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7월 말,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백화점과 마트에서는 바캉스 용품 대전이 열리고 덩달아 사람들의 마음도 날씨처럼 달아오른다. 수영복을 고르고 밀짚모자를 써 보고 야자수 무늬가 이국적인 롱 원피스를 쓰다듬어 본다. 편하게 신을 샌들을 신어보고 달아오른 태양을 비켜 갈 진한 선글라스도 고른다. 여행 준비가 반쯤 완성된다. 나머지는 잔뜩 부푼 마음이 차지한다. 여행 가방은 사각의 애드벌룬이 되어 둥둥 마음을 띄우고 몸보다 앞서 여행지에 도착한다.
작년 구월 초,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여행을 강행했다. 베트남의 다낭과 호이안을 친구와 둘이 떠났다. 항상 단체여행으로 휩쓸려 다니다 구글 지도를 찾아가며 여행하려니 두렵기도 했지만 짜릿한 기쁨이었다. 골목길을 헤매다 되돌아 나오고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선한 눈동자들과 미소로 인사하는 동안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런저런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쁨도 찾을 수 있었다. 거리를 헤매고 누군가가 해주는 밥을 먹고, 약간의 피곤함에 젖어도 좋다. 풍경이 그림 같은 숙소, 깨끗이 정돈된 하얀 시트 속에 몸을 맡길 때면 오늘 하루 단 한 번도 집이나 남편, 아이들이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함이 아닌 충만함으로 다가왔다. 자신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본연의 나를 마주친 것이어서 당혹스럽지만 싫지 않은 순간이 된다.
여름이 끝나버린 미케비치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분홍빛 나염 수영복을 입고 헤엄쳤다. 친구는 들어오지 않고 서서 신기한 장면을 보듯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주었다. 잠영을 하며 한 마리 고래가 되어 꼬리 치듯 두 발을 굴렀고 물풀이 되어 두 팔을 춤추듯 흔들었다. 물속은 사람을 자유롭게 했다. 파도에 들썩이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고 드넓은 바다는 내 마음이었다. 유년의 강물 같은 이국의 바다에서 아이 마음 하나를 건져 올렸다. 검어진 살결보다 건강해진 영혼을 만나 ‘신나다’라는 단어를 재발견하는 날이었다.
낯선 곳,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은 자유의 땅이다. 얇은 어깨끈만 달린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쉰이 넘어도 당당히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모자를 좋아해 잔뜩 사 놓았지만, 평소 시선이 집중될까 잘 쓰고 다니지 못하다가 서너 개의 모자를 번갈아 써가며 잔뜩 멋을 부렸다. 정장 구두에 갖추어진 옷차림으로 포장된 나를 보여 주다가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편한 차림새로 야시장을 돌아다니고 사탕수수 주스를 홀짝였다. 거리를 느긋이 걷는 것은, 내 몸이 아니라 영혼이었다.
여행을 가면 항상 의무감에 시달렸다. 외국을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숙소에 돌아온 저녁이면 뭔가 기록해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중국에 가면 가옥구조 문화, 일본에서는 절이나 신사의 내력을 녹음하고 캄보디아에서 내전의 잔혹함을 들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남들은 기행수필을 잘도 써냈지만 나는 부담감이 과했는지 기행문조차 적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나힐에서 놀이기구를 타며 괴성을 지르고 안방 비치에서 파인애플 주스를 들고 앉아 바구니 배를 쳐다보고 앉은 무한한 평화, 미케비치에서 물에 들어가 누렸던 안온한 기분은 한 해가 지나도 몸속에서 떠다녔다. 몸도 정신도 걷고 방랑하고 빠져드는 그대로 내 버려둔 여행. 이런 것이 최고의 여행이 된 것이다.
언젠가 읽은『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이자 두목이라 불리는 남자의 모습이 그동안 나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원리원칙에 얽매이면서도 달려가야 할 때는 도망치고 숨어버리는 비겁한 사람, 생각만 많고, 실천하지 못하는, 보여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한 어리석은 사람, 조르바는 질그릇을 만들려면 물레를 돌려야 하는데 왼손 검지가 자꾸 걸리적거린다며 도끼로 내리쳐 잘라버렸다 하지 않던가. 도끼질까지야 할 수 없지만, 체면이나 겉치레 같은 포장지는 이제 버려야지 다짐해 본다. 그것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유인 조르바처럼 거리를 흥청거리며 걷고 싶고,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바의 음악을 들으며 산투리 대신 발장단이라도 맞추며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다. 혼자 걷고 싶다. 둘이라도, 여럿이라도 좋겠다. 때로는 고요함을 즐기고 때로는 왁자함에 빠지며 가끔은 적막에 젖고도 싶다. 이제 몸이 원하는 일, 마음이 바라는 대로 살고자 한다. 내 안의 조르바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자주 갈 수 없는 여행을 꿈꾼다. 가을에 떠나는 가을 여행도 좋고 가을에 떠나는 여름 여행도 좋다. 호젓한 눈 쌓인 자작나무 숲도 좋다. 야생화 가득한 들판도 좋다. 조용한 뒷골목도 발 디딜 틈 없는 도시의 번화가도 좋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 나의 언어를 듣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끼이기만 하면 좋다. 그 바다와 그 숲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으로 벌써 충만해진다. ‘떠남’은 위축되었던 내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길이었고 더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유쾌하게 웃고 흥얼대며 낯선 길을 걷는 나를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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