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丁酉再亂胡伐峙戰蹟地] 전북기념물 제30호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왜병을 맞아 혈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 고개의 싸움터.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개암사에서 줄포 쪽으로 2km쯤 가다 보면 낮은 오르막길이 나오고 오른쪽 노변, 공원 같은 경내에 비석과 사자상 등이 세워져 있는 곳이 호벌치이다.
임진왜란 때 채홍국(蔡弘國)은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근방에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려 부안, 흥덕, 고부, 고창 등지에서 충의지사들이 모여들었다. 92명의 지사들은 1592년 9월 16일 흥덕의 남당에서 삽혈동맹을 맺고 궐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곡식 400석을 모아 권율 장군에게 보내 300석은 해운 편으로 임금이 머물고 있던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보내게 하고, 나머지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 후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왜군들은 그들의 주력 부대를 전라도에 투입하여 호남 각지가 적에게 유린되었다. 왜병들은 바다를 이용, 변산반도에 상륙하여 줄포로부터 부안읍으로 진격해왔다. 이때 채홍국은 다시 뜻있는 의사 33명을 더 모집 하여 총 126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고창군 흥덕 회맹단에서 혈맹하고 1월 27일에 호벌치 고개에서 왜병을 맞아 싸웠다. 당시의 순절기에 따르면, 3월 23일에 배풍령(排風嶺) 싸움에서 채홍조가 전사 하였고 24일에는 이탁과 승려 만세(萬世), 김영 등이 전사하였다. 4월 16일에는 채우령과 이시화가, 4월 17일에는 이익성이, 4월 18일에는 임추가, 그리고 4월 19일에는 오몽서와 김귀복이 전사하였다.
4월 20일 전투에서는 조익령이 적의 급습을 받아 위급하게 되자 채홍국이 이를 구하려다 적의 칼에 맞았다. 두 아들 채명달, 채경달이 아버지를 구하려 하였으나 이미 늦어 숨지고 말았다. 그러자 두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삼부자가 모두 이곳 호벌치 싸움에서 순국하였다. 또한 유희방, 이유, 김홍원, 김경덕, 김경장, 권대붕 등도 별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싸웠다. 유희방은 적병 수백 명의 머리를 베고 9월 15일 전사하였다. 이유는 감교리(甘橋里)의 청등(靑燈)고개에서 3일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전사하자 그의 부인 부안김씨 역시 죽창을 들고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 김홍원은 이곳 싸움에서 적의 토로를 끊고 수륙양면작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965년 8월 이곳에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호벌치라는 지명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留陳峙)와 주류성(周留城) 일대에 통수부(統帥府)를 설치하였던 데에서 비롯 되었다고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