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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제27장. 기자조선과 삼한의 성립
은殷의 망명인 기자箕子¹가 패잔병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서 도망 왔다.
명분을 위하여 당우唐虞의 법²을 시행하며 오행과 삼정三正³을 사용하고, 홍범무함洪範巫咸⁴을 실시하니 천웅의 도⁵와 절대로 서로 용납될 수 없었다.
은의 군사와 무리들이 부도의 남은 민중들을 무력으로 억누르니 남은 무리들이 마침내는 밝은 땅의 단을 봉쇄한 후 동해지빈東海之濱⁶으로 피하여 살았다.
바로 옛날 사례벌斯禮筏⁷의 빈 땅이었다. 사례벌은 긴 깃발로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걸고 저녁에 내려서 멀리서 지키는 사람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6촌을 건설하고 인접한 여러 족속들과 더불어 분담하여 지키면서 각자 한韓이라 칭하고 지키니 한은 보위의 뜻으로 북의 마, 남의 변, 동의 진 등 삼한⁸이었다.
부족들이 자치를 행하며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키므로 이래 천년동안 은나라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존하고 막는 일에 전념하느라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때에 하토夏土의 싸우고 빼앗는 풍조가 점점 심해져서 동요와 혼란이 삼한으로 파급되었다. 이에 6촌의 사람들이 의논하였다.
“서쪽의 화가 점점 밀려와 보수保守가 장차 위태하므로 불가불 통합하여 방비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계를 정하며 요새를 설치하고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합방비 하는 일을 맡겼다.
모든 족속들이 또한 수령을 세워 방비하니 남은 백제요 북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⁹하고 서쪽에서 침범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완전히 지켰다.
[원문] 殷之亡人箕子 率敗軍難民 逃來於符都之西 爲名行唐虞之法 用五行三正 施洪 은지망인기자 솔패군난민 도래어부도지서 위명행당우지법 용오행삼정 시홍
範巫咸 與天雄之道 固不相容 殷之軍民 武壓符都之遺衆 遺衆 遂封禁明地之壇 범무함 여천웅지도 고불상용 은지군민 무압부도지유중 유중 수봉금명지지단
避住於東海之濱 卽昔世斯禮筏之空地也 斯禮筏者 長旗 曠野之謫人 朝揭暮藏 피주어동해지빈 즉석세사례벌지공지야 사례벌자 장기 광야지적인 조게모장
使遠居之守者 知其不逃也 乃設六村 與隣接諸族 分擔共守 各稱韓而保之 韓者 사원거지수자 지기부도야 내설육촌 여인접제족 분담공수 각칭한이보지 한자
保衛之意 北馬南弁東辰之三韓 自行部族之治 固守先世之道 邇來千年之間 不 보위지의 북마남변동진지삼한 자행부족지치 고수선세지도 이래천년지간 불
納殷箕之法 專以保防爲事 殆無餘力 於是 夏土爭奪之風 漸次激甚 動搖混亂 납은기지법 전이보방위사 태무여력 어시 하토쟁탈지풍 점차격심 동요혼란
波及於三韓 是時 六村之人 相謀以爲西禍漸迫 保守將危 不可不統合防備 遂限 파급어삼한 시시 육촌지인 상모이위서화점박 보수장위 불가불통합방비 수한
境設塞 推擧赫居世 委任統御之事 諸族 亦擧首領而防備 南曰百濟 北曰高句麗 경설색 추거혁거세 위임통어지사 제족 역거수령이방비 남왈백제 북왈고구려
高句麗 仍卽恢復北堡之地 軀遂西侵之人 完保其域 고구려 잉즉회복북보지지 구수서침지인 완보기역 |
[해설]
1. 기자箕子
이름은 수유이고 자는 서여이다. 기箕는 나라이름이며 자子는 작위이다. 기자가 다스리던 곳은 산서성 태원시 남쪽의 기국이다.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 은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이 된 후 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부도지』는 기자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기자는 단군조선으로 망명한 후 부도의 법과 다른 당우唐虞의 법을 시행하며, 오행과 삼정을 사용하고, 홍범무함을 실시하여 고조선의 민중들과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력으로 억누르므로 고조선의 민중들이 동해의 바닷가로 피하였다고 한다.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하여 은나라의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부도의 백성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기자가 어떻게 부도(아사달, 조선)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부도지』제26장에 의하면 기자가 부도로 망명하기 일백여 년 전부터 부도(아사달, 조선)는 이미 통치체계가 와해된 상태에 있었다.
기자가 침범한 후 부도(아사달, 조선)의 땅은 춘추시대에 선우국鮮于國으로 이어졌다. 『회남자』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朝鮮에 봉해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 하북성 平山으로 추정)에 봉해졌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라 했다.”고 한다. 또 중국 고대사학자인 하광악何光岳이 쓴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역림易林’편에 “기자가 하북성 북쪽으로 이동하여 선우국을 세웠다.(箕子北遷河北 建立鮮于國)”고 하였다. 중국고지도인『청국지지淸國地誌』에 수록된 「춘추전국도」를 보면 선우국鮮于國의 위치가 하북성 백석산 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사기』·『한서』·『위략』·『삼국지』등 중국의 각종 사서에서 기자가 갔다는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로, 이곳에 고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있었다.
선우국은 춘추시대 강대국인 진晉과 60여 년간(BC 507~BC 449년) 12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춘추말 전국초인 기원전 414년에는 중산국中山國으로 나라이름을 바꾸었다. 중산국은 태행산맥 아래에 위치하였고, 위나라, 조나라, 제나라, 연나라에 둘러싸여 있었다. 중산국도 주변국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기원전 408년에 위나라에 병합되었다가 기원전 380년 환공桓公 때 재건된 후 조나라와 연나라를 거의 멸망시킬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그러다가 BC 296년 조나라 무령왕에게 멸망하였다. 중국고지도인『청국지지淸國地誌』에 수록된 「전국칠웅도」를 보면 중산국의 위치도 선우국鮮于國과 마찬가지로 하북성 백석산 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산국은 전국칠웅 중의 하나로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1973년과 1974년 두 차례의 발굴로 그 실체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1973년과 1974년 두 차례의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73년 5월 톈진시天津市 우칭셴武淸縣에서 827자가 새겨진 동한시대의 비석이 확인되었다. 비석 상단에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로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는 동한시대 환제 때인 AD 165년임을 뜻하는 연호가 새겨져 있었고, 다음과 같이 선우의 조상이 은나라 기자임을 밝히고 있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
또 1974년 11월,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싼지셴三汲縣. 수리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진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곳에서 중산국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중산왕 착錯의 무덤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됐다. 정(鼎·예기로 쓰인 솥)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 등 강대국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베이징~톈진 사이 우칭셴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ㆍ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이형구ㆍ이기환 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자가 도망간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이곳에 고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있었다. 기자조선은 춘추시대에 선우국鮮于國으로 존재하였으며, 춘추말 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기원전 414년 ~ 기원전 296년)으로 이어지다가 296년 조나라에게 멸망하였다.
한편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중산국 멸망후 어느 시기엔가 기자조선이 다시 부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위만衛滿이 기자조선에 망명하여 정권을 탈취함으로써 기자조선은 막을 내렸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중심지는 모두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의 왕검성이었다. 그리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단군조선의 법통을 계승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는 삼조선과 삼한이 양립하는 시기였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삼조선의 일부인 변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2. 당우唐虞의 법
요임금과 순임금의 법으로 제왕지도帝王之道의 패권주의이다.
3. 오행과 삼정三正
오행은 오행설을 말하며, 삼정은 자子 ․ 축丑 ․ 인寅을 정월로 삼는 역법을 말한다.(『부도지』 제22장) 부도(아사달, 조선)에서는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정월로 삼고 조제를 올리며 하늘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면 중화족들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정월을 자월ㆍ축월ㆍ인월로 역을 바꾸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하였다.
부도의 역이 천수지리天數之理와 해혹복본解惑復本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짐으로써 수천 년을 변함없이 이어진 반면, 중화족들의 역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역이 바뀌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대에는 역법이 정치ㆍ종교ㆍ철학ㆍ문화 등 모든 인간생활의 중심에 있었으며, 10월을 정월로 삼는 한민족의 역법과 자월 ․ 축월 ․ 인월 중 하나를 정월로 삼는 지나족의 역법이 서로 대립하였다. 역법은 천자국만이 제정할 수 있었으므로 어떤 민족이 어떤 역을 사용하였는지 알면 그 소속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기자가 부도(아사달, 조선)로 망명와서 지나족의 역법을 쓰려고 하였으므로 고조선 민중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초기에는 10월을 정월로 하는 고조선의 역법을 사용하였다. 진나라와 한나라도 고조선의 통치이념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훗날 한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한 후 비로소 자子월을 정월로 하는 지나족의 역법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은나라 정월이자 한무제가 변경한 정월이기도 한 음력1월을 설날로 쓰고 있으며, 1만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으뜸 명절인 10월 상달의 개천절 행사는 빛을 바래고 있다. 한반도에 갇힌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10월 상달의 개천절 행사를 거국적인 축제로 승화시키는 날, 한민족 웅비의 날이 다시 오리라!
4. 홍범무함洪範巫咸
홍범구주라고도 한다. 중국 하나라 우禹왕이 남겼다는 정치 이념으로, 즉 9개 조항의 큰 법이라는 뜻이다.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얻은 낙서를 보고 만들었으며,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기자가 홍범구주를 가르쳤다고 한다. 『서경』 주서周書 홍범편에 수록되어 있다. 9조목은 오행ㆍ오사ㆍ팔정ㆍ오기ㆍ황극ㆍ삼덕ㆍ계의ㆍ서징 및 오복과 육극이다.
5. 천웅의 도
『부도지』는 제11장에서 “천웅의 도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미암은 바를 알게 하였다.”고 짧게 언급하였을 뿐 ‘천웅의 도’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환웅천왕이 ‘천웅의 도’를 세운 이래로 기자의 망명이 있기까지 우리 한민족이 수천 년의 세월을 지켜왔음을 알게 한다. ‘천웅의 도’는 해혹복본解惑復本을 바탕으로 하는 ‘마고의 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혹복본은 “의혹을 풀고 근본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의혹을 풀기 위하여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데, 부도의 진리는 기화수토설氣火水土說, 하도河圖, 『천부경天符經』, 부도역符都易 등이다. 이는 기자가 시행한 당우의 법과 오행과 삼정 및 홍범무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은 부도의 조선을 가리켜 천독天毒이라 하였다. 이 글에 대하여 중국 진나라 시대의 학자인 곽박(郭璞, 276~324)은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국天竺國이다.” 고 하였으며, “부도浮屠가 이 나라(조선)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부도浮屠란 원래 부다(붓다=부처), 불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환웅천왕이 단군임검의 부도에서 부처로 받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오늘날 불교에서 부처를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르는 것을 보더라도 ‘천웅의 도’는 불교의 모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부도지』 제13장)
6. 동해지빈東海之濱
기자의 법을 따르기 싫어서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곳이다. 기자는 산서성 태원시 남쪽의 기국箕國을 다스렸으며, 은나라가 망한 후 태원시 북쪽으로 피하여 살다가 부도의 서쪽에서 부도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부도의 민중들은 기자를 피하여 동해쪽으로 이동하였다.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동해지빈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부도지』는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가 일어나서 부도를 재건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역사를 이해하려면 동해지빈이 어디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과연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동해지빈東海之濱은 어디일까?
(1) 동해의 ‘빈濱’ 지역
중국의 동쪽 해변에 위치한 빈濱 지역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하북성 천진시의 남쪽 해변이다. 춘추열국도 등 중국의 여러 고지도에 지명이 빈濱으로 나타난다.(향고도/중국고지도/청국지지/춘추열국도) 부도의 민중들이 기자와 전쟁을 하다가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기자의 법이 따르기 싫어서 피하는 상황이므로 부도에서 멀리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도지』에서 말하는 동해지빈은 부도에서 가까운 ‘동해의 빈濱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빈濱지역은 황하에 의하여 섬처럼 구분되어 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 빈濱지역은 후일 한무제 시대에 창해군蒼海郡이 된 곳이다. 『사기』와『한서』에 의하면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후한서』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은 원삭 3년 봄 폐지되었고, 도로 위만조선에 속하게 된 곳이다.
(2) ‘동해東海’라는 지역의 물가
중국 산동성의 남쪽 바닷가에 ‘동해東海’라는 지명이 있었다. 부도의 민중들이 피신한 곳은 ‘사례벌斯禮筏의 빈 땅’으로 죄인의 귀양지라고 하였다. ‘동해’ 근처의 우산羽山은 순임금 당시에 우임금의 아버지인 곤이 귀양가서 죽은 귀양지이므로 ‘동해’도 『부도지』의 동해지빈에 부합되는 지역이다. 그리고 부도의 민중들이 나중에 신라를 세우는데, 신라의 처음 이름이 서라국徐羅國이고 ‘동해’ 부근이 서주徐州인 점도 비슷하다.(『부도지』 제32장)
(3) ‘동해의 바닷가’라는 일반적인 의미
단군임검의 부도는 중국 양자강에서 발해만을 빙 돌아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바닷가의 요소요소에 8곳의 해시海市를 열어 서로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따라서 동해 바닷가 어디라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따라서 위의 장소 이외의 지역도 가능성을 가지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7. 사례벌斯禮筏
사례벌은 긴 깃발로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걸고 저녁에 내려서 멀리서 지키는 사람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수도를 사례벌 혹은 서라벌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다. 아울러 초기 신라의 위치가 거칠은 광야로 죄인들의 귀양지였음을 알 수 있다.
8. 삼한
마한ㆍ진한ㆍ변한이다. 부도(아사달)의 민중들이 기자를 피하여 동해지빈으로 이동한 후 인접한 여러 족속들과 삼한을 건설하였다. 삼한의 위치는 중국 하북성의 호타하 남쪽 지역이다. 고조선은 삼한 또는 삼조선의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단군조선이 분열되면서 호타하 북쪽의 삼조선과 호타하 남쪽의 삼한이 병립하게 되었다. 훗날 한반도에도 삼한이 건설되어, 2개의 삼한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삼한을 배경으로 삼국이 일어나므로 신라ㆍ고구려ㆍ백제 또한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각각 존재했을 개연성이 크다.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나오는 삼한 또는 삼국의 기록은 대부분 중국 대륙의 삼한 또는 삼국에 대한 기록이다.
9. 고구려는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
부도의 민중들이 고구려ㆍ신라ㆍ백제를 세우고, 고구려는 곧바로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부도의 북보는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부도지』 제13장) 고구려가 세워지고 곧바로 북보의 땅을 회복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지켰다는 것은 고구려가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에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북보의 관할지역인 대륙의 북쪽지역을 모두 회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구려가 요령성 집안이나 길림성 장춘부근 등 만주에서 일어난 것으로 배워왔다. 『부도지』에서 말하는 지역과는 동쪽으로 수 천리나 떨어진 곳이다. 『부도지』의 이 증언은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폭발력이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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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초기 중심지 |
본문의 내용에 따라 삼국의 초기 중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부도(아사달)의 북쪽 보단保壇이 위치한 하북성 장가구시와 탁록 일대이다. 신라는 기자를 피하여 동해지빈東海之濱으로 이동하였는데, 하북성 천진시 남쪽으로 한나라 시대의 창해군滄海郡 지역이며, 오늘날의 창주시滄州市 일대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쪽이며, 신라의 서쪽으로 대방帶邦 지역이다. 곽박이 『산해경』의 주석에서 열수列水가 대방에 있다 하였고, 열수는 호타하이므로 대방은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석가장시 일대이다. <끝>
첫댓글 머리가 나빠서 공부가 안되니~`이거원,,잘보았습니다
중국의 북경, 남경, 서경.....일본의 동경...그럼 중앙은?..................경(京)은 서울...황제가 거하는 곳이죠...
그렇다는건 북경,남경,서경,동경은 황제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거대한 대륙은 이제 분열을 맞이합니다. 일본은 ..쩝..제가 살고 있지만...침몰합니다...홋카이도만 조금 남지요....
대단한 공력입니다. 계속 후속작을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