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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잉 워십,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 기독교세계관 학술동역회 요청으로 매거진 <월드뷰> 9월호에 핫이슈였던 '디제잉 워십'에 관한 글을 기획칼럼으로 올렸습니다. <필자의 말>
1.
최근 한 대학생 선교단체의 오프닝 집회에서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연주한 공연으로 ‘디제잉 워십’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신나는 비트와 현란한 조명, 그리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사운드가 요즘 유행하는 대학축제나 홍대클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참여한 학생들은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신나는 비트에 맞춰 열광했고 이후 ‘이러한 집회가 과연 예배일 수 있는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물론 해당 선교단체는 논란이 된 ‘디제잉 워십’이 예배가 아닌 인트로 성격의 오프닝 공연의 일환이었기에 문제를 확대해석하지 말기를 주문했지만, 예배인도자로 자처한 DJ 본인은 여전히 예배의 시도로 진행하였다고 진술했기에 이번 논란은 여전히 ‘예배’에 대한 핫이슈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디제잉 워십’ 논란은 1980년대의 ‘드럼과 일렉트릭악기 사용‘ 논란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 있었던 구자억 목사의 트로트 찬양 논란 역시 이러한 맥락에 기초해 있다. 예배음악에서의 악기 사용과 장르활용의 문제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뜨거운 감자다. 사실, 이러한 논란의 이면에는 ‘성속 이원론’이라는 세계관적 주제가 자리하고 있다. 근본주의, 경건주의, 신비주의, 세대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관념론적인 성속 이원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성(聖)과 속(俗)을 분리하고 영(靈)과 육(肉)을 나누는 관념론적인 개인경건 위주의 신앙은 결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왜곡시켰다. 일찍이 한국교회는 <낮은울타리>의 신상언 대표와 같은 문화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 라는 입장이었다. 대중문화는 세속적인 것이며 사탄이 장악한 것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대중문화를 경계하고 사용하는데 있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디제잉 워십 논란’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의 수용적인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이번 논란의 당사자인 DJ의 입장으로, 세속적인 음악과 거룩한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세속문화를 기독교가 적대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사탄에게 빼앗긴 음악이라는 주장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니 타락한 문화를 구속하고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가치중립적인 세속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오히려 기독교를 갱신하고 개혁하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EDM을 즐기면서 그것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CCM 그룹 <좋은씨앗>의 멤버였던 미국 리버티 신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유정 목사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많은 문화사역자들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음악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다만, 우리의 할 일은 사탄에게 빼앗긴 음악을 구속하여 원래의 목적에 따라 회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예수의 십자가로 구속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책임이자 문화변혁적 사명이다. ‘디제잉 워십’은 장르에 불과할 뿐이며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에 대해서 무분별한 비난을 가해서는 안 된다.”
2.
디제잉 워십 논란에서 EDM의 수용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음악과 장르는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가치중립적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세대 간의 차이,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되어 있으며 단지 표현방식에 대한 선호도와 관련되어 있을 뿐 어떠한 가치개입도 불가하다는 것이다. 어른 세대가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젊은 세대는 EDM을 즐길 뿐이다. 한 사람이 발라드를 좋아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은 헤비메탈을 좋아한다. 이것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다양성의 문제일 뿐이다. 일정부분 이 말은 맞다. 기본적으로 장르는 형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과연 장르가 형식적 의미만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아무데나 사용할 수 있을까? 특정한 음악장르와 그 장르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예컨대 에로문학(Erotica)은 문학의 특정 장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 간의 애정과 성적인 사랑을 나타낸 문학이다. 에로문학이라는 장르는 인간 심연의 사랑과 애정을 표출하는 목적이 있다는 얘기다. EDM 역시 대부분 클럽이나 파티, 축제 등의 엔터테인먼트의 장에서 인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분출하기 위해 고안된 장르이다. 그러하기에 이에 적합한 표현방식, 신나는 비트와 현란한 사이키 조명, 감정을 고조시키는 강력한 전자사운드가 사용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르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형식이나 그 가운데 장르가 목적하고 지향하는 바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한 가지 더, 패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운동할 때 운동복을 입고 수영할 때 비키니를 입는다. 하지만 운동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가지 않으며 비키니를 입고 예배를 드리러 가지 않는다. 운동복과 비키니는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며 가치판단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패션의 종류(장르)가 가진 목적과 부합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새로운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DM 역시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음악으로 사용될 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배는 엄위로우신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과 지식에 근거해 경건한 감정으로 고양되어야 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과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거룩한 정서가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자극하고 고양시키는 방식은 예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더욱이 유념해야할 것은 이러한 장르로서의 음악이 인간 심성의 타락한 요소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과연 ‘그냥 음악’일까? ‘그냥 장르’일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구조와 그 구조가 지향하는 방향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음악이라는 구조가 구성하는 멜로디와 화음, 리듬은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악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할 수도 있지만 탐욕적인 인간의 관능적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음악 역시 인간의 정신적 산물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EDM의 예배음악 사용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형식으로서의 장르사용의 차원을 넘어서서 바라봐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EDM이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목적도 문제가 되지만 EDM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정황, 문화 역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단순히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나이브한 생각이다. 음악은 인간정신의 산물로서 메시지와 내용, 삶의 정황, 문화를 포함한다.
EDM이 그동안 추구해 왔던 목적이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목적의 세속적인 음악사용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때 그러한 문화와 삶의 정황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이들이 과연 클럽과 파티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넘어서서 경건하게 고양된 거룩한 정서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단지 그 장르에 ‘익숙’해 있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찬양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장르에 대한 옛 경험이 올바른 찬양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인이 되지 않을까?
3.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EDM의 예배음악 사용이 은사주의적인 이머징 교회의 출현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트 기독교와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모더니티를 극복하고자 시도된 대안교회로서의 이머징 교회는 철저하게 성속의 분리를 거부하며 ‘온 삶(whole life) 영성’을 추구했다. 모더니티 교회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고 관념론적인 이원론에 천착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러한 이들의 시도는 몸과 마음을 통합하는 예배를 추구하면서 의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고대 영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몸’을 예배 이벤트 속으로 가져오면서 EDM과 같은 대중문화를 예배의 한 요소로 수용한 것이다. 이머징 교회에서 대중문화는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는 중요한 좌소(座所)가 되었으며, 클럽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며, 춤이라는 열광적인 방식은 하나님을 ‘몸’으로서 예배하는 중요한 방식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러한 예배의 장소는 불신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감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머징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는 체험이 이끄는 기독교다. 포스트모던시대의 교회전략으로서의 이머징 교회는 과거 구도자 중심의 예배보다 더 공격적인 형태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각을 자극시켜 줄 체험들을 추구한다. 은사주의적인 이머징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똑같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격식이 없는 예배를 추구하며 예배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갈망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과거의 예전과 새로운 예배 및 음악스타일과의 통합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예배방식을 창조하려 한다. 하지만 성속 분리와 관념론적 이원론을 지나치게 거부한 나머지 이들은 말씀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오류에 빠졌으며 감각적 체험을 우선한 나머지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세속적인 문화를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우를 범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를 무시하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마이클 호튼은 포스트모던시대에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소비자 중심의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 복음주의의 문제점은 바로 인간중심적인 접근에 있는 것이다. 바로 자아중심의 기독교다. 데이빗 웰스가 지적했듯이 특히나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대중사회에서 인간은 자아도취와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과거 수용되어져 오던 보편적인 진리와 규범은 사라지고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자기기준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만족을 위하여 행하는 신(新) 사사시대인 셈이다.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다. 성경계시가 실종된 현실에서 기독교는 대중문화와 심리학으로 대체되었고 인간 본위의 체험 중심적인 신앙으로 점차 변모해 가고 있다.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는 철저하게 자기 사랑에만 집중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자기 존중과 자기 만족의 복음으로 전락시켰다.
4.
과거 한국교회가 가져왔던 성속 이원론적인 경건주의 신앙은 오늘날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속 이원론을 경계해야할 시점이 아니다. 오히려 성속 이원론이 지나간 자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속주의라는 괴물이 싸움의 대상이다. 세상문화와 단절하며 세속적인 삶을 멀리하려는 분리주의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인 세계관은 한국교회 가운데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들은 오히려 개별적이거나 마이너리티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아 중심적이며 현세적 가치를 강조하는 세속주의와 맞닥뜨리고 있다. EDM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바로 이러한 세속주의와 상관이 있다. 바른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상실한 한국교회에는 세속화의 물결이 이미 몰려와 있다. 그래도 과거에는 경건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던 반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잘못된 성속 이원론을 극복해야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세상과 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불신자들의 삶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속 이원론을 거부하고 문화변혁을 외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탄이 장악한 세속문화를 십자가로 구속하자는 문화변혁적 사명은 일견 그 동기와 진정성 차원에서 공감할 만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변혁을 외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오히려 선한 구조와 그릇된 방향을 구분하지 못하여 죄악된 요소를 쉽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변혁의 노력이 세상의 가치를 교회 내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결과 혼합주의로 화(化)하는 형국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신, 불신을 막론하고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는 늘 인간의 타락한 죄성과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헤르만 바빙크가 말했듯이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할 세상 속에서의 문화적 소명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화변혁적 사명에 앞서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타락에 대해 인식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죄와의 반립(反立, antithesis)에 대해 더욱 민감해야 한다. 자칫 무분별한 문화변혁의 시도가 세상의 죄악된 요소를 허용하고, 오히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세속의 가치를 가져오는 세속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5.
예술과 창조성의 회복을 자신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모토로 삼았던 프란시스 쉐퍼의 아들 프랭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예술 활동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주요 요소는 바로 ‘죄’라고 하였다.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인간의 모든 예술 활동의 핵심에는 바로 ‘성결’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디제잉 워십 논란’과 함께 야기된 예배음악에 대한 우리의 고민 가운데서 우리가 유념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각 그리스도인 개인의 예배로서의 모든 삶 가운데서 ‘죄’와 ‘성결’에 관한 고민이 필수적이라면 교회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예배’와 관련해서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예배자의 진정성이라는 명분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세속적인 음악적 요소를 무조건적으로 도입할 수는 없다. 문화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다. 음악 역시 죄와 타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히 하나의 장르라는 형식논리를 넘어 디제잉 워십을 둘러싼 사회, 문화, 종교적 차원 등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본질은 무엇이고 또한 비본질은 무엇인가? 디제잉 워십을 둘러싼 나이브한 생각들과 EDM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은 자칫 교회를 허무는 심각한 여우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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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헌 /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총무로 사역 중이며, 합동신학대학원(M. Div.)과 고려신학대학원(기독교 윤리학, S.T.M)을 졸업하고 지금은 고신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기독교 윤리학, Ph. D.)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사회윤리에 관하여 논문을 쓰고 있다. 현대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많은 관심이 있으며 기독교 세계관 아카데미와 기독교 윤리 연구소를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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