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교의 선구자, 남장로회 전킨 선교사 (1892년 ~ 1908년 1월 2일)2부
전킨 선교사는 쪽복음서를 돌리며 전도를 하였고 드루 선교사는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들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고군산멸도와 금강 상류 강경에 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러나 1899년 군산이 일본에의 개항이 되자 일본이 수덕산 일대를 조계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킨 선교사는 군산선교부를 수덕산(월명공원 일대)에서 군산의 변두리인 구암동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구암동(구멀)에서 정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산교회는 곧 난관에 봉착을 하였다. 일본의 조차에 의해 항구 일대가 다 일본인들에게 장악되자 항구주변에 살던 신도들이 다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전도가 물거품이 된 것 같았으나 뜨거운 반응이 도시 변두리와 시골에서 왔다. 시골에 사는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자 앞을 다투어 토요일 밤에 교회로 왔다. 전킨 선교사는 그들을 따라서 신도들이 사는 마을로 순회 여행을 시작하였다.
1899년에는 정규적인 예배 장소가 네 곳으로 늘어났다. 군산교회(현 개복교회), 궁멀교회(현 구암교회), 군산 대야 만자산교회(현 지경교회), 김제 송지동교회(김제시 공덕면)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계속해서 그는 통사동교회(개정 통사리교회), 남차문교회(익산 남전리)를 개척하였다.
1899년경 군산, 전주, 목포 등 세 곳의 선교센터에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있었고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공간이 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시골로 전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3주나 4주 동안 집을 떠나서 규모가 작은 성도들의 모임을 방문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미전도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순회 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텐트, 침안, 담요, 통조림, 빵, 커피, 또는 코코아, 음식을 담은 상자,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용기, 옷, 책, 소책자, 벌레약을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그는 순회전도, 거리 전도에 열심하였지만 의료, 교육을 통한 선교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전킨 부부는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1902년에 세워진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아내인 메리 레이번이 시작한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가 되었다. 그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구암병원(군산 예수병원)을 세우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순회하지 않고 선교센터 안에 머물 때는 드루 박사의 선교병원에서 환자들이 들어오면 대기하는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고 이내 그들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구암을 중심으로 하여 대야, 익산, 전주, 장항, 서천, 논산, 부여, 김제 등을 순회하였으며 금강, 만경강, 동진강 뱃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군산 선교부를 연지 8년이 되었을 때 그의 몸은 열악한 환경과 과로로 허약해졌고 아내의 병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는 순회 중에 말의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하였고 무리한 일정으로 편도선염이 악화되어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1899년 아들 시드니를 1903년에 프란시스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한 그 자신도 오랫동안 이질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될 대로 되었다. 아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전킨 선교사의 건강이 약화되자 1904년 남장로회 선교부는 그가 나은 환경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틀이 갖추어진 전주 서문교회로 발령을 냈으며 이십 리 이상의 순회전도를 떠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문밖교회에 부임하여서도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등 쉬지 않고 일하였으며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걸식아동을 돌보며 고아원을 세웠다. 전주 부근을 돌아다니며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로 6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교회 성탄절 행사로 과로한 중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얼음을 저장하는 일을 감독하며 무리한 나머지 폐렴에 걸렸다.
그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1908년 1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5)
그의 죽음 전의 모습을 선교사 불(Bull)dl 기록에 남겼다.
그가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지 유언을 쓰고 그의 아내와 몇 가지 사업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들을 불러서 자기는 그들을 떠나야 하므로 더 이상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지만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하늘의 아저비가 계신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본향에 가서 매우 행복하다”는 것이었다.6)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는 군산 지역에 있는 섬들을 돌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전킨 선교사는 아마도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웅변 실력과 유창한 언어구사 그리고 따뜻하고 자비로운 성품과 한국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겸손하고 소박하고 기품이 있는 매너로 한국인들에게 쉽게 어필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한국인들의 사랑방을 찾아가서서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본질로 선교에 임하였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헌신한 이 병사를 하늘나라로 부르셨을 때 나는 선교 경험이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선교사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장례식 때 어떤 분이 해 주었던 인상적인 말을 잊을 수 없다. 전킨 선교사를 땅에 묻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일에 대해 의문이 제기 되었다.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와서 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남선교의 개척자가 되시는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전킨 선교사는 살아 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는 슬픔에 젖어 있는 눈으로 전킨목사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에 전킨 선교사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으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7)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구암 동산의 두 아들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현재 전주 선교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저누 선교사 묘역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전주여학교❯를 ‘전킨 기념학교’ 라고 명명하여 학교 이름을 ❮기전학교❯라고 명명하였다.
한국 선교사로서의 16년 동안의 그의 삶은 실로 초인적이었다. 나라를 잃고 헤매며 고난을 당하는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충성심으로 심장이 화산처럼 타오른 그는 과로와 피곤을 몰랐다. 그는 다른 기후와 문화, 불편과 불안, 온갖 유행병과 풍토병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친구 삼아 지냈으며 끝내 조선을 사랑하여 관제처럼 부음이 되었다.
자신의 안일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삶을 일관한 전킨 선교사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2021.5.16.수, 목
우담초라하니
미주
1)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57쪽, 동연, 2010
2) 같은 책, 57쪽
3) 같은 책, 69쪽
4) 같은 책, 72쪽
5) 같은 책, 98쪽
6) 같은 책, 98쪽
7)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호난 선교 초기 역사⏌, 58,59쪽
8)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101쪽
참고서적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57쪽, 동연, 2010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호난 선교 초기 역사⏌, 도서출판 경건, 1998
*G. H. 존스 저, ⎾한국교회형성사⏌, 홍성사, 2013
*디지털군산문화대전- 전킨
*블로그 hkmo1님의 블로그, 호남선교의 개척자 전킨 선교사와 전북 군산
*블로그 이성과 영성, 전킨, 군산 복음화의 선구자, 이땅에 축구 보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