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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익주와 형주를 지배한다.
둘째, 오와 굳은 동맹을 맺고 동쪽의 우환을 없앤다.
셋째, 오의 도움을 얻어 위를 견제하고, 익주와 형주 양쪽에서 군을 이끌고 위를 압박한다.
넷째, 위에 변고가 일어날 경우 이를 노려 진군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 가장 중요했던 형주는 관우의 사망과 함께 물 건너 가버리게 되고, 이 때문에 발발한 이릉 전투까지의 과정에서 촉한의 주요인재와 병력 등이 쓸려나가게 된다. 거기다 맹달이 다스리는 상용마저 조위에 투항하고[46], 이릉 전투로 오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제갈량이 생각했던 위나라 공략의 모든 전제 조건이 무너지게 된다.[47] 이에 제갈량은 오와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맹달의 회유를 시도한다. 비록 형주는 완전히 촉한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상용만 되찾아도 상용을 통해서 양방향 압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는 성공했어도, 정작 맹달이 우유부단하여 촉에 투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마의에게 걸려 속전속결로 패망하고 만다. 결국, 두 방향으로 위를 압박해 진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던 제갈량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상용을 놓치면서 제갈량의 북벌이 한중 북부 방면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고[48][49] 위도 그쪽을 중심으로 수비를 하게 됐는데 체급 차이가 큰 촉이 공격 루트마저 한정되어 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시행한 제갈량의 북벌의 최우선적인 전략적 목적은 관중과 농서를 얻는 것이었다. 정사에 수록된 사마소의 언급에 따르면 제갈량의 북벌 목적은 농서의 서쪽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한다. 이 지역들을 얻는다면 촉은 위처럼 기병 육성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고대에 기병은 오늘날 전차에 비유될 수 있는 고급 병종인데다가, 위는 수만의 정예기병을 중심으로 대촉 전담인 정촉군(정촉호군)을 편성하고 북벌 때마다 활용했다. 팔진도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도 기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목적이니 제갈량도 확실한 기병 육성을 할 여건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서는 이 기병을 육성하는데 탁월한 지역이었다.
물론 최종 목적은 후한의 국토 회복으로 볼 수도 있다. 촉은 유비 이래 한실의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비록 많은 이들이 한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은 다수 존재했다. 제갈량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조운을 비롯한 다수 무장과 유비가 입촉할 때까지 그를 따랐던 인재 대부분이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었던 이들이었다. 거기다 조위 내에서도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촉의 한나라 부흥의 방침은 유비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이념은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3군이 단숨에 촉에 호응하고 이후 관중의 민심이 촉에 쏠리는 등의 반응으로 어느 정도 구체화된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는 한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자기 세대에 한나라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이용해서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위나라를 점령할 수는 없어도 옹주와 양주를 점령해서 힘의 균형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위의 국력이 압도적이라도, 간신히 복구한, 가장 생산력이 좋으면서, 후한 말 전란의 여파가 가장 오래간 옹, 양이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균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거기에 관중은 발전한 지역이었고 장안만 해도 충분히 교역의 중심 지역인 동시에 옛 한나라의 수도라는 정치적 입지까지 더해줄 수 있었다. 물론 관중과 장안은 그 때까지도 삼보의 난으로 인해 입은 피해가 채 복구되지 않았지만, 관중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자체는 여전했다.
그래서 촉한은 이 지역 주민들, 이민족들과 경제,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지역을 얻으면 한나라의 옛 중심지인 관중+파촉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경제, 인적 자원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진출과 물자 보급이 용이해지고 파촉에서부터 지속적인 무기 개발과 새로운 진법의 도입으로 위나라와 맞서는 게 가능했던 촉군에 군마 등 군수 물자를 지급해 전투력을 더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또 지리적인 이점도 있다. 동쪽은 장안 인근 관문을 통해 방어가 쉽고 반대로 조위는 방어선 길이가 늘어난다. 관중과 익주의 생산력으로 동관을 틀어막는다면 훨씬 적은 병력으로 나라의 유지만큼은 너무나 쉬워진다. 여기에 옹주 양주의 물산과 인구를 확실히 손에 넣고 서쪽으로는 외부 세력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가 열린다. 위나라가 소유한 중요 요지를 타격하고 2개 주를 위나라에서 갈라 촉에 소속시키는 것 이상의 시너지가 가능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정세야 그때 그때 변하는 것이니 버티다가 실제 관중을 근거지로 했던 다른 나라들처럼 천하를 통일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전국시대의 진(秦)이 그러했고, 한의 시조인 유방도 이 관중과 파촉을 근거지로 해서 초한대전 동안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다. 즉, 옹양주 겸병 그 자체가 촉한의 천하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했다면 촉한이 잡을 수 있는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셈인 것이다.
또 당시 양주 지방은 마초 및 양주 군벌들과 조조 세력의 전투가 214년까지 이어지면서 215년 이후에야 위의 행정 구역으로 들어왔다. 이후에도 반란이 이어져 당시 옹주자사였던 장기가 애를 먹었으나 그래도 겨우겨우 대충 반란은 안정시켰고. 이후 222년 옹주자사 대리로 부임한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하면서 나름 행정력을 갖춰가게 되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오랜 내부의 전란으로 내부의 국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으며 촉한이 북벌을 진행할 때마다 내부 반란+이민족들의 이탈 같은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여 단일한 국력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위가 이전 후한 시기 9주의 국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모르되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아직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날 때를 노려 위가 완전히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해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제갈량의 계책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실제로 제갈량의 융중대 조건은 국력을 키우는 상태에서 위에 내분이 있을 때 치고 올라가자는게 기본적인 전략이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위를 치기 위해선 위가 어느 정도 분열된 것을 상정했다는 것인 만큼 당초 계획이 상당히 무너진 상황에서도 위나라의 분열과 행정력 장악 부족 상황에선 시도해 볼 만했다. 이 당시 촉한의 입장에서는 북벌이 더 늦어지다가 곽회가 이 지역에 완전히 행정력을 미치고 촉 위 경계를 확정할 정도의 방어력을 갖춘다면 진짜 완전히 익주에 갇히게 되어 중과부적이 된다. 익주가 아무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 해도 힘에서 절대적인 격차가 난다면 100% 지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위가 가만히 있다면 몰라도 위 역시 목적은 다른 곳에 진공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원자(袁子)에서도 제갈량의 북벌은 소국의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면 국력 차이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위의 국력은 너무 막강해서 잠자코 있다가는 점점 차이가 벌어져서 언젠가는 위의 침공으로 멸망할 미래밖에 없으므로,[50] 가만히 있기보단 좋든싫든 북벌로 명운을 걸어볼 필요가 있었다. 촉은 중앙 집권과 관료제의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효율적으로 국력을 운용했기 때문에 그나마 위나라와 정면대결을 할 건덕지라도 나왔지, 위가 제대로 내부를 수습하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끌러 올린다면 촉의 열세는 필연이었다.
여기에 질적 우위까지도 위나라의 편이다. 당시 시점에서 촉, 오의 영토는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 교육 같은 부분의 인프라가 위나라에 비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위나라의 영토에는 여러 명문가와 호족들의 기반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남방의 기후, 습도 등으로 촉, 오의 많은 인재들은 병으로 요절했던 반면, 위나라의 인재들은 정말로 오래오래 앉았다. 유비가 전국을 누비면서 긁어모았던 인재들은 하나 둘씩 노환 혹은 부적응으로 죽어가고, 여기에 이릉대전으로 상당수가 전사했거나 위나라에 투항했으니 인재 사정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촉한에 불리하게 된다.
조위와 서진이 조예 이후로 고평릉 사변, 조모 시해, 팔왕의 난, 5호 16국 시대가 차례로 일어나는 역대급 병신국가들이긴 하지만, 위는 이 막대한 페널티를 달고도 촉과 오보다 국력이 강했다. 강유의 북벌 시대까지 이어보면 사마의, 사마부 형제의 관서 진흥책이 성과를 보고 곽회가 계속 관중 지역의 행정력을 확대함으로써 강유가 매우 고전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는데, 강유의 북벌 시기조차 위는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다. 사마씨로 인한 정치 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수춘 3반란, 강유, 왕사 등의 농서의 강저족 회유 등이 있어 그래도 북벌을 해 볼만한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제갈량 죽을 때 까지는 조예가 제정신이었으니 저 막장 사태를 예견했을 리도 없는 제갈량의 경우엔 견제할 필요성을 더 크게 느꼈을 테고.
하지만 북벌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고 촉과 위의 국력차는 제갈량 이후 계속 벌어지게 되어 촉은 위에게 멸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기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안하면 죽는 환경이라 죽으나 사나 북벌을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또 위나라 역시 제갈량 사후 촉한이 침공하지 않자 오히려 대군을 이용해 한중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위나라 역시 언제든지 촉한이 그냥 가만히 있을 경우 막강한 물량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촉한의 북벌은 양국간 주 전장을 촉한 외부인 옹, 양주로 두는 일종의 예방전쟁적인 성격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 기타[편집]6.1. 북벌에 참전한 사람[편집]6.1.1. 촉한[편집]
조운: 관우, 장비와 함께 1세대로 분류되는 노장이지만 실질적인 커리어를 봤을때 일군을 지휘하는 역할보다는 보좌나 군무에 특화되어 있던 인물이다. 1차 북벌 당시 의군인 별동대 지휘관으로서 제갈량이 기산으로 향하는 동안 총사령관 조진의 대군을 묶어뒀다. 실리했다는 표현을 봤을 때 조진군을 잡아두는 주요 임무에는 성공했으나 전투 자체는 패한 것으로 보인다. 마속의 실책으로 퇴각할 때 조진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침착한 지휘로 큰 피해없이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이를 치하한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포상을 내리려 하자 반대한 일화가 유명한 원칙주의자다. 1차 북벌 실패 후 책임을 지고 제갈량과 함께 유일하게 벼슬이 깎였다.[51] 1차 북벌 이후 병사했다.
왕평: 촉한 후기를 대표하는 명장. 문맹이지만 기민하고 노련한 장군으로 가정 전투에 마속의 부장으로 참전했는데 제갈량의 명을 무시하는 마속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장합에게 패해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다른 군은 뿔뿔히 흩어졌으나 왕평이 이끄는 1천 명만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장합을 물러가게 한 후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며 퇴각해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이 공으로 마속이 죽고 제갈량, 조운이 강등되는 와중에 유일하게 승진했으며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는(無當)' 촉한 최강의 정예 부대 오부를 통솔하게 된다. 231년 4차 북벌에선 제갈량이 노성에서 사마의와 교전하는 동안 남쪽에서 오부를 이끌고 위의 명장 장합과 맞붙어 격퇴시켰으며 234년 제갈량 사후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꾸짖음 한번으로 위연의 군사를 흩어버리고 반란을 진압했다. 244년 흥세 전투에선 1천 명을 이끌고 직접 출진해 조상이 이끄는 위의 10만 대군을 각지에서 저지했고 강유, 비의의 요격군과 함께 포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위연: 유비의 사병 출신. 북벌에 나설 때마다 한신이 삼진왕을 토벌하던 고사를 들어 독립 군세를 요구했으나 제갈량이 들어주지 않자 제갈량을 겁쟁이라 부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오만하고 거칠어서 모든 사람이 기피했으나 용맹스럽고 군사들을 잘 훈련시켜 230년 오일과 함께 양계에서 위장 곽회, 비요를 격파했고 231년 노성에서 제갈량의 지휘 아래 오반, 고상과 함께 사마의를 격파했다. 그러나 제갈량 사후 자신에게 지휘권을 주어지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직속 부대만 이끌고 남하하는 와중에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워 7 ~ 8만에 이르는 촉군 주력을 통째로 괴멸시킬 뻔한 걸로 모자라 평소 사이가 안 좋던 양의가 반역을 일으켰다고 거짓 장계를 올렸으나 이내 들통나고 병사들에게 인심을 못 얻어서 왕평의 고함 한번에 병사들을 모두 잃고 도망치다 삼족이 몰살 당한다.
양의: 자 위공. 위연과는 사사건건 다툼을 벌이며 무척 사이가 나빴다. 제갈량은 툭하면 치고받는 둘을 재주가 아까워 내치진 못하고 보듬어 안고 일하느라 마음 고생이 상당했다. 그러나 실무 능력이 뛰어나 북벌 시 부대를 편성하고 군량을 계산하고 군수품 조달을 담당했는데 일처리가 무척 신속하고 정확했기에 버릴수가 없었던 인재였다. 위연의 난이 집안되자 마자 그의 삼족을 몰살시켰으며 그 후 자신 대신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은데 불만을 품고 위로하러 온 비의 앞에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도 반성하지 않고 불충한 말을 늘어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유: 1차 북벌 때 촉에 투항했으며 제갈량은 그를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234년 5차 북벌에 참가해 제갈량이 죽고 위연의 반란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퇴각을 지휘했다. 촉한 말기 북벌을 주도하며 최후까지 촉의 충신으로 남았으며 그의 정책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능력과 인품은 인정했다.
비의: 강하군 맹(鄳)현 사람. 촉한의 치세를 대표하는 촉한의 사영 중 한 사람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엔 참모로서 제갈량을 보좌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성격에 문제가 있는 위연과 양의의 불화를 잘 다스려 적어도 제갈량 생전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잘 봉합했으며 황제 유선을 위시한 촉한의 조정의 대신들과 제갈량이 주고받던 서찰을 직접 전달하는 역할이나 오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맡는 등 외교에서도 두드러진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오의(오일): 중원 사람으로 유언을 수행해 촉으로 들어왔다 유비에게 투항했다. 누이가 유비에게 시집가 목황후가 되었으니 황제 유선의 의붓 외삼촌이 된다. 강인하면서도 자애로왔던 장군으로 통솔력이 뛰어나 약한 군사로 많은 병력을 제압해고 좀처럼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230년 위연과 양계에서 함께 곽회, 비요를 격파했는데 신중하고 통솔력있는 오의와 용맹스러운 위연의 시너지 효과를 노린 제갈량의 인선이었던 듯. 거기 장군을 역임했으며 관중 도독, 제갈량 사후에는 한중독을 역임했지만 기록이 소실되어 따로 열전을 남기지는 못했다.
오반: 오의의 집안 동생으로 호방한 성품의 협사. 유비의 동오 정벌에 참전해 풍습과 함께 오나라 장군 이이를 격파했고 다시 수군을 이끌고 진식과 함께 장강을 끼고 올라갔다, 이릉 대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몇 안 되는 장군 중 한 명으로 북벌에 참전에 231년 노성전투에서 위연, 고상과 함께 사마의를 격파하고 참수 3천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형 오일이 거기 장군일 때 본인도 표기 장군까지 올랐던 거물이지만 역시나 기록이 부족해 열전을 남기진 못했다.
진식: 화양국지에서는 진계(陳戒)로 기록되어 있다. 유비가 한중 공방전 때 서황의 상대로 내보내 마명각도(한중 인근 지명)를 끊는 역할을 담당했던 나름대로의 명장이다. 동오 정벌에도 참여해 오반과 함께 수군을 이끌었고 229년 3차 북벌때 무도와 음평을 공격해 그곳을 촉령에 편입시켰다.
고상: 가정 전투 당시 인근 열류성에 주둔하고 있다가 마속이 참패하고 난 후 제갈량의 진군 당시 상규에서 처박혀 기회만 노리던 위장 곽회의 공격을 받아 패한다. 231년 노성 전투에서 오반, 위연과 함께 참전해 사마의를 격파하고 참수 3천, 갑옷 5천 벌, 각노 3100개를 노획했다.
마속: 마량의 동생. 유비에게서 실제보다 말이 앞서니 중용해선 안 된다는 평을 들었으나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중 정벌 이전 2년여에 걸친 전쟁 준비 기간 동안 제갈량과 수차례 전략을 토론하며 남중인들의 마음을 얻으라는 진언을 해 제갈량의 신임을 얻었다. 가정 전투 당시 제갈량이 일부러 대군을 딸려주고 노련한 왕평을 붙여주고 전략 목표까지 제시해 줬으나 자뻑해서 장합 잡겠다고 산 위에 진을 쳤다 식수가 끊겨 참패하고 북벌을 통째로 말아먹어 참수당하여 읍참마속의 일화를 남긴다.
등지: 청렴결백하고 강직, 소박한 사람으로 평생 녹봉에만 의지하고 개인 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처자식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죽고 나서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일찍히 유비가 발탁했으며 제갈량 치세 아래 외교관으로서 오나라와의 국교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고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부장으로 참전해 별동대를 이끌었다. 북벌 이후에도 각지를 진수하면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다.
장익: 각종 태수직을 거치고 남부 경략에서 활약했던 인물로 경력으로 보나 임무로 보나 야전 사령관이라기보단 군정관, 군수-공병 사령관에 가까운 인물이다. 원리 원칙에 충실하고 엄격한 성격으로 지나친 법치주의로 인해 만족들이 싫어했다. 제갈량은 234년 마지막 북벌때 악착 같이 군량을 비축하고 운송 수단을 개선해 장기전을 가능하게 한 다음 옹주 한가운데인 오장원에서 버티기 들어갔는데 이때 장익을 불러워 점령 지역의 관리를 맡겼고 당시 오장원 일대의 민심은 촉에 상당히 우호적이라 백일넘게 어울려 농사 지으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장억: 마충과 남중에서 대부분의 커리어를 쌓은 장군. 227년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위해 한중에 주둔할 때 남쪽 면죽 일대에서 산적 장모 등이 군자금을 약탈하고 관민을 겁박하고 있을 때 장억은 도위로 임명되어 그들을 토벌했다. 당시 산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는 통에 정면으로 싸워 뿌리뽑기는 힘들었다. 생각끝에 거짓으로 화친을 청한 다음 주연을 열어 장모를 비롯한 산적 두목들을 불러모은 다음 모두 참수하고 잔당들을 추격해 열흘만에 산적떼를 깨끗이 토벌하는 데 성공한다. 북벌이 끝난 후엔 마충의 지휘 아래 문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토벌했고 남부에서 꾸준히 활약했다. 강유의 북벌에도 참전해 254년 위의 정촉 호군 서질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가 죽이거나 부상 입힌 적은 배가 넘었다.
마충: 원래 이름은 호독. 유능한 장군이자 행정관으로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하고 백제성에 머물때 그에게서 '황권을 잃었지만 호독(마충)을 얻었다.'는 평을 들었다. 농담을 즐기고 분노해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웃음에 많았던 사내로 관대한 성품에 도량이 크고 결단력이 뛰어나 이민족들은 그를 두려워 하면서도 존경했다. 231년 4차 북벌에 참전해 군대 내 사무를 관장했다. 대부분의 경력을 남쪽에서 보냈는데. 제갈량의 남중 정벌 이후 가장 큰 반란이라는[52] 233년 유주의 난을 평정하는 등 촉의 남중 경영에 있어 큰 공헌을 했다.
이막: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익주 토박이 출신. 재능은 있었지만 너무 오만방자하고 엉뚱한 실언을 일삼은 탓에 스스로 명성을 실추시킨 인물. 이미 선주 유비와 쓸데없는 불화를 겪다 숙청당할 뻔 했지만 그 재능을 아낀 제갈량의 변호로 화를 면한 인물인데 그 후 제갈량의 비호에 힘입어 꽤 출세 가도를 달리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까지 종군했다. 양의처럼 키워 성향이 짙지만 안한 장군까지 오른 걸 보면 일정 수준 군재도 갖췄던 모양. 그러나 마속을 처형하려는 제갈량을 걸고 넘어져 실각하게 된다. 그 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곧바로 유선에게 제갈량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고 화가 난 유선은 이막을 즉각 처형한다. 이막의 처형은 난세에 천하를 다툴 군주로서의 능력과 리더십은 부족하지만 인간성 자체는 선량하고 온순한 유선이 제위 기간에 거의 유일하게 본인 손으로 신하를 숙청한 사례이다.
상랑: 형주 양양군 의성현 사람. 양양의 명사 사마휘의 제자로 제갈량, 방통, 서서 등과 동문이다. 학자 성향이 강한 인물로 촉한에서 소장 도서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유표 휘하에서 일하다 유비가 남형주를 진수하자 임관해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제갈량이 남정할 땐 승상장사로서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한다. 227년 북벌을 추진하려는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들어와 그를 계속 보좌한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에 가정에서 제갈량의 지시를 불복하고 군을 마음대로 움직이다 대패한, 거기에 패배한 군을 수습할 생각은 안 하고 도주한 마속을 묵인한 죄로 실각하게 된다. 이로 보아 상랑은 남정에서처럼 후방만 담당한 게 아니라 가정 전선의 백업을 담당하고 있었거나 최소 옹, 양주 최전선 근처에서 종군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제갈량이 그렇듯 동향 출신인 마속, 마량과도 꽤 친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비록 실각했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샀고 조정에서 원로 대우를 받았다. 20여 년간 본업인 학문에 전념하다 247년 세상을 떠난다.
맹염: 225년에 제갈량이 남정 때 주제군에서 등용되었고 관직은 보한 장군, 호보감에 이르렀다. 234년 제갈량의 5차 북벌에 종군해 위수 이남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와 대치할 때 제갈량의 지시를 받아 무공수 동쪽 기슭을 공격해 점령했다. 남중 주제에서 맹획과 함께 등용되었다는 점과 성씨가 같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맹획의 일가붙이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재밌는 건 삼국지 연의를 통해 군주이면서 동시에 저돌적인 무장형으로 캐릭터성이 정립된 맹획 같은 경우는 실제 역사상에서 어사중승이라는 문관직을 역임한 데 비해 맹염은 명백히 무관직을 맡았다는 점이다.
마대: 촉한의 대표 상장 마초의 사촌 동생. 연의에서는 오호 상장 사후 촉한을 대표하는 숙장 가운데 한 명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에선 별 비중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벼슬이 평북 장군 진창후까지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록에 남지 않은 활약이 많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꽤 나온다. 어쨌든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고 반란을 일으킨 위연을 양의가 마대를 보내 참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 제갈량의 5차 북벌에 종군한 건 확실하다.
유염: 유비와는 종씨로 예주에 있을 때 그의 막하에 들어 곁에 머물렀으나 노래와 우스갯 소리에 능했다. 연회 좋아하는 유비가 종씨 배려도 할겸 술상무도 시킬 겸 데리고 다닌 모양인데 매우 사치스런 생활을 했고 북벌 때는 벼슬이 거기 장군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군사 1천 명만 데리고 제갈량에게 농담 따먹기나 할 뿐었다. 232년에 트러블 메이커 위연과 불화를 일으켜 실언을 늘어놓다 제갈량에게 문책 당하고 성도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뜻을 잃고 혼란스러워 했다. 234년에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던 아내 호씨가 황궁에 한 달이나 머물고 돌아오자 유선과 호씨의 불륜을 의심하여 신발로 얼굴을 때리는 등 심한 폭력을 휘두르다 '얼굴은 신발을 놓는 곳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기본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한 고조의 선례를 따른것으로 초한 쟁패 시절 한신을 얻고 북벌을 한 한 고조의 행적과, 삼국 시대 위나라에 대한 제갈량의 북벌은 언뜻 비슷해보여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나 실제론 이 두 북벌은 기본적인 상황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진짜 험준하고 깊숙한 파촉' 은 가 본 적도 없는 한 고조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함양을 정복한 항우는 곧바로 공과에 따라 자신을 따른 세력들을 중원 각지의 제후로 임명하는 18 제후왕 분봉을 시행하는데 한 고조는 파촉 지방을 다스리는 한왕으로 임명된다. 이에 한 고조는 낙담했고, 수하 장병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엄청난 오지로 들어가는 듯 하지만. 파-촉의 군주가 되고 유방이 정한 도읍지는 남정(南鄭)인데 바로 한중 지역이다. 남정의 위치를 지도에서 살펴보면 알겠지만, 훗날의 성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한 고조는 자기 생전에 훗날 익주 중심부가 되는 쓰촨 성 지역은 아예 가 본 적도 없다. 어디까지나 익주 외곽이 되는 한중, 섬서 성 지역에 머물렀을 뿐인 것이다.
이 '남정'은 한중에 위치해 있어서 훗날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북벌을 시작하는 최전방 군사 기지' 역할을 한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군수 물자와 병력을 잔뜩 끌고 남정까지 온 다음 거기서 짐을 풀고 기지를 만들고 장수들과 향후 움직임을 논의하는 상황으로, 삼국시대 때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후방인 수도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 지역이었는데, 수백 년 전의 한 고조에게 그 변경은 '왕이 사는 수도'였다. 때문에 당장의 군사 작전은 똑같이 남정에서 시작한다 한들, 여러모로 그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기준에서 보면 '파촉으로 통하는 입구'에 지나지 않는 한중의 남정이, 초한 쟁패 시기에서는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유방은 엄청 화가 난 나머지 전력에서 상대조차 되지 않음에도 이판사판으로 싸워보려고까지 하다가 소하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남정으로 보내는 쪽이나, 남정으로 가는 쪽이나 남정을 '사람으로서 갈 수 없는 곳'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53]. 만약 이런 초한 쟁패 시대에 유방보고 "너 성도 지역으로 가라"라고 했으면, 유방은 정말로 바로 전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당대의 익주 지역이 외진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 물론 촉 지방에 아예 문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화양국지나 기타 기록에도 보이듯이 촉 지방에는 아주 오래된 문명 국가가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면, 삼성퇴 문명을 비롯해 독자적 청동기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고, 목야 대전 때 숟가락을 얹었다든가, 상나라 시절 갑골문에도 '촉을 쳐야 하는가'라는 점을 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도 이 촉 지방의 나라가 초나라를 친적도 있고, 진나라와 싸우기도 했던 역사가 있었다.
다만 한참 기세를 올리던 진나라에서 '서쪽과 중원, 어느 쪽을 먼저 쳐야 할까'하는 논의를 하던 중, 진나라의 재상 장의가 '이런 곳과 전쟁을 하는 건 중원에서의 왕업에서 멀어지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이에 반대하여 '촉을 쳐서 그 이익을 취한 다음 중원을 공격하는 게 좋다'라고 주장한 사마착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니 그래도 오지 중 오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후일 이 지역에 도강언이 세워지고 진나라의 배후지로서 기능했을 때조차도 이곳은 오지로 여겨졌는데 당장 여불위의 자손들이 이주 당한 곳도 후일 익주의 남중 지역으로, 삼국 시대 때 촉한의 관헌 여개가 여불위의 자손이다.
파촉의 풍부한 물산을 이용하여... 운운은 제갈량 시절 이야기.
실제 유방이 파촉 깊숙한 곳은 고사하고 남정에 머무른 시기만 해도 길게 잡아봐야 3~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18 제후왕 분봉을 해서 각지의 왕들을 봉한 시기는 BC 206년 2월. 유방이 파촉에 입성한 것은 4월. 그리고 진창 고도를 통해 군사를 이끌고 옹왕 장한을 쳤던 것은 BC 206년 8월,[54] 유방이 분봉 조치를 받아, 과거의 그 험한 길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남정까지 터벅터벅 가서 도착하고,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마련하는 데 한달 정도를 잡고, 전투 준비를 전투 시작 한 달 전 무렵에는 대략 끝내놓았다고 보면, 여유있는 준비 기간은 BC 206년 3~7월 정도, 즉 겨우 4개월 정도인데, 이것도 도착하고 한숨 놓은 뒤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고 타이트하게 잡았을 때이다. 실제로는 매일매일 수많은 제장들이 도망가고 군대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었으니, 실제로 뭔가 준비가 된건 한신이 대장군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한신을 등용하고 바로 곧장 치고 나선거나 다름이 없는 것. 한신은 "천하가 평화로워진 다음에 싸움을 건다면 백성들은 항우가 아니라 우리를 원망할 것이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 쪽 사람들의 예봉 또한 꺾이게 된다."며 즉시 동진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유방이 받아들인다.
물론 현지의 기반을 이용하기 위해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닌데 자치통감 한기를 보면
'이에 한왕은 크게 기뻐하고 스스로 한신을 얻은 것이 늦었다고 여기고, 드디어 한신의 계책을 듣고서 제장들이 공격할 부서를 정하였는데, 소하를 남겨두어 파와 촉의 조세를 거두어 군사에 양식을 공급하게 했다.'
라는 언급이 있어, 소하가 해당 작업에 착수하긴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방이 자신에게 협조한 판순만 일곱 씨족에 대해 일체의 세금을 면제시켰고, 나머지도 겨우 1인당 40전을 냈다는 언급을 보면 그리 빡빡하게 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들에게 불만을 사서 뒤가 불안해지는 상황도 위험했을테고. 촉 지방에 항구적인 거점-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반세기 가깝게 싸운 제갈량의 촉나라와는 달리 한 고조는 그 촉나라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 남정 부근에서 잠깐 몇개월 머물렀을 뿐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인적 자원과 물리적 자원을 꼼꼼히 챙기고 끌어들이고 체계적으로 싸운 전투라면, 유방의 경우는 '왕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전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듯한 사람들'이 우당탕탕 한번에 끝내버린 셈.
제갈량 북벌과의 상황 비교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방은 파촉 지방에서부터 떨치고 나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잠깐 거기 구경 좀 하다가' 다시 '되돌아' 온 것에 가깝다.[55] 그 와중에 협상을 통해 판순만의 이민족을 얻을 수도 있었고, 한신의 계책을 따라 옛 길을 이용해서 진군한 것도 있었고 여하간에 꽤 쉽게 여러 지역을 돌파했고, '진창'에서 장한을 상대로 한번 대승을 거두면서 그대로 돌파 할 수 있었다.
제갈량의 북벌과 비교해보도록 하자.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진창을 거치지 않고 기곡 방면으로 군사를 보내자 위나라는 지체없이 조진을 파견해 바로 저지에 나섰다. 진창 방면으로 가진 않았지만 촉군이 진창 정도 위치로 북상하기도 전에 위나라 쪽에서 빠르게 저지에 나서는 셈. 물론 관서에 대비를 안했다고 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대비면에서 차이가 있던 셈이다. 이 점이 진창까지는 아무런 감시 없이 별 어렵지 않게 진군했던 유방의 북상과는 다르다. 물론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에선 기곡 방면 진군은 속임수였고 우회군이 주공이었지만.
아예 진창 방면으로 똑같이 진군했다가 학소의 수비에 막혔던 제갈량의 2차 북벌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번엔 진창까지 향하는 촉군을 위군이 중간에서 요격 시도를 하진 않았지만, 이 당시 위나라는 첫 북벌에서 기곡 방면에서 촉나라가 저지되었으니 '다음에는 진창으로 올 것이다'라는 판단 아래 이미 진창성의 수비를 강화하여 준비가 된 상태였고, 그런 준비를 바탕으로 버티는 와중에 왕쌍 등이 이끄는 중앙군이 지원 병력으로 속속 도착하자 제갈량은 퇴각한다. 물론 이 진창 공격 자체도 '무도/음평 공격의 사전 준비 작업 + 오나라에 가해지는 장합의 관중군의 공격'을 진창으로 돌리는 페이크였지만 이미 진창에서 위나라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유방의 북벌 당시에는 이렇다. 앞서 말했듯 남정에 자리 잡은 지 불과 3~4개월 정도 만에 곧바로 움직인 유방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고도를 이용한 루트 때문에 별 대비도 안 되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진창까지의 이동 경로를 내주고, 장한은 진창에서 맞서 싸웠으나 대패. 유방이 남정에 자리 잡은지 3~4개월도 안 되었다는 소리는, 마찬가지로 장한 역시 삼진에 자리를 잡은지 3~4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막 왕으로 부임하여 주변 정리를 하기에도 정신없는 시기이다. 진창의 방비 따위를 학소만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고[56] 초군이 진나라를 불태우고 진왕 자영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부린지라 그들이 세운 왕인 장한, 사마흔, 동예는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관중의 민심은 이 삼진의 왕을 덜 지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유방이 자신들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할 정도로 기운 상태였다. 이는 이후 유방이 초나라와의 전면전 때 관중 지역의 인원과 물자를 무리할 정도로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중의 민심이 유방을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 이 학소의 수비 당시에도 학소가 제갈량을 직접 격퇴했다기보다는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그 사이 지원병이 도착하자 제갈량이 물러났다고 한다면, 유방을 상대하는 초나라의 경우는 마침 제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떠나 지원군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초군 입장에서는 기동 거리가 거의 중원 동서 끝에서 끝 정도였던 셈.
만약 '한중'만이라도 초나라의 세력권으로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면 유방의 행보는 크게 제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한중을 제어한다는 것은 남정에서의 모든 군사적 움직임도 한중에서 제어한다 것이다. 유방이 군사적 행보를 시작한다면 한중 자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가버리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불온한 행보는 곧바로 장한에게 보고되었을 테고 장한은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제대로된 준비가 가능했을 것이다. 유비가 한중을 전진기로로 삼고 한중이야말로 익주의 목줄이라고 한 연유도 이와 비슷한 셈이다. 그렇다고 장한이 유방을 저지해낼 수 있는가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시간은 더 끌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동예, 사마흔 등 다른 삼진의 세력과 연계를 꿰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버티면 초군이 제나라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올 수도 있었을 터, 유방은 진나라를 평정하며 질척거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한중은, 장량에게 뇌물을 받은 항백의 설득 덕에 아주 시원하게 유방에게 '그냥' 덤으로 넘어갔다.
다만 제나라 전역과 관중과의 거리가 멀어서 장한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항우가 관중 지역에 남는다면 자연히 초나라 측은 항우의 보호 없이 제나라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며, 항우가 의도했을리야 없으나 항우가 떠난 직후에 대기근이 관중을 휩쓸었기 때문에 관중 지역의 전략적 가치는 인적 자원 공급 측면을 제외하면 한동안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항우의 입장에서는 신안대학살까지 벌였던 마당에 관중 땅에 남는다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었고, 당장은 오히려 이 결정에 행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도 있었던 것.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과 위의 싸움은 각국의 '국력 싸움' 양상이었다면, 이 당시 유방의 북벌은 '제후들의 세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나라가 초나라를 무찌르며 북벌한 게 아니라, '제후 한왕 유방'이 '제후 삼진왕 장한 및 사마흔 동예'와 싸웠던 것이다. 비록 남정에 봉해지는 와중에 유방의 군사 일부를 해산시키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유방은 당초 중원의 제후들 중 항우에 이은 2번째로 가장 큰 세력이었다. 오히려 힘으로는 어지간한 제후들은 전부 찍어누를 위치였던 것. 유방의 군단을 해산시켜 3만 명만 남겼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 3만 외에도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정도로 그는 이미 영향력 있는 제후였다. 거기다 운좋게도 파 지방의 이민족 판순만의 지원군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제대로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진창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막 옹왕이 되어 자기 세력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한 장한과 일대일 싸움에서 크게 밀릴 이유도 없다. 진창에서 유방을 막아 세웠던 옹왕 장한은 본시 진나라군을 자기 세력으로 가지고 있던 장수였다. 그런데 그 병력은 거록 대전에서 왕리가 대패하며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장수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신안대학살로 소멸했다. 장한은 자신이 본시 가지고 있던 세력은 모조리 날려버렸고, 왕으로 봉했다 한들 장한에게 주어진 3~4개월 남짓한 시간으로는 유방을 능가하는 세력을 재구성할순 없었다. 원래부터 인심을 얻지도 못하고 시간도 없어 진나라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진 장한으로서는 자신의 세력을 크게 키우기는 커녕 왕으로 막 즉위하여 주변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3~4개월은 버거웠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또 '삼진'이라고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유방과 적극적으로 싸운 사람은 오직 장한뿐이었다. 사마흔과 동예는 장한이 계속 패퇴하는 동안 제대로 협조를 하지도 못했고, 장한이 모조리 패퇴당한 다음에야 유방의 침공을 받고 바로 항복했다. 이들 역시 근본은 장한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통일 중국에 대한 소속감이 없고, 초나라인으로서 초나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인 항우가 인식하는 국경 라인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고, 이에 따라서 유방의 북벌 또한 위나라와 제갈량의 그것과 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유방에게 제갈량의 북벌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건 관중 돌파가 아니라 형양 너머의 땅으로 진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 국경선 공방전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처절한 과정을 치러야 했다.
[1] 후출사표에 제갈량이 올린 표현 중 아주 유명한 부분이다.[2] 나라 이름을 한나라로 한 이유가 바로 찬탈당한 헌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다. 그러니 북벌은 나라의 존립 이유. 촉이라고 부르는 건 후세의 사람들이 편의상 부르는 거고 실제 명칭은 한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도 원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촉한이나 계한 등 다른 이름을 썼다.[3] 기본적으로 촉한은 유비, 관우라는 인물이 건국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둘이 사망한 상태라면 내부에서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4] 맹획과 고정의 난이 대표적이다.[5] 계한보신찬[6] 촉서 장억전. 장억은 이후 월수를 재정복한다.[7] 남으로는 오나라를 상대해야 하고 다른 방면으로는 이민족들을 상대해야 했다. 북쪽에는 훗날 오호십육국 시대를 열게되는 흉노, 선비 등의 유목민이, 농서 지역에는 강족이, 요동에는 공손씨 정권이, 그 배후에는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다.[8] 한중 태수의 치소가 있는 곳이다.[9]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10] 다만, 이는 4차 북벌 이후에 확인되는 사항으로, 1차 북벌 당시에는 더 낮은 직책이었을 수도 있다.[11] 좌장군의 오기라는 말도 있다.[12] 이름불명[13] 제갈량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촉한이 실제로 저정도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대군임은 확실하다.[14] 좌장군의 오기라고도 한다.[15] 사실상 실제 전력[16] 장합이 인손한 중앙군인 남북군[17] 조진이 파견한 비요의 군세[18] 당시 관중의 군대를 오나라 정벌을 위해 차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북군을 보내야 했다.[19] 이를 보아 제갈량이 형 제갈근에게 언급했던 진창성 공성전의 진짜 목표인 형주의 위군압박을 해소시킨다는 목적을 장합은 간파했었던 듯 싶다.[20] 수경주 권17 《위수(渭水)》에서 인용.[21] 실제로 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22] 진창도를 통해 한중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받으면서 장안에서 오는 위의 공세를 막을 수 있고 나아가 진창의 일부 부대는 기산을 통해 올라가는 촉의 군대와 합류하여 량주를 공략할 수도 있다.[23] 즉 12월이 거의 다 끝날 때쯤에 넘어와 20일이 지나는 동안 공성하는 동안 해를 넘겨 1월 봄이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24] 시기상으로 2차 북벌 직후다. 두 가지 군사 활동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삼덕은 2 ~ 4차 북벌, 위의 촉 공격 시도를 큰 틀에서 하나로 묶어서 본다.[25] 제갈량전 후주의 조서에선 둔주(遁走)케 했다고 표현한다.[26] 과거 오란이 음평으로 퇴각했을 때, 그의 목을 베어바친 자가 바로 음평의 저족 강단이었다.[27] 이 당시 진서 사마부전의 기록을 보면, 계속된 제갈량의 침공으로 군량이 부족했다고 기록하는데, 등애전엔 농서와 남안을 두고 '강족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위연과 오의의 기습 목적을 군량 탈취로 보는 시각도 있다.[28] 자오곡, 흥세, 야곡[29]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30] 중감군 혹은 호군이거나 겸임[31] 대오전선 병력을 이끌고 한중으로 북상[32]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33] 호삼성은 무위가 촉한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다는 이유로 이것이 무도(武都) 내지는 건위(建威)의 오기가 아닐까 하는 견해를 제기한 바 있다.[34] 옛날 우후라는 사람이 퇴각할 때 아궁이를 늘려서 피해 없이 군사를 물린 사례.[35]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36] 4차 북벌 이후의 관직이라서 그보다 더 낮았을 수도 있다.[37] 오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가 진서라서...[38] 다만, 당시 비요가 후장군이었으므로 관직이 달랐을 것이다.[39] 병주에 주둔하다가 가비능을 견제하기 위해 출진[40] 조위의 숙장이자 대촉전선의 거물인 장합의 전사는 향후 대촉전선을 사마의가 장악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41] 진나라 대에는 시평군(始平郡)[42]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43] 전사가 아닌 병사[44] 최초 사마의가 이끌던 기병 1만과 진랑의 군세 2만[45] 왕기의 이릉 점령 방법보다 먼저다.[46] 형주가 빼앗긴 것만큼 상용을 빼앗긴 것도 타격이 컸는데 이 상용의 경우 양양과 완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장안을 견제하는 것도 가능한 군사적 요충지였다.[47] 위에 조조의 사망이라는 변수는 생겼지만 이미 앞의 3가지가 무너진 상황이었고 유비는 이릉대전을 택했다.[48] 그나마 한중 북부가 기산과 야곡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기에 전력을 어느정도 분산시키는게 가능했고 그랬기에 제갈량이 북벌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49] 기산 루트는 천수, 안정쪽으로 진군이 가능했고 야곡 루트는 진창이나 오장원으로 진군이 가능했다.[50] 제갈량의 조카인 오나라의 제갈각도 숙부의 표문을 보면서 항상 비슷한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51] 창작물에서는 촉 군부의 대부라 제갈량과 함께 책임을 졌다는 묘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촉한 내에서의 제갈량의 위치는 조운이 비할바가 못된다. 1차 북벌 당시 각 전선의 책임자가 가정의 마속, 기산 및 북벌 총책임자 제갈량, 기곡의 조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속은 패전 자체보다 과정과 뒷처리에서 문제가 많았기에 처형당했고 제갈량은 총책임자로 북벌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운도 기곡에서 패전했기에 벼슬이 깎인 것이다. 흔히 묘사되듯이 정말 스스로 벼슬을 깎았어도 조운 본인의 원칙중시 성향을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52] 반란이라고는 해도 관리들과의 마찰로 일어난 소요 수준이었다.[53] 다만 남정까지만 해도 어쨌건 중화인들이 사는 영토였고, 익주는 당시에는 중화인이 아닌 이민족들이 사는 땅이었다. 남정이라는 이름의 유래 자체도 서주 시절 옹주 지방에 분봉받았던 정나라가 서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같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 유민들이 정착했던 곳이기에 붙은 것이다.[54] 한서 고제기에 따르면 5월로, 파촉으로 들어간지 겨우 한 달 후이다.[55]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항우에게 보여주기 위해 "저 지금 파촉왕 하고 있쪄염."하는 식. 물론 안 그랬으면 항우가 보낸 추격자들에게 당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56] 다만 옹주 변방도시 1정도 수준의 위상이었던 위나라 시기의 진창과는 달리, 당시의 진창은 진나라의 옛 수도로 어찌됐건 옹주 전체에서 알아주는 도시였으므로 기본적인 인프라 자체는 상대적으로 더 잘 깔려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옹주의 어원이 된 옹이 진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