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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현상적 이해
깨달음이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 내용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선 시간에 대한 부분은 불교 교설의 설명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교리의 지향점인 깨달음이 그 존재론적 기반에서 시간의 문제와 커다란 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명의 타파를 역설하고 있는 불교에 있어 무명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무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원시불교 및 이후의 아비달마 교설이라든가, 시간의 근본을 무명이라고 밝히고 있는 <미란타왕문경>의 설, 그리고 <물불천론>에서 '성문(聲聞)은 무상의 법칙을 깨달아 도를 이루고, 연각(緣覺)은 인연이 분리되어 사라지는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참된 진법의 도에 들어간다.'고 언급하고 있는 승조(僧肇)의 말처럼, 시간에 대한 체득은 미망(迷妄)의 중생계를 벗어날 수 있는 핵심 요체이기도 하다.
흔히 과거와 현재, 미래의 3세로 설명되는 불교의 시간론(kāla-vāda)에는 여러 관점이 있지만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가 언급되고 있다. 인식론과 실재론, 절대론적 관점이다. 각 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의 인식론적 관점은 시간의 존재상이 인식론의 바탕 위에 있다는 관점이다.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렇지 못함이 인식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고(苦)와 락(樂)으로 대별되게 된다는 견해이다. 교의에 의한다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및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중심으로 한 근본불교라든가 시간이 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주관의 인식 형식이라는 유식의 관점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인식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일단 객관과 주관의 인식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인식은 무상의 법칙 속에 있어 불완전하므로 열반의 절대적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식론적인 관점이다. 물론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불이(不二)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둘째의 실재론적 관점은 시간이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으로 아비달마의 시간론이 이에 해당하며, 그 중심은 유부(有部)의 '삼세실유(三世實有)'설과 경량부(經量部)의 '현재유체(現在有體) 과미무체(過未無體)'설이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시간 자체가 독립된 실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보광(普光)이 <구사론기> 12에서 '시간은 따로 실체가 없으며, 법에 의하여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오온이 체라고 한 것이다.'라는 것이라든가, 중현(衆賢, Saṃghabhadra)이 <순정리론>에서 '여러 겁은 오직 오온을 사용하여 체(體)로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시간의 체를 얻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존재의 양태와 관련하여 실재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시간이 독립적으로 실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인 오온의 유위법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즉 존재법과의 작용(kāritra)의 유무에 따라 구별하는 관점이다. 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하는 유부에서는 관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정신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곧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이다.
특히 미래세로부터 현재세의 법이 실유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부는 이 법이 또한 과거세로 투사된다고 설명한다. 미래세의 법이 실재하며 그것에 의해 탄생한 현재세의 법도 실재하고, 따라서 현재에서 과거로 투사된 과거세의 법도 실재한다는 관점이다. 유부의 시간관도 이에 기초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시간의 흐름을 유부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법의 존재가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4상(四相)에 의해 존재하며, 4상의 형성과 관련한 시간 단위가 1찰나이고, 이 찰나(kṣaṇa)의 사상이 쌓여서 현상의 변화가 성립된다는, 그리고 시간을 구성하는 법은 찰나멸(刹那滅)이고 1찰나 1찰나가 독립해 있다는 시간과 존재의 상관적인 관점이 깃들어 있다. 곧 상태의 변화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비해 경량부(經量部)의 '현재유체 과미무체'설은 현재만이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유부의 3세실유설을 비판하고 있는 경량부는 생, 주, 이, 멸의 4상 성립을 1찰나간이라는 유부의 관점을 부정하면서 사상을 다찰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 찰나를 기준으로 하면서도 다찰나의 상속 위에서 설명하는 사상의 인식이다.
'유위법에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생한 이후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현재라고 하며, 이미 멸한 것을 과거라고 한다.'는 설에서 볼 때 미래는 아직 생하지 않았고 과거는 멸하여 없어졌으므로 법체항유(法體恒有)라는 유부의 설과는 달리 무체(無體)가 된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有]하므로 현재유체(現在有體) 과미무체(過未無體)인 것이다.
이런 경량부의 과미무체설은 시간을 현재에 존재하는 제법의 바탕 위에서 현재만이 존재함을 설명한 것으로, 과거나 미래는 현재 모습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시간의 실재를 주장하는 유부나 경량부의 설이 똑같이 시간의 독립적 실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법에 의해 존재한다는 존재와의 상관관계를 설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셋째의 절대론적 관점은 위의 인식이나 실재론의 범위를 초월해 절대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으로, 교리적으로는 반야나 화엄 등의 대승설이 이에 속한다. 특히 공사상을 정립, 대승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고 있는 용수(Nāgārjuna)는 <중론>에서 시간에 관한 절대론적 관점을 밝히고 있다.
[제19관시품(kāla-parikṣā)]에서 용수는 이전의 시간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밝히면서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3세 사이에 존재한다는 상대적 존재론의 형태, 시간을 인식한다는 인식론적 관점, 시간 존재의 근거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으로 분류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어느 하나에 의해 다른 것이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며, 시간이 존재물의 변화와 생멸의 상태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정적이지 않은 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고, 존재하는 법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의 존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수는 시간의 실체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 허구성을 밝히면서 시간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은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한 연기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본성이 없는 무자성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존재하는 것은 무실체 무자성인 채로 우리의 인식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고 보고 있다.
실체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여러 조건으로 규정되며 인식되고 있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가유(假有)이고 이것은 임시로 존재한다고 파악, 옳고 그름 등에 대한 취사선택을 하지 않도록 설하고 있다.
시간의 절대론적 관점은 여기에 기초해 있다. 시간의 실체성과 존재성에 대한 부정이 여러 대승경전에서 밝히고 있는 것,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관련되며 각각의 특성을 발휘하여 빛나고 있는 불타의 세계, 시간을 초월한 절대의 시간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식론과 실재론, 그리고 절대론의 관점 등 이상의 시간관에 의해 볼 때 불교의 시간관은 인식론과 실재론에 이어 궁극적으로는 절대론의 시간관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본 논은 이의 어느 것에 대한 시비를 논하고자 함은 아니다. 형태론으로 본다면 절대론에 있지만 어느 것이든 그 시간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각자(覺者)의 깨달음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시간, 그 속에 내재된 시간적 영역과 그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다음 시간의 장단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는 <대비바사론> 및 <구사론>의 8종설과 <유가사지론> 의 10종설 등이 있으며, 모두 유위법의 차원에서 시설 설명되고 있는 것들이다.
곧 <대비바사론> 권136에서는 찰나, 달찰나(怛刹那), 납박(臘縛), 모호율다(牟呼栗多), 주야(晝夜), 월(月), 세(歲), 겁(劫) 등의 8종을, <구사론> 권12에서는 찰나, 달찰나, 납박, 모호율다, 주야, 월(月), 년(年), 겁(劫)의 8종을, <유가사지론> 권2에서는 시(時), 년(年), 월(月), 반월(半月), 일(日), 야(夜), 찰나, 달찰나, 납박, 목호자다(目呼刺多) 등의 10종을 밝히고 있다. 이 중 <유가사지론> 의 월, 반월(半月)과 일(日), 야(夜)는 <대비바사론>과 <구사론> 의 주야, 월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본 논에서는 8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찰나(kṣaṇa)는 불교의 시간관에서 가장 짧은 시간으로, <대비바사론>에서는 '시지극소(時之極少) 위일찰나(謂一刹那)'라고 하고 있다. 이 찰나를 오늘날의 초(秒) 개념으로 보면 1/75초, 약 0.013초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장사가 손가락을 퉁길 때 64찰나가 지나간다[如壯士彈指頃 經六十四刹那]는 것이라든가 손가락을 한 번 퉁기는 데 60념이 있다[一彈指頃 有六十念], 또는 1찰나에 900의 생멸이 있다, 혹은 1,800의 생멸, 81,000의 생멸이 있다는 견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찰나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찰나(tatkṣaṇa)는 120찰나를 합한 것으로 약 1.6초 가량이 되는 시간이며, 순식(瞬息)이라고도 하는 랍박(lava)은 60개의 달찰나가 모인 것으로 약 96초, 수유(須臾)라고도 하는 모호율다(muhūrta)는 30랍박으로 48분여의 시간, 주야(ahorātra)는 30모호율다로 오늘날과 같은 1일, 곧 24시간이다. 월(māsa)은 30주야, 년(varṣa)은 12월로 세(歲)라고도 한다.
겁(kalpa)은 가장 긴 시간으로 개자겁(芥子劫)과 반석겁(盤石劫)의 설이 있다. <잡아함경>에 의하면 개자겁은 사방 둘레와 높이가 각각 1유순[1由旬은 최소 16km]이 되는 철성(鐵城)에 가득 들어 있는 개자를 어떤 사람이 백 년에 하나씩 꺼내 그 개자가 다 없어져도 오히려 겁의 시간은 남아 있는 정도의 시간이라 하며, 반석겁은 깨어지거나 부서진 곳이 없이 사방 1유순의 돌산을 어떤 사람이 얇은 천으로 백 년에 한 번씩 쓸어 돌산이 모두 닳아 없어져도 겁의 시간은 남아 있는 정도의 시간이라 한다.
그리고 이런 가장 긴 시간이 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겁이 또한 한량없음을 밝히고 있다. 겁이 백천만억이나 된다든가[如是長劫百千萬億], 겁수(劫數)의 끝은 생각할 수 없는 것[不能憶念劫數邊際], 과거의 겁수는 무량한 것[過去劫數無量]이라는 <잡아함경>의 내용이라든가, 아승지겁(阿僧祗劫), 또는 여러 대승경에서 밝히고 있는 항사겁(恒沙劫)과 같은 내용들이다.
겁의 수가 헤아릴 수 없는 숫자만큼, 혹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는 이야기이다. 또 흔히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하는 불교의 시간관을 위 <잡아함경>의 과거겁수무량(過去劫數無量)이라는 구절에서도 헤아려 볼 수 있다. 과거겁이 무량이므로 미래겁도 또한 무량인 것이다. 그런데 주지해야 할 점은 이러한 시간들이 단계적 길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설명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법장(法藏)이 <화엄일승교의분제장> 권4에서 '혹은 장겁(長劫)이 단겁(短劫)에 들어 있고 단겁이 장겁 속에 있으며, 백천의 대겁(大劫)이 일념이 되고 일념이 곧 백천 대겁이고, 과거겁 속에 미래의 겁이 들어 있고 미래겁 속에 과거의 겁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자재하여 시겁(時劫)은 무애(無礙)이며,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혼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의상(義湘)이 <법성게>에서 밝히고 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과 같은 내용이다. 또 <대지도론> 권30에 천만 무량겁이 1일(一日)이 되고 1일이 천만 겁이 된다는 구절도 있다. 이상이 시간의 길이에 대한 대략적 내용이다.
시간의 근본이 무명이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무지가 무명이라고 하였듯 깨달음이란 일단 장단이 포함된 이런 삼세의 시간에 대한 각오(覺悟)라고 하겠다. 존재법의 변화와 그 초월지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 불교의 시간관이기에 삼세에 대한 깨달음은 거기에 내재된 일체에 대한 깨달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찰나찰나가 영원부단(永遠不斷)하며, 1찰나에 담겨 있는 64념 중의 일념이 무량겁이기에 항상 현재에 대한 철저한 각득(覺得)이 바탕이 되어 있다. 곧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시간=일체 존재법=현재'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일체의 존재법은 본질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현상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이런 모두에 대한 깨달음이 된다.
한 개체의 존재와 관련해 볼 때 유한한 시간과 상관하며 존재하기에 시간에 대한 깨달음은 유한 생명으로서의 삶의 태도와 행동 및 가치질서를 규정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은 일반적으로 시방으로 일컬어진다. 곧 동, 서, 남, 북의 4방과 그 각 중간인 4유(四維), 그리고 위와 아래의 상하 등 4방, 4유, 상하로 이루어진 방위적 개념이다.
이러한 방위로서의 시방은 방향도 없고 중심이나 끝도 없는 그야말로 무방무형(無方無形)의 광대무변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형체나 모양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느 한 곳에 원점을 정하고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경우, 그 방향은 한 곳을 향해 끝없는 무한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여타 어느 방향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원점으로부터 일정 방향으로 나아간 그 방향에의 끝없음은 한 곳으로부터 전개된 길이가 얼마냐에 상관없이 역시 그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을 옮겨 놓고 또다시 옮겨 놓아도 그 길이 이상의 무한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정의 범위나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 불교의 공간이다.
또한 4방과 4유 및 상하 등의 방향은 해가 뜨고 지는 쪽이 동쪽과 서쪽이라는 것과 같은 규정된 방향이 아니라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편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방소(方所)이다. 임의 설정의 가방(假方)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방향이 가방이기에 시방은 미규정 상태로서의 일정처를 향한 무한 지향이며, 또 4방과 관련한 4유나 상하의 한 방향을 몇 천이나 몇 만으로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각각의 하나하나가 시방의 정방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방위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무한의 영역에 속해 있는 불교의 공간을 모양으로 도식화해서 설명해 내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그 영역이 무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억지로 그려내 본다면 일반적으로 표시하는 공간의 형태, 곧 하나의 둥그런 원형이 아니라 각 방향으로 끝없는 화살표를 가진 하나의 구체(球體)라고 할 수 있다. 고정이 아닌 가정(假定)의 원점을 설정하고 그 원점으로부터 각 방향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무한 영역으로서의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시방의 개념을 교설에서는 무한의 삼천대천세계(tri-sāhasra-mahā-sāhaḥ loka-dhātuvaḥ)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교설에서는 중생 거주의 소의처(所依處)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3천대천세계, 즉 불교의 공간을 수미산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남섬부주(南贍部洲) 등의 네 개의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여기에 수미산과 수미해(須彌海), 쌍지산(雙持山)과 쌍지해(雙持海) 등의 팔산팔해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철위산(鐵圍山) 등 구산팔해가 있으며, 이를 하나의 소세계라 하고, 소세계가 천 개인 것을 일소천(一小千)세계, 소천세계가 천 개인 것을 일중천(一中千)세계, 중천세계가 천 개인 것을 일대천(一大千)세계, 그리고 소, 중, 대 셋을 합하여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이다.
<장아함경>에서는 구산팔해의 넓이와 길이, 깊이, 모양 및 지옥과 천상세계 등 삼천세계의 여러 부분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곧 오늘날의 관점에 의해 볼 때 하나의 태양계를 하나의 소세계라 할 수 있고, 그것이 천 개인 것을 소천, 소천의 천 개를 중천, 중천의 천 개를 대천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천대천세계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중중(重重)의 무진(無盡)이다.
<대지도론> 권30에는 보살의 한 발의(發意)나 음성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삼천대천세계를 지나 항하사와 같은 시방의 모든 세계에 이른다.'고 하고 있는 구절이 보이며, 권50에서도 삼천대천세계가 아승지의 수만큼이나 많다[시방아승지삼천대천세계]고 하고 있고, 또 삼천대천세계를 하나의 세계라 하며, 이는 일시에 생겨나고 일시에 사라진다. 이와 같이 시방에는 항하의 모래알과 같은 세계가 있으며, 이것이 일불의 세계이다.
이러한 일불의 세계 수 또한 항하사의 세계와 같으며, 이를 일불 세계의 해(海)라고 한다. 이러한 불세계 해의 수 또한 시방 항하사의 세계와 같으며, 이를 불세계의 종(種)이라 하고, 이러한 세계의 종은 시방에 무량하다. 고 하고 있다. 광범한 숫자 개념으로 해(海)와 종(種)를 들며 더욱 넓혀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삼천대천세계에 대해서도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다고 하고, 또한 그것을 해나 종, 그리고 종의 무량이라는 무한 숫자로 설명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광대무변한 무량무변의 세계가 교의에서 설하고 있는 공간의 영역이다.
나아가 <대지도론> 권93에서는 이런 세계와는 다른 세계, 곧 정불국(淨佛國)의 세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곧 삼악도나 사견(邪見) 및 삼독심, 2승(二乘) 등이 없는 절대의 세계를 들고 있다. 연화장세계나 극락정토와 같은 세계이다. 이처럼 불교의 공간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소세계와 그 천 배씩의 세계, 그리고 항하사 수와 그 몇 곱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또한 유, 무위의 공간 영역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일단 공간에 대한 깨달음은 이러한 공간 영역에 대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무방무원(無方無圓)하고 무변한 광대의 세계, 곧 하나의 소세계를 비롯하여 소천, 중천, 대천의 세계, 그리고 항하사의 대천세계에 대한 앎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들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서로 상관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후 살펴볼 물질의 관점과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개체로서의 절대 영역에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관련되어 존재하고 있다. 독립된 실체이면서도 서로가 상의상자(相依相資)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하는 개체는 모두가 성(成), 주(住), 괴(壞), 공(空)한다는 불교의 기본 교설에 의거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물질은 무상(無常)와 무아(無我)의 법칙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이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성, 주, 괴, 공을 반복하게 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해 한 영역의 공간은 다른 공간과 상관하여 성, 주, 괴, 공하며, 다른 공간의 생멸 또한 이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물질은 지수화풍이라는 4대의 요소, 현상적으로 말한다면 극히 작은 소립자들의 집합과 이산(離散)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즉 성, 주, 괴, 공의 실제적 주체는 작은 소립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립자는 관념적으론 다양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곧 아무리 커다란 삼천대천세계라 할지라도 항하사 수의 삼천대천세계에서 볼 때에는 극히 작은 소립자에 불과하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반대로 극소의 공간이라도 삼천세계나 그 이상 등 무한의 영역을 담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중생이 지각(知覺)하기에는 한정된 영역이지만 그 한정된 영역 속에는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성게>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의 세계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는 내용도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며, 법장(法藏)이 <화엄일승교의분제장> 권4에서 '하나의 티끌 속에 삼세 일체의 부처님의 국토와 삼세 일체의 중생 등이 널리 나타나 있다.'고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이다.
또한 존재의 측면에서 개인 입처(立處)로서의 공간은 개인적인 요소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과 관계하는 가정이라는 것이 있고, 이를 내포한 국지적 영역과 국가 및 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이상들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존재 공간은 이들과의 상관관계에 의해 존재한다.
공간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화엄 등 여러 대승경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보다 멀고 커다란 항하사의 삼천세계에 대한 앎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입처(立處)에 대한 공간적 깨달음을 갖는 것에 그 주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입처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그 위치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 실존 영역에 대한 체득이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소립(所立)의 처소에 대한 확고한 앎은 안심(安心)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그 무지는 상관적 현상에 얽매인 피동적이고 종속적인 고통과 질곡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에 대한 앎이요, 나아가 항하사 수의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앎, 그리고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와 상관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그 공간 존재의 법칙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법칙에 의해 개개인이 살아가는 현상적 영역이 실재론이나 가치론의 측면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리고 그에 따라 피체(被逮)의 삶과 능동의 절대적 삶으로 구분 짓게 된다는 그런 문제의식 위에 깨달음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일이다. 무위법의 세계에서는 생멸이나 능소(能所)가 의미가 없지만 유위법에서는 생멸의 극복이 무위법으로 가는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바로 여기에 공간에 대한 깨달음의 필요성이 있다.
정신에 관한 내용은 사실 단층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색채가 이 정신적인 부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정신은 교의의 심화에 따라 이루어진 내용의 다양성과 구조체계의 복잡성, 그리고 특히 깨달은 각자의 경지에서만 취급될 수 있는 영역까지 매우 세분되어 있으며, 이는 불교 정신세계의 이해를 위한 접근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인식론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순수 인식만은 아니며, 도덕이나 철학 등 기초 윤리를 설하면서도 진리의 오도에 의한 절대경이 설해지는 등 불교의 정신은 존재의 전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곧 개인이나 집단, 인간의 내적 세계와 외경(外境)의 물질,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등 일체의 모든 것과 상관하여 설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구조체계가 복잡하고 세세하다. 상세한 내용은 피하고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상'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사상은 관련된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 정립되어 나타난 것으로 관점이나 이론, 환경과 같은 외적인 영향이 바뀌게 되면 그에 따라 변하게 되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가변의 것은 불교 관점으로 볼 때 외형으로 표출된 정신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은 개인적 내면세계의 근저를 포함해 보다 근원적인 우주의 이법(理法)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흔히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마음, 즉 정신은 불교교리의 발달과 함께 세분화되고 상세함이 더해지고 있다. 일단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을 일체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인식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불교의 기본 관점이며, 이에 의해 볼 때 정신도 또한 여기에 입각해 기술되고 있다.
불교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원시와 부파 등 여러 관점이 있지만 궁극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여래장 사상이다.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원시에서는 인간 개인의 구성 요소를 5온(五蘊)라고 칭하고 있다. 이 중 색은 물질로 육신을 말하지만 나머지 수, 상, 행, 식의 넷은 정신이다.
곧 수(vedanā)는 고통이나 즐거움 등의 감정 및 이를 받아들이는 감수작용(感受作用), 상(saññā)은 마음에 비추어진 심상(心像)으로 5관의 감각 인식기관을 통해 취합된 취상(取像)의 기념(起念), 행(saṅkhāra)은 수와 상을 제외한 여타 정신작용의 총칭, 식(viññāṇa)은 체성(體性)으로 인식의 주체이다. 또 원시에서 불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로 언급하고 있는 18계(界) 중 안~신의 전5근과 색~촉의 전5경은 물질에 관한 것, 그리고 의근과 법경 및 6식은 정신에 관한 것이다.
곧 원시교설에서는 만상의 구조를 '일체법'이라 하고 이를 5온과 18계로 나타내고 있는데, 5온은 그 중심을 인식 주체의 내외를 포함한 객관성에 두고 이를 외적인 물질의 색온과 내적 정신인 수, 상, 행, 식의 4온으로 구분한 것이고, 18계는 중심을 인식 주체의 내적인 주관적 측면에 두어 6근, 6경, 6식의 18계로 설명하면서 전5근과 전5경을 물질로, 그리고 법, 의와 6식을 정신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정신은 감각기관으로서의 5근과 인식대상으로서의 5경을 바탕으로 생기(生起)하고 있다.
또한 원시의 중요 교설인 4제(四諦)와 12연기도 정신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고뇌의 고(苦)와 그 원인인 집(集), 해탈인 도(道)와 그 방법인 멸(滅) 모두가 정신 작용이며, 무명으로부터 노병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혹은 그 역관(逆觀)도 모두 정신의 영역이다. 곧 중생사의 제현상으로부터 수행의 방법, 그리고 그 과정의 계위(階位) 및 도달한 깨달음의 성제(聖諦)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신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에 관한 이러한 원시의 관점을 부파불교에서는 심(心, citta)과 의(意, mano) 및 식(識, viññāṇa)이라 하고, 이것을 마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소위 심식론(心識論)이다. 부파는 이런 심식론, 곧 마음의 구조를 일체의 존재를 분류하는 5위법에서 마음의 주체인 심법과 작용인 심소법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정신을 주체적인 심식과 수, 상 등 작용의 속성으로 나눈 구분이다. 원시의 5온에 의한다면 심식은 식을 말하고 심소는 수, 상, 행이다. 수, 상, 행, 식의 4온을 대등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식과 그에 내재된 속성으로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는 심과 심소가 각기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 구체적인 정신현상이 성립한다는 관점이 있다. 이후의 유가행파에서 설하고 있는 아뢰야식과 같은 일원론의 논리와는 다르지만 부파에서는 이를 주된 정신론으로 정립하고 있다. 물론 경량부와 같이 이에 대해 부정하는 일부 이론도 있다.
이러한 심식론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점은 이것이 6식이라는 외형적 표면심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내면에 내재된 잠재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극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이론이다.
유식법상종에서는 마음을 안식(眼識) 등의 전6식과 표면심 보존처로서의 의계(意界)인 제7말나식, 그리고 잠재식으로서의 제8아뢰야식을 들고 있다. 곧 나타나는 표면심으로 전6식을 설하고, 내재된 잠재심으로 제7식과 8식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5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5관을 통한 의식 내용에 대응하는 객관적 자극이자, 감각과 동시에 지각하기도 하는 의식이다.
제6의식은 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작용으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제6의식은 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5식과 공동으로 작용하는 5구의식(五俱意識)와 단독으로 작용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 있다.
제7말나식(manas)은 아뢰야식과 6식 중간에 존재하는 식으로 전6식을 발생하는 식이다. 즉 아뢰야식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개인적으로 본다면 개인 존재에 집착하는 아집이다. 이 아집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고 아뢰야식의 작용과 결합해 출생 생장하여 6식을 갖는다. 따라서 표면심의 보존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제7말나식이다.
아뢰야식(ālaya)은 장식(藏識)로도 번역되고 있듯 일체 제법이 종자로서 존재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일체의 제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지속하는 식이며, 여러 식과 함께 작용하여 환경세계나 개인 존재의 신체, 자아, 대상 등을 성립시킨다. 또한 과거의 인(因)에 대한 응보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해 개인적 존재를 비롯한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모든 생명의 감각이나 생명, 체온 등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는 생명 근원으로서의 식이다.
대체로 부파불교와 이러한 유가행파에서 밝히는 식은 모두 표면심과 잠재심으로 생멸변화하는 현상심(現象心)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심의 관점과는 달리 불변하는 체성(體性)으로서의 마음이 있다고 보는 교설이 있다. 곧 현상심의 깊은 곳에 불생불멸의 실체로서 성심(性心)가 있다고 설하는 여래장계 계통의 경론으로 불교 정신계의 궁극적 관점이다.
여래장계 경론에서는 근원 본성의 본체인 성체(性體)로 불성이나 여래장을 설한다. 선과 악, 시와 비, 유와 무 등 제법으로 현상화되기 이전의 근본 본원계를 여래장이라 하고, 여기에서 일체의 제법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래장 설의 기본 관점에는 자성청정과 객진번뇌(客塵煩惱)라는 두 개의 정신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즉 여래장에는 청정심과 번뇌심이 공존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번뇌심을 제거하고 청정심을 드러낼 때 여래가 현현한다는 것이다.
여래장의 이런 관점은 원시교설에서 명(明)(vidyā)과 무명(avidyā)을 언급하며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드러내야 한다는 관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무명은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고를 낳지만 이를 제거하면 해탈의 삶이 나타나게 된다. 문제는 이런 교설의 내용을 체득하여 명의 삶을 사느냐 아니면 무명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있다. 곧 불교 정신의 근원인 성체(性體)에는 자성청정과 객진번뇌, 즉 명과 무명이라는 두 가지가 있고, 정신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이 성체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여하에 따라 고뇌와 해탈이라는 양자로 극명하게 나누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정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교설에서 밝히고 있는 정신의 성체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명(明)와 자성청정이 현현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 반대인 번뇌심에 뒤엉킨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의상이 <법성게>에서, 법성이란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하고 심심미묘한 법으로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不守自性隨緣成]고 하고 있는 것도 이 성체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의한 현상법의 세계, 곧 명과 무명에 있어 어떤 연으로 나아가느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또한 현상계의 정신, 곧 오늘날 존재하는 사상이나 이념 등에 대한 부분과는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간과해서는 안 될 극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아의 완성이라는 개인적 해탈과 개공성불이라는 이상세계의 구현이 모두 이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인의 현황을 보면 대체로 불교의 내적인 면에만 치중되어 있고, 외부 사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는 느낌이다. 불타가 당시 96종 외도나 62견(見)의 사상을 모두 살피고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화도(化度)의 행에서도 이런 당시의 관점들을 비교 언급하여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려 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한 한 개인의 정신 구조는 좁게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의 정신세계와 상의상관하여 성립 존재하고, 나아가 학교나 사회, 그리고 국가나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의 정신들과 관계하고 있다. 하나의 지구촌이라고 하듯 정보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기존의 사상은 물론 새로운 이념들이 급속한 전파속도를 가지고 있고, 모든 정신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상의 정신계를 구성하는 주된 내용들은 개인적인 내면의 것만이 아니라 외부의 여러 관점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전체도 물론이지만 개인의 내적 정신세계는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 정신계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또한 현실 정신계에 대한 관심은 개인 정신의 문제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상에 사로잡혀 독존성을 고집하거나 이른바 법집(法執)에 가득찬 사고방식만 유지한다면 공존의 사회 속에서 폐쇄성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적 깨달음의 추구만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체 중생 성불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교의 기본 목적에도 위배된다. 즉 현상계의 정신에 대한 시비를 구분해 자타가 구경의 정각을 얻어 해탈의 삶을 살 수 있는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 어느 시대에서나 불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다.
현상계의 정신 또한 모두 성체(性體)에서의 현현이지만 무명으로부터 전개된 잘못된 정신세계에 대한 국집은 결국 자타 모두에게 고뇌로운 삶을 가져다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의상관의 법칙에 따라 불국토 건설이라는 이상세계의 구현에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것은 결국 불교의 정신, 곧 성체에 대한 깨달음의 필요성과 중대성이 강조되는 것이며, 현상계의 정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류를 위태롭게 하고 고난에 빠뜨리는 정신 이념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에 대한 무관심은 객진번뇌를 제거하고 자성청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밝혀 해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불교적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불교에 있어서의 정신에 대한 깨달음은 근원 본성인 성체에 대한 깨달음이며, 이는 객체적 모습인 현상의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선 및 해결을 통해 참다운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마음이라는 정신 위주로 설명되고 있는 불교의 교리에 있어 부정하고 비상(非常), 비아(非我)의 것인 물질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색심불이(色心不二)라 하여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님을 밝히고 있듯이 일체법 존재 양태의 기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 물질이기도 하다.
이는 근원적으로는 물질과 정신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는 물질이 정신의 소의처이자 존재의 기반이고, 때론 인간의 정신까지도 지배하는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물질 구성의 원소인 4대와 이 4대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계[색법]를 관찰하면 불타의 보리(菩提)를 능히 얻을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매개체이자 불교적 이상세계 구현의 중요한 기능과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 온 시간과 공간 및 정신적인 부분과 상관, 혹은 공존의 법칙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따라서 이런 물질에 대한 깨달음은 사물이나 존재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자 전제조건이 된다. 물질에 대한 교설의 내용도 무척 다양하지만 역시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구조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와 상관하여 존재한다. 작게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먼지 티끌에서부터 크게는 공간에서 살핀 항하사 수의 3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질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예외되거나 벗어나는 존재는 없다. 불교에 있어서의 물질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색을 중심으로 설하고 있다. 인간의 육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색이다. 이를 원시에서는 5온(蘊)에서 색온(色蘊)으로, 12처에서 5근(五根)과 5경(五境)으로, 부파에서는 5위(五位)에서 색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는 주지하다시피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이다. 오늘날 물질의 구성 요소로서 수십 종으로 세분하여 언급하고 있는 원소와는 달리 다소 관념적인 성격은 짙지만 이보다는 물질 성립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사대이다. 이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 따라 물질의 성립과 소멸, 즉 물질의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이 이루어지게 된다.
<잡아함경> 권2에서는 색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이란 일체의 4대(大)와 4대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四大造色]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색이라고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부파의 <아비달마품류족론> 권1에서도 색을 사대와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5근, 5경, 무표색 등으로 들고 있다.
물질의 원소가 되는 4대에는 각각 고유한 성질이 있다. 지대의 견성(堅性), 수대의 습성(濕性), 화대의 난성(煖性), 풍대의 동성(動性)이다. 이 네 성질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에나 포함되어 있는 기본 요소이다. 하지만 단지 모든 물질이 가진 성질을 대표한 것일 뿐 유일한 것은 아니며, 이것이 확대되면 무한한 성질이나 작용력으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
4대에는 또한 조인(造因)로서 5인(五因)이나 4업이 있으며, 이에 의해 물질의 성(成), 주(住), 괴(壞), 공(空)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 4대의 기본 요소는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며, 각각은 상(床)의 네 다리와 같아 하나라도 빠지면 능조(能造)와 소조(所造)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들 요소의 양적인 증감과 주이(住異)가 업연(業緣)과 연관하여 천체(天體) 등 일체의 물질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물질의 크기로는 16종이 언급되고 있다. 가장 미세한 물질로 단절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장단(長短), 방원(方圓), 고하(高下)가 없고, 더 나누거나 분석하고 눈으로 보거나 냄새 맡고 맛볼 수 없는 극미(極微, paramānu)에서부터 극미의 7배 크기로 천안(天眼)이나 전륜왕안(轉輪王眼), 보살안(菩薩眼) 만이 볼 수 있다는 미진(微塵, aṇu-rajas) 및 가장 큰 크기의 유선나(踰繕那, yojana)까지이다.
이처럼 물질인 색은 4대와 11종의 색법, 4대성, 5인, 4업, 16종의 크기,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각종 성질 등 다양한 내용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들이 인연 화합에 의해 이합집산하고 성주괴공하는 물질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물질이 본 논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성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강한 현실적 존재성을 띠고 있고 근원적으로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를 잘 관찰하면 보리의 증득이라는 직접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본래는 성공(性空)의 관점에서 설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에 대한 올바른 체득을 통해 정신적 자재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선가(禪家)인 조동(曹洞)의 5위에서 본다면 현상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편중정(偏中正)의 방법이다. 사실 중생 무명의 근원인 탐(貪) 등의 삼독심은 물질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이란 무상(無常)한 것이고 인연 화합에 의해 생멸한다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기본 성격을 깨닫게 되면 삼독심도 소멸케 된다.
석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물질에 대해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능히 괴로움을 끊지 못하게 된다. …… 비구들이여, 물질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그것이 항상하지 않음을 관찰하라. 이것을 분명하게 하는 자는 물질에 대해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진 자는 심해탈을 얻은 것이다.'고 하시고 있다.
물질을 올바로 알면 물질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지면 해해탈(解解脫)이 아니라 심해탈(心解脫)이므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설하시고 계신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형태를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이 일체색이고, 일체진이 일체불이라고 하듯 일체법은 물질과 상관하여 있다.
물질도 하나의 진리이며, 진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물질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이 곧 깨달음의 길이다. 심성의 깨달음 못지않게 우리 인간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물질계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는 학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이란 이제까지 살펴 온 것처럼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고, 이들은 다양한 내용으로 설명되면서 근원의 일체법으로서, 또한 유정 중생의 현실계에 올곧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근원법에 대한 체득은 일체에의 자재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현상계를 제외한 본질계만의 추구는 결코 올바를 수가 없다. 본질이 현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근원의 체득에 있어 본질에서 현상을 추구하는 정중편(正中偏)만이 아니라 현상에 본질을 추구하는 편중정(偏中正)의 방법, 그리고 불회호(不回互)의 정중래(正中來)나 편중정(偏中正)의 방법도 있듯이 현상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근원법 체득의 지속문제를 도와준다.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는 현상이 결코 본질과 괴리되어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논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1차적 깨달음이 아니라 명(明)로부터의 전개인가 아니면 무명으로부터의 전개인가를 살펴 자타(自他)가 일시에 개공성불(皆共成佛)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5온이나 연기를 비롯한 원시경전의 수많은 내용들에서부터 대승경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설들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불타의 생애가 그러했듯, 이들 경론에서는 내적 청정계만의 국집이나 안주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깨달음의 현상적 이해/ 박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