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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벗도서관에서 이야기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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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 통일된 땅의 사람을 위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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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다. 그 소원에는 무엇보다 분단으로 인한 민족적 고통을 치유하고, 항구적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며, 미중일 등 외세에 대한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으리라는 합리적 기대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까지 포함하는 근래의 전지구적 자본축적위기 속에서 북한의 노동력⋅시장⋅자원은 위기 타개를 위한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남한 재계의 대표선수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찍은 기념사진은 북한을 자본의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확실히 각인하는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통일은 남북의 역사적 갈등 해소 및 화해라는 민족적 과제를 푸는 일이자, 동북아에서 패권을 다투는 열강들과 적합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북한이 국제자본의 격전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막고 한반도가 인류의 바람직한 발전 모델로 되는 기회를 창출하는 길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통일이 어떤 세력의 주도 아래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이러한 기대와는 반대로 민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열강들에 의한 긴장고조와 군사적 충돌 위협 속에서, 국제자본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가 커지는 가운데, 사회적 갈등⋅차별⋅모순이 새로이 증폭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통일 자체가 지고의 선이 될 수는 없으며, 어떤 세력관계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통일이 이루어지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독일의 통일을 잠시 돌아보아도 통일주도세력과 과정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독일은 중세 이후 400개 가까운 군소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나폴레옹의 침략을 계기로 민중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통일운동이 불붙었으나 봉건지배세력의 탄압으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1848년 혁명기에도 맑스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일을 기대하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그 후 산업혁명의 급진전에 따라 자본가들로 변신한 봉건지배세력(융커)이 자본의 요구에 따라 통일을 주도하는데, 이때 비스마르크는 융커들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이들의 주도에 의해 반민주⋅반민중적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은 프로이센 중심의 군국주의 내지 제국주의로 치닫고 결국 파시즘 체제를 만들었으며, 1차 2차 세계대전의 범인류적 비극을 초래하는 데에 앞장섰다.
대중들이 지배자들(오늘날에는 특히 자본권력과 그 대리자들)의 무자비한 지배욕, 무한축적 본성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주술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할 때면, 일상적 착취는 물론이고 종종 범사회적 위기와 파국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은 끔찍한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 이러한 역사법칙은 통일 문제에서도 변함없이 작용할 것이다. 통일이 평화를 정착시키고 우리 사회의 극심한 적대관계와 모순들을 풀어가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의 축적본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바탕으로 전지구적 자본축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명확하게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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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전쟁이나 한일 경제전쟁은 자본축적의 위기와 불균등발전의 경향뿐 아니라, 시장 재분할로 인한 갈등과 이에 잠재하는 군사대결의 위험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시적인 예외현상이 아니다. 선발 자본주의국가들의 성장둔화 내지 마니어스 성장,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금융위기, 이를 타개할 새로운 시장의 제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 후발 자본주의국가들의 생산력 발전에 대응하는 필사적 방어기재인 여러 형태의 전쟁들과 그에 따른 파국 등을 감안하면, 이제 인류는 자본축적을 절대불변의 상수로 전제하고 작동해온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이성적 존재라면 그렇다. 특히 축적위기 때마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노동자대중이라면 자본축적을 절대상수로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생산력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학기술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기 위해서도 다시 과학기술의 도움이 필요하다.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을 소수의 자본축적 내지 권력독점을 위한 도구로 쓸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방향이 구체적 모습이 어떠할지 우리는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 중심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를 벗어나고 경제적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궁극적인 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혁신을 통한 특별잉여가치 생산이 평준화되거나 추월당하는 것은 언제나 시간문제다. 삼성이 소니를 능가하듯이, 중국의 짝퉁 기술은 이제 여러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또 이 경우 제국주의로 치달을 수 있는 패권주의적 발상도 문제지만 끝없는 혁신의 성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 늘 사회적 갈등이 야기될 것이다.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북구 복지모델이 한동안 각광을 받았지만, 그것이 최종 해답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권력 간의 힘겨루기는 여전히 남아 있을 테고, 이미 이루어진 복지도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근래에는 중국식의 국가주도 시장경제와 다자주의적 국제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극심한 양극화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토대로 인한 요구들이 언제까지 상부구조인 국가권력에 의해 제어될 수 있을지 의문이며, 그 내적 모순의 극복이 크나큰 난관으로 남아 있다고 여겨진다. 자본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역사적으로 패배한 구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복원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이에 선뜻 공감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이러한 모델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유일무이의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피와 땀으로 쌓아온 경험들을 특정한 관점에 어울리는 것만 빼고 모두 쓰레기 취급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통일 이후를 포괄하는 미래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들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민중해방운동⋅사회주의운동⋅노동운동⋅여성해방운동⋅반제식민지해방운동⋅환경운동⋅소수자운동 등의 성과들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하고 배워서 받아들일 것과 비판하고 넘어서야 할 것들을 분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 분파나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이러한 포괄적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기본전제는 자본증식을 절대상수로 놓지 않는다는 것, 또 자본이 이룩한 성과를 인류의 의미 있고 풍부한 삶의 물적 기반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지속가능한 효율적 자본증식에 관심을 집중하는 재벌연구소들이나 친재벌 정부기관들 혹은 이미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들에서 기대하기는 어렵고, 자본과 기본적으로 모순⋅적대관계에 처한 노동운동의 주요 당면과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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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세부까지 구체화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대중이 함께 꿈꿔볼 만한 미래사회의 기본골격에 대해 자유로이 상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자유 아니겠는가. 우선 예측불허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을 감안할 때, 노동시간의 획기적 축소는 불가피할 것이다. 1844년에 쓴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미 맑스는 프랑스 쪽의 연구를 끌어들여 당대의 생산 단계에서 노동할 수 있는 사람 1인당 하루 5시간의 평균 노동이면 사회 전체의 물질적 관심을 충족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동안 사회의 ‘물질적 관심’이 늘어났지만, 그 이상으로 생산력도 증대하였다. 오늘의 생산력이면 지구 전체를 낙원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며, 문제는 비합리적 생산관계에 있다는 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현재 독일에서는 주당 28시간까지 축소되었다. 반면에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국가들 중 멕시코 다음으로 최장시간인데도, 주당 52시간조차 너무 짧다고 아우성이다. 자본이 노동시간을 무한정 늘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해 노동자들은 100년 이상 피를 흘렸고, 소련에서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되었다. 그후 100여년이 8시간 노동제를 중심으로 싸워왔다. 이제 독일에서 이미 시작된 4시간 노동제를 우리도 꿈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임금 삭감에 대한 우려 때문에 노동자들조차 아직 노동시간 축소를 적극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5G, AI 등 첨단 기술의 확대는 극소수를 위한 천국과 다수를 위한 지옥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전 인류를 위한 낙원을 건설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장시간 노동 및 대량실업사태와 노동시간의 보편적 축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당연히 후자가 바람직할 것이다. 노동시간 축소는 일자리 나누기를 전제한다. 또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도 의미 없어져야 할 것이다. 업종에 따른 임금격차도 가능한 한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노동강도와 난이도에 따른 공평성이나 효율성 문제는 세부적인 실행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소해갈 수 있을 것이며,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노동에 대한 욕구의 변화에 맞춰 시간도 조절되어야 하겠지만, 필요노동시간의 근본적인 축소와 잉여노동의 폐지야말로 새로운 인류문명의 발판이 될 것이다.
노동시간 축소와 함께, 혹은 그에 앞서, 생산력 발전에 걸맞게 사회가 의료, 교육, 주택 등 주민들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의료보험은 현행제도에서 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확대하면 좋을 것이다. 한편 최소한의 재원으로도(약 15조?) 대학까지의 무상교육은 가능하다.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낮은 나라들(부탄, 코스타리카, 쿠바 등)을 포함해 30개 가까운 나라가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학까지의 무상교육을 발판으로 적절한 제도를 통해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대학서열도 없애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교육의 공공성을 높이고, 살인적 경쟁체제와 보편적 차별과 불평등을 획기적으로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초중등학교의 정규 학과수업도 4시간으로 끝내고, 그 후에는 문학, 음악, 미술, 체육, 기술실기 등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선택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핀란드의 사례를 보면 자유로운 교육이 학력저하와는 무관한 듯하다. 오히려 창의적이고 전인적인 인격 형성을 통해 미래의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는 핀란드의 기준이 통용된다면, 서울 강남구나 대구 수성구의 주택 가격에 타격이 있겠지만, 주택소유가 신분을 결정하고 학원비나 대학등록금 혹은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금 상환에 등골이 빠지는 일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주택문제는 본질적으로 산업구조로 인한 일자리 도시집중과 교육⋅문화적 기회불균등에 기인할 터인데, 특히 농업이 생태위기 속의 생존을 위한 미래 첨단 산업임을 인정하고 농업노동을 우대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격차를 없애는 다양한 건설⋅문화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실행한다면, 장기적으로 주택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4시간 노동제와 함께 기본생존권이 보장될 때 우리는 노동하는 역축이나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누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자유로이 활동하면서 환경과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로 창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가치는 오늘의 척도로 계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터와 학교울타리 안에 머물 필요가 없는 그러한 활동 가운데에는 이제까지 인류가 어떤 억압과 착취의 지옥을 거쳐서 왔는지 자각하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을 길러줄 역사,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새로이 만들어내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또 언제 어디서든 닥쳐올 수 있는 사회적 갈등과 위기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치적인 판단력을 갖춰가는 훈련도 여러 형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경제활동의 목표를 이윤추구라고 가르치던 몰상식 대신에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위한 물적 조건의 창출이 목표라는 건전한 사고가 상식화될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현재의 불평등한 조건이 해소되면 인간은 누구라도 철학자⋅예술가⋅정치가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 곧 이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할 사실판단이라기보다 행복이나 생명 혹은 자유와 마찬가지로 논증을 뛰어넘어 우리가 추구할 가치에 대한 판단이다.
평등주의는 우리 민족에게만 아니라 외국인노동자들⋅결혼이주민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고, 나아가 타국과의 관계에서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뒤처진 약소국들을 약탈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전지구적 난관들을 극복해가면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는 동반자로 대하는 국제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의 폐해, 군사적 충돌이 초래하는 계산 불가능한 재난, 핵무기로 인한 인류 절멸의 가능성에 비춰볼 때, 과학기술과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그 비용을 훨씬 능가한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초강대국들이 소수를 위한 자본증식 및 권력독점을 광적으로 추구하며 범인류적 희생을 초래하는 대신에, 이미 얻은 재화들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공유해감으로써 탄생할 새로운 인류문명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미사일과 폭탄을 퍼붓는 대신 가난한 나라들의 가난한 민중들에게서 가난을 몰아내는 일을 하면 절대 안 된다는 무슨 신의 계율 따위가 있겠는가. 물론 미국의 네오콘이나 일본의 극우파들에게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호전적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테러의 위협에 직면하거나 경제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미국이나 일본의 다수 민중들에게는 인류문명의 평등주의적 방향전환도 터무니없는 망상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상의 실제 형태는 치열한 연구와 토론과 검증을 거쳐 구체화될 수 있고, 아직은 열린 상태로 남아 있다. 또 이 전환이 실질적으로 구현되기까지는 단발성의 변혁에 한정되지 않는 장구한 투쟁과정 내지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운동은 다가올 전쟁의 전초전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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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누구도 자유나 평등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겠지만, 실질적으로 평등을 거부하는 것은 1%의 가진 자들만이 아니다. 현재 99%의 대중들 자신이 자본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설계된 서열과 경쟁의 게임규칙에 따라 생존사다리의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영혼을 팔며, 공존과 공유의 정신으로 그러한 사다리구조를 타파하겠다는 꿈도 꾸기 어렵다. 조국사태는 진보를 표방하는 인사들조차 그러한 서열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만큼 누리겠다는 욕구를 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심지어 조국의 특권적 삶에 사회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젊은이들마저 ‘정의’니 ‘공정’이니 ‘희망’이 하는 훌륭한 이념을 서열과 경쟁의 상징물인 사다리 위에 붙여놓고 있다. 그 사다리가 필요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의 기본생존권이 보장되고 누구도 타인을 상대로 함부로 갑질할 수 없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만들자고 젊은이들이 당당하게 외치면 왜 안 되겠는가.
이는 경쟁절대주의 지배질서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육성되고 단련되어온 오늘의 대중적 사고방식⋅욕망구조를 뒤흔들고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것이기 때문에 저절로 혹은 편안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또 그러한 사회는 대중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지배관계, 이를 뒷받침하는 소유관계의 변화 없이 현실화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의식 빈곤이나 ‘소확행’에 대한 애착 따위를 탓하기보다, 현재의 지배질서를 바꿀 현실적 방안을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자본의 총체적 저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득권을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는 모든 제도개선⋅단체행동은 물론이고 개인적 사고방식이나 발언조차 원천봉쇄의 대상이 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자본권력은 노동자들이 이미 얻어낸 권리들까지 다시 원상복귀 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올봄에 상정된 보수정치권의 노동법 개정안에는 사업장내 시설점거 쟁위행위 금지, 쟁위행위 중 대체근로 금지 규정 삭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적용 제외 등 노조운동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와 같은 부류의 요구들은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입소문으로, SNS로 노동자대중의 의식 속에 파고들고 있다. 그 결과 이제 사회문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진지한 발언들조차 귀족노조니, 노동적폐니 하는 부적딱지 앞에서 사회적으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흘러가기 일쑤다. 노동운동과 노동자대중의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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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권력독점에 맞서 노동자대중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격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바꿨지만, 나라의 주인이 누구냐는 물음 앞에서 당혹감을 떨쳐낼 수 없다. 삼성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떨쳐버렸는지도 의문이다.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민주사회의 일원이라고 자부하지만, 혹시라도 선입견 없는 어린이의 맑은 정신으로 민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에 걸맞게 우리사회가 실제로 민중이 주인인 사회인지, 또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누가 대변하고 있는지 묻기라도 한다면, 온갖 세파에 오염된 어른들은 마땅히 내놓을 답을 찾기 어려울 듯하다. 이제 교사⋅공무원⋅교수들까지 노조를 결성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민주국가의 뜻에 더 부합될 것이다. 친노동자정부가 아니라 노동자국가를 꿈꿀 때가 되었다. 노동자국가의 건설을 통해 우리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과 독재 권력을 이성적으로 제어하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획기적으로 진전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를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간단히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건설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 건설에 따르는 예상 난관들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희생과 총체적인 실패까지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수행은 역사적으로 패배한 현실사회주의체제가 실은 자본주의였고 그 속의 노동자대중은 ‘임금 노예’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제시한다. 이때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사실로서 인정하기만 하면, 그래서 “국회 의장이 방망이를 한 번만 치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구현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혁명주체의 ‘미성숙’과 ‘실패’에서 ‘혁명의 교육학’을 찾는 지젝의 주의주의적 처방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구상 및 이에 공감하는 여러 탈자본주의적 공동체운동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 주체들의 자유와 자발성의 형식을 존중하지 않고는 어떤 운동도 활성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자유와 자발성의 실질적 성격이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지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변혁운동의 과제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 궁극적으로 국가 사멸 단계에 이른 미래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과장된 주장보다 엥겔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좀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기습 공격의 시대, 자각하지 못한 대중들의 선봉에 서서 자각한 소수가 수행하는 혁명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이라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 스스로가 변혁 과정에 참여하여, 그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야 하는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50년의 역사가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하려면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일차로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룩셈부르크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른바 전위에게 제기되는 요구사항이다. 대중들이 스스로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를 의식하고 나아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필요한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 바로 이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해내는 사람들이 전위인 셈이다. 이로써 광범한 대중이 ‘의식적 자발성’ 혹은 ‘변혁적 자발성’을 갖출 수 있어야 비로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노동자국가의 건설도 가능해진다. 물론 대중들의 의식은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 발전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후에 제기될 난관들을 극복하고 더욱 풍요롭고 평등한 사회가 실현되는 정도에 따라, 그리하여 지배관계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소멸해감과 더불어 대중들의 의식과 욕구, ‘꿈꾸는 방식’까지 끊임없이 변화⋅발전해가야 할 것이다.
레닌 역시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에, 변혁을 위한 전위의 결정적 의의를 분명히 강조하지만 대중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전위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전체 계급, 곧 광범한 대중들이 전위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적어도 전위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고 적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기도 전에, 전위만으로 결전을 치르는 것은 멍청할 뿐만 아니라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레닌은 민주주의 없이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1)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 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승리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 수도, 또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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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도 오늘날, 특히 포스트모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은 레닌의 전위 중심 운동방식이나, 당과 중앙에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구조에 대해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의구심 내지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극단화될 경우, 모든 위계구조를 거부하고 제반 부문별 해방운동들의 비중을 각각 1/n로 평준화하여, 상대적으로(실은 절대적으로) 자율적인(실은 고립된) 부문운동들 간의 간헐적이고 우발적인 연대를 이상적인 모델로 내세울 수도 있다. 이러한 모델이 현실적으로 의미 있으려면, 계급적 지배관계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는 사회, 자본과 노동의 적대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심각한 담론 가운데 99%가 돈 문제와 직결되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계급적 지배관계의 근본적 의미를 인정하고 이에 합당한 변혁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현실이 자본 중심의 위계 체제를 이루는 한에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사안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 위계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권력이나 당의 결정적 중요성에 대한 부정이 곧 해방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략의 포기에 더 가깝다.
그러나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자본주의적 욕구는 강력히 작동하며, 조합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빠질 수 있듯이, 노동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전위나 당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노동자대중 위에 군림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변질과정은 대중들을 정치허무주의에 빠뜨리고 해방운동의 성과들을 거꾸로 돌려놓기 쉽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레닌의 지적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파리코뮌이 취했던 주요 조치, 즉 자신들의 대표가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하는 현상을 막을 두 가지 ‘절대 확실한 방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코뮌은 입법, 사법, 교육 등의 모든 직책을 관계자들의 보통선거권에 근거하여 인선하되 동일 관계자들에게 언제라도 자기들의 파견 대표를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둘째로 코뮌은 모든 공무원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 지불하였다.”
성공적인 해방운동을 위해서는 운동의 주체들 각자가 운동과정에서 민주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유방식과 욕망구조를 몸속 깊이 새기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일이 폭넓고 심도 있게 이루어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노동자국가 건설의 성패 이전에도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주체들의 의식과 욕망구조 변화 없이 변혁의 성공도 없다. 남부군이나 지리산에 등장하는 빨치산들이 남으로부터 박해받고 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빠지는 것과 달리, 태백산맥 주요 인물들은 빨치산활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다운 존재로 거듭났다고 자부한다. 또 다른 의미 있는 사례로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매몰 사건을 겪은 33인 광부들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3일치의 식량으로 구조를 기다리며 기약 없이 버텨야 했는데, 처음에는 갈등하지만 식량을 전원이 똑같이 나누기로 합의한다. 이로써 그들은 동지애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며, 실제로도 69일만에 전원 구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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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사회 속에서 계급적 지배관계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억압과 지배관계가 계급관계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적 지배관계는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며,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억압으로 표현된다. 계급적 지배관계 내지 경제 문제가 차지하는 이러한 현실적 비중을 ‘경제주의’라는 말로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에 못지않게 각 부문들의 억압과 차별에 맞선 투쟁의 직접적 절박성과 잠재력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은 부문운동들과 적합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을 주요 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주요모순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주요모순에 힘을 집중하는 마오의 전략은 중국 해방전쟁 시기에 주효했다. 이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주요모순의 파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이 논쟁들은 변혁운동 주체들 간의 주도권 싸움과 갈등과 분열로 귀착되었고, 이 분열은 노동계급 정치세력화의 뼈아픈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꼭 하나의 주요모순 해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절대 원리는 아닐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주요모순이므로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다른 문제는 뒤로 미룰 수 있을지, 또 그렇게 하여 주요모순이 해결되면 다른 모순들도 함께 풀릴지는 미지수다. 현실적 중요도를 면밀히 파악하고(여기에는 물론 운동 내부의 치열한 논쟁과 검증과정이 전제된다) 이에 근거해 우선순위와 배율을 감안하여 역량을 효과적으로 배치한다면, 운동의 통일과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의 획기적 확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여타의 부문운동들이 주요모순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부문의 당면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도 주요모순의 우선적 해결이 더 효과적임을 확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문운동들의 역량도 주요모순 해결에 적극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인권운동 등등 여러 부문운동들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가 가로막혀 있고, 약자들의 절대적 무기인 단결투쟁의 정신이 희미하게 소멸해갈 때,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변혁운동은 극단적인 사회적 재난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불붙더라도, 노동자국가 건설을 향해 전진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남북통일 이상으로, 자본 독재에 맞서는 변혁운동들의 변증법적 통일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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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국가에 대한 꿈이나 풍요로운 평등사회에 대한 상상은 인류가 너나없이 모두 동의하고 그에 따라 발맞춰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보편적 진리나 도덕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토대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의식하고 싸움의 끝을 보려는 진실투쟁 및 의미투쟁, 곧 상부구조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속가능한 효율적 착취를 꿈꾸는 자본권력의 상부구조의 끊임없는 입체적 파상공세에 직면해 있다. 오늘의 역학관계만을 표피적으로 파악한다면 상부구조에서의 싸움은 상대도 안 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자본주의사회를 관통하는 양극화 경향과 자본축적의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적대관계들, 이로 인해 대중들이 구조적으로 겪게 되는 불행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변혁적 상부구조는 대중들의 권익과 욕구와 힘에 바탕을 둠으로써 오늘의 역학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이 근본적 변혁과 함께 이루어지는 민족통일은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의 통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