기가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쩌다 야근하는 날이면 책이 빼곡히 실린 서가가 조금씩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다고 몸을 비트는지 탁, 탁, 널빤지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늘도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귀 기울여 듣는 걸 알아챘나? 잠시 조용해졌다. 자판을 두드리며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는 사이 잊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삐거덕 삐거덕…. 나 말고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출퇴근하는데 그는 아예 상주하는가 보다.
조용할 때면 그는 불쑥불쑥 소리로 다가온다. 가끔은 붕- 하고 도서 검색용 컴퓨터가 절로 부팅되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한낮에도 식별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존재를 알려 오기도 한다. 언젠가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나서 발원지를 찾아다녔다. 폭이 크지 않은 길고 가느다란 신호음이었다. 한참 만에 찾고 보니, 뜻밖에도 독서 중인 할아버지의 보청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가 아니다.
집에는 구매한 지 십 년 넘은 의자가 있다. 널찍하고 편해서 세 개나 샀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통에 두 개는 일찌감치 갖다 버리고 한 개만 컴퓨터 앞에 두었다. 그런데 나사가 달아났는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의자는 집에 있는데 소리만 도서관에 왔을까? 혹시 대만 여행에서 본 유택(幽宅)에서 혼이 따라온 걸까. 스마트폰에 줄줄이 담아 온 무덤 사진 속에 끼어 왔다가 이곳에 자리를 틀었는지도 몰라. 이 생각을 하는 중에도 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희미하게 들릴 듯 말 듯 삐거덕 삐거덕….
이곳에서 주말 근무하던 직원이 말했었다. 퇴근 시간 후 남아 일하다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집에 갔다고. 갑자기 덜컹, 하더니 바람이 쏴-하고 들어온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돌아보니 숲 쪽으로 난 창문이 열려 있다. 살금살금 다가가 쾅, 하고 닫았다. 강심장이라고 자부했는데 오늘은 왠지 불안하다. 녀석들은 내 허락도 없이 넓은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저 소리들은 보이지 않은 그림자를 가졌나 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 소리는 소리로 퇴치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컴퓨터에서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음악 방송 중이다. ‘이제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볼륨을 끝까지 올리자 악기 소리가 자료실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역시나 녀석들은 재빠르게 존재를 숨겼다. 서가 틈새에 숨었는지 문틈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드러내진 않는다. 라디오에선 유쾌한 사회자의 진행으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는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일을 마쳤다. 녀석들과 씨름에서 오늘은 완전한 나의 승리다.
하지만 찜찜하다. 소리는 인간이 추구해 온 편리함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이 많은데 갖가지 행태의 그것들에 오히려 매몰되는 느낌이다. 나는 소리에서 그림자를 읽는다. 그들은 세상의 소리를 끌고 다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다. 그들에게 발목을 내줘서는 안 된다. 혹여 나약해지면 그림자는 슬그머니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려 들지도 모른다.
밤은 모든 그림자를 집어삼킨다. 그림자가 끌고 온 온갖 소리까지 꿀꺽꿀꺽 몸속으로 밀어 넣었을 거다. 쉴 곳을 찾아 날아가다 유리창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 산비둘기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 미처 말 못하고 떠난 누군가의 마음의 울림소리, 불빛에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대는 서가의 소리까지. 주변이 조용해지면 심술궂은 밤은 그것들을 되새김질하다 슬그머니 하나둘 풀어 두고 가기도 한다. 마치 우리를 시험하듯이.
아침이 오면 소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태양의 위력에 땅속으로 가라앉거나 백색 소음에 묻혀 버린 것 같다. 하지만 대낮의 활력과 바쁜 일상에 덮여 잘 보이지 않을 뿐, 어둠이 내리면 그림자가 끌고 온 소리는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바라보아야 보이는 사물의 이면처럼,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야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혼자 있는 밤. 거대한 밤의 되새김질에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스쳐 지나간 눈동자가 보낸 마음의 소리를 알아챈다. 내 생채기만 만지느라 타인의 아픔을 외면했었다. 그중 어떤 소리엔 숀탠의 그림책에 나오는 가엾은 매미*처럼 오래 침묵해온 누군가가 보낸 신호음도 포함해 있으리라. 탁, 탁. 삐거덕, 삐거덕…. 그것은 세상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내는 아픈 소리이다. 나는 이제 소리를 찾아 나선다.
* 매미 : 숀탠의 그림책, 『매미』에 나오는 주인공. 매미는 평생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만 받다가 껍질을 벗고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