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일이더라도 정작 본인이 싫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조선시대 평안감사가 최고 선망의 꽃보직이었음을 입증하는 말로도 쓰였다. 여기서 감사는 관찰사를 말한다. 도백으로도 불렸던 종2품의 관찰사는 8도에 파견됐던 지방행정 최고 책임자였다.
8명의 관찰사 중 평안 관찰사가 조선의 고위 관료들에게 특별히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뭘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가 소장돼 있다. 조선 후기 풍요로운 평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월야선유도’,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 등 3폭으로 구성돼 있다. 평안감사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대동강 변에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성곽과 건물, 연회에 참여한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 등 당시 연회의 장면을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연출한다. 특히 악사와 무용수, 기녀, 평양부의 양반 등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월야선유도’의 대동강 뱃놀이를 보면 평안감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알 수 있다.
평안감사는 독자적인 재정권을 쥐고 있어 권한이 막강했다. 평안도는 세금으로 거둔 세곡을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했다. 운송의 어려움, 군수물자 비축의 필요, 낮은 생산량,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비 부담 등 여러 문제들로 인해 평안도의 세곡은 서울로 갖고 오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따라서 평안도의 감사는 외관직인데도 도의 세금을 걷고 사용하는 전권을 가지고 있어 많은 관료들이 동경하던 자리였던 것이다.

더욱이 평양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한다. 18세기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은 경제가 활기를 띈다. 무엇보다 의주대로와 해로를 통한 중국 교역로의 길목에 위치한 평양은 이 시기 상업발전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인구와 물자가 평양으로 몰리면서 평양은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부상한다. ‘평양감사행연도’ 중 ‘연광정연회도’에서 민가의 상당수가 기와집이며 백성들의 의복도 비단 또는 다양하게 염색한 옷인 것으로 볼 때 평양 백성들의 삶이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에는 술과 유흥이 따르기 마련이다. 평양은 평양기생과 평양냉면으로 유명하다. 전국의 기생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이춘풍전’에서 이춘풍은 평양의 기생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다른 고전들에서도 상인들은 물건을 팔러 평양에 왔다가 기방에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도 다시 돈을 벌어 평양의 기생을 만나러 오겠다는 풍자적인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평양의 기생들이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냉면 역시 평양의 부를 상징한다. 육수에 만 국수 위에 돼지고기나 꿩고기를 얹은 냉면은 조선시대 일반백성들이 거의 맛보기 힘든 음식었다. ‘동국세시기’는 “관서지방의 면이 가장 좋다”고 서술한다. 면이 좋은 관서지방의 냉면은 별미였으며 술을 마신 다음 날 해장용으로도 먹었다. 평양에 유흥을 즐기러 온 양반들이 겨울에는 냉면을 많이 먹었다. 국숫집에서 기방으로 냉면을 배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접대로도 평양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 조선후기 문신 정태화(1602~1673)가 사행단을 이끌고 중국을 다녀온 내용을 기록한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은 평양에서의 환대문화를 상세히 묘사했다. 이에 따르면 정태화는 영의정에 재직 중이던 1662년(현종 3)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 임무를 맡아 중국길에 올랐다. 정태화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평안감사 임의백(1605~1667)이 마중을 나왔다. 정태화가 평안감사의 안내를 받아 대동강에 이르니 기생들을 가득 실은 배가 띄워져 있었다. 기생들은 정태화가 도착하자 음식채비를 하면서 풍악을 막 울리려고 했다.

정태화가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이니 잔치는 불가할 듯 하다”고 만류했다. 그러자 평안감사는 풍악을 중지키시면서 판관을 돌아보며 “그대가 날마다 음악연습을 한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라고 허탈하게 말했다. 감사는 하는 수 없이 새로 지은 별당에 정태화의 숙소를 정해주고 대접을 융숭하게 했다. 얼마나 대접이 후했던지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이 “이런 일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연광정, 부벽루, 을밀대, 만경대, 모란봉, 능라도, 청류벽, 주암 등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도 평양의 매력을 더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연광정에 올라 풍광에 감탄하면서 ‘제일강산(第一江山)’ 네 글자를 썼고 연광정 편액에 그 글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다른 명나라 사신인 허국(許國)도 부벽루를 중국 소주·항주와 비교하면서 “소주와 항주는 인공적이지만 부벽루와 청류벽, 섬과 봉우리는 모두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라 훨씬 낫다”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양의 최전성기에서 한 세기가 흐른 1866년(고종 3)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등장한다. 바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이다. 대포 2문을 장착하고 24명의 선원들도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교역을 하자는 요구를 우리 측이 거절하자 제너럴셔먼호가 대포를 쏘면서 위협했다. 평안감사는 화공으로 배를 전소시켰고 선원도 모두 죽였다. 이 때의 평안감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사상가인 박규수(1807~1876)였다. 박규수는 그 뒤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로 중국을 방문해 청나라의 근대화운동인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는 귀국 후 젊은 사대부 자제들을 대상으로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척화파의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조약을 맺게 한다. 박규수는 형조판서, 우의정, 종1품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잘 알려진 반석평(1472~1540)은 8도의 관찰사를 전부 역임했다. 조선시대 8도 관찰사를 모두 지낸 인물은 반석평, 함부림(1360~1410) 단 2명 뿐이다. 반석평은 노비출신이었지만 주인집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워 면천해 주고 반 씨 집안에 입양시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반석평은 청렴하고 겸손해 미천한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평안감사를 끝으로 중앙에 올라와 형조참판, 한성부판윤에 이어 정2품 형조판서에 올랐다.
가장 혹독한 평안감사는 박엽(1570~1623)이었다. 조선후기 학자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에 의하면 그는 평안감사로 근무할 때 중국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았다. 점괘는 “일만(一萬)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나왔다. 박엽은 이 말을 믿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마구 죽였다. 하지만 1만명을 모두 채우기 전에 자신이 처형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청성잡기는 “박엽을 죽이도록 한 사람은 반정의 주역 김자점(1588~1651)인데 김자점의 어릴 때 자(字)가 바로 ‘일만’이었으므로 점괘는 틀린 게 아니다”고 했다.
의병장 조경남의 ‘속잡록’에 따르면 박엽은 평안감사 재임 때 음탕하고 포학하며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행랑 70여 칸을 새로 지어 도내 명창 100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주야로 오락과 음탕을 일삼았다. 세곡의 액수를 배로 늘려 이를 내지 않으면 참혹한 형을 가했다. 박엽이 처형을 당하자 군중이 모여들어 관을 부수고 시신을 훼손했다.
평안감사가 유혹이 끊이지 않아 청렴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명종대 문신 김덕룡은 예외였다. 이익의 성호전집 68권은 “평양감사로서 깨끗한 관리는 이준경(선조 때 영의정)과 김덕룡 두 사람뿐이었다”고 밝힌다. 이익은 “평양은 재화가 충만하기로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다. 감사가 된 자는 의레 해 오던 관습을 따라서 바로 탐관이 된다”면서 “공(김덕룡)은 평안도 관찰사에 재임하는 동안 일체의 은괴와 비단을 별도로 창고를 두어 보관하고 추호라도 간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덕룡은 1571년(선조 4) 대사헌에 지냈다.
영조대 문신 조원명(1675~1749)도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평안감사를 마친 후 돌아오면서 차림이 타고 나선 말한 필 뿐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는 평안감사 재직시 함부로 돈을 쓰지 않고 재정을 든든히 했다. 그는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했다.
그밖에 평양감사 출신 명사들은 꼽자면 다음과 같다. 영의정 하연(1376~1453), 공조판서 성현(1439~1504), 영의정 유순정(1459~1512), 예조판서 이기(1522~1600), 영의정 이원익(1547~1634), 형조판서 이명(1570~1648), 우의정 신익상(1634∼1697), 좌참찬 윤양래(1673∼1751), 종1품 판돈녕부사 이기진(1687~1755), 우참찬 서종옥(1688~1745), 형조판서 조관빈(1691~1757), 좌의정 이후(1694~1761), 영의정 유척기(1691~1767), 종1품 판의금부사 홍상한(1701~1769), 우참찬 윤동섬(1710~1795), 좌의정 김종수(1728~1799), 우의정 김재찬(1746∼1827), 이조판서 김유근(1785~1840).
첫댓글 역사 이야기 잘 봤습니다 평안감사 자리가
그렇게 좋았군요 그래서 그 자리가 선망의 대상이 였군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