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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6월 10일 오후 1시 30분경 분당구 서현동 A 아파트의 한 가정집에서 시커먼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발견한 아파트 경비원은 분당소방서에 화재신고를 했고 다행히 불은 내부 집기만을 태운 채 20여 분 만에 진화됐다.
화재 진압 후 집 안을 살펴보던 경찰과 소방관들은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검게 그을린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죽음 뒤에 패륜살인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것이 5년 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지게 했던 ‘서현동 패륜살인 사건’의 서막이었다.
유학에 실패해 홀대를 받아오던 엘리트 가문의 아들이 명문대 교수인 아버지와 할머니를 차례로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다.
분당경찰서 근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기지방경찰청 나원오 폭력계장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의 잔상이 또렷하다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사건 발생 하루 만에 밝혀진 범인은 뜻밖에도 피살된 교수의 맏아들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가 평소 아버지에게 대들기는커녕 반항 한 번 못해본 온순한 청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있는 집’ 아들로 남부러울 것 없던 청년이 졸지에 살인범이 된 사연을 알고 더없이 착잡했던 기억이 난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나 계장의 설명.
화재사건으로 알고 현장에 갔는데 거실에 두 구의 사체가 있었다.
숨진 사람은 집주인인 이 아무개 씨(당시 48세)와 그의 모친(당시 71세)이었다.
그다지 큰 불이 아니었음에도 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의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사체에서는 예리한 흉기에 여러 차례 찔린 상흔이 발견됐다.
수사경험상 이것은 분명 살인사건이었다.
수사팀은 누군가 새벽 2~3시경 두 사람을 살해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그날 오후 불을 지른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장조사 결과 수사팀은 이 사건을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내부인이나 면식범의 소행으로 판단했다.
현관문이 정상적으로 잠겨 있었고 집에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집 내부를 뒤진 흔적도 없고 집 안에 수억 원이 들어 있는 통장과 현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돈을 노린 강도의 소행은 아니라는 데 무게가 실렸다.
특히 수사팀은 사건 당일 새벽 2시께 이 씨의 집에서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주민의 진술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수사팀은 우선 이 씨의 가족관계 및 집안 배경에 주목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B 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 씨는 그야말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그의 모친 역시 고령의 나이에도 교육 분야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 이 씨의 집안 역시 교수를 많이 배출한 전형적인 교수 가문으로 사회적인 지위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이 씨의 부인 또한 명문여대 출신으로 사건 당시 유학 중인 자녀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해외로 출국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 씨는 서현동 아파트에서 자신의 어머니, 장남인 이영민(가명·당시 22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의 가족이나 최측근 인물이 가장 먼저 수사선상에 오르게 마련.
수사팀 역시 함께 살던 세 식구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 씨의 장남 이영민을 첫 번째 조사대상으로 올렸다.
다음은 나 계장의 회고.
그날 오후 이영민을 불러들였다.
또래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으레 하는 수사절차에 따라 우리는 이영민에게 시간대별 행적에 대해 질문했다.
이영민은 수사팀이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새벽시간대에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영민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강남에 있는 친구 집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영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김영민은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한 눈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사건 발생 당시 친구 집에 있었다는 이영민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이어지는 나 계장의 얘기.
이영민의 친구가 경찰서에 같이 왔더라. 역시 유학생으로 모 대학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이영민의 친구는 이영민이 사건 발생 시각에 자신의 집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뭔가 어색했다. 나는 그를 이영민과 다른 장소에서 분리해서 조사했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일치했지만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말이 맞지 않았다. 억지로 입을 맞추다보니 여러모로 어설펐던 거다. 나는 ‘이영민이 엄청나게 큰 사건에 연루돼 있다. 진실을 말해 달라’고 그를 설득했고 마침내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가 계속될수록 이영민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진술을 번복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수사팀은 사건 다음날 이영민으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 받을 수 있었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사건 직전 이영민은 아버지 이 씨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와 술을 먹고 들어온 이영민을 이 씨가 심하게 몰아붙인 것이다. 한밤중에 찍 소리 한 번 못하고 몇 시간에 걸쳐 아버지의 온갖 꾸중을 들은 이영민은 방으로 돌아와서 혼자 분을 삭였다. 하지만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좀처럼 감정이 제어되지 않았다.
‘정말 갑갑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버지만 없으면 살 것 같은데….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당시 이영민은 방에 틀어박혀 밤새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결국 이영민은 무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잠든 새벽 2시 반경 한참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거실로 나왔다. 다음은 나 계장의 설명.
“이영민은 거실 벽에 세워져 있던 스키 폴대 끝에 칼을 묶었다. 마치 창과 같은 흉기가 만들어진 셈이다. 아버지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간 이영민은 아버지를 찔렀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나. 더구나 창처럼 생긴 흉기로 멀리서 찔렀으니 단번에 숨이 끊어질 리 만무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는커녕 ‘야, 야 너 왜 이래’ 하며 반항하자 이영민은 겁이 덜컥 난 거다. 당황한 그는 거의 패닉상태에서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기다란 흉기를 손수 제작한 이유에 대해 이영민은 ‘피가 튈까봐 두려웠다. 가까이서 찌를 자신이 없었다’고 대답하더라.”
하지만 이영민의 범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씨의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깬 할머니는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아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범행현장을 들킨 이영민에게는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시급했다. 결국 이영민은 놀라 얼어붙어 있는 할머니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범행 후 이영민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 믿기지 않았다. 평소 아버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자신이 이처럼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니….
“이영민은 범행을 저지른 그날 오전 8시에 여자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다 정오경 귀가했다. 집 안은 범행 당시 상황 그대로였다. 이영민의 눈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체가 다가왔다. 두려움에 떨던 이영민은 불을 질러 화재사고로 범행을 은폐하기로 마음먹는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떨어진 여러 곳의 주유소를 돌아다니며 휘발유를 구입해온 시각이 오후 1시경. 이영민은 사체와 집 안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흉기와 피 묻은 옷가지 등을 챙겨서 서둘러 집에서 빠져나왔다. 이영민은 흉기가 든 가방을 집 근처 야산에 버리고 강남에 사는 친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친구에게 ‘새벽 2~3시경 네 집에 있었다고 해달라’며 알리바이 증언을 부탁했다.”
성급하게 짜 맞춘 알리바이는 어설펐고 노련한 수사팀의 추궁 앞에서 금세 탄로가 나고 만다. 한 집안의 장남이 아버지와 할머니를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에 수사팀원들은 충격과 동시에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이영민에게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이영민은 이 씨가 유학생활을 하던 중 미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과는 완전히 교육환경이 다른 국내 학교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틀에 박힌 입시위주의 수업은 이영민에게 고역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영민은 일찌감치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자격을 땄다. 그리고 1997년경 캐나다로 건너간 그는 이듬해 그곳의 한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이영민에 대한 아버지 이 씨의 집중적인 ‘타박’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으로 보인다. 다음은 나 계장의 설명.
“일류 코스만을 밟아온 아버지 이 씨의 눈에 이런 아들이 눈에 찰 리 만무했다. 이영민은 학업적인 면에서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못난’ 아들이었다. 특히 이 씨는 장남인 이영민이 제대로 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반면 이영민의 두 동생들은 공부를 잘했다. ‘제대로 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두 동생과 비교되는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만도 속상한데 명망 높은 학자 집안에서 검정고시라니…. 아버지로서는 또 다시 외국으로 가서도 ‘허접한’ 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더없이 못마땅했을 거다. 원래 공부 잘 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법 아닌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 일류학자로 명성을 쌓아온 아버지 역시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불만은 끊임없는 잔소리와 꾸중으로 분출됐다고 한다.”
결국 보다 못해 이 씨는 어정쩡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이영민을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이것은 또 다시 엄한 아버지의 직접 통제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영민으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영민에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무조건 옳은 것이며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뇌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영민은 어쩔 수 없이 1998년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2000년 3월 S대에 특례입학을 한다.
하지만 이영민은 국내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강제로 이뤄진 한국행은 이영민에게 더할 나위없는 고통이었다. 실제로 이영민의 진술조서에는 “억지로 나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아버지가 야속했고 현실이 정말 답답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한국과 외국을 왔다갔다 한 탓에 국내에 친구도 없었다. 친구라고 해봤자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국내에 머물고 있는 유학생이나 교환학생 정도였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족한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날로 심해졌고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를 향한 이영민의 반감은 더욱 커져갔다.
더욱이 사건이 벌어진 날은 이영민이 논산훈련소 입대를 딱 열흘 앞둔 날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영민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이 씨는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 된다’며 이영민의 입대를 종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굳이 군대에 보내려는 원칙주의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범행에 단초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두고 집에 늦게 귀가하는 이영민을 이 씨는 용납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건 당일도 이 씨는 술을 마시고 오후 11시 반께 귀가한 이영민을 불러다 새벽까지 심하게 나무랐고 실제로 이 일은 이영민의 범행에 불씨를 당기고 만다.
그렇다면 이영민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음은 나 계장의 설명.
“이영민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사고를 칠 애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영민은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반항 한 번 못해봤다고 하더라. 이영민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사과정에서도 차분하고 담담했다. 이영민의 범행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동안 마음 깊이 묵혀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해 끔찍한 범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이영민은 ‘아버지는 더할 수 없이 높은 벽이었다’ ‘아버지만 없으면 살 것 같았다’ ‘아버지가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에게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살인)뿐이었다는 것이 이영민의 항변 아닌 ‘항변’이었다.”
나 계장은 한 가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 사건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부자간 의사소통이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고 보면 된다. 주목할 점은 갈등을 완화시켜줄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바람막이가 돼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답답함과 따라갈 수 없는 기대수준에 헐떡거리던 아들 간에는 항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기류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영민의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오열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