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가 요즘 시끄럽다.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TV 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로 오른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利馬(이마)빌딩에 입주해 있는 의문사委 사무실 앞에서는 재향군인회, 상이군경회, 고엽제후유증전우회, 전몰군경유족회, 활빈단 등이 번갈아 집회를 열고 『대한민국 國是를 부정하는 의문사委는 당장 해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의문사委 건물 앞에는 경찰병력 1개 중대(120여 명)가 고정 배치돼 있다.
이 모든 상황은 지난 7월1일 의문사委가 「간첩·빨치산도 민주화 기여자로 볼 수 있다」고 결정하면서 초래된 것이다.
의문사委는 이날 非전향 장기수 3명에 대해 의문사를 인정했다.
의문사委는 보도자료를 통해 「유신정권 시절 교도소內 사상전향 공작 과정에서 숨진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최석기·박융서 3명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향을 거부했더라도 자신의 사상·양심을 지키기 위해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에 의문사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발표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들 중 최석기와 박융서는 1950년대에 남파된 간첩이고, 손윤규는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빨치산 출신이다.
의문사委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최석기는 대전교도소 재소 중인 1974년 4월 교도소 전향공작반 박모씨 등이 꾸민 이른바 「2 대 1 특별전향 공작」(폭력 재소자 2명을 非전향 장기수 1명과 합방시킨 뒤 폭력과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한 것) 과정에서 입에 수건이 물리고 바닥에 눕혀진 상태에서 가혹한 폭력·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역시 대전교도소에 있던 박융서는 같은 해 7월 교도관에게 전향을 강요당하며, 온몸을 발로 차이고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했다. 박융서는 이날 방 벽에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긴 채 유리 파편으로 목과 다리의 동·정맥을 끊어 숨졌다.
▲손윤규는 1976년 4월 대구교도소에서 고문과 협박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가 고무호스를 胃(위)까지 집어넣고 소금물에 가까운 죽물을 넣는 강제급식 과정에서 사망했다.
의문사委가 낸 발표자료 표지에는 「깡패동원, 강제급식, 고문·전향공작이 부른 살인!」, 「反인륜적 전향공작에 굴하지 않은 양심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발표 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反국가 저항은 민주화운동 아니다』
이들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제기되지 않았다.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공산주의를 지키려고 했던 간첩·빨치산들을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봐야 하느냐」였다.
의문사委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1969년 8월7일(3選 개헌) 이후 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
이들을 민주화 기여자로 인정하는 것은 1기 의문사위원회 때 기각된 사안이었다. 1기 의문사위원회는 『세 사람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인 것은 인정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한 자들로서 민주화운동과 연관성이 없다』고 판정했다. 2기에서도 내부 논란이 있어 7명의 위원 중 3명이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2기 의문사委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전향공작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리를 침해당했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轉向제도나 준법서약서의 위법성이 알려져 결과적으로 이 제도들이 철폐에 이르게 됐으니 민주화에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신봉한 사람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상을 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누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그의 행위를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발표가 나오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反민주(공산주의)를 위해 反민주(독재정권)에 항거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민주주의를 신장시켰다는 결과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행위까지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본말을 뒤집은 것이다』 (安京煥 서울大 법대학장)
『이들의 죽음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자유를 위해 희생한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김형성 성균관大 법대 교수)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민주화운동의 주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신봉한 자」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법률도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헌법 안에 있기 때문에 의문사委의 결정은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다』(李石淵 변호사)
1기 의문사委에 참여했던 이윤성 서울大 의대 교수는 『민주화라는 것은 국가를 인정한 뒤에 정부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국가를 반대한 행위를 민주화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면 수용할 수 있는 판단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韓相震 서울大 사회학과 교수는 『인권이 가진 보편적 가치로 평가해야 할 때』라며 『공산주의자라도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은 넓은 의미에서 인권을 지키기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장기수 北送」 주장
의문사委는 「간첩·빨치산 민주화 인정」 논란이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장기수의 추가 北送(북송) 문제를 대통령에게 권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혀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의문사委는 공식활동을 마감하면 한 달 內에 그간의 활동 결과와 권고案을 담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돼 있다. 이 보고서에 「北送」을 포함시키겠다는 것이다.
의문사委의 논리는 이렇다.
「강압에 못 이겨 강제로 사상전향서를 쓴 사람들은 전향자로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원한다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
인도적인 차원을 떠나서 의문사委가 과연 北送을 거론할 권한이 있느냐는 「越權(월권)」 논란부터 일었다.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상 의문사委가 대통령에게 권고할 수 있는 사항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 사건과 피해자에 대한 조치 ▲의문사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뿐이다.
장기수 北送은 이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제성호 중앙大 법학과 교수는 『권위주의 정권에서 자행된 인권탄압과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구가 정치적 판단에 대해 언급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문사委 내부에서조차 『의문사 조사결과와 그에 따른 문제점만 권고하면 되지 정치적 이슈까지 판단하자는 것은 오버』라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왔다.
납북어부·피랍인사·국군포로 등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장기수 北送만을 언급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상호주의에 입각해 北送이 이루어진다면 납북어부 등의 송환과 형평을 맞춰야 한다. 일방적인 태도는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이동복 前 명지大 교수)
『가족을 그리워하는 납북자·국군포로를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도주의다』(김기춘 한나라당 의원·前 법무부 장관)
우리 정부는 남북 頂上회담 직후인 2000년 9월 北送을 희망하는 非전향 장기수 63명을 무더기로 北으로 보냈다. 1993년에는 빨치산 출신 이인모씨를 北으로 보냈고, 李씨는 북한 全域(전역)을 돌며 인민 영웅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체제홍보에 앞장섰다.
그러나 북한은 『국군포로는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단 한 명의 국군포로도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국민의 보편적인 감정에 맞지 않는 의문사委의 행동이 이어지자 학자들뿐만 아니라 보수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金日成·金正日이 남한 민주주의의 代父냐?』
지난 7월6일 의문사委 사무실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6·25 전쟁, 월남전 등에 참전한 星友會(성우회) 소속 예비역 장성들이 의문사委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의문사委가 간첩·빨치산 출신을 민주화 기여자로 인정한 데 격분했기 때문이다.
吳滋福(오자복·74·前 국방부 장관) 성우회장, 李相薰(이상훈·71·前 국방부 장관) 재향군인회장, 蔡命新(채명신·78·前 주월사령관) 6·25참전연합회장, 金仁基(김인기·71·13代 국회의원) 前 공참총장, 張東完(장동완·64·前 국방부 법무관리관) 변호사, 鄭仁均(정인균·67·前 국방대학원장) 성우회 사무총장 등 백발이 성성한 퇴역장성들이었다.
이들은 한상범·김희수·이기욱 등 의문사委 위원들과 70여 분간 격론을 벌였다.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지만 뼈 있는 말들이 오갔다. 다음은 주요 발언을 정리한 것이다.
한상범 『전향했느냐, 안 했느냐, 따지는 건 모순』
▲오자복=체포된 간첩과 빨치산이 사상전향을 거부한 것이 어찌 민주화운동인가?
▲한상범=한때 공산주의자였다고 영원히 「너는 빨갱이」로 몰아 법의 보호 밖에 놔 두는 것은 법치 논리가 아니다. 인간적 권리를 주장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상훈=간첩과 빨치산은 헌법 적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前 간첩·빨치산」이 아니다. 전향을 안 했는데 어떻게 「前」이냐. 이 논리라면 金日成·金正日이 남한 민주주의 代父라는 것이냐. 자유민주 투사는 反민주냐?
▲한상범=법을 위반했다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법치가 아니다. 사형수를 사형 전에 때려 죽인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과 같다. 전향제도가 잘못된 것인데 전향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모순이다.
▲김인기=민주화에 기여했다? 도대체 어떤 기여를 했단 말인가. 간첩·빨치산은 가장 非인간적 행위로 체제를 교란시키는 인물들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듯, 이들이 죽자 전향제도가 폐지됐으므로 민주화 신장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기욱=易地思之(역지사지)해 보라. 북파 공작원이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저항하다 죽었다면 북한 민주화에 기여한 것 아닌가?
▲한상범=빨치산 출신 이태씨는 국회의원 하고 「남부군」이란 책도 냈다. 나도 놀랐다. 우리가 폭넓은 관용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성우회=그 사람은 전향한 사람이 아니냐.
▲한상범=전향제도는 불법이라고 법무부에서 인정한 것이다. 자꾸 단순논리로 몰아가지 말라.
▲정인균=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정통성을 부인하고, 전향을 거부했는데 어떻게 敵이 아니라고 본단 말인가. 법 이전에 법 감정이 있다. 법 해석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릴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김희수=난 공산주의 싫어한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인정하고 共生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명신=간첩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본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들을 같은 반열에 놓는단 말인가.
▲장동완=민주헌정질서를 부정하고, 뉘우치지도 않고, 마지막까지 전향을 거부했는데 국민으로 봐야 하나. 이들이 옥중에서 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투쟁 일환이었다.
▲한상범=첫 북송자인 이인모를 예전에 만났다. 그는 北에 처와 자식이 있었다. 그가 그들 때문에 버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을 인간으로 보는 안목도 필요하지 않나.
일곱 위원들
이후에도 의문사委 건물 앞에는 의문사委의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보수단체들의 집회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재향군인회·활빈단·고엽제후유증전우회 등은 번갈아 가며 집회를 열고, 전몰군경유족회·대한상이군경회의 집회에서는 『反국가활동에 면죄부를 준 이번 결정으로 그동안 주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은 졸지에 反민주적이고 역적 행위를 한 사람처럼 돼 버렸다』는 절규도 나왔다.
급기야는 韓相範(한상범) 위원장 등에 대한 테러 첩보가 입수돼 경찰이 의문사委 건물과 위원들 자택에 순찰을 강화하는 등 특별경계에 나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의문사委가 엄청난 결정들을 내놓자 의문사委 구성 멤버들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직업공무원인 洪春義(홍춘의·57) 제2상임위원을 제외한 의문사委 위원 대부분이 좌파적 성향의 시민단체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기 의문사委는 韓相範 위원장을 포함,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지난해 7월1일 출범 당시에는 9명이었으나, 지난 5월19일 全海澈(전해철·42) 위원이 대통령 민정비서관을 맡으며 사임했고, 지난 6월1일 徐在冠(서재관·55) 위원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韓위원장은 현재 동국大 명예교수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와 인권정보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인권 시민운동을 펼친 학자로,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소장을 지내며 親日 청산작업에 열심이었다.
1기 의문사委 때도 초대 위원장인 梁承圭(양승규·법학) 現 가톨릭大 대우교수에 이어 2002년 4월부터 9월까지 위원장을 지냈다. 『유가족들의 무리한 주장에 대해서도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조직 내부에서도 통합력을 발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지나친 反骨(반골) 기질이 자칫 무리한 해석을 낳았을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金熙洙(김희수·45) 제1상임위원은 전북大 법대를 나와 1987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0~1995년 수원지검, 서울지검 북부지청 검사 등을 지냈다. 변호사로 개업한 뒤 대한변협 인권위원과 인권실천시민연대 운영위원을 맡았다.
1999년에는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 특별검사팀의 수사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2기 위원회가 출범한 지난해 7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모두 재조사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며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폭넓게 해석해 이 사건들에 접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洪春義 제2상임위원은 의문사委 위원 중 유일한 직업공무원 출신이다. 성균관大(경영학과)와 美 남가주大(행정학 석사) 출신으로, 행정자치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지원단 단장(副이사관)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조사1국 국장(이사관) 등을 역임했다.
전북大 농대 명예교수인 李碩榮(이석영·68) 위원은 전북大 교수로 재직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 해직된 경력이 있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서울大 의대 교수인 黃尙翼(황상익·52) 위원은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이다.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의사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에 간여하고 있다.
李基旭(이기욱·48) 위원은 한양大 법학과를 졸업한 軍 법무관 출신. 법무법인 창조 대표변호사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부회장이다.
고려大 법대 출신의 姜京根(강경근) 위원은 숭실大 법대 교수로, 경실련 前 시민입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직원 43명이 탄핵 의결을 「쿠데타」로 규정
의문사위원회 밑에는 사건의 조사업무를 담당하는 조사 1·2·3과와 특별조사과 등 4개의 조사 파트가 있다. 경찰이나 보안수사대와 관련한 사건은 조사 2과가, 軍·보안사 관련 사건은 조사 3과가 담당한다. 그 밖의 관련 사건 수사는 조사 1과가 맡는다.
특별조사과는 교도소 관련이나 행방불명자 등 위원장의 특명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非전향 장기수의 獄死(옥사) 사건은 특별조사과 담당이다.
조사관의 수는 1기 때 57명보다 조금 늘어난 63명이다. 이들은 행자부나 검찰·경찰·국정원 등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부터 민간단체에서 채용된 직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는 半官半民(반관반민)의 조직이다.
민간 출신들은 대부분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나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다.
그러나 민간 출신이라 해도 4명의 비상임위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별정직 공무원 신분 또는 공무원에 준하는 예우와 신분 보장을 받고 있어 공무원법 적용을 받게 된다.
이들은 때때로 지나친 정치색을 드러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3월에는 탄핵 관련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金熙洙 위원을 중심으로 한 의문사委 직원 43명은 대통령 직속 7개 위원회 가운데 처음으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국민主權에 대한 의회의 「쿠데타」이고, 탄핵을 추진한 정당이나 소속 의원들은 親日·수구 반동 세력』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무원·準공무원 신분으로서 독립성과 중립성을 준수해야 할 위치에 있던 이들이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출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시국성명에 참여한 위원과 직원들은 모두 민간 출신이었다.
金熙洙 위원을 비롯, 李碩榮·黃尙翼·李其旭·전해철 비상임위원 등 5명과 조사 1·2·3과장 및 특조과장 등 조사과장 전원(4명), 실무 담당인 34명의 전문위원 등 모두 43명이었다.
이 중 비상임위원 4명을 뺀 39명은 국가공무원법의 적용을 받는 대통령 직속기관의 공무원 신분이다. 따라서 국가공무원법의 정치적 행위(제65조)와 집단 행위(제66조) 금지 규정에 정면으로 위반되기 때문에 징계 대상이다.
이들 스스로 『어떠한 불이익과 처벌까지 감내하겠다』고 밝히면서까지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 것이다.
許일병 자살을 「타살」이라고 발표했다가…
의문사委가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2년 1기 때의 「許元根 일병 사건」이다. 의문사委가 처음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때이기도 하다.
의문사委는 2002년 8월20일 정례 브리핑에서 『1984년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3연대 소속 GOP 철책근무 軍복무 중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許元根(당시 22세) 일병이 실제로는 타살됐으며, 軍 간부들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당시 의문사委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許일병은 중대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열린 진급 소대장 축하 술자리에서 뒷바라지를 하던 중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盧모 중사가 우발적으로 쏜 총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숨졌다.
許일병이 숨지자 현장에 있던 간부들과 3~4명의 사병들이 내무반을 물청소하고 許일병의 시체를 내무반에서 30m 떨어진 폐유류고로 옮긴 뒤 다시 왼쪽 가슴과 머리를 총으로 쏘아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이 발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부사관이 술김에 부하를 총으로 쏴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고락을 함께 한 10여 명의 동료 부대원들이 이를 알고도 18년여 동안 철저히 함구해 왔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의문사委가 이처럼 특정 인물을 「살인범」으로 지목하면서까지 발표한 결과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당시 같은 부대원 소속 2명의 증언뿐이었다. 스스로도 물증은 없다고 인정했다.
불과 1주일 뒤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부대원 대부분이 「軍에서 조직적으로 타살을 자살로 은폐 조작했다」는 의문사委의 발표를 정면 부인하고 나섰다.
朝鮮日報 취재진이 신원이 확인되는 부대원 9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의문사委 발표 내용은 당시 상황과 전혀 다르고, 진상조사 과정에서 그처럼 진술한 적도 없다』 밝혔다.
부대원들은 의문사委 발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상황이 반전되자 의문사委는 살인범으로 지목했던 盧중사의 진술 내용 일부 공개하며 자신들의 발표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공개된 盧중사의 진술내용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소총으로 설칠 때 누가 나를 말린 것 같다. 아마도 총에 장탄을 해 위협할 때 뒤에서 껴안은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오발하였는지 어떤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盧중사는 일관되게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며, 당시 진술도 『의문사委가 「GOP에서는 실탄을 장탄하고 다니느냐」, 「평소 부대원들을 구타한 적이 있느냐」는 식으로 별개의 질문을 한 뒤, 이를 연결해 마치 내가 그렇게 진술한 것처럼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결국 의문사委는 9월10일 최종 조사결과 발표에서 『許일병이 당초 軍 발표와 달리 타살됐지만, 軍이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은폐 조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시간과 권한의 제약으로 이번 조사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는 중간조사 발표에서 크게 후퇴한 결론이다. 許일병이 타살됐다는 증언자의 진술을 담은 녹음·녹화 테이프 등은 공개를 거부했다.
국방부, 「의문사委가 타살 조작」
두 달 뒤 정수성 당시 육군 중장(現 1군 사령관)을 단장으로 하는 국방부 특조단은 『許일병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의문사委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조작해 許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방부 특조단은 기록과 부대원 진술을 토대로 사건 당일 새벽에는 총기 오발 사건이 없었으며, 당일 중대본부 및 예하 소초원의 알리바이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히 1명을 제외한 나머지 타살 정황 진술자들은 대부분 의문사委의 각본에 따른 유도 질문이나 강요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결론지었다.
의문사委가 「내무반에서 피 제거를 위한 물청소를 했다」고 발표한 당시 14소초원 윤모씨의 경우 『내무반 물청소를 봤다고 진술하자, 의문사委 조사관이 「흘린 피를 닦은 것 아니냐」며 유도신문을 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도 내가 직접 바닥에 흘린 피를 물로 닦는 장면을 본 것처럼 진술조서를 작성했다』고 특조단 조사에서 밝혔다.
의문사委는 제한된 권한과 부족한 시간에 쫓긴 나머지, 확실한 물증이나 자백 등의 결정적 증거 없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이를 발표해 스스로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하나의 가설, 혹은 추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문사委에 의해 살인범으로 지목된 盧중사는 2002년 11월27일 서울지법에 의문사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韓相範 위원장을 비롯해, 상임위원·조사관 등 5명을 상대로 각각 1억원의 명예훼손 관련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이는 아직도 계류 중이다.
盧중사는 의문사委 발표 이후 인터넷상에 실명이 떠돌아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했다. 盧중사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다는 인물이 『노○○는 원래부터 사이코였다. 또라이 한 명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 한 명이 희생됐으니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이냐』는 글을 올리는 등 원색적인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盧중사는 현재 경기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기 의문사委의 조사에 일절 불응했다. 1기 조사에서 盧중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데 결정적인 증언을 한 이모 하사와 전모 상병은 각각 2500만원과 500만원의 포상금을 의문사委로부터 받았다.
3기 의문사委의 운명은?
의문사委는 「지나간 시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힌다」는 목표로 2000년 10월17일 출범했다. 1기 의문사委는 22개월간의 조사 기간 동안 인혁당 재건委 사건, 서울大 최종길 교수 사건 등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흔적을 남긴 사건부터 노동·학생운동 과정이나 軍복무 도중에 일어난 의문사까지 83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의문사委는 이 중 19건을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 의문사」로 인정했다. 1974년 인혁당 재건委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음이 드러났고, 서울大 최종길 교수 사건은 『간첩 혐의 자백 후 투신자살했다』는 당국 발표와 달리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 추락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2003년 7월1일 출범한 2기 의문사委는 지난 6월30일로 공식활동을 종료했다. 1기 때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내려진 30건과 기각된 사건 중 再조사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된 14건 등, 모두 44건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의문사委는 이 중 광주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된 임태남씨 사건 등 8건을 의문사로 인정했지만, 절반이 넘는 23건에 대해선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다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특히 관심이 집중된 張俊河(장준하) 실족사 사건과 이철규(조선大 교지편집장)·이내창(중앙大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박창수(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사건 등 주요사건은 모두 未濟(미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3기 의문사委의 출범 여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남파간첩·빨치산 민주화 인정」 이후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의문사委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17代 국회는 與野 모두 의문사委의 연장에 호의적이어서 3기 의문사委의 출범은 확실시돼 보였었다. 오히려 야당인 한나라당이 앞장을 섰었다. 한나라당 元喜龍(원희룡) 의원은 지난 6월 말 같은 당 의원 96명의 서명을 받아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놓은 상태다.
與野가 의문사委 권한 확대 개정안 준비
이 개정안은 3기 의문사委의 권한과 조사대상을 크게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열린당의 元惠榮(원혜영) 의원이 독자적으로 준비 중인 개정안도 大同小異(대동소이)하다. 조사권한 확대와 기간 연장 등은 그동안 의문사委의 숙원이었던 부분이다.
의문사委는 그동안 국정원·기무사·경찰 등 관련 기관들이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등 협조를 제대로 안 해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의문사委의 조사 범위가 크게 확대된다. 「의문사」의 정의는 2기 때까지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이었으나, 개정안에는 「중대하게 부당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에 의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죽음으로서 그 死因(사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아니한 것」으로 수정했다.
「민주화 운동」 관련 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이 경우 軍 부대內에서 일어난 수많은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조항 때문에 金正日도 인정한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도 再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정치권 일부의 발언이 나오면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조사 범위가 확장되면서 조직의 규모도 커진다. 개정안은 현재 2명인 상임위원을 3명으로 늘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위원장의 특명사건 외에 모든 사건에 대한 지휘를 맡는 상임위원의 권한을 감안하면, 상임위원 1명이 늘어나는 것은 조직 규모가 50% 가까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임기는 2년을 유지하되 한 차례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개정안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조사권한의 강화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의문사委는 조사대상 관계기관에 자료제출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는 관련 기관이 자료제출을 요청받아도 기관이 이를 거부하면 그만이었지만, 법이 개정되면 위원회가 자료제출을 명령하는 권한을 갖게 되고, 이때 기관은 정당한 사유를 입증하지 못하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
非협조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된다. 의문사委는 자료제출 요구에 정당한 이유 없이 협조하지 않는 관련자에 대해 징계·해임·교체를 요구할 수 있고, 관계기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 증거를 인멸·위조·변조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정당한 이유 없이 동행명령을 거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도 있다.
의문사委가 요청할 수 있는 자료에 통신사실에 관한 확인자료와 금융거래내역 자료까지 포함된다. 위원회가 업무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참고인·증인·감정인 등을 대상으로 공개 청문회를 열 수도 있다.
여론의 反轉
▲조사 기간도 크게 늘어난다. 개정안은 의문사委의 진상규명활동 기간을 「개시한 후 3년 이내」로 하면서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2회에 한하여 1년6개월의 범위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최장 6년의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다. 1기의 활동 기간은 21개월이었고, 2기는 1년에 불과했었다.
개정안은 이 밖에도 ▲진정인이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이의가 있는 경우 再조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고 ▲의문사가 인정될 경우 당초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손해배상을 국가배상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에 대해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청구권 소멸시효도 의문사委의 결정 이후부터 진행하도록 했다.
개정안대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면 3기 의문사委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간첩·빨치산 민주화 기여 인정」 결정 등이 잇따라 파장을 일으키면서 출범 자체가 불투명할 정도로 상황이 急반전했다.
출범은 하더라도 개정안 내용에 대폭 손질이 가해져 권한 확대가 이루어질지도 미지수다. 열린당內에서는 『의문사委 활동 시한은 연장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 우세하지만 『원점에서 再검토해 봐야 한다, 요즘의 분위기가 시한 연장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 측도 『의문사委 부분은 국회가 정할 문제이며 어떤 방향이나 입장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당초 元喜龍 의원의 발의안에 서명까지 했던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다시 당론을 모아봐야겠지만 개인적인 입장은 의문사委가 더 이상 존속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거의 기정사실화되던 3기 의문사委 출범에 의문사委가 스스로 발목을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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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가기본조직이 있는데 윗 권위로 온갖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막강 힘을 가진다는 것은 곧 독재를 말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공권력이 공정하지 못하게 휘둘러지고 정치에 이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뭔 위원회가 자꾸 생겨서 제 맘대로들 법해석을 하는가, 공산국가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