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철학
1) 딜 타 이
헤겔의 범논리주의와 신칸트주의자들 그리고 실증주의자들에 있어서 철학은 다만 논리적 체계성을 지닌 철학이었고 동시에 강단의 철학이었다. 이들 철학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체계적 완전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대중들의 관심은 삶의 철학으로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삶의 철학은 20세기초를 지배했던 기계론적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표면에만 붙어 있는 사고, 수학적-합리주의적 사고, 정적인 사고에 반대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적인 것, 체험적 인 것, 역동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제 이들에게 중심이 되는 개념은 이념이나 논리나 사유작용이 아니라 바로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삶 자체이다.
딜타이(W. Dilthey, 1833~1911)는 이미 낡은 시기에 속하지만 그의 영향은 제 1차 대전 후에 전개되었다. 그 역시 역사가로서 그 당시를 지배했던 실증주의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칸트의 선험적 계기도 받아 들인다. 삶의 현상들을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객관화하려 했던 실증주의적 사고는 결국 삶 자체를 무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고,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에 대해 가지는 고유성을 차단시켜 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딜타이가 그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정신과학에 남겨 준 유산은 바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설명’과 ‘이해’의 방법으로 이원화하였다는 점이다.
딜타이의 중심 문제는 삶과 삶의 이해(Verstehen)이다. 삶은 그에 있어서 목적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자기완결적 통일체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Erklaren)하려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심리학에서 ‘이해’라는 단어를 받아 들인다. 그는 ‘설명하는’ 심리학에 반대했다. 이 심리학은 자연과학과 그 보편화해 나가는 도식적인 방법에 바탕하고 있어, 바로 살아 있는 영혼에 고유한 것, 즉 삶의 일회성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가 자기완결적 통일체이고 그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별적 대상으로서 자연과학적 방식에 의해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기계적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연상심리학을 반대하고 심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구조연관, 즉 심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체험연관에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역사가로서의 딜타이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 자체를 맹목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고 역사의 문제를 삶의 이해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해석학(Hermeneutik)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구조에 들어 맞는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 (Typus)이다. 언어, 종교, 국가 등은 비교를 하는 방법에 의해, 변화의 유형, 발전의 방향, 규칙 등을 알려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계관에 있어서도 이와 똑 같은 것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사(精神史)의 여러 현상들 역시 일정한 유형, 즉 삶의 형식으로서 모든 개별적 삶의 현상들을 꿰뚫고 흐르는 보편적 형식들에 바탕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개별적 삶의 하나의 일정한 형식 하에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딜타이가 헤겔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적 사고에 의해 매몰되어 버린 인간의 구체적 삶과 역사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다시 꺼집어 내려는 노력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지만, 그가 발견해낸 것은 개별적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 뿐이었다. 헤겔에게는 하나의 절대자가 있었지만, 딜타이에게는 상대주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딜타이가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버리진 못했지만, 정신과학적인 이해의 방법을 자연과학적인 설명의 방법과 구분하여 실증주의의 유령을 역사 속에서 몰아내려 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점은 이후의 역사철학이나 학문의 방법론적 논의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