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 힘을 얻어 조금 더 걸으니 돌계단 너머로 약사암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약사암의 활짝 열린 법당문과 개운하게 쓸린 앞마당은 먼 곳에서 오는 자식들을 맞는 부모 마음을 보는 듯 반갑고 살갑습니다. 단아한 암자 뒤로는 화려한 단풍으로 단장한 바위장볍이 우직하게 서 있고, 마당 앞으로는 누고 하나 소리 높이지 않고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가는 배려에 고마울 뿐입니다. 마당 한쪽에 마련된 전망대를 찾습니다. 자줏빛으로 물든 단풍 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무인 찻집입니다. 저 멀리 울긋불긋 단풍숲에 둘러 싸인 백양사를 바라봅니다. 평지에서 느끼지 못했던 산중 사찰의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듭니다. 풍경에 취한 것일까요? 커피가 유난히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백양산
이 길로 그냥 내려가자니 못내 아쉽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다 영천굴을 가리키는 팻말을 발견합니다. 3분 여 거리라는 안내 문구를 따라 가보기로 합니다. 전망대와 암자 사이의 가파르고 좁은 샛길로 내려가니 백암산 단풍의 절정을 토해내는 풍경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는 영천 샘물을 한 모금 마시고 굴 내부를 들여다봅니다. 굴은 석조관세음보살상과 천 개의 초들로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영천굴에서 다시 약사암을 지나 백양사를 찾아갑니다. 경내에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 주위로 마른 잎들이 수북합니다. 이른 겨울을 준비하느라무성한 잎들을 모두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계절이 겨울의 문턱에 다다랐음이 새삼스럽습니다. 백양사를 걸어 나오는 길, 너른 초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유쾌한 재잘거림이 노랫소리처럼 들려옵니다. 아이들의 천진함만큼이나 언제나 함께하고픈 백양사의 가을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