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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1회 법문
무명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지속하고, 지혜는 알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끊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가 있고,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가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는 두 가지로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가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난 선한 행위는 좋은 일을 하되 부귀영화를 원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무명으로 인한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라고 해서 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회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행위는 바라고 없애려는 것 없는 수행을 해서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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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상좌불교는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의 가르침 그리고 존재를 분석한 『논장論藏』이 있으며, 『논장』을 『아비담마』라고도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처님에 의해서 설해진 가르침입니다.
『경장』과 『율장』은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괴로움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논장』은 존재를 분석해 놓은 것으로, 이는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여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 근본적인 치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경장』과 『율장』과 『논장』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폅니다.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모두 빨리어 경전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진리가 왜곡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삼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전의 자의적 해석이나 왜곡을 막기 위해서 주석서들이 있어서 다시 주석서에 근거하여 경전을 해석합니다. 대표적인 주석서가 『청정도론』입니다. 지금도 위대하신 스승들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석서들이 씌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에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121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은 52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단순한 분석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서로 결합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로를 밝힌 것입니다. 마음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직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아를 알아야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치유에 목적을 두고 이처럼 분석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며, 어떤 신앙으로도 풀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서 얻는 해탈의 지혜로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혜안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특정한 사람만 소유하는 지혜가 아니고 누구나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수행을 하면 알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보편타당하고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석을 한 것은 이러한 분석에 의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모든 번뇌가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석에 그치지 않고 그에 따른 방편을 제공하여 행복을 얻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이 『논장』이며, 이러한 방편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을 얻는 해탈의 자유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지혜와 자비라는 수행과 함께 『논장』을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이 길은 이미 2,500년 전에 밝혀진 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문화와 사상으로 인하여 이 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였지만, 오늘 우리가 듣는 법은 빨리어 경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으며, 자비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리고 『논장』은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직 정신적 치유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 정신적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불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정신과 물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번뇌를 해결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학은 오직 수행을 돕는 역할을 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교학과 수행과 지혜의 세 가지 단계로 완성됩니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오온五蘊으로 나누어서 분석합니다. 오온은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이라는 다섯 가지의 무더기를 말합니다. 이들 하나하나는 여러 가지의 구성요소로 결합되어 있어서 이것을 오온이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물질을 말하는 색온을 빼고는 나머지 네 가지가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정신에 대한 비중과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정신이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과 함께 있습니다. 마음은 오온의 식識이며,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분석은 오직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만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분석을 통하여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마음에 든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 바로 무아입니다. 그러나 이 무아는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가 나야 알 수 있는 최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초보수행자가 무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말해서는 허물이 되므로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거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신에 대한 것을 다루는 심리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심리학은 분석에 머물 뿐이지 치유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심리학은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에 대한 분석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정신에 관한 것은 추론적이기 때문에 지혜가 없으면 밝힐 수가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신분석에 근거한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번뇌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지 번뇌를 말려서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는 있지만 해탈을 얻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논장』은 마음을 낱낱이 분석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인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궁극에는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러한 통찰지혜를 통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불태워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현대의 심리학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을 알아차리는 힘을 얻어서 마음까지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다른 수행방법과 다른 것입니다. 인류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보는 방법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위빠사나를 통하여 비로소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방법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마음의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잠재적 성향까지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이것의 힘이 약해지도록 합니다. 그러면 현재에도 괴롭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개입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 자기 의지가 개입이 됩니다. 그래서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을 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아야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내가 본다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본다고 하는 자아가 개입되면 바라는 것이 있어 이것은 사마타 수행이라서 통찰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은 있지만 알아차리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있지만 깨달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무지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몸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수행과 다른 위빠사나 수행만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결국에는 완전하게 번뇌를 소멸시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끕니다. 마음인 오온의 식이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이끌고 몸인 색까지도 이끕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것들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선한 마음이면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이면 선하지 못한 말을 하고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마치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이 마음에 따라서 모든 행위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현재의 선심과 불선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만들어진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만들어진 선과보심이 현재의 선심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불선과보심이 현재의 불선심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현재의 선심이 선과보심을 만들어 미래에도 선심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또 현재의 불선심이 불선과보심을 만들어 미래에도 불선심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과보심이 서로 얽혀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반드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리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의 수준에 머뭅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라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실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히 일부의 스승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몸을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반드시 다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결코 위빠사나 수행이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을 할수록 장애가 생기고,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도과를 성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꼭 거쳐야 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의 필요에 따라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도 있지만 평소에 해보지 않아서 생소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초보수행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제152회 법문
옳은 것을 말하려면 단지 옳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옳은 것이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옳지 않은 사람이 분개하여 더 나쁜 길로 갑니다. 옳지 않은 것을 말하려면 단지 옳지 않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더욱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내가 옳고 내가 나쁘다고 말하게 되면 말하는 자신도 옳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단지 행위일 뿐입니다. 여기에 나와 너가 없습니다. 나와 너라는 자아로 판단하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면 영원히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어서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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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싶어도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원래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많은 수행자들에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울 수 있도록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동의어 반복이 많습니다.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모르는 것도 차츰 알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 때는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고 그냥 습관적으로 아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마음이 대상을 알 때 깨어서 압니다. 이때 깨어 있다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 세 가지가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대상을 알 때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이고, 수행을 할 때는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대상이 마음에 와서 부딪칠 때 깨어서 알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길을 걸을 때 걸어가는 것을 막연하게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걸을 때 걷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시선을 여러 곳에 두고 걷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기 때문에 정작 걷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걷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는 것은 수행자들이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길을 걸을 때는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압니다.
이때 대상과 아는 마음을 연결해 주는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냥 걷는 것은 걷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이 있을 때 비로소 걷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런 뒤에 걷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음이 발을 겨냥하지 않고 마음을 겨냥합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반드시 걷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때 무엇을 하거나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 몸을 알아차리면 신념처身念處이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심념처心念處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마음이 있어서 합니다. 이때는 마음이 있어서 대상을 아는 것이 일차적 현상입니다. 이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거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거나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일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이차적 현상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초보수행자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다음 단계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하여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 때는 마음이 신, 수, 심, 법이라는 사념처 수행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사념처 수행이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으로 이것이 심념처입니다. 물론 이때도 사념처가 모두 작용하지만 심념처는 두드러지게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다른 수행과 다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알아차림을 두고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와서 부딪칠 때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문지기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대상을 볼 때는 마음을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소리를 들을 때는 마음을 귀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마음을 코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맛을 볼 때는 마음을 혀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신체가 부딪칠 때는 마음을 몸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생각을 할 때는 마음을 생각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각각의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대상과 부딪칠 때 대상을 아는 것이 모두 똑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생각이라는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른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는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마음도 하나의 감각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단지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수행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은 신체라는 감각기관이 아니고 정신이라는 감각기관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 눈이라는 감각기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감각기관도 함께합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론으로 설명해서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몸의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대상을 볼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혀로 음식 맛을 볼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몸으로 대상과 부딪칠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생각을 할 때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모두 심념처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모두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감각기관이라고 하면 몸을 말하지만 몸과 더불어 있는 마음도 감각기관의 하나입니다. 감각기관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안, 이, 비, 설, 신은 몸에 있는 감각기관이고, 나머지 의(意)는 마음에 있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의를 빨리어로는 마노(mano)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의意라고 하거나 의근意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의라고 하는 마음을 감각기관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은 각각의 위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은 몸의 위치와 다릅니다. 마음은 몸의 어느 위치에 있지 않고 언제나 몸과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이 있는 위치를 편의상 ‘전면全面’이라고 합니다. 또는 ‘면전’이라고도 하고, ‘앞에서’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는 ‘마음자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위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나 옆에서나 또는 앞에서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나 TV를 볼 때 전면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 보듯이 마음도 이렇게 전면에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몸과 함께 있을 뿐이지 어느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 뇌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아닌 앞이라는 공간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안다고 할 때는 모두 전면에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하게 마음의 위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마음도 사실은 전면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몸의 감각기관에서 느끼는 강하고 분명한 느낌처럼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몸에서 느끼는 것보다 순화되어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볼 때는 대상의 느낌의 강도가 약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상이 미세해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과 다르게 형체가 없는 비물질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마음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느끼거나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느낌의 분류는 다양한데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으로 나누는 분류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몸의 느낌이 아닌 마음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아는 것도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본다’로 시작해서 다음에는 ‘느낀다’로 수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안다’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거나 단지 알고만 있으면 되는 단계가 오면 집중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가 되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본다고 하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경우에는 대상의 모양에 빠지거나 관념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항상 모양으로 대상을 접근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먼저 대상을 모양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아도 모양으로 보려고 눈을 사용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눈으로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좌선을 할 때 눈을 감고 수행을 하면 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보려고 눈을 사용하면서 힘을 쓰기 때문에 장애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표상으로 보지 않고 느낌과 마음으로 알기 때문에 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문으로는 관법觀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한문으로 관觀한다고 할 때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할 때는 편의상 관용어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느낀다거나 안다고 해야 언어가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모양 너머에 있는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느끼는 것으로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대상의 모양에 빠지지 않고 대상의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 단계에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12연기에서 느낌을 발견하시고, 그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결과로 법을 발견하시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황금의자는 보리수 아래가 아니고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는 자리입니다. 느낌으로 인해 갈애가 일어나고, 이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가 모두 소멸하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래서 느낀다는 것은 대상의 실재를 아는 매우 훌륭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 제153회 법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축적된 성향은 바꿀 수 없습니다. 바뀌지 않는 축적된 성향을 바꾸려 하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지 않고 자신의 축적된 성향을 계속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적된 성향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오랫동안 쌓여 온 성향을 그대로 두고 ‘그렇네’ 하고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바꾸려고 하는 것은 욕망이고, ‘그렇네’ 하고 지켜보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것이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축적된 성향이 차츰 개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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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자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느끼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수행의 개념이 바뀝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을 아는 상태가 되면 이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 뒤에 그냥 대상을 아는 상태로 수행을 하면 고요함에 의해 집중력이 생기고 지혜가 나서 수행이 발전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정신상태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 확실한 단계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서 본다, 느낀다, 안다, 로 이해하고, 현재 자신이 어떻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느 단계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바로 이러한 본다, 느낀다, 안다, 라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감각기관에 두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감각대상에 마음을 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가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마음을 안에 두어야 할 때가 있고, 밖에 두어야 할 때가 있고, 안팎에 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합니다.
혼자서 수행을 할 때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즉 일을 하면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두는 위치가 상황에 맞게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안에 둘 때도 있고, 밖에 둘 때도 있고, 안팎에 둘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좌선이나 경행을 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을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감각대상에 마음이 가면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감각대상에 머물면 대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대상을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 초기에는 단체로 모여서 지도를 받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이 여기저기로 쫓아다니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마음에 와서 부딪쳐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들뜨거나 분주하지 않아서 고요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요한 마음가짐에서 대상의 성품을 보는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대상을 관념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온전한 실재를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요함이 있는 만큼 노력이 함께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요함이 지나쳐 졸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고요할 때는 그만한 노력을 해서 알아차림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미세한 대상이 나타날 때는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상태에서는 고요하기 때문에 집중의 힘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노력과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중의 힘이 커지면 졸음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이때는 집중으로 인해서 희미해진 마음을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거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가령 통증이 나타났다거나 망상이 나타났다거나 가려움이나 졸음이 나타난 것도 모두 강하고 거친 대상입니다. 수행 초기에는 모든 힘이 약하기 때문에 강한 것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이 발전하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졌을 때는 오히려 미세한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강한 대상과 미세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들이 조언해 주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오히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할 때는 집중력을 더 배가시키기 위한 시기입니다. 이때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다른 때보다도 노력과 알아차리는 힘을 더욱 키워야 합니다.
수행자는 언젠가 반드시 이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미세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거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보다도 더 고요하고, 부드럽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겨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대상의 변화를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의 변화란 매 순간 다른 것을 아는 것으로 이것이 무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반드시 거친 대상만을 선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약할 때는 거친 대상을 선택하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할 때는 자신이 스스로 미세한 대상을 선택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발전을 가져옵니다.
이때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알아차리는가?’ 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과 알아차림이 집중되기 때문에 이런 상태의 노력이 수행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일하는 마음은 정지가 되고,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순간에 전에 있던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끊어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 일어난 마음이 있는 마음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이것도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오직 현재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마음이 오직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가령 망상을 했을 때 망상한 것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망상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망상을 알아차린 새로운 마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하는 말로 ‘보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망상이 완전하게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망상하는 마음이 기억 속에 종자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이때 알아차림이 약해지면 사라진 망상이 다시 일어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망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망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망상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길은 오직 새로운 대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혜로 작용합니다.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무상을 알 수가 있으며, 이 무상을 통해서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항상 같은 마음이라면 결코 이런 지혜가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다고 알고, 이것을 통해서 무상을 알고, 다시 무아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마음이 한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수행자 여러분이 높은 지혜가 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상황에 따라서 매 순간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방금 좋았다가도 불쾌한 일이 생기면 방금 싫어집니다. 방금 싫었다가도 이익이 있을 때는 방금 좋아집니다. 이때 전에 있던 마음과 다음에 생긴 마음은 분명히 다른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빠르게 변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 중에서 과연 어느 마음이 나의 마음입니까? 현재를 아는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해도 현재는 현재라고 하는 순간에 이미 과거가 되고 미래를 향해서 갑니다. 이렇게 빠른 시간의 흐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알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를 아는 마음일 때는 현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 반드시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현재 여기에 있는 대상이라면 무엇이나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부딪치는 모든 대상이 다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가 들린다면 소리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냄새가 난다면 냄새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만약 현재 고요함이 있다면 고요함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현재를 지켜보는 것이 마음이라고 알 때는 마음도 알아차릴 대상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가지 대상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알아차리고 몸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인 대상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추론적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몸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에 근거한 추론이 아니고, 오직 실재하는 것에 근거한 추론에 속합니다.
마음은 몸과 함께 있으면서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몸은 육체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마음은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결합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더라도 몸의 영역에 관한 것이나 마음의 영역에 관한 것이나 모두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대상이 나타났을 때 이것은 몸의 영역에 관한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의 영역에 관한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만약 고요함과 함께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리고 현재 여기에 있는 몸이 나타나면 이때는 몸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고 괴로워할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몸에 있는 호흡만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대상을 알아차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에서 알아차릴 것이 없을 때는 알아차릴 것이 없어서 방황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대상과 저 대상 중에서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까 선택의 고민을 할 때는 이것 자체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알아차려야 할지 망설이고 있네’ 하고 이 사실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감각기관에 접수되는 모든 것이 대상이 될 때 수행자의 선택의 폭이 넓어져 싫증을 내지 않고 자유롭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할 수 있을 때 사념처 수행을 균형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호흡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 세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상과 대상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알아차림이 부족하면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립니다. 그래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대개는 과거나 미래로 가서 불필요한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대상을 아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생긴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이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