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55/111205]이런 우정과 이런 배려
‘108(백팔)’이란 숫자를 엄청 좋아하는데, 이런 제목의 글을 항상 108편으로 막(幕)을 내리고 또 다른 제목으로 생활잡문을 쓰기 시작한 지 어언 12년이 되었다. 대체 얼마나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을 것인가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 적이 무릇 기하였던가. 하지만, 그게 나인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맨처음 시작한 게 <백수일기>였다(나중에 ‘자유인일기’로 문패를 바꿨지만). 이후 <직딩일기> <우천의 생활이야기> <오목교통신> <우천산고(散稿)> <행복어칼럼> <살며 생각하며> <은행잎편지> <살며 사랑하며> 등이 그것이다. 틈틈이 공기관 월간지에 칼럼을 5년간 썼고, 일간지나 ‘전라도닷컴’ 등 잡지에 칼럼이랍시고 몇 편 선을 보인 것까지 합하면, 대체 글자수가 몇 만자나 될까? '꼴통'이라면 참 꼴통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로 '기록(錄)의 바다'에서 '영원히 헤엄치는(泳)'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부산물이 ‘열매’라 할 수 있는 수필집이나 문집으로 나온 게 6권이 되었으니, 아무튼 ‘글’하고는 인연이 있어도 ‘모진 인연’이라고 할 듯하다. 중간에 <누비처네>라는 수필집의 100여편을 읽고 절망하여 몇 달 동안 절필(絶筆)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피천득 선생을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인 것을 어이 하랴. 또 끄적거리는 ‘고급병’에 걸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좀 생각을 달리 하리라, 마음을 먹다가도 깜냥이 이것밖에 안되기에 나도 모르게 ‘똑같은 글’을 쓰고 말아, 막역한 친구로부터 “‘감정 과다배출병’으로 남들에게 ‘공해(公害)’를 안긴다”며 애정의 욕도 많이 얻어 먹었다.
하여, <新너더리통신> 1부 54편을 끝내고 신새벽 컴퓨터 자판을 외면해보려 노오력도 해보았다. 그런데 그게 ‘악습(惡習)’인지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날짜를 보니 11월 9일, 겨우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쓰고 싶은 글감들이 자꾸 떠오른다. 말하자면 손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에라이-, 누구에게 읽으라고 쓰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제 곧 사회생활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젊은 날(40대 후반∼60대 초반)’ 마구 흘린 잡문 나부랭이나 읽으며 소일(消日)하자는 심정으로 오늘도 자판을 두드린다. 잊혀진 추억들, 잊고 싶은 기억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무수한 일화들, 글을 통하여 만난 많은 인간관계 등을 소가 되새김질하듯, 나의 생활찌꺼기를 반추(反芻)해볼 생각이다. 취미치고는 제법 고상틱하지 않은가.
오늘의 글감은 ‘이런저런 우정과 배려’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하다면 나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11월초 광양에서 산부인과를 경영하는 의사친구가 카톡을 보내왔다. 몇 년만에 어쩌다 한번 만날까말까하는, 관계가 제법 소원한, 그렇지만, 한때(초등 6∼고등 1년)는 5년 동안 내리 한 반이었고 요즘말로 ‘절친’이었다. 문과 이과로 갈리고, 대학도 그 친구는 전북의 의대로, 나는 서울의 문과대로 진로를 결정한 이후, 별 일도 없었는데 자주 만나지 못했다. 졸업 20주년 기념행사때 모교에서 십수년만에 보았는데 화들짝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심상한 표정이었다. 순간 기분이 팍 상해서 ‘어, 저놈 봐라’ 하는 심정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왜 있지 않은가? 나는 너무 반가워 보듬기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거의 남 보듯이 할 때의 뻘쭘함. 그래서 그렇게 또 헤어지고, 10년만인 30주년때 또 만났는데, 그때는 제법 살갑게 굴었기에, 순천에 가는 길에 일식집에서 저녁도 같이 먹은 적도 두어 번 있었다. 저도 반가웠던지 해설사까지 동원해 순천만 전역과 노을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 친구가 11월초 “18일 서울 가는데 보자”는 카톡을 보내 왔다. 무조건 반가웠고 100% 오케이. 일요일에 자기들 학회 세미나라도 있으니, 토요일에 상경해 만나자고 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약속장소인 지하철입구에서 보니 가방 하나 없는 빈손이었다. 날씨는 그날따라 오지게 추었다. “왜 빈손이냐”는 질문에 “너 보러 왔는데 무슨 가방타령이냐”는 것. “뭐?-나만 보러 왔다고?” 놀랐다. 솔직히 여유가 있어도 쉽지 않은 게 아랫녁에서 서울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예 내일 오전 10시 KTX도 끊어놓았다 한다. 이 친구가 나를 이 정도로 생각했는가 싶어, 정말 놀랐다. 마침 아내가 2박3일 나들이를 갔기에 우리집을 가자고 하니, 호텔 숙박비를 사전결제했는데 취소가 안되니 같이 자자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으나 내일 오전 약속이 있어 곤란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멀리서 나만 보려고 왔다는데. 할 수 없이 “신새벽에 나올테니 이해해 달라, 네가 미리 말하지 않은 잘못”이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동대문 닭집에서 각 1병을 마시고 남영동 호텔로 택시를 탔다. 호텔방에서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시덥잖게 살아가는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어쩌면 처음으로 ‘동침’을 했다. 쑥스럽게도 “글 잘 쓰는 친구가 자랑스럽다”는 말도 했다. 요즘엔 전국 어디서든 출산율이 형편없어 큰일이고, 산부인과는 더 큰일이라고 한다. 산부인과병원이 곳곳에서 문닫는 소리가 들린다며 한탄도 했다. 정말 그럴 것도 같다. 이것은 무조건 몇 년 앞도 못보는 ‘정부의 잘못’이다. 1986년 전주 예수병원의 레지던트였던 이 친구가 내 큰 애를 직접 받아냈다고 한참을 놀려 민망한 적도 있었다. 신새벽 코를 고는 친구를 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만 보러 왔다는데…’ 이 친구의 마지막 말이 유독 기억에 남고 쓴웃음을 짓게 했다. “의사로서 말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성관계를 자주 가져라. 근육이 굳어진다. 이 말 하고 싶어도 왔다”는 것이다. “매친 넘”이라고 일축했지만, “농담 아니니 진지하게 들어라. 아내와 하면 더 좋지만, 안되면 다른 여자하고라도 해라. 안되면 비아그라를 먹어서라도” 진지했다. 정말일까? 이 말 해주려고 일부러 올라왔을까? 휴우-. 60을 살다보니, 이런 고마운 우정(友情)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잘 내려가라. 나도 시간내어 너만 만나러 함 가마.
전남 광주에 ‘희한한, 믿기 어려운’ 공부모임이 있다. 이름하여 ‘무등공부방’. 2010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각계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일반인들이 꾸준히 공부를 해왔다고 한다. 벌써 370회를 웃돌았다던가. 그 공부모임을 만들어 현재도 이끌고 있는 분이 강정채 이사장이다. 그 분은 심장전문의인데 전남대 총장을 그만둔 후 맨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문화계 마당발 선배가 '이 시대 숨어 있는 현자'라고 상찬(賞讚)한 분이다. 소책자 강사 명단을 보니 학계 등 각계에서 명망이 쟁쟁한 분들이다. '전라도닷컴' 황풍년 대표의 추천으로 그 '무등공부방'에 초청을 받아 11월 14일 KTX로 광주를 다녀왔다. 영광(榮光)이었다. 처음 들은 모임, 가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나의 인문학 특강 주제는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90분 강의는 자찬(自讚)이지만, 영양가(營養價)가 있었을 것이다. 광주에 사는 고교동창친구도 다음날 카톡으로 ‘정말 좋은 강의, 잘 들었다. 고맙다’라는 문자를 보냈으니, 자랑할 만한 일 아닌가.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3시 30분 송정역에 내렸는데 마중을 나와서 6시간 동안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준 어느 50대초 여성의 ‘배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초 부모님이 출연한 ‘인간극장’ 5부작을 열심히 시청했다고 한다. 그후 얼마 지나, 시댁에서 가까운 우리 시골집을 찾아와 고맙게도 음료수 한 박스를 드리며 건강하게 사시라고 인사를 했다던가. 그 남다른 고마움에 나는 책을 몇 권 보내며 카톡을 주고받았다. 하여 나는 ‘S오라버니’가 되고 그녀는 ‘S동생’이 된 것. 요즘 세상에 참 희한하다면 희한한 인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난 8월말 전남에 간 김에 처음으로 터미널 다방에서 만나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수더분하고 숫기도 전혀 없게 생겼는데, 어떻게 친정부모 찾듯이, 우리 시골집을 몇 차례 찾으며 ‘진짜 막내딸’처럼 할 수 있을까, 신기했다.
하여, 이번에도 광주 특강소식을 알리니 당연히 마중을 나와 ‘빈 시간’을 같이 해주겠단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5․18기념공원(옛 상무대 터)을 한바퀴 돌고 무각사(無覺寺) 절집 카페에서 쌍화탕 한 그릇을 마셨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이런 친절이 가능하다니? 특강도 듣고, 끝난 후 모임사람들과 저녁을 같이 하며, 배웅까지 해주었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을까? 이것도 진짜로 ‘흔치 않는 일’, 나의 인복(人福)이 이제 여기까지 미쳤다. 기독교에서 말하듯 ‘범사(凡事)에 감사(感謝)하라’는 말은 딱 이 경우에 맞아떨어진 듯하다. 고맙다. 광주 누이여. 대접만 받고 아쉽게 올라오는 길, 판교집에 들어오니 12시 40분. 잠이 달디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