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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자유
34: 29-35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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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12-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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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6일 미국 의회에서 프랭클린 루우즈벨트 대통령이 행한 유명한 연설에 언급된 네 가지 자유는 모든 나라의 헌법에 들어갈 만큼 기본적인 자유로 여겨졌습니다. 그 네 가지 자유란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네 가지 자유가 확보된 나라야말로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이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이런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정치적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근원적인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절에서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의 해방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자유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치적 의미로서의 자유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자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보면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주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적 자유일까요? 아니면 내 마음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자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자유, 육과 영의 세계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자유, 빛과 사랑이 충만한 하느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뜻합니다. 이런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구별하기 위하여 '영광의 자유'(롬 8:21) 혹은 '영적 자유'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자유는 주님의 영이 역사하실 때에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싸워서 쟁취하는 자유가 아니라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가져오시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점차 성장하여 완성되도록 창조하셨다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이 점차 성장하여 완성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생명은 병들고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유는 생명의 산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산소를 호흡함과 동시에 자유를 호흡할 때 건강하게 활동하고 자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에게 이런 자유를 주셔서 그 생명이 자라서 마침내 완성되도록 설계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주신 자유는 바로 하느님과 만나며 그와 교제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고 그의 돌봄을 받을 때 그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것이기에 이 자유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생명의 요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주신 자유는 특권이며 은총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는 특권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서 그만 타락하게 되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그 특권을 남용(濫用)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청와대 직원이 그 특권을 남용한 것과 같아고 하겠습니다. 청와대 직원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청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권을 남용하게 되면 그는 해직되어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해직되는 순간 그는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유를 남용한 인간은 그들이 살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된 인간은 자연 죄와 죽음으로 내 몰렸고, 죄와 죽음을 자기의 무기로 삼은 사탄
의 지배에 종속(從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죄와 죽음의 종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림은 곧 그 생명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공포가 되어 우리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영적 자유의 상실은 곧바로 정치적 자유의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1775년 4월 23일 버지니아 의회에서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연설하였을 때, 그 말은 단순하게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말로만 기억된 것이 아니라, 지나온 인간의 역사에서 얼마나 자유가 유린(蹂躪)되고 박탈(剝奪)되었는가를 증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자유를 원하고 있는가를 대변해 주는 명언으로 기억되는 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역사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투쟁해도 여전히 자유를 확보하기 어려운 것은 영적 자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으로 자랄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우리가 사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자유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 당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서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자유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율법의 매임으로부터의 해방이며(2:19, 3: 13, 25, 4:5),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의 해방이고(4:8-9), 동시에 사회적 압제와 종교적 문화적 차별로부터의 해방(3:26-28)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영적인 자유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자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결국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순간 우리의 생명이 다시 자랄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막았던 죄의 장벽을 허무시므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고, 우리의 생명은 다시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자라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생명은 죽음에서 막히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바로 죽음을 뛰어넘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영광의 자유' 혹은 '영광된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목적과 책임
우리가 자유를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선 영광의 자유는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유는 결코 방임(放任)이나 방종(放縱)이 아닙니다. 자유를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죽음으로 내 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자유는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유는 특권임과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예의가 있게 마련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면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청와대 들어갔을 때 예의를 갖추어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과의 만남은 은총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이 요구되게 마련입니다. 자유에는 목적이 있고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목적 없는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고,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 자유는 하느님의 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결국은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의 자유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영광의 자유는 바로 생명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왕궁에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기에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나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일들은 희생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령 박사학위를 위해서 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논문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이 완성되기까지는 다른 일들을 다 제쳐놓고 거기에 매어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문을 작성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있는 도서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을 경우 그 도서관에 부지런히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그 일에 몰두하여야 할 때입니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며, 그분을 예배하면서 주님과의 사귐을 끊임없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는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자유를 헛된 일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생명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 앞에 이르러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박사 학위 과정에 등록하였으면서도 그리고 지도 교수로부터 논문과제를 받았으면서도 자료 조사도 하지 않고, 연구도 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퇴학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공부하여야 하는 책임은 무거운 것이고 힘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은 놀라운 은총이지만, 거기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험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다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것은 방종이며, 그 결과로 하느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고 하였습니다. 결국 영광의 자유는 우리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하는 자유입니다.
영광의 자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하여 허락된 자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이란 깨어진 생명공동체를 다시 회복하여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깨어진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엮는 일은 바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나뉘었던 형제자매가 만나고, 갈등하며 싸우던 이웃들이 화해하게 되고, 분쟁하던 세계가 평화를 찾게 될 것이며, 파괴된 환경이 회복될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영광의 자유를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 속에서 울어나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사귐에 우리도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이 영광된 자유를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육체의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반드시 붙들어야 할 고귀한 자유임 올바로 깨달을 때 우리 속에서 사랑이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두 사하시고 이제 영광스러운 영생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영광된 자유를 감사하면서 부지런히 하느님께 나가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영광의 자유가 늘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8)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때 여러분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은총입니까!
이제 이렇게 놀라운 은총으로 주어진 고귀한 자유를 값진 보배로 여러분 속에 간직하시면서 모든 육체의 욕망은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