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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인생은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구절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학자들에 따라서 전도서를 허무주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슈라이너는 그런 사람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관점과 틀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슈라이너는 전도서의 저자는 12장 13~14절에서 책 전체의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슈라이너의 설명은 전도서의 핵심 내용을 심도 있게 알려준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해 아래 인생의 허무(슈라이너)
그렇다면 우리가 전도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도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인생의 헛됨과 허무다.(A 라이트는 전도서의 섬세한 구조를 발견하는데, 1:12~6:9은 "인간의 다양한 노력의 헛됨”을, 6:10~11:6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을 강조한다(A Wright, “Riddle of the Sphinx,” p. 324). 라이트에 따르면, 1:2~11과 11:7~12:8은 전도서를 시작하고 끝맺는 시다(pp. 333~334). 라이트의 전체적인 주장을 보라(pp. 313~334). 또한 그의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과 "Additional Numerical Patterns in Qoheleth"을 보라.) "헛됨" (히. 헤벨)은 전도서에 37회 나오며, 인간 실존의 허무와 무의미를 뜻한다. 이 구호는 전도서를 열고(1:2) 닫는(12:8) 봉투 역할을 한다.(또한 Dumbrell, Faith of Israel, p. 284; Waltke, Old Testament Theology, p. 955도 주장한다. '헤벨'은 해 아래 인생의 “모순”을 의미한다(Murphy, Ecclesiastes, p. lix; Waltke, Old Testament Theology, p. 956). 나는 전도서와 관련해서 "불합리성"이라는 용어를 "모순"과 동의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삶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다(Fox, Qohelet and His Contradictions, pp. 29~51을 보라). 프레드릭스(Fredericks, Coping with Transience, pp. 11~32)는 '헤벨'이 인생의 덧없음에 초점을 맞추지만(또한 Perdue, Wisdom and Creation, pp. 206~207을 보라), 이 정의가 단편적으로는 사실일지라도 전도서에 흐르고 있는 주제인 좌절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드로시(DeRouchie, "Shepherding Wind")는 '헤벨'이 인생은 수수께끼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케인데이(Caneday, "Everything Is Vapor")는 이 단어가 헛되고, 일시적이고, 악한 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드로시와 케인데이 모두 '헤벨'을 '무의미한'이나 '허무'로 번역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면 전도서를 궁극적인 절망을 다루는 책이라고 하는 주장을 지지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 '헤벨'의 의미를 완전히 다룰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나는 전도서의 문맥에서 보면 '헤벨'은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단어이며, 모순, 허무, 무의미는 이 단어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전도서의 저자는 인생이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거나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저자의 핵심은 해 아래 인생은 무의미하고, 허무하고, 모순되며, 수수께끼이며, 덧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땅에서 벌어지는 것을 관찰하고서는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전도서가 궁극적으로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고 모순된다고 가르친다는 주장을 따르지 않는다. 저자가 가르치는 핵심은 우리가 역사의 사건에 나타나는 패턴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전도자는 창조에 기초하는데,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이 한 측면에서는 설명될 수 없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창세기 3장에 묘사된 타락으로 설명된다."(B. Webb, Five Festal Garments, p. 104. 또한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pp. 278~279을 보라.) 전도자가 인생의 모순을 전하기 위해 선호하는 다른 표현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1:14, 2:11, 17, 26, 4:4, 6, 6:9). 이 표현은 흔히 "헛됨"과 평행을 이룬다.(Waltke, Old Testament Theology, p. 957을 보라.) "바람을 잡으려는 것”은 인생의 허무를 멋지게 그려 준다. 왜냐하면 아무도 바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또 다른 핵심 구는 “해 아래에서”로, 전도서에 29회 등장한다. 이 구는 이 땅에서의 인생, 이 세상에서의 인생을 의미한다. 저자는 죽은 자들에 대해 말하면서(9:5)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9:6)라고 한다. 이 본문에서 "해 아래"는 현세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1:9),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4),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2:11. 참고, 1:3)라고 말한다.(그의 수고는 “해 아래에서” 있었고(2:18), “모든 수고”는 “해 아래에서” 있었다(2:20). 또한 2:22을 보라.) 따라서 "해 아래에서"라는 구는 제한된 관점을 가리키며, 이 관점은 인생을 땅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Dumbrell, Faith of Israel, pp. 288~289을 보라.) 이것은 "인생의 의미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전적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확언한다.(House, Old Testament Theology, p. 471.) 이 마지막은 잠언을 읽을 때 생길 수 있는 실수인데,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잠언은 이런 잘못된 견해를 가르치지 않는다. 캐슬린 파머(Kathleen Farmer)는 "이 용어가 일종의 내세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암시한다고 옳게 주장한다.(Farmer, Who Knows What Is Good?, p. 206. 그는 또한 "(해 아래) 일어나는 것과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 대조가 있다"라고 말한다(p.206).)
왜 인생은 헛된가? 전도자로서 솔로몬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생의 헛됨을 설명한다. 예컨대, 사람의 수고는 무의미한 것으로 표현된다(1:3~11). 이 세상의 근본 구조는 변치 않으며, 자연의 주기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에 새로운 것은 정말 하나도 없다. 수고의 열매가 일시적이기 때문에 사람의 수고는 허무하며, 어떤 사람은 수고해서 얻은 재물을 미련하게 될 상속자에게 물려준다(2:18~19). 일을 하는 것은 "슬픔"을 가져다주고, "수고하는 사람은 이윤에 대해 근심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2:23). 다른 이들은 쉬지 않고 일하지만 재산을 물려줄 상속자조차 없으며, 자신들의 부에 만족하지 못하고(참고, 6.7),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4:7~8).
사람의 수고와 "재주”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기 원하는 열망과 경쟁에서 나오며, 따라서 노동은 사람의 "시기"를 일으키는 뿌리가 된다(4:4). 하지만 행복은 끝없는 노동으로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수고가 두 손에 가득하고(4:6) 바람을 잡는 사람의 삶은 참으로 무익한 삶이다. 전도서는 열심히 일하라고 가르치는 잠언의 강조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도서는 일하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의 끝은 자기 파멸이지만(4:5), 지혜로운 사람은 일과 쉼의 균형을 찾고(4:6), 일이 기쁨을 준다는 환상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모순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롭지만 가난한 사람은 미련한 왕을 대체하나, 왕이 된 가난한 사람도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4:13~16). 땅에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해 아래 있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탈출하는 기쁨을 찾는 사람들의 분깃은 헛됨과 바람을 잡는 것이다(2:1~12), 솔로몬은 이런 접근으로 인생을 산 첫 번째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한없는 즐거움을 얻을 만큼 충분한 부를 누렸기 때문이다(2:11). "해 아래" 사는 인생은 "짧은” 기간일 뿐이어서(2:3), 어떤 사람은 쾌락주의로 인생의 공허함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솔로몬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지혜를 버리지 않았다(2:3). 이것은 신중함과 이해력으로 인도받고 정보를 얻어 육체의 기쁨을 추구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어마어마한 공원과 정원을 만들었다. 자신의 명령을 즉각 따르는 수많은 노예를 거느렸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부를 누렸다. 이스라엘에 있는 최고의 음악가들과 가수들을 데려다가 유희를 즐겼다. 셀 수 없는 여자들과 성관계를 즐겼다. 포도주로 쾌락을 자극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삶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2:10). 그러나 쾌락주의의 길은 궁극적으로 인생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인생의 공허함은 인생의 쾌락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은 마음의 모든 열망을 만족시킨 다음에도, 쾌락이 인생의 권태감을 없애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인생의 모순은 더욱 확실해질 뿐이었다.
쾌락이 만족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때 나와야 할 대답은 지혜, 곧 슬기로움과 이해력으로 삶을 바꿀 수 있는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전도자는 지혜가 미련함보다 낫다고 확신한다(2:13~14). 이 확신은 잠언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윤리적 어둠에 둘러싸인 삶을 산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와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통찰력 때문에 미련한 자보다 더 오래 산다(7:1~12. 참고, 9:18. 10:10). 머피의 말처럼, "미련함은 결코 전도서의 실행 가능한 선택이 되지 못한다."(Murphy, Ecclesiastes, p. Ιxii.) 그러나 해 아래 사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공허와 모순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혜로운 자는 해 아래 인생의 무의미를 알고 있으며, 인간의 실존 속에 있는 슬픔과 비애를 미련한 자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있다(1:13~18). 지혜로운 자는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13)라며 인간의 수고로운 일에 대해 깨닫는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인생에 고칠 수 없고 교정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있음을 깨닫는다(1:15).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의 수고를 즉시 망가뜨릴 수 있다(10:1). 지혜로운 자나 미련한 자가 죽고 잊히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지혜로운 자는 이 땅에서 지혜로운 삶으로 얻는 이득이 오래가지 못함도 깨닫는다(2:15~17). 안타깝게도, 부자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슬기로 한 도시를 구하지만, 도시를 위해 수고한 그의 노력은 완전히 잊혀질 것이다(9:13~18).
전도서의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는 해 아래 인생의 불합리성이다. 이 주제는 2장 17절에 다음과 같이 잘 담겨져 있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인간 실존을 특징짓는 불의로 인해 애통한다. 안타깝게도, 의가 명성을 얻어 차지할 자리를 불의가 대신 차지한다(3:16). 여기서 현 세대에 나타난 해 아래 불의는 최후 심판을 피해갈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또한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p. 272을 보라.) 왜냐하면 전도자는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3:17). 여기서 전도자는 모든 일의 결론을 예상하며(12:13~14), 그 결론이 전도서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인간이 짐승보다 더 낫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전도자가 3장에서 강조한 것은 인생의 "헛됨"이다(3:19~21. 참고, 6:12). 인간이나 짐승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이는 인간 실존의 허무를 의미한다(참고, 9:1~3).
누구도 전도자가 인생의 밝은 면만 보고 있다고 비난할 수 없다. 전도자는 억압받는 자들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위로받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다(4:1). 그들의 압제자는 약자와 주권을 잃은 자에게 힘쓰기를 즐기기 때문에 억압을 그치지 않는다(참고, 5:8~9). 그래서 전도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4:2~3). 결국,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그들의 악 때문에 형통한 반면, 의로운 자들은 그들의 의 때문에 망하는 것을 본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9:11~12). 누구도 언제 죽을지 계산할 수 없고, 코앞에 닥친 것이 비극인지 승리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그들의 삶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들을 다룬다. 때에 대해 잘 알려진 시 (3:1~8)는 삶이 펼쳐질 때마다 인간은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Dumbrell, Faith of Israel, p. 289을 보라.) 우리는 파종할 때 파종해야 하고, 죽음에 대해 울고, 탄생에 대해 웃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싸워야 하고, 평화의 때가 오면 기뻐한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물론, 대답은 "아무도 없다"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을 펼 수 없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8:8). 죽음의 사자가 오는데, 우리는 그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레오 퍼듀(Leo Perdue)의 말처럼, "인류는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나는 시간의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요소와 신적 사건의 과정을 완전히 알지 못하며, 불투명하고, 신비롭고, 모호한 현재에 갇힌 채 무엇이 일어날지 무엇이 일어나지 않을지 알지 못한다."(Perdue, Wisdom and Creation, p. 217.)
전도자는 부와 행복의 부조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부는 성취를 보장할 것 같지만,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진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돈이 많을수록 돈을 가진 사람의 물질에 욕심을 내는 친구들이 많아진다. 부는 마음을 장악하며, 부자들은 재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5:11~12). 사람의 재산은 "재난을 당할 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5:14). 힘들게 모은 소득이 사라져 자손에게 남겨 줄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며, 그 결과 이 모든 수고는 "바람을 잡는 수고"가 되고 만다(5:16).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엄청난 부를 모으는 복을 받았지만, 쌓은 재산을 누리지 못한다(6:1~2). 전도자는 인생이 어떻게 이토록 모순적일 수 있는가를 보고 놀란다. 어떤 사람은 백 명의 자녀를 얻고 오래 살았지만, 인생의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부질없다(6:3).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6:3). 왜냐하면 낙태된 자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나 즉시 평안함을 얻기 때문이다(6:5). 위에서 언급한 대로, 때때로 전도자는 마치 죽음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것 같다(4:2~3, 6:3). 우리는 전도서가 잠언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을 긍정적으로 보는 격언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진술과 함께 다뤄져야 한다.(머피(Murphy, Ecclesiastes, p. lxvii)는 죽음의 우월성에 대한 말씀이 “매우 드문 경우”라고 말한다.) 우리는 잠언에서 하나의 잠언을 과도하게 확대시킬 위험성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다. 전도자는 삶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다(이것은 아래에서 더 다뤄질 것이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9:4~6). 전도자는 삶의 소중함을 전하지만, 삶의 허무함도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로 설명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전도자가 모든 미래의 삶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의 삶을 말하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에 근거해서 미래를 엿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토머스 슈라이너 지음, 강대훈 옮김, 『성경신학』(부흥과개혁사, 2016), pp. 310~314.

첫댓글 성경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해 아래 인생의 허무라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 그 허무를 은혜와 복음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아멘22
전6:10-12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호크마 주석>
=====6:10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 문자적으로는 '그 이름이 불리워진 바 되었으며'(has already been named, NIV, RSV, NASB)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격이나 특성이 이미 규정되어 있으므로(M.A. Eaton)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한편 주석가 위클리프(Wycliffe)는 본절이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자의적 노력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 만물의 생성 소멸과 존재 법칙 및 인생의 모든 길흉화복을
주권적인 섭리로써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피조물이 반박하거나 대항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사 45:9;46:10;롬 9:20 참조). 또한 이말 속에는 참된 낙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맥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6: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 유익하랴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키'( )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있음음 암시한다. 여기서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데바림'( )으로서 대략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1) 개역 성경처럼 '일(사건)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Hengstenberg, Ginsburg). 영역본 KJV도 이를 지지한다. (2) '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M.A. Eaton, G.A. Barton). 이를 지지하는 영역본들로는 NIV, RSV, NASB등이며, 70인역(LXX)또 '말들'( , 로고이)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이 '말들'은 10절에서 암시되어지는 바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다투는 무익한 변론의 말들을 뜻한다 하겠다.
그러나 (2)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에는 후기 연대설에 근거하여 본서의 내용이 구약 시대 말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및 엣세네파 등이 인생의 예정된 운명과 그로 인한 인간의 행동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토론들(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행동 중 일부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운명에 의해 또 다른 부분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모든 해동들이 하나님의 예정이나 작정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그리고 엣세네파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의한 것으로 본다, Josephus)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Delitzsch, G.A. Barton) 일반적으로 본서의 저작 연대가 솔로몬 시대라고 보는 바, 이와 같은 논리 비약적인 주장은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아무튼 본절의 의미는 앞절과 연관시켜 볼 때,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생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약하여 스스로 행하는 것들은 전혀 무익하고 오히려 더욱 헛되게 함을 암시한다.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 - 전도자가 인생을 이와같이 규정한 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 정죄되고 사망 가운데 거하여(롬 5:16-21) 일평생을 헛된 수고와 근심 가운데서 보내기 때문이다(1:3;2:23).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 생활을 하나 하는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고후 5:16,17;빌 3:21;벧전1:1;2:11).
그림자 같이 보내는 - '그림자'란 실체의 허상으로서 머물지 않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생의 날이 빨리 사라져 지나가는 것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대상 29:15;욥 8:9;14:2;시 102:11;144:4 참조).
그 신후(身後)에 - '신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라'( )는 '뒤에'(후에)란 뜻인데, (1) 죽음 후를 말하는 것인지(Delitzsch) (2) 단순히 알지 못하는 미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문맥상 (1)이 더 타당한 듯 보인다. 아무튼 본절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 무지하고 연약하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함으롯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분을 거약하고는 결코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하겠다.
한편 신약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안개에다 비유했다(약 4:14).
@장코뱅 야고보서가 신약의 지혜서로 분류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호크마 주석>
헛되고 헛되며 ... 헛되도다 - '헛되고'의 히브리어 '헤벧'( )은 '숨', '증기', '공허함', '속이 텅빔' 등을 뜻한다. 그리고 '하벧 하벧림'( , 헛되고 헛되며)은 문자적으로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다. 이것은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이와 같은 관용구적인 표현은 이외에도 '지성소'(the holy of holies, 출 26:33), '아가'(song of songs, 아 1:1), '만왕의 왕'(King of kings, 계 19:16), '만주의 주'(Lord of lords, 계 19:16) 등이 있다. 한편 본절에서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1:16) 부유하며(2:4-8), 수많은 첩들을 둔 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한때 이방 여인과 연락(宴樂)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낀 자로서 이를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전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호크마 주석>
전도자가 가로되 ... 헛되도다 - 이는 전도자가 그의 말을 귀결짓는 내용으로서 그가 처음 본서의 서두에(1:2) 시작했던 말을 반복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은 그의 말을 종합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본절이 본서 전체의 내용을 귀결짓는 부분인지 아니면 구결 부분의 시작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나뉘인다. 딘(W.J. Deane)은 본서 전체의 문맥상 전자를 취한다.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9절이 '와우'( , 그리고)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후자를 취하기도 한다.
좋은 설명을 첨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향방을 정확히 알고 계시며 허무하지 않고 복되게 살게 만들어 주신다고 믿으며, 늘 의지합니다.
아멘!
아멘22
해 아래서의 모든 인생이 헛될 뿐이므로 인간은 하나님 없는 공허함을 버리고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면서 참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전도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슈라이너도 그런 의미를 강조하고 있네요.
인생이 무엇인가 하고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들,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는 증거이니 전도서에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