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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기도(마 6장 9~13)
지난 시간까지 주의 기도의 앞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주의 기도 후반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의 기도가 주님께서 드리신 기도라 했습니다. 주님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자신이 하지도 않는 기도를 가르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의 기도의 뒷부분을 살펴볼 때에 의아한 점이 보입니다.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죄 사함을 위해, 시험과 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이야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매우 현세적이고 매우 인간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드리셨다는 것은 다소 의아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당연하고 현실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이? 원하면 돌덩이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순결한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의 기적으로 잉태되셨고,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또 사랑의 후원 외에는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신 적이 없고, 세금을 내야할 때도 물고기를 잡아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세금을 내신 분이 빚을 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너끈히 이기시고, 죽음을 앞에 두시고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신 분이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러한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구절에서 ‘동정하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안 됐다.’고 느끼는 동정심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함께 느낀다. 함께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헬라어 단어는 “쉼파데오”로 ‘동료의식을 갖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동정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안 됐다는 동정심이 아니라, 우리와 동료의식을 갖고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것을 경험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우리처럼 배고픔을 느끼셨고, 피곤하며 졸리셨습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이셨고, 인간으로 사셨으며, 인간으로 기도하며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높이고 존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동정하심으로써 우리를 동료로 대우해주셨고, 또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기도요, 우리와 함께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주님은 무엇을 바라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같은 처지로 함께 하는 동료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나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우리의 죄를’ ‘우리를 시험에’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천하고 죄인인 인간을 동료 인간으로 대우하시며,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기도도 앞선 부분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해 달라’는 기도이기보다는, ‘하겠다.’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바클레이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주십시오.’라는 기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단지 나와 나의 가족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양식이 없는 동료 인간, 이웃을 생각하는 기도, 그리고 내게 주어진 양식을 나누겠다는 기도입니다. 나의 양식을 구하면서도 이웃과 동료인간을 함께 생각하는 기도, 내게 주어진 양식을 이웃과 나누겠다는 기도,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참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후반부의 각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기도를 그저 ‘나 자신을 위한 기도’로만 이해했던 그동안의 독법을 넘어서, “우리”를 위한 기도의 범주로 넓혀 해석해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나 자신, 나의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약속에 따라 우리는 응답을 받는 비결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 전에 아버지가 아신다.”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에도 그 약속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그 기도의 의미를 알고 기도한다면, 또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세로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는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채워주시도록 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동료인간을 높이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동정하셔서, 즉 우리를 동료로 대우하시며 같은 마음으로 같은 것을 느끼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그저 한낱 죄인취급 하지만 않으시고,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셨고, 우리의 죄 사함을 구하셨으며, 우리와 함께 시험과 악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은 ‘그날 필요한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돌보고 책임지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는 신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안정된 삶을 떠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은 광야에서의 유랑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돌보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만나였습니다. 풀이며 숲이며 물조차 아무것도 없던 광야에서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그들을 돌보신다는 증거로 내리신 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하늘에서 먹을 수 있는 양식인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들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기에 맘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각자가 ‘먹을 만큼’ 거두는 것과 ‘다음날 아침까지 저장하지 말 것’(출 16:16, 19)입니다. 말 그대로 ‘일용할 만큼만’ 거두는 것이 만나입니다. 왜 이렇게 일용할 만큼만 먹고 가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출 16장 18절입니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많이 거둬서 남을 만큼 남보다 더 많이 갖는 자가 없고, 또 적게 거둬서 남보다 부족한 자가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방지하고 그로인해 빈익빈부익부를 막고자 함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것은 쌓아놓고 나만 배부르거나, 또한 쌓아둠으로써 누군가에게 직간접의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쌓아두는 것, 즉 저장을 비웃으십니다.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자신의 재산이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매우 흡족해 하는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부자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넘치도록 늘어난 재산을 ‘쌓아둘’ 곳간을 새로 증축하는 일이었습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 자신만을 위해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저장하는 자가 쉽게 잊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타인의 배고픔, 타인의 고통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고 말하며 이웃과 동료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주님은 ‘어리석은 자여’(20)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저장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31). 이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풀어 구제함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행위를 말합니다(33).
하나님은 왜 쌓아두는 창고를 비웃으십니까? 창고는 모아두는 곳입니다. 모아두면 부자 자신은 모아둔 돈이나 곡식을 보며 흡족해합니다. 창고에 쌓여가는 곡식단을 보며, 은행에 쌓여가는 잔고를 보며 부자들은 흡족해합니다.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니까. 그런데 이걸 생각해보죠. 부자의 곳간에 곡식이 쌓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누군가는 부자가 쌓아놓은 만큼 곡식을 갖지 못해서 쫄쫄 굶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자의 통장에 잔고가 수십, 수백억 쌓여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서민들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십 수 년 간 일반 노동자들의 월급을 쥐꼬리만큼 밖에는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가는 어떤가요? 두 배 세 배 올랐습니다. 이건 뭘 말하나요? 노동자들의 수입은 거의 제자리인데, 대기업이나 재벌들의 수입은 엄청나게 쌓였다는 말입니다.
IMF 이후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퇴직이 다양한 형태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기업들의 상황도 비슷한가요? 아닙니다. 대기업과 재벌기업간부들의 월급은 어마어마하게 올랐습니다. 미국의 예로, 보통 일반 근로자와의 급여 차이가 1965년 24대 1이었던 것이 2004년에 431대 1로 뛰었습니다. 2008년 경제위기 때 약간 떨어진 것이 319대 1입니다.(짐 월리스, <가치란 무엇인가> pp.106~107) 월마트 사장(리 스콧 주니어)은 연봉이 1,750만 달러(한화 약 178억 원)입니다. 일반 노동자의 900배이다. 900명이 받는 월급이니 한 가정 3명이라 해도 2,7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혼자서 독식을 하는 것입니다.(짐 월리스, p.109) 이건 약과입니다. 캐피털 원 파이낸셜이란 금융회사의 사장(리처드 페어뱅크스)은 연봉이 2억 4,940만 달러(약 2,500억 원)입니다.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 일가의 재산이 9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돈은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미국인 하위 40퍼센트인 1억 2천만 명의 재산을 다 합하면 900억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한 가족이 미국 시민 1억 2천만 명이 버는 것보다 더 버는 것, 쌓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상위 부자 400명이 소유한 재산이 13조 달러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 인구 50퍼센트가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액수입니다. 그러니 고작 400명이 미국인구의 절반보다 더 많은 돈을 쌓아두고 있는 것입니다.(짐 월리스, 114)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전반에 미국을 그대로 따라 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황은 돈이 돌지 않는 것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는 것. 돈을 쓰지 않습니다. 서민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쓰고, 부자들도 돈을 쓰지 않고 모아둡니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투자를 안 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쌓아두기만 합니다. 그러면 이 피해가 돈 없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돈이 나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직원을 고용하지 않거나 직원을 줄여서 비용을 절감합니다. 이는 말이 쉽지 실제 당하는 사람은 엄청난 위험을 안게 됩니다.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취업의 문이 좁아진다는 것이요, 대학생들의 취직난을 의미합니다. 직원을 줄인다는 것은 회사에서 잘린다는 것입니다. 한 가장이 직장을 잃으면 한 가족의 생계가 위험해집니다. 쌍용자동차 사태가 보여주지 않습니까. 해고노동자들 뿐 아니라 가족들도 자살을 합니다.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꼼수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 용이한 해고를 자행합니다. 우리나라가 비정규직 비율이 최고로 높습니다. 옛날에는 평생직장, 연공서열제 해서 회사 오래 다니고 경력이 많으면 존중해서 높은 직급과 봉급을 보장해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경력 많고 오래 다니면 싫어하고 기피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월급 적게 줘도 되고, 자르기 쉽고 말 잘 듣는 비정규직을 늘립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나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 이상의 의미를 담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지 않는지를 헤아리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쌓아두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갖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 모자라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쌓아두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고 흡족해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며 더블어함께 누리고자 하는 동료의식의 발로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더불어 느끼고 경험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죄(빚)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빚)를 사해주소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용서하는 행위를 빚지는 것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용서는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빚은 단순히 돈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빚은 그 사람의 인생, 생명을 저당 잡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자유롭고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거나 못한 것 없이 동등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빚은 이러한 동등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빚지면 완전히 죄인 취급받습니다.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괴로움을 당합니다. 돈 때문에 노예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이 빚진 돈보다 더 많은 양의 착취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 인생이 비참한 지경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빚진 자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가차 없이 빨간 딱지 붙이고, 못 갚으면 법의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 동네에 장터 통닭집이 생긴다고 해서 반가워했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동네 맛집이 생기는구나 했습니다. 동네 통닭집이니 동네 닭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네 닭집이 아니라, ‘장터’라는 동네의 분위기 나는 이름으로 프랜차이징화된 지역 대리점이었습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신도시라 동네상권이 거의 없습니다. 동네 슈퍼마켓 외에는. 다 프랜차이징입니다. 동네 마트가 생겼다가도 몇 개월 혹은 몇 년 뒤에는 다 프랜차이징화된 대기업의 마켓들이 꿰차버립니다. 프랜차이징이 뭡니까? 많은 자본을 가진 거대기업과 재벌들이 지역 상권을 모조리 사들여 중앙에서 자기네들이 다 차지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통닭장사, 떡볶이 장사까지 합니다. 원래 프랜차이즈라는 것이 지역의 상권이 가진 품질력 대신에 가격을 싸게 해서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프랜차이즈가 더 비쌉니다. 외국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비싼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군요.
프랜차이징은 자금을 쥔 중앙 본사가 대리점주들의 목을 잡고 빚지게 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역 대리점은 망해도 본사는 떼돈 번다는. 통닭 체인의 경우, 본사에서 대리점에 주기적으로 인테리어 교체를 강요합니다. 손님들에게 나가는 상품들을 강매합니다. 심지어 소스류도 필요이상을 의무적으로 구매하게 떠넘깁니다. 일정량 이상을 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대리점을 안 내주니. 그러면 그런 것들 다 빚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자본을 틀어쥐고서 거의 무소불위의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대리 점주는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입니다. 속에 분통터지고 억울하지만 힘이 없으니 그대로 당합니다. 빚의 특성이 뭔가요. 안 갚으면 가차 없이 다 빼앗아갑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무조건 갚아야 합니다. 잔인합니다. 용서란 이런 엄청난 현실을 염두에 두는 행위입니다.
용서하라는 것은 약자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강자에게, 가진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약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그야말로 절실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있는 자들, 강한 자들에게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다른 의미가 됩니다. 빚으로 부를 쌓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귀한 노동, 남의 귀한 인생, 남의 귀한 시간으로 얻어낸 돈과 이윤을 저당 잡아서 그걸로 자신의 창고를 쌓지 말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하나님께 빚진 것을 사해달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기도 속에서 타인을 높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자신의 왕국이 아닌, 십자군의 승리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유혹이 찾아옵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양식을 자신만을 위해 곳간에 쌓아둠으로써 독점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빚을 지게 하여 동료 인간의 인생을 저당잡고 놓아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를 쌓아가고 남을 지배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디에 그 유혹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또 우리의 욕망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과 악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에 우리는 주의 기도 후반부 마지막 세 번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이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시험받으신 것도 우리를 동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동료의식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려는 마음과 그의 나라와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려는 마음으로 이기셨습니다. 그가 받으신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유혹,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라는 유혹, 천하만국의 부와 영광을 소유하라는 유혹입니다. 이 모든 시험은 부에 대한 유혹이요, 사람들 위에 높아져 군림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기도는 그 시험에 빠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지배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의 자리, 섬김과 십자가의 자리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먼저 높이시고, 그의 나라와 뜻이 임하기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양식, 우리의 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우리’를 생각하십시오. 예수께서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죄인인 우리를 동정하시고 동료의식을 가지신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게 함으로써 이웃을 생각하고, 모든 인간을 동료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과 인간을 위하는 기도는 결국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핑계로 이웃과 동료 인간을 무시하는 행위는 전혀 하나님을 높이지도 거룩히 여기지도 못합니다. 그의 나라와 뜻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도 북동부 부다가야라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불교 4대 성지로 꼽힙니다.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이 사원에서 3명의 한국 기독교 청년들이 ‘땅 밟기’를 했습니다. 사원 내 대탑 입구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개신교식 기도를 했습니다. 이에 그곳에서 1년 이상 묵언수행을 하던 한 한국스님이 자신의 묵언 수행을 깨면서까지 중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대꾸했답니다. 이제는 이런 행태들이 멈춰야 합니다. 정말 부끄럽고 저급하고 저열한 행동입니다.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줄 아는, 그야말로 나뿐인 줄 아는 ‘나쁜’ 행동입니다. 온 세계에 한국교회의 저급함을 선전하는 부끄러운 행동밖에 안 됩니다.
주님은 주의 기도를 통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려 하신 것 아닐까요? ‘우리’를 위한 기도는 사실 ‘우리 자신만을’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인간입니다.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동료를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모든 인간을 적이나 경쟁자가 아닌 동료 인간으로 보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만 생각하시고, 또한 인간을 동료로 높이시고자 했던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기도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생각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