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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고현동’의 도시변신 집중탐구
전경심 지구와에너지 수석편집위원
바다와 육지의 기억을 간직한 거제시 고현동 스토리
거제는 한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섬이다. 거제시는 현재 인구 23만의 작은 도시지만 대한민국 최고 조선산업의 기지다. 조선업 빅2인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모두 거제시에 위치하여 지역사회 경제의 축을 담당한다. 1974년 8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춰 출범한 거제의 조선산업은 80년대 극심한 장기불황,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많은 시련을 이겨냈고 지금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1년째 주력산업인 조선경기 불황으로 원도심(原都心)이 쇠퇴하면서 한숨짓던 거제의 중심거리가 다시 활력을 찾는다. 거제시 중심지에 조성되는 도시재생 복합기능 ‘이음센터’와 광장이 그 시작의 중심에 있다. 도심중심기능이 강화되면 쇠퇴하던 상권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것이고 지역공동체도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거제에선 초유의 일이며, 세계 도시재생 사례로도 흥미로운 ‘사건’이 될 것이다. 미래문화공간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환상호텔’ 얘기다.
1998년 6월 폭우가 쏟아지던 밤 거제관광호텔(옛 청운호텔)에 노부부가 찾아왔다. 한여름 더위에 폭우까지 겹쳤지만 버스와 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호텔에 온 것이다. 이날 호텔은 숙박객으로 넘쳐나 빈 방은 단 하나뿐이었다. 노부부는 여정의 피곤함 속에서도 지하의 나이트클럽 ‘아라비안나이트’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당시 거제관광호텔의 인기가 나이와 날씨를 가리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일화다. 한국에 IMF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울 때도 거제만큼은 비껴갔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당시 거제의 ‘그 시절 호황’에 대한 향수를 잘 대변해준다.
거제관광호텔
지금의 럭셔리한 호텔문화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 시절의 거제관광호텔은 ‘놀고 싶은 시민들’을 달래줬다. 호텔의 외관은 모던한 서양식 건축이다. 당시 널찍한 홀에 레크리에이션 공간을 두고 즐길 거리를 넣은 거제의 호텔은 지역 최고로 알려져 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의 정교한 황금 빛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호텔 로비에는 섬에서 자라나는 온갖 희귀한 난초와 수석이 가득했다. 2층의 연회장은 시민들의 결혼식과 돌잔치로 일년내내 붐볐다. 당시 변변한 결혼식장이 없던 거제 시내에서 거제관광호텔은 가족모임을 위한 훌륭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밤이 되면 멋들어지게 장식된 호텔 바로 몰려든 시민들이 시원한 맥주의 거품을 들이키며 끊임없는 이야기들로 하루의 피곤을 씻어냈다. 한쪽 면이 창문으로 설계된 1층 커피숍에는 때로는 거친 입담으로 때로는 비밀스런 결사의 속삭임으로 어깨를 모으는 지역 정치가들로 가득했다.
1995년 고현 시가지에 문을 연 거제관광호텔(사진)은 20여년간 거제의 정치와 문화사회적 공간으로 역사와 스토리를 입혔다. 거제시청이 처음 이음센터를 구상할 때 영감을 받은 부분이 그것이다. 지금의 호텔이 있는 자리는 당시에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이었다. 거제시에서 추진한 1차 매립지에 호텔이 들어서고 도시가 확장되어 간 것이다. 당시 현 거제시청 아래쪽에 형성돼 있던 식당과 주점들이 매립지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서고 조금씩 이동해 가면서 지금의 고현동 중심시가지가 형성되었다. 30년동안 진행된 매립사업으로 고현 시가지는 바다 쪽으로 최소 500미터 이상을 서서히 이동해 갔다. 최근 고현만의 2차 매립이 진행됨에 따라 다시금 시가지는 이동할 것이고, 거제관광호텔 주변은 도심 공동화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시가 거제관광호텔을 사들여 미래의 환상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거제시 중심 ‘고현동’(고현동 33-30번지 일원)이라는 곳을 가보니 퇴락한 호텔의 층마다 잃어버린 기억의 환상이 가득했다. 오래된 건축물을 현대 도시의 자산으로 재탄생시키는 이른바 재생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현장이다. 그곳에서 거제시청 임우정 도시재생 과장을 만날 수 있었다. 임 과장에 따르면 2020년 10월 거제시는 법인 소유였던 거제관광호텔을 사들여 시민들이 일상의 휴식과 다양한 문화예술 경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고자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 대상지’로 선정받았다. 아울러 호텔 바로 앞 시유지인 구 신현지구대와 공영주차장을 연결해 시민 광장을 만들기 위한 도시 스케치를 구상 중이라는 것이다. ‘이음센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리모델링되는 거제관광호텔은 시민의 문화공간 및 공연장, 청년 창업 인큐베이팅 공간, 노인 일자리와 문화향유를 위한 실버하우스 등으로 재창조된다. 주민들이 운영하는 공공 임대상가와 옥상 정원(루프탑)도 계획되어 있다. 지하 1층, 지상 8층의 이음센터가 앵커시설이 되어 청춘과 실버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활력과 휴식의 공간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2020년 9월 중앙부처의 중심시가지 사업을 위한 거점시설 현장평가가 호텔의 지하 옛 나이트클럽인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이뤄졌다. 한때 고현의 중심가를 화려하게 밝혀주었던 그 곳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고 쇠락한 고현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옛 클럽의 여전히 화려한 벽 장식은 천 일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처럼 ‘잘 나가던 시절’의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는 변화무쌍하다. 세월 따라 융성했다가 쇠퇴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흥망성쇠의 이치가 도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도시는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쇠퇴한 도시에 새로운 기능이나 가치를 입혀 경제·사회·물리적으로 부흥시키려는 시도를 거제시가 하고 있다, 오래된 호텔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과 증축에 많은 건축비(102억)를 투입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 곳이 시민들의 기억과 관심을 모으는 장소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 거제시는 건물 리모델링(9월경 착공예정)을 할 때 어떤 것은 남기고 어떤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경계는 어디인지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고민 중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미래는 이전보다 한층 더 밝아졌다. 지방선거 권력교체 이후 도시를 위한 정책도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활력과 휴식’이 고현동 플레이스 브랜딩의 기본 컨셉
지방선거 권력교체 이후 도시는 어떻게 바뀔까. 도시는 어떤 새로운 정책으로 재구성되고 진화할 것인가. 국내외 도시브랜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코로나 라이프가 중소도시에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중소도시는 붐비지 않고, 안전하며, 일과 휴식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도시가 너무 과밀해 관광객들이 환영받기 어려웠다. 이제 그들은 거대한 랜드마크나 인프라보다는 사람과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플레이스 브랜딩(Place Branding)’이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자연환경에서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로 전환된 것이다.
플레이스 브랜딩(장소 브랜딩)은 ‘지역 또는 장소가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하는 것을 구현하는 작업이다. 구조물이나 표지 같은 시각적 상징물이 아닌 그 이상의 문화적 경험이 가능한 장소를 말한다. 이제 출렁다리와 케이블카나 조망대로는 밀레니엄 세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밀레니엄 인재를 끌어들이려면 천편일률적인 지자체의 도시 브랜드 경쟁으로는 답이 없다. 매력적인 도시로 진화하려면 차별성이라는 플레이스 브랜딩이 필수적이다. 문화를 활용한 플레이스 브랜딩 구축이 도시를 다르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다른 도시에는 없는 독특한 자원을 발굴해 도시가 갖고 있는 자연과 안전한 환경, 철학과 문화, 신념과 의지가 융합될 때 성공할 수 있다.
파리하면 달달한 로맨스가 떠오르고 밀라노하면 멋진 스타일로 설레인다. 바르셀로나 거리는 문화가 가득하고, 뉴욕은 활력과 힘의 상징으로 도시는 저마다 고유한 인상과 느낌을 뿜어낸다. 도시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도시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조직이다. 유형적인 특정 사물을 통해 도시이미지는 만들어진다. 그래서 도시마다 각인 효과가 있는 상징을 개발하여 다차원적으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거제시 고현은 다른 도시 특히 대도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현재 어떻게 포지셔닝되고, 어떤 이유로 찾아질까. 또 얼마나 오래 머무르고 싶을까.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절경이 펼쳐진 거제 망산
거제시는 사면이 푸른 바다이다. 푸른 바다와 산을 끼고 발전하는 세계 제1의 조선 산업 도시이자 해양관광․휴양도시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풍치를 안겨주는 붉은 동백꽃과 시민의 힘찬 기상을 닮은 갈매기의 도시이다. 활력과 휴식이라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거제시는 다른 남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배후도시가 없다. 인구유입이나 산업의 외연을 확장시킬 공간적 접근성도 훌륭하다. 계룡산과 독봉산으로 대표되는 나지막한 산줄기는 중심에 흐르는 고현천과 더불어 마치 유럽의 소도시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바다와 산이 잘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을 10분 이내에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거제시다. 차별화된 명소도 가득하다. 30년 전만 해도 거제를 대표하는 관광지는 해금강과 학동 해수욕장 정도였지만, 지금은 ‘외도 해상공원’과 ‘바람의 언덕’, ‘매미성’, ‘동백섬(지심도)’, ‘1박3식 이수도’ 등 전국적으로 알려진 수많은 관광지들이 즐비하다. 특히, 전국 100대 명산이라 불리는 남부면 ‘망산’에 올라서면 그야말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절경이 눈앞에 그림같이 펼쳐진다. 망망대해인 동해나 갯벌과 수많은 섬을 가진 서해와는 다르게 거제 앞바다는 손에 잡힐듯한 적당한 수의 섬들이 있다. 복잡하지 않아 평온하고 소박한 휴식을 준다. 거기다가 그 섬들을 돌아 나가는 새하얀 물살의 움직임은 보는 이의 시선을 무아지경으로 이끈다.
거제시는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도시브랜드의 슬로건을 ‘블루시티(Blue city)’로 정하고, 해양관광․휴양도시로 성장해왔다. 플레이스 브랜드에는 도시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장소에 기반한 도시브랜드의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구침략을 막았던 고현성과 거제포로수용소, 고현시장 등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스토리가 잠재된 곳이다. 고현동의 플레이스 브랜드인 ‘활력과 휴식’이라는 상징성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남해 연안의 다른 도시와는 차별적인 문화적 시각이 필요하다. 원도심의 상권이 다시 활성화되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특히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라이프에 맞춘 도시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미국 보스톤 시청의 리모델링 프로젝트의 교훈
보스턴 웨스트엔드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항구도시 보스턴은 지금의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도시였던 보스턴도 도심 공동화 현상은 피해 갈 수는 없었고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줄면서 자연스럽게 황폐화되고 있었다. 보스턴을 다시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보스턴 시청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보스턴 재개발청을 별도로 설립하여 웨스트엔드(West End)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초창기 계획은 멋졌다. 초고층 복합건물을 건설하고 충분한 주차공간과 녹지공원 등을 조성해 다시 사람들을 원도심으로 유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초고층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면적이 필수였다. 대규모 철거작업으로 기존 공간의 정체성과 문화가 상실되면서 주민 커뮤니티도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이후 웨스트엔드 프로젝트는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서 ‘소통과 상생’이라는 중요한 기준을 전세계적으로 제시했다.
보스턴 노스엔드
이후 10여년이 지나고 보스톤 시청은 노스엔드(North End) 지역에서 주민의견과 공간 특성을 고려하는 또 다른 사업을 추진한다. 보스턴에서 가장 먼저 이민자들에 의해 개발된 노스엔드 지역은 오래된 건물이 많았다. 노스엔드 프로젝트의 가장 큰 특징은 시청이 오래된 건물을 매입해서 공공서비스 문화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당시 시민들의 참여 의지가 대단했다. 주민들 스스로 보스턴의 역사를 기리기 위한 비영리 단체인 ‘자유의 길 재단(The Freedom Trail Foundation)’을 설립한 것이다, 주민들이 참여하여 노스엔드 지역의 관광 코스도 개발하였다. 보스턴이 가진 항만도시의 특징을 살린 퀸시마켓 활성화 사업도 성공적이었다. 지역산업 연계를 위한 수산물 테마 음식점, 카페, 상점들이 생기면서 과거의 호황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음센터’ 리모델링과 ‘광장’ 프로젝트가 만드는 일상의 문화예술 경험
미래의 이음센터와 광장조감도(거제시 제공)
거제시 중심지에 2010.1 ㎡ 공간을 아우르는 ‘이음센터’ 사업이 한창이다. 거제시가 야심차게 사들인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복합적인 문화공공서비스를 디자인하는 대형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거제시의 실질적인 상권부활과 일자리창출의 앵커시설이 될 것이다. 이미 가로환경이 개선되고 있고 거리에는 유럽풍의 테라스가 연상되는 ‘버스킹존’이 조성되고 있다. 거리가 빠른 속도로 생기를 되찾고 있다.
80년대에 이곳은 1차 매립으로 1,130,000㎡에 이르는 도시 공간이 확장되면서 상가가 형성되어 거제 시가지 발전의 근간이 됐다. 하지만 2차 매립으로 600,000㎡의 신도심 공간이 다시 생겨나면서 말 그대로 구도심이 되었다. 고현동 일대는 이제 도시 활성화계획으로 리뉴얼되면서 타도시와 경쟁 할 수 있는 ‘차별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역주민을 위한 각종 문화예술 소프트웨어 사업, 플리마켓, 주민공모사업 등 복합문화앵커시설이 창조하는 공간가치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머지않아 고현동 원도심은 거제시의 명소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건물 외벽에는 미디어 파사드가 설치되어 각종 정보 제공과 함께 영상물 상영으로 주민들의 열린 광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빛과 동영상을 결합한 콘텐츠는 이음센터와 이어지는 광장 일대를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건축할 것이다. 미디어파사드는 미디어(media)와 건물의 외벽을 뜻하는 파사드(facade)가 합쳐진 말로 건물 외벽에 LED·조명 등을 활용해 영상을 구현하는 기법이다. 시간을 내서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모두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일상의 예술 경험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이음센터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골목에서 만나는 낯선 풍경은 언택트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일상을 충분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음센터 미디어 파사드 담당자는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의 따뜻한 울림이 되어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다만 야간 경관에 미칠 빛공해에 관해서는 면밀히 검토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세계 도시들은 지역경제와 산업, 관광을 활성화 하기위해 고유 이미지 창출에 힘쓰고 있다. 이제는 국가의 대표 도시들 간의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이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유명도시들이 도시디자인에 힘을 쓴다. 디자인은 거리와 광장, 빌딩과 시설물과 같은 하드웨어 영역에서부터 도시행정, 교육, 축제, 주민교육과 서비스라는 소프트웨어 영역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든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도시로 거듭나려는 도시디자인 개념은 시민의 안전과 삶의 질, 장소 애착에서 출발하여 도시의 브랜드 가치, 경쟁력, 정보기술 인프라, 관광, 지식산업 등 도시의 모든 항목에 관여한다. 그래서 도시를 재생하고 디자인할 때는 모든 복합적인 디자인 영역들이 모인다.
권영걸 “걷고 싶은 거리, 머물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야”
거제시 고현동에는 시민들의 일상적 행위를 위한 예술적 하드웨어가 다각적으로 건설 중이다. 이음센터 앞에 만들어질 ‘광장’이다. 이미 도심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자연과의 접촉을 위한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시각적 아름다움도 고려하고 있다. 안전성과 치안은 기본이다. 광장의 휴식은 소상공인들의 장사를 활기차게 만들어줄 것이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이나 파리의 퐁피두센터(Pompidou Centre) 광장처럼 도시의 역동성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지역의 정체성 형성은 물론이고 지속적인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예술적 하드웨어란 광장이나 공원, 미술관이나 도서관 등의 공공건물, 기차역, 버스정류장, 벤치와 같은 시설물, 그리고 환경예술 같은 것들을 말한다. 거리를 걷다가 얻게 되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팔려는 상업성으로 가득하다. 반면 공익을 위한 도시디자인은 우리에게 잠깐의 휴식이 되어 도시에 대한 작은 기억이나 의미로 남는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가끔은 예술적 인식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런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 장소에서 하고 싶은 행위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보편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를 위해서는 잘 계획된 디자인이 필요하다.
수년전부터 서울은 도시 경쟁력의 수단으로 디자인을 선택했다. 구조 중심의 하드웨어 시티에서 콘텐츠 중심의 소프트웨어 시티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울시 초대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을 지낸 권영걸(서울디자인 재단 이사장)은 '디자인 서울 가이드라인'에서 디자인도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도시행정에 디자인의 개념을 접목시킨 것이다. 그는 서울색과 서체 등 서울시의 상징체계를 수립하고 간판정비 사업 등을 통해 도시 미관을 개선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는 “거리는 중요한 곳입니다. 시민이라면 단 하루도 피할 수 없는 공간이 거리거든요. 이 거리를 걷고 싶게 만들고, 머물고 싶게 하면 문화가 소통되고, 사람들이 몰리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되는 것이죠.”라고 말한다. 2008년 그는 공공건축, 공공공간, 공공시각매체 등 5개 분야에서 규제와 권장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적용하면서 서울시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사업과정에서 관료조직이 디자인의 시각을 가질 수 있어서 가능했다고 한다. 디자인 역량을 넘어 조직 속에 디자인을 체화시킬 수 있는 행정력을 함께 갖춘 전문가가 일할 수 있는 행정적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권영걸 이사장은 현대도시의 유토피안 이미지는 ‘도시의 자연화’와 ‘도시의 인간화’라고 말한다. ‘도시의 자연화’는 건강하고 안전한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고, ‘도시의 인간화’는 품위 있고 매력 있는 도시를 향한 꿈이라는 것이다.
간판정리: 도시 미관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방법
간판은 도시의 지배적인 시각환경 요소이다. 옥외광고물의 40% 이상은 판형 간판이다. 상가 주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점포와 광고물을 강조하기 위해서 넓은 면적의 판형 간판을 달기 때문이다. 또한 전체의 반이 넘는 불법 간판들은 낮에는 어디가 어딘지 건물이 잘 보이지 않고, 밤에는 간판마다 형형색색으로 빛을 낸다. 행인과 운전자의 시각을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러한 간판들은 정보 전달 기능이 매우 약하다. 사토 마사루 교수(규슈예술공과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보도를 걸어가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한 곳을 응시하는 시간은 평균 0.3초라고 한다. 그 순간 사람의 뇌가 기억하는 정보량은 15글자를 넘지 못한다. 시선이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지면으로부터 높이 10m 이내인 건축물의 3층 높이정도인 것이다. 이 범위를 넘어 게시된 정보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옥외광고물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여 간판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가이드라인 적용으로 오히려 경관의 특성을 저해하는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률적으로 표준화되는 간판정리는 오히려 다양성을 침해해서 조화롭지 못하다. 진정한 상생은 다양성과 통일성이 잘 어우러져야 얻을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도시재생 뉴딜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매년 약 10조 원씩, 5년간 약 50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전국 500곳(매년 약 100곳)의 도시재생사업을 지원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엄청난 규모의 정책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면서 그동안의 관주도 사업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함께 다양한 대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장소를 중심으로 주민의 역량자체를 높이는데 중점을 둔다. 하지만 쇠락한 지역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단기적으로 효과를 나타내기는 힘들다.
해외의 경우 도시재생에 인구 및 고용 증가를 도시재생의 핵심 지표로 삼는다. 수십 년까지 기간을 두고 진행하면서 도시 문화디자인에 입각한 정비사업과 인프라 개발도 함께 한다. 주택과 상가, 주변 환경의 기반시설이 개선되지 않으면 커뮤니티를 아무리 강조해도 주민들은 점점 떠나게 된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시민 참여와 거버넌스도 사회적 가치는 있지만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서는 사업 자체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많은 지방의 정책들이 성공했다는 지역의 어느 정책과 유사하다. 들여다보면 도시재생의 대상이 되는 지역 특유의 역사와 문화가 잘 반영되지 않는다. 어쩔수 없이 전국적으로 지자체의 독주와 관주도의 속도전이 벌어진다. 도시재생의 주인공은 그 지역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주민들이어야 하는데, 주민들이 사업 과정에 참여한다 해도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반대로 참여 열의가 너무 강한 주민들이 개별적으로 사업의 제반 진행과정에 참여하면서 사업의 추진 동력도 잃어버리는 문제도 생겨난다. 주민 의견이 모이기보다는 서로 자기가 옳다며 시비를 가리다가 거버넌스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사업이 지지부진해지고 주민 대표가 사임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어떻게 탄생하나
지금까지의 도시재생사업은 재정사업인 ‘마중물사업’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민간투자를 견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경제 원리로 작동하는 도심의 상업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 있어 지나친 공공성 추구는 공공의 이익이 아닌, 손실로 작용할 수 있다. 주변 환경과 인프라 개발보다는 비슷비슷한 구조물과 벽화들이 즐비한 것도 도시재생의 특징이다. 수백억의 세금을 들이면서도 눈에 띄는 성과는 나오지 못하니, 도시재생의 공익적 효과가 낮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도시재생사업은 과거 뉴타운 재개발 지역들이 국제금융위기로 사업 추진 동력을 잃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낙후된 단독주택촌을 재개발하려다가 해제한 후 도시재생 대상지구로 변경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월세를 많이 받으려는 집주인들이 자기 집을 허물고 원룸과 오피스텔을 짓기 시작하면서 많은 도시재생 지역들이 원룸과 오피스텔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월세가 부담스러운 거주자들이 빠져나가면 지역 전체가 다시 슬럼화 되었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재취임으로 서울의 많은 도시재생사업이 재개발 사업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서울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3.6%가 '도시재생에 개발을 포함해야 한다'고 답했다. '개발'에 대한 시민 인식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도시는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도시는 늙어간다. 신도시, 주택, 공공인프라 등을 성장동력으로 삼는 시대는 지나갔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환경파괴, 기후위기, 자연재해 등은 도시에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목표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장기 코로나 시대에 과연 현재와 같은 대도시의 삶은 지속가능할까?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안전한 도시로의 열망은 중소도시로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중소도시가 바로 회복력 있는 새로운 유형의 미래도시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거제시 고현동은 구도심라는 이미지에 갇혀 도시다운 품격과 면모를 갖추기 어려웠다. 이제 이음센터라는 앵커시설과 광장 건축으로 ‘활력과 휴식’ 플레이스 브랜딩을 과감하게 추진함으로써 명실공히 독자성과 차별성을 갖춰나가고 있다. 새 정부가 구도심 개발을 용이하게 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방선거 권력교체 이후 도시는 새로운 정책 디자인을 기다리며 오늘도 진화중이다. 거제시 고현동이 활력 넘치는 젊은 도시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도시는 나날이 확장되고 이동하지만 원도심을 기억하는 도시의 향기는 점점 더 짙어지고 사람들은 그 멋을 찾아 이동할 것이다. 그것이 이 도시가 추구하는 진정한 플레이스 브랜딩으로 거제시 만의 ‘고유의 가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