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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21년 1월 17일, 주현 후 제2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1월 17일, 주현 후 제2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주현 후 제2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 교독 시편 시편 139:1~6, 13~18절까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 함께 기도합니다. [오리게네스(Origen)를 따라]
(실시간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주 예수님, 눈 먼 자들의 눈을 만지신 것처럼
우리의 눈을 만져주소서.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것들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소서.
주 예수님,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우리의 삶을 정결케 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소리들 속에서
참된 소리를 듣고 인지하며
우리 자신 안에서 온전함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3:1~20절입니다. (성경)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 특별 찬양 -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 말씀 선포: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1. 들어가는 말
주현 후 제2주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살아야 한다는 그리고 어디로 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늘 듣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 봅니다.
본문을 요약해서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여 이상(異像)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에(1), 제사장 엘리는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고, 사무엘이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잘 때,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엘리에게 다가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지만 엘리는 그를 부른 적이 없습니다. 세 번 그런 일이 반복될 때에,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깨닫고, 다시 또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일러줍니다. 다시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사무엘은, 엘리가 일러준 대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1)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엘리의 아들들로 인한 엘리 집안의 무서운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로 세우고 늘 함께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면서 삶을 꾸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흔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일까요? … 부터 살펴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여 이상(異像)이 보이지 않던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여 이상(異像)이 보이지 않았다 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말은, 자신의 밖이 아니라, 자신의 안을 돌아본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기(生氣)는 인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입니다. 그는 사울 왕과 다윗 왕을 세우면서 왕조시대를 연 인물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사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혹은 직접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왕조시대는 왕이 통치하고,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선지자)를 통하여 (왕에게)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다윗조차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나단 (혹은 갓)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왕이 되기 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구절이 있기는 있습니다 만은, 사사 때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다윗이 큰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고, 그의 응답으로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제비뽑기인)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0:7-8,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이것은 사사시대와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런 표현도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다는 마음을 품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ref. 사무엘하 7:5~16; 사무엘하 7: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후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고, 아들을 낳았을 때도,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말씀합니다. (사무엘하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다윗이 말년에 인구를 계수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여 벌을 내리실 때에도 선지자 갓을 보내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24:11-12,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다윗이 그러할진대, 여타 다른 왕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사실, 솔로몬 때 하나님께서 두 번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11:9b, “…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첫번째는 (여호와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열왕기상 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두 번째는 여호와의 성전을 다 지은 후 성전 봉헌식이 끝난 후에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열왕기상 9:1-3,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두 번 모두 다 사실은 왕으로서라기보다는, 제사장과 같은 직무를 행할 때, 곧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로 제사할 때와 성전을 다 짓고 성전 봉헌식이 끝났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왕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상을 드러내셔서 말씀하시지 않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까요? [*. 사울 왕의 경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28:6-7,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사와 달리 왕은 백성들을 고역에 처하게 하고, 왕을 위해 양식을 빼앗아 자신과 자신의 신하들에게 주고, 백성들을 끌어다 왕의 종으로 삼게 됩니다(ref. 사무엘상 8:11~17).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시키게 됩니다. 이 때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그럼에도 백성들이 왕을 원한 것은 ‘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무엘상 8:19-20,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한마디로 하면, 왕은 ‘싸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왕은 싸움(전쟁)을 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왕의 에고(ego)라는 관념이 만들어집니다. 사사와는 달리, 왕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강과 함께 흘러가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도전을 좋아하고 싸우고 싶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상대가 없다면 상대를 만들어서라도 싸웁니다. 왜냐하면 싸움 속에 에고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싸우고자 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싸움은 우리의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투고 나뉘게 됩니다.
[*.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고역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보다 더 무겁게 하겠다고 말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잃게 되고, 나라는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rer. 열왕기상 12:1~20; 열왕기상,12: 4, “왕의 아버지(솔로몬)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르호보암)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열왕기상 12: 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솔로몬)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르호보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3.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 “나”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는 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자리한 ‘나’입니다.
김난도가 쓴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거리에 나가면 약도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 당신은 지도에 무엇부터 찾나요? 당신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you are here’라고 쓰인 ‘현재 위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 놓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좌표를 알려주지 않으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현재 나의 위치’(I am here)를 찾지 못하면 목표도 실행 계획도 무의미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듣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거죠? 내가 듣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수 많은 지식을 쌓아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현재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채 지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 이야기 하나 더 들려드립니다. 라비아 알 아자비아(Rabia Al Adawia)의 일화: 라비아라고 하는 지혜로운 할머니가 밖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할머니, 무엇을 찾고 있어요?’ 할머니가 답합니다. ‘바늘을 찾고 있지.’ 사람들이 할머니를 도와 함께 한참을 찾아도 찾지 못하자, 사람들이 다시 묻습니다. ‘할머니 어디에서 잃어버리셨는데요?’ 그러자 할머니는 방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니 방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어째 밖에서 찾습니까?’ ‘방이 어둡잖아, 여기는 밝고.’ 그러자 사람들이 킥킥대며 할머니를 조롱하죠. ‘아니, 할머니 잃어버린 곳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지, 다른 데서 찾으면 찾을 수 있나요?’ 그러자 지혜가 넘치는 이 할머니는 말하기를, “그러는 당신들은 왜 잃어버린 자신을 ‘밖’에서 찾고있는가?” 라고 되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밖은 무엇일까요? 재물, 권력, 명예, 전쟁, 지식, 교리, 가족, 이웃, 스포츠, … 등등 자신(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everything except yourself(God)]입니다. 자신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곳 곧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요? 혹은 무엇인가요? 인간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인간은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을 통제하는 오감(五感, 보기, 듣기, 맛보기, 냄새 맡기, 감촉)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감을 통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통제하는 지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식인이 보는 관점입니다.) 지성을 통제하는 참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신을 믿지 않는 수행자가 보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참나를 통제하는 생기(生氣,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와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인, 생기가 참나를 구성하여 통제하고, 참나가 지성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지성이 마음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마음이 오감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오감이 몸을 구성하여 통제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가장 건강한 ‘나,’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감이 몸을 구성하여 통제하지 못하면 ‘장애인’이 됩니다. 마음이 오감을 구성하여 통제하지 못하면 ‘난봉꾼’이 됩니다. 지성이 마음을 구성하여 통제하지 못하면 ‘사회부적응자’가 됩니다. 참나가 지성을 구성하여 통제하지 못하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숨, 생기가 참나를 구성하여 통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임하나요? 몸, 오감, 마음, 지성, 참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인 생기(生氣)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일부분이 생기인 까닭입니다. 생기가 맑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생기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참나를 거쳐, 지성, 마음, 오감, 몸으로 내려가, 참나로 드러나고, 지성으로 드러나고, 마음으로 드러나고 오감과 몸에 이르기까지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기를 거치지 않고, ‘참나’에 이르렀다 하면 거짓 참나, 곧 왼갖 잡동사니 사이비 신비주의가 판을 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기와 참나를 거치지 않고 ‘지성’에 이르렀다 하면, 왼갖 잡동사니 지식들이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기와 참나와 지성을 거치지 않고 ‘마음’에 이르렀다 하면 사람들이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 됩니다. 세상에 사이비 신비주의, 거짓된 미혹하는 지식, 이기주의자들이 이리도 많이 판치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인 ‘나’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심, 곧 ‘생기’에 이르지 못한 까닭입니다.
4. 말씀이 육신으로 되신 예수,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
지난 주에, 우리는 요한복음 1장 4-5절을 빌려, 하나님의 몸은 말씀이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나신 하나님의 몸, 말씀은 예수이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생기에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참나, 지성, 마음, 오감, 몸으로 드러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믿고 고백하는 것’은 그 지평이, 곧 시선이 ‘밖’에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믿고 고백하면서도’ 참 행복에 이르지 못한 까닭은 ‘믿고 고백하는 것’의 지평이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몸, 오감, 마음, 지성, 참나에까지 이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숨인 ‘생기’에 이르지 못하면 나의 ‘안’에 온전히 이르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고 고백하는 것’이 생기에 이르지 못한 채, 참나에 그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신앙인이 되고, 지성에 그치면 율법주의 신앙인이 되고, 마음에 그치면 독불장군 신앙인이 되고, 오감과 몸에 그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양심에 화인 맞은 신앙인 혹은 난봉꾼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믿고 고백하는 것’이 어떻게 나의 ‘생기’에 까지 이르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을 조금 구체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이 땅에 오셔서 사신 것도, 이 땅에 오셔서 주신 가르침도 다 ‘사랑’입니다. 사랑때문에 오셨고, 사랑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지평은 지식이요, ‘밖’입니다. 사랑의 지평은 생기이며, ‘안’입니다. 믿음의 지평은 성공을 가져오지만 사랑의 지평은 행복을 가져옵니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꼬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믿음을 갖고 성공했지만, 사랑을 믿음으로 행복을 찾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수입이 적어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그녀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 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장사에서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그녀는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진 책이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작가로서 빛을 낸 것이죠. 사업에 믿음을 가지고 하면 성공합니다. 사랑에 믿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성공을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사랑을 믿는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이 아닌, 과거가 아닌, 내 안에서 그리고 현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 음성입니다.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5. 나가는 말
요약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말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밖’으로 향하면 들리지 않습니다. 전쟁을 주 목적으로 세워진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임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3. ‘안’으로 향하면, (인간은) 몸이 있고, 오감이 있고, 마음이 있고, 지성이 있고, 참나가 있고, 생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기(生氣)로 받아야 합니다. 생기만이 하나님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생기로 받아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합니다.
5. ‘믿는다’는 고백은 지평으로 보면 ‘밖’이 됩니다. 이를 ‘안’쪽으로 바꾸려면, 예수님의 정체성 ‘사랑’을 믿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고 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가 286장(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1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 날)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