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⑬야곱이 그에게 이르되,“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⑭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⑮에서가 이르되,“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하매, ⑯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⑰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⑱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⑲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⑳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안토니오’는 결혼을 위한 지참금 마련을 위해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계약서의 내용은 잔인했다. 돈을 기한내로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안토니오의 살들 중 심장에 가까운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안토니오의 배는 기한 내에 돌아오지 못했고, 샤일록은 약속대로 살을 도려내겠다고 나섰다. 1파운드는 그램으로 환산하면 약 450g이다. 심장 근처의 살을 이만큼 내놓으라는 것은 사실상 죽이겠다는 뜻이다.
안토니오의 약혼자 ‘포셔’는 남장을 하고, 재판관으로 나선다. 포셔는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어, 돈으로 빚을 받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하지만 샤일록은 계약이 정당했음을 주장하고, 끝까지 살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한다. 결국 포셔는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샤일록이 칼을 들고 안토니오에게 다가서는 순간, 포셔는 집행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계약서에 오로지 ‘살’만 적혀있을 뿐, ‘피’는 명시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샤일록에게 원금의 세 배를 갚겠다고 하지만, 샤일록은 싫단다. 살을 도려내겠단다. 죽여야겠단다. 안토니오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저당 잡히는, 천사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샤일록에게만큼은 독설을 퍼붓는다. 유대인이라고, 그러니 ‘개’라고 부르겠다고. 사실 똑같은 사람이다.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왜 이토록 싸워야할까?
에서가 야곱을 끌어안았다. 야곱도 에서를 끌어안았다. 미운 감정은 있었지만, 만나고 보니 서로 형제였다. 만나고 보니 얼마든지 화해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왜 그토록 미워했는지 모른다. 굳이 20년 동안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뇌물을 준비했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한 후, 이 뇌물은 선물이 되었다. 사랑하기에 진심으로 건네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살고 싶어서 건넨 뇌물이었는데, 지금은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순수한 선물이다.
에서는 야곱의 선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도 넉넉히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군인 400명을 유지하려면, 아브라함만큼이나 큰 부자였을 것이다. 더 큰 부자였을 수도 있다. 굳이 야곱의 선물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야곱의 계속된 요청에 결국은 그 선물을 받아들였다.
에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12절) 야곱의 보호자, 안내자가 되어주겠단다. 이제껏 못했던 형 노릇을 하고 싶단다. 에서는 세일산으로, 자신은 벧엘로 방향을 잡을 것이다. 아직 말은 안했지만, 둘이 살아갈 방향은 다르다. 그래서 야곱은 정중히 거절한다.
에서는 최소한 보호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사막에는 힘없는 사람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많다. 틀림없이 어디선가 야곱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에서는 진심으로 야곱을 생각한다. 야곱도 그 마음을 안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절한다. 에서의 군대와 보조를 맞춰가려면, 자신의 가축 떼는 필시 사막에서 다 지쳐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각기 갈 길로 간다. 에서는 세일산으로 돌아갔고, 야곱은‘숙곳’으로 갔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17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것이다. 미움을 거두고, 용서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나 같은 멍에를 메는 것은 원하시지 않는다.“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삼상 19:1)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순간에도,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은 심히 좋아하였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이 여겼다. 물론 다윗 역시 요나단을 좋아했다. 사울과는 전혀 상관없이 두 사람의 우정은 갈수록 깊어졌다. 친한 것은 친한 것이고, 두 사람의 갈 길은 너무 다르다.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 모두 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한 사람밖에 왕이 될 수 없고, 결국 나머지 한 사람은 죽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께는 12 사도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12 사도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셨다. 똑같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12 사도 모두가 같은 멍에를 메지는 않는다. 가룟 유다는 자기 멍에를 멘다. 자신은 12 사도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갔다. 야곱과 에서가 각자의 길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야곱은 ‘숙곳’에 자리 잡았다. ‘숙곳’은 ‘우릿간’ 혹은 ‘움막’이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하여 초막집을 지었다. 가축 떼를 위하여 움막을 지었다. 이것이 그대로 그 땅의 이름이 되었다.
숙곳의 또 다른 이름의 뜻이 있다. ‘쉼, 피난처’라는 뜻이다.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곱이 마음 놓고 쉼을 가졌던 적이 없다. 에서와의 갈등도 해결됐다. 넉넉한 재산도 있다. 이제는 마음 편하게 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숙곳에서 체류한다.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19절)‘숙곳’에서 이번에는 ‘세겜’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의 땅을 은 백 냥에 샀다. 유목민에게는 땅이 필요 없다. 굳이 야곱은 땅을 샀다. 야곱의 믿음이 성장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축복하셨다.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땅의 축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⑥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⓻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6~7) 지금, 야곱이 서 있는 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다.
땅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꼭 여기 이 땅을 사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믿어진다. 내가 축복의 시작이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땅을 사야만 한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20절)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야곱도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엘엘로헤이스라엘’라고 불렀다. ‘엘’은 ‘강한 하나님’을 의미한다. ‘강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믿어진다.
바로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다. 나도 같은 제단을 쌓는다. 같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자기의 삶을 돌아보니, 감사한 것밖에 없다. 그래서 소리 높여 외친다. “엘엘로헤이스라엘”
이태리 남쪽에 시칠리 섬이 있다. 헬라시대에, 그 섬에서 제일 번성한 도시가 사라쿠사였다. 주전 287년, 이곳에서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태어났다. 당시 이곳은 헬라의 식민지였다. 당시 사라쿠사를 다스리는 왕 히에론 2세는 그의 친척이었던 아르키메데스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아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물리학을 가르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왕립학교에서 유학하게 하였다.
사라쿠사왕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공공제단을 만들기도 하고, 진귀한 왕관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한 번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를 축하하기 위해 금세공장이를 시켜 승리의 왕관을 만들게 했다. 왕이 정한 날에, 금세공장이는 왕관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얼마 후에 금세공장이가 왕이 준 금을 다 사용하지 않고, 대신 은을 섞어 왕관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왕의 귀에까지 들렸다. 왕이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해 왕관을 살펴보았지만,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무게를 달아봐도 같은 무게였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왕관을 산산이 부수어 조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금세공장이에 관련된 혐의를 조사하게 했다.
아르키메데는 이 문제를 두고 궁리해 보았지만, 해결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중목욕탕에 들어갔다. 탕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몸이 물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물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런데 자기보다 덩치가 적은 아이가 들어갈 때는 물이 적게 넘쳤다. 이전까지도 같은 광경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때는 그렇구나 생각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날은 “왕관이 순전한 금으로 만들어졌는가?”하는 문제로 고민하면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을 깨달았다. 사람 70kg의 부피와 쇠 70kg의 부피가 다르다. 그러므로 물이 가득한 탕에 넣으면, 물이 흘러넘치는 양이 다르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금과 은도 같은 무게라 할지라도, 부피가 다르다. 여기서 해답을 발견했다. 왕관이 같은 무게라도 성질이 다른 것을 섞으면 부피가 다르기 때문에, 물이 흘러넘치는 양도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유레카)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사실을 목욕탕에서 발견하고, 너무 기뻐 흥분되어 벌거벗은 몸으로 “유레카(εὕρηκα 발견했다)”를 외치며, 시가지를 거쳐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금세공장이의 부정이 폭로되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수많은 에디슨의 발명품과, 수많은 과학자들의 발견이 같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므로 유레카 했다(찾았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발걸음이 무겁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던 제자들의 발걸음이 갑자기 사슴의 발처럼 가벼워졌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찾았을 때’는 무거웠다. 생명을 ‘찾았을 때’는 가벼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만 ‘찾았을 때’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찾았을 때’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소리 질렀다. 야곱은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기서 만났다! 내가 부르짖을 소리는 무엇인가? ‘할렐루야!’ 하나님, 살아계시다. 살아서 역사하신다. 나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분으로 인하여 지금 여기에서 소리 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