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픽션은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게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가까운 이의 이야기는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
이강산 선배와는 딱 두 번 만났다. 광주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날렵해 보이는 몸과 희끗한 턱수염 그리고 깊은 눈.
첫 번째는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했고, 두 번째 오래 같이 했다. 오래 작업해 온 흑백 사진과 연작 달방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선배는 빛났다. 보내준 사진집과 시집에서도 그 빛은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선배는 다시 달방에 든다 했고 두어 번 달방 사진이 여기 보이더니 어제 암실 작업 사진이 올랐다. 두 계절쯤 지나면 전시회라 한다. 기다린다.
<나비의 방>은 그렇게 두 번 만난 선배를 아주 오래 알고지낸 선배로 만들어준다.
나비의 방. 역설이다. 나비의 세계는 창공이다. 들판이다. 그런 나비에게 방이라니. 그 방이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좀 나을까. 그러나 여기 제목 나비의 방은 헤세의 <나비>를 인유한다. 그러니 그 방은 나비가 주체가 아니라 나비를 수집한 자가 주체다.
헤세의 이야기는 이렇다. 하인리히는 자신은 갖지 못한 친구의 공작나방을 훔치다 바스라뜨린 후 그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하지만 친구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자신이 수집했던 나비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나비의 방을 스스로 부숴버린 소년, 친구의 경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깨달은 상징처럼 보이는 그 과정을 통해 그는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제임스 조이스의 "Araby"의 소년이 첫사랑의 환상을 깨며 돌아오던 길만큼 주인공 하인리히의 성장도 가슴아픈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나비도 방도 있다. 누군가의 카메라거나 가슴에 그린 타투이거나 혼자 세계를 만나는 암실이거나 아니면 걷는 일이거나 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이거나. 무엇이건 자기만의 나비가 있는 이는 행복하다.
나비의 방은 부숴지기도 한다는 데 비극이 있다. 문이 열리고 나비는 부숴지고 카메라는 가까운 이의 손에 박살나고 빛은 들어 암실의 필름은 망가지고 몰래 그려둔 나비 그림은 드러나고 걸어야 하는 이의 다리에 족쇄가 채워져 주저앉게도 된다.
헤세의 하인리히가 스스로 나비의 방을 부쉈던 반면 <나비의 방>의 인물들은 대부분 타자의 손에 자신의 나비를 잃는다. 형도 양원장도 민도 그리고 주인공인 나도. 소설은 그 각각의 모습을 나의 앵글로 보여주지만 사실 내가 보는 것은 그들 속의'나'다. 그래서 그들 모두에게는 '내'가 있다.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까닭이다. 아직 자신의 나비의 방이 파괴되지 않은 인물은 '나'의 부인 하나지만, '나'는 안다. 그 견고해 보이는 방 또한 깨거나 깨져야 한다는 것을.
자신만의 나비의 방을 갖는 욕망도 그 욕망을 깨거나 그 욕망이 깨지거나 하는 것도 필연이다. 시간은 그런 것. 산다는 것도 그런 것. 그렇다고 멈출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걷는 것이다. 안개 자욱한 삶의 거리를 걸어가는 것. 인생은 필연적으로 '홀로 걷는 역마살'의 여정 그 위에 있는 것이다.
뱀발) 다행스러운 것은 지체장애 3급인 '나'의 막내 여동생이 '사지 멀쩡한' 남자와 행복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나비의 방은 아직 환한 봄이다. 세상 어디 부숴지지 않는, 부숴서는 안 되는 나비의 방 하나쯤 있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