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씨알의소리를 내나 ?
함석헌
먼저 어떻게 잡지를 내게 된 경로부터 이야기 합시다. 내가 자진 했다기 보다 친구들의 몰아침에 못 견디어 내게 된 것입니다. 속담에 권에 못 이겨 상립 쓴단 말이 있지만 나야말로 그렇습니다. 상립은 상주가 되기 전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인데 하두 권하기 때문에 쓸 수 없는 그 상립을 쓴단 말입니다. 친구의 정의는 그렇게 강한 것이란 말입니다.
물론 잡지는 내게 상주 안된 사람의 상립은 아닙니다. 나도 생각이 있었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조건이 도저히 가망이 없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나는 일을, 비록 좋은 일이라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하면 좋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이 나야 춤을 추지, 억지로 추는 것은 춤이 아닙니다. 물론 춤을 추노라면 신이 오기도 합니다. 그래나 그런 구실 하에 사람 잡는 선무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잡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해방 후 줄곧 해오는 생각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지만 <말씀>도 그래서 냈었습니다. 6호 까지를 냈다가 5.16파동으로 중단됐습니다. 그담은 월간보다도 주간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꾸는 데는 나는 반드시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듯합니다. 남들이 주간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63년 경입니다.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당시 사상계 사장 장준하님을 보고 그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점점 바쁘고 복잡해 가는 매스컴 시대에 사람들은 긴 논문을 읽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그럴 겨를도 없고, 한달에 한번 가지고는 시대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그러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있어서 벌써 김준엽님을 전혀 거기 관한 것을 조사 연구하기 위해 영국에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나오는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자금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후 알아보니 주간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정의감과 기백은 줄어드는 것이므로 그 법령의 그물을 통과하고 나오는 놈이면 묻지 않고 자기네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해도 좋다 하는 심산에서 나온 법입니다. 하여간 그래서 다시 월간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분 뜻이 통할만한 이들을 모아 그 전의 <말씀> 보다는 좀 넓고 교양적이요, 사상계보다는 좀 더 민중 계몽적인 것을 내보려고 대체로 의론이 돼서 구체적인 토론에 들어가려는 때에 시국의 회리바람이 일어났습니다.
한일회담 월남파병 문제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주주의의 밑 뿌리가 흔들리는 때에 잡지 이야기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들어온 강도부터 막고 보아야 한다 해서 잡지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너도 나도 시국의 일선에 나서 싸웠습니다. 싸움엔 무참히도 패했고 세상 형편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낙심을 해서는 아니 되고 물이 깊어지면 작대기도 길어져야 한다고 새 전법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군사정권에서 제1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3선 개헌 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달음 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 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왼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 씨-저 죽는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씨-저도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하고 친구가 바른 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가도 못 본 척 하고 있었습니다. 귤이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 기실이 돼버리고 만다고, 서양 자유의 학문도 종교도 이 나라엘 들어오면 변질하는 것입니까? 그 풍토가 나쁩니까? 그렇습니다. 그 풍토를 고치지 않으면 않되겠습니다.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 씨알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 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일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사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신문이 민중을 깨우고 일으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정말 깨면 정치 강도 무리 집어치우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민중의 눈을 쥐고 입을 쥐고 손발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을 아니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망하면 변명하기를 자금의 길을 정부가 꼭 쥐고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얄미운 수작입니다. 돈이 뉘 돈인데 ? 그들은 정부가 허가증 내주는 것만 알지, 민중이 사 보기 때문에 신문사가 돼 가는 줄은 모릅니다. 신문을 해서 외국 사람이나 개 돼지게 팔렵니까? 그들이 그것을 모를 것 아닌데 집권자에 아첨 하노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배은망덕입니다. 정말 주인 무시하고 딴 놈을 주인으로 섬기니 말입니다. 주인은 주인이니만큼 참을 것이요 도둑은 도둑이니만큼 사정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참아 주는 주인을 무시해서야 됩니까? 집권자는 아무리 강해도 망하는 날이 올겁니다. 나라의 주인 씨알은 영원 합니다. 그런데 그짓을 하니 어찌 밉지 않겠습니까? 말은 죽을 수 없어 복종한다 하지만 그 소리 더 밉습니다. 죽기까지는 그만두고 배에 기름질 생각만 아니해도 충분히 버티어 나갈 수 있습니다. 집권자에 꼬리 치지 않는 나도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불매 운동을 해서 신문이 몇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까진 시시한 소설이나, 음악회 운동회 쇼 따위를 가지고 민중을 속이려는 신문들 !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끼리 서로 씨알 속에 깊이 파고들어야만 합니다. 내가 몇해 전에 사상의 게릴라전을 해야 된다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정규군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유격대는 못 당합니다. 정규군은 큰 기계와 조직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번 깨지면 혼란에 빠지지만 유격대는 기계보다 하나 하나가 정신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를 가지고 백도 천도 당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 싸움터는 국회의사당도, 법정도, 학교도, 교회도, 신문사조차도 아닙니다. 직장, 다방, 선술집 소풍 놀이터에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일만이 아니요. 누가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생활의 한부분이 아니라 모두의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밀 결사 운동일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이 때에 비밀은 이미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치하던 시대의 일입니다. 도덕적이 못되는 일입니다. 비밀은 결국 남을 해치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남의 속에 양심을 인정 아니 하는 일입니다. 남의 속에 양심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양심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적은 다 악한 자로 규정하고 죽여 마땅하다 생각함으로 이기려던 옛날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싸움은 드러내 놓고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폭력으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저쪽의 속에 있습니다. 그적 도덕적 양심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적일수록 그를 도덕적 가능성이 있는 인간으로 보고 그의 속에 있는 양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에 나타나는 게릴라가 아닙니다. 청천백일 하에 버젓이 어엿이 내놓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이제 인간은 높은 정도에 올라가서 나와 대적이라는 사람이 서로 딴 몸이 아니요 하나라는 자각에 들어가는 때입니다. 나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서 저쪽을 죽일 수 없고 저를 인간으로 살려줌 없이 내가 살 수 없이 됐습니다. 민중 속에 파고든단 말은 인간 사회 지층이 밑바닥을 흐르는 생명의 지하수를 찾아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씨알을 하나로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주 시급한 줄을 알면서도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소위 국민투표란 것 이후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이 아주 급작히 달라졌습니다. 나와 세상과의 사이에 너무 거리가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아주 말을 아니 하는 것 것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전과 같은 식으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국민투표란 것을 지내더니 신문이란 신문 잡지란 잡지가 언제 그렇게 역사 내다보는 눈을 배웠던지 제각기 60년대, 70년대 하면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엇을 깊이 보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달라졌다고만 떠듭니다. 달라지긴 무엇이 달라집니까? 못 사는 씨알의 못사는 정도가 더 심해짐 졌지 씨알 짜 적는 사람들의 심술머리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어째 기술이 달라진단 말만 하고 이 때까지의 일의 잘못 된 것을 반성은 아니 합니까?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민심이 아무리 썩어져도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서 도덕 의식을 깎아내 버리지는 못 합니다. 겨울에 죽었던 풀이 봄이면 또 돋아나듯 씨알은 살아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글 쓰는 사람들은 돋아나려는 씨알에 봄바람을 불러 주는 것이 자기 일인줄은 모르고 스키에 미치는 부르조아의 자식들 모양으로 겨울바람만 점점 더 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돋아나던 싹 조차 얼어 버리고 맙니다. 국민투표 이후 국민이 아주 멍청이가 돼 버렸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 아니고 스스로 양심을 짓밟은 데서 오는 현상입니다. 마취약을 먹이고 강도질을 하듯이 지배자는 그렇게 만듭니다. 언론인의 책임은 그때에 있습니다. 마비된 양심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반대로 놀았기 때문에 민중은 점점 더 멍청이가 돼 갑니다. 이 속에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합니까? 얼마나 답답하면 예수가 탄식을 했겠습니까, 슬픈 노래 불러도 가슴을 치지도 않고 기쁜 노래를 불러도 춤도 추지 않는다고, 그래 그는 너희게 보여줄건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하고 스스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아마 이 민중에게도 십자가 이 외에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이 법 만든 것을 보면 십자가 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살길 바라 것이 아니라 죽기를 바래나봅니다. 말하고 글 쓰는데 무슨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지요? 잡지 하나 하려면 참 어렵습니다. 등록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그것 하는데 몇날이 걸립니다. 또 세호를 연거푸 못내면 자동적으로 폐간이 됩니다. 지금 이 글 쓰는 내 마음도 급합니다. 2월 부터 내기로 돼 있는데 2월에 못 냈지, 이 달까지 못내면 아니 되는데 이제 이 달이 닷새 밖에 아니 남았습니다. 왜 사람을 이렇게 구속합니까? 다른 것 아니고 「내 말 듣는 놈은 살어라. 듣지 않으려거든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무슨 권세입니까? 5.16 음모할 때 등록하고 했으며, 정치사무 이 달에 할 것 못하면 면직 시킵니까? 이런데는, 이런 이성 없고 도리 모르는 사람들게는 보여줄 것이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사람 마음을 가졌어야 말이 통하지 말이 통치 않는 사람에게 잡지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잡지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글이란 정성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잡지 등록규정에 맞추어 억지로 기일 내에 써야겠으니 나는 그런 구속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멍청한 민중이 사 보지도 않을테니 수지가 맞을 생각은 할 수 없고, 죽을 사람에 약 주는 심정으로 값은 받거나 못 받거나 내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계속해서 상당한 자금을 써야 할 것인데 어디서 그런 돈이 납니까 ?
도둑놈들은 도둑질한 돈이니 물쓰듯하며 생색 내겠지만 내게는 그런 돈 없습니다. 등록이 된 후에도 잡지 내기가 늦은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오지 않는 춤을 어찌 추느냐?」했는데, 그래도 기어이 졸라서 정말 상주 아닌 상립을 쓰게 됐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편안 합니다. 하게 되면 하고 못하면 말지오. 돈이 없어 못했다 해도, 글을 미처 못써 못하게 됐다 해도 터럭만큼 부끄러운 것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해 놓고 뒤에서 악마같은 웃음으로 입이 떡 벌어지고 손뼉을 치며 시원해 하는 양반님들이 있다 해도 조금도 미워도 아니 합니다. 내가 할 말 못하면 저희 부끄럼이지 내 부끄럼 아닙니다. 국민이 누구나, 죄인조차도, 자유로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자랑할 나라지,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할 수 없는 나라는 참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정치적인 듯이 보일는지 모르나 사실을 말하면 나는 정치하자는 마음 아닙니다. 묶어 놓고 「정치는 강도질이다」하는 내가 정치하겠습니까? 공자도 정치해보려다가 틀렸으니깐 그만두었고, 석가는 왕가에 났어도 아예 내던졌고, 예수도 아니 했고, 소크라테스도 아니 했습니다. 사람 중에 가장 잘났던 분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인간이 인간 노릇을 했을 수 없다하는 분들이 정치 아니 했는데 내가 왜 그 욕심을 냅니까? 나는 타고나기도 크게 타고 난 것 아니고 힘쓰는 정성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배우기는 가장 어진 그이들을 배우고 싶지 정치 같은 것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린데 왜 정치에 관계된 말을 하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럼 「도둑놈이야」하고 내쫓을 생각도 아니 해야겠습니까?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 발전을 방해 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 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 하는 놈은 도둑의 한패 아닙니까? 나의 바라는 것은, 정치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감히 못 바라도, 적어도 손에 무기 쥔 정치무리가 판을 치는 날이 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친구들 조차도 왜 가만있지 않느냐 하지만 답답합니다. 글쎄 도둑이 분명한데 도둑이야 소리를 하지 말란 말입니까? 또 내가 하는 것이 무슨 다른 욕심 있어서 합니까? 도둑 보고 도둑이야 했다가 얻을 것이 칼 밖에 없는 것을 모르리만큼 내가 바보입니까? 그러면 네가 정말 바보라고 할는지 모르나 바보거든 바보대로 두십시오.
내가 바보의 생각을 좀 말하리다. 나는 씨알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은 못 놓겠습니다. 나 자신이 씨알인데, 나는 농사꾼의 집에 났습니다. 참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지갓은 베고 죽는다」고 우리 마을에선 표본적인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 한데 들었습니다. 농사는 나만이 하는 농사입니까? 밥은 나만이 먹는 밥입니까? 천하 사람이 영원히 먹을 밥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종자는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농사입니다. 민중은 씨알입니다. 나라가 망해도 씨알은 남겨 놔야 합니다. 나라가 씨알 속에 있는 것이 한국 민족이 한 사내의 생식 세포의 유전 인자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제국이니 공화국이니 문제 안됩니다.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역사 생활을 하는 이 인간성은 아니 없어집니다. 그것을 지키고 가꾸잔 말입니다. 내가 가꿔 놓면 엉뚱한 놈이 먹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단 말입니다. 나는 가꾸는 것이 맛이지 먹는 것이 맛이 아닙니다. 또 내 입이야만 입입니까 남이 먹은 것이 곧 내가 먹은 것입니다. 나는 이 개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씨알을 믿습니다. 끝까지 믿으렵니다. 믿어 주지 않아 그렇지 믿어만 주면 틀림없이 제할 것을 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처 모르고 꾀임에 들어서 그랬지 본바탕은 착하다 믿습니다. 까닭은 간단 합니다. 씨알이라니 다른 것 아니고 필요 이상의 지나친 소유도 권력도 지위도 없는 맨 사람입니다. 나라의 대다수의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이 남을 간섭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로도 여러가지고 형식도 여러가지지만 그런 사람이 결국 정치계 사업계로 나갑니다. 그린데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어서 양심도 다 있고 이성도 다 있지만,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도덕적으로 약해집니다. 대다수의 민중은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그러한 기회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난대로의 인간성이 살아 있습니다. 그점이 내가 민중을 믿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정책의 시비가 문제 됐을 때 판단하는 표준을 어디 둘거냐, 민중에 두어야 합니다. 민중은 어리석은 것이니깐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제법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틀림없이 압박 착취하는 독재자가 하는 소리입니다. 어진 정말 지도자는 그런 소리 절대 아니 합니다. 민중에게 들으려 합니다. 지혜는 결코 천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 씨알에서 나옵니다. 특별한 발명에 달려 있는 과학조차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과학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은 결코 천재나 돈이 많아서만 아닙니다. 그들의 협조 잘 하는 특징 때문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미국의 교육 주지는 천재 교육이 아닙니다. 세상은 잘못 생각해서 천재 교육을 하는데 발달이 있을 것 같이 알지만 그릇된 생각입니다. 일반교육이 앞서야 천재가 나옵니다. 숲이 커야 큰 재목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모든 특성은 전체의 것입니다.
씨알을 믿는다는 말은 그대로 내버려 두란 말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가르쳐야 합니다. 없던 것을 새로 주는 것 아닙니다. 민중이 스스로 제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각 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문 잡지는 그래 필요 합니다. 사상의 게릴라전을 하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씨알은 착하지만 착하기 때문에 잘 속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 절대 필요한 것이 언론 집회의 자유입니다. 어느 정부나 정치가가 정말 민중을 가르치려는 거냐 아니냐는 그 언론 정책을 보면 압니다. 언론의 길을 통제하는 것은 이유를 무엇에 붙이거나 민중 속이고 억누르자는 뱃속입니다. 그렇게 볼 때 5.16 이후의 정치는 완전히 반민주주의적입니다.
그럼 언론집회의 자유가 없는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 우리 문제 있는데가 여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언론 자유를 얻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얻어집니다. 언론 자유 있어야 된다는 소리 해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소리는 공화당 정권의 종노릇하는 오늘의 신문 잡지도 다 합니다.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서 자유는 오는 것 아니라 실지로 죄악적인 법을 무시하고 할 말을 함으로만 됩니다. 그러면 감옥도 가고 징역도 할는지 모릅니다. 모릅니다가 아니라 틀림없이 그리될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할 말은 하란 말입니다. 그 밖에 길이 없습니다. 악도 선도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하나 있을 때 그 놈이 악한 놈이라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전체에 있는 악이 그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이기려면 전체가 동원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민중 교육의 목표는 봉기(蜂起),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있습니다. 전체 씨이 일어만 나면 어떤 강력하고 치밀하고 교묘한 권력구조를 가지고도 막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악독한 놈이라도 사람을 다 죽이고는 저도 못살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악한놈도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정의는 이긴다는 법칙만은 살리려 합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무서운 인간 본바탕의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대량 학살을 하는 놈도 아니하는 척 숨겨가며 하려 합니다. 죄악이 패하고야 마는 원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체가 일어만 서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하나님 혹은 하늘이 하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이 어디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마는 그 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입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말 아닌 말씀을 입 아닌 입으로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지, 우리처럼 이따위 입 가지고 지꺼리는 이라면 하나님일 리 없습니다. 하여간 하나님은 입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씀을 하시나 사람의 입을 빌어서 하십니다. 모순이에게도 하나님의 입은 사람의 입에 있습니다. 예수 때에는 예수가 했지만 예수 돌아간 후는 누구나 대신 또 해야 합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입노릇을 하라고. 약한 인간들이 자기가 늘 있으면 자기게만 맡기고 스스로는 하려 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는 자유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죽으면서 「내가 가는 것이 좋다」했습니다. 하여간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입노릇할 자격이 있고 또 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을 하려면 죽을 각오는 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좋게 여겨야만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나 혼자 독차지 하지 말아야 하며, 또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틀림 없이 할거다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말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하는 말입니다. 악하던 사람도 바른 말하다가 죽는 것을 보면 맘이 달라집니다. 전체 씨을 동원시켜 봉기하게 하는데는 피로써 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실로는 피까지 흐르겠는지 아니 흐르겠는지 모르나 적어도 각오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뜻은 무엇이냐 하면 바른말을 주고 받겠거든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듣고 바른 말이다 생각 될 때 죽으면서라도 나도 그 말을 지지할 의무가 지여 집니다. 내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목적이란 것은 이것입니다. 둘째는 거기 따라오는 것인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생활 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는 못삽니다. 독신생활을 하는 사람조차도 혼자가 아닙니다. 가족이거나 교회거나 무슨 클럽이거나 간에 하여간 하나의 무슨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요 약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평소에 약하던 사람도 여럿이 뒷받침을 해주면 놀라운 용기를 얻어 도저히 보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고, 반대로 아주 용감하던 사람도 자기가 감옥에 간 후 제 어린것들이 길가 헤멜 생각을 할 때에 그만 간장이 녹아 버립니다. 그런 실례를 우리는 많이 압니다. 그러므로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나서는 사람편에서 영웅심을 청산해야 하는 것은 물론, 주위에서도 만일의 경우 그의 가족 혹은 그의 평생의 관심거리에 대해 계속 공동 책임을 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4.19도 6.3도 나는 학생의 동기를 집권자들 모양 불순한 것으로는 결코 보지 않고 전적으로 학생들 옳았다 하지만, 그 운동이 왜 힘차게 자라지 못하나 하면 위에서 말한 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부의 앞잡이들이 학생진을 분열시키려 할 때 그 부모를 통해 「너 생각해 봐, 4.19라야 남은 것이 뭐냐? 너 하나 곯을 뿐이다」 하고 꾀이는 것은 사실 그럴 만한 말입니다. 퀘이커들이 수는 적으면서도 큰 소리를 치게 되는 원인은 이점에 있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국교에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섰을 때 정부와 교회는 합세하여 잔인한 핍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 예배하는 것을 금하는데 대해 비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알아보기 쉬운 장소에 내 놓고 모였습니다. 흩으면 또 모이고, 어른들을 잡아가면 아이들 끼리 모이고, 잡혀간 사람의 가족은 모임에서 맡아 책임을 지고 돌봤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약해지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나중에 그 정부로 하여금 공공연히 모이는 것을 승인하고야 말게 했습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굳센 믿음을 가졌더라도 이러한 공동체를 조직해서 발의 상처를 손이 만져주고 위의 아픈 것을 온 몸이 느껴주듯 유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빛나는 승리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병역 거부를 해서 이긴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의 일로 알지 않고 전체가 책임을 지고 돌봐 주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는 처음부터 강하지만 한번 순교하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으면 순교자의 씨는 끊어지고 말 것 입니다. 순교자 자신은 물론 그것을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는 그것을 전체의 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희생자의 뒤를 봐주는 조직적인 활동은 설교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무슨 운동 무슨 운동 일어나는 것을 그리 신용하지 않습니다. 몇날 못견딜 것이 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갚아 준다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사람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합니다. 왜 다른 나라에서는 잘되는 선 악의 보응이 우리나라에서만 아니 됩니까 ? 우리 사람이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기적인 공동체를 길러가기 전은 아무 운동도 될 가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기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뵈는 조직체를 만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각자가 앙심에 나타나는 명령에 따라 자진해서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잡지 보는 것이 목적 아니라 서로 통해서 하나라는 느낌에 이르도록 하는 운동을 시작하란 말입니다. 눈에 뵈는 조직체 만들면 빨리 되는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위험도 있습니다. 야심가의 이용이 돼 버립니다. 농업협동조합 같은 것은 그 좋은 실례입니다. 그런 것 만들지 않았던들 농민을 그렇게 해치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조직체가 있는고로 야심가에게 이용 돼 버립니다. 본래부터 그런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운동은 성질상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되어 올라와야 한다는 말들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기어이 관에서 만들어 내리 씌웠다는 사실이 그것을 의심케 합니다. 조직은 그것을 바로 쓸 성의와 역량을 가지는 인격이 없으면 곧 타락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운동은 서둘러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조직체 소용없단 말 아닙니다. 생각이 아무리 있어도 실력이 차기전에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알이 다 익으면 밤송이는 벌리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벌립니다. 그리고 익어서 스스로 벌리는 밤송이는 다물게 할 놈이 세상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조직체를 만들지 않으면 일이 규모 있게 빨리 되지 못하는 듯 하나 그것은 한때 뿐입니다. 자발적인 양심의 명령에 의해 성립되는 공동체는 되기만 하면 놀랍게 활동합니다. 기독교의 초대교회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는 자기 살아있는 동안 교회를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은 있지만 환란이 닥쳐오면 자기를 혼자 버리고 제각기 자기 곳으로 흩어져 갈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때가오면 자기가 없어도 틀림없이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길러서는 잡아먹자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위해 주자는 참 목자의 하는 일입니다.
나는 우리 민족을 등뼈가 없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아주 없지는 않은지 몰라도 부러지거나 꾸부러지거나 한 사람들입니다. 개인도 나라도 서야 사람입니다. 세포에는 핵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죽으면 다른 부분이 다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국민 정신의 구조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어떤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어느 종교 단체에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어느 지식인의 모임에 있을 수도 있고, 심한 경우는 어떤 개인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영제국과 싸우던 때의 인도에 있어서 간디의 경우 같은 것은 그것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천하가 어지러웠는데 공자가 춘추라는 역사를 쓰자 당시의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부르르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시대는 아무리 어지러워도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아주 걱정인 것은 그런 국민적 양심의 자리가 아주 없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세상은 아무래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다 양심적이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천하 사람이 저이들 혹 저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옳다 하고 인정하는 권위를 가진 핵심이 있어야 질서가 유지 됩니다. 그것이 아주 없어지면, 아무래도 사회생활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 폭력으로라도 그것을 유지하게 됩니다. 5.16은 그렇게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해서 일시로 묵인된 것이고 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오래면 국민의 양심이 아주 마비되어 버립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5.16 이후의 정권을 극력 반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압박을 면하고 싶으면 싶을수록 어서 빨리 국민적 양심의 자리를 세워야 합니다. 정신적 등뼈를 일으켜 세위야 합니다. 집에는 늙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늙은이는 그 집 양심의 상징입니다. 나라에도 늙은이가 있어야는데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지나온 역사로 보아 부득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부족한 우리끼리라도 중심을 세우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정치는 모르지만 벌써 오래전부터 새 중심 세력을 기르지 않는한 우리 정치 풍토를 고칠 수는 없다고 주장해 옵니다. 정치적인 운동으로 결코 해결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겨누는 것은 그러한 운동에 있습니다. 집을 지을 재목은 이 숲에서 나가겠지만, 우선은 집 지을 생각은 하지말고 순전히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이 다음 사람이와서 재목을 구할 때에 서슴치 않고 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참 건지자는 생각 있거든 우선 정치적인 생각을 깨끗이 청산하고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치에는 아무래도 기르기 보다는 어서 찍어 쓰자는 조급한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역사 첨에 天皇氏는 木德으로 王했단 말이 있습니다. 찍기보다는 기르자는 마음이 木德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형편상 그럴만도 하지만 너무 찍어 쓰기에만 바쁘고 기르려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씨알의 소리를 해 보자는 것은 기르기 위해서 입니다. 나라에 늙은이 없으면 못생긴 우리끼리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의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늙은이를 가질 것입니다. 그 밖에 어느 성인이 오신대도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씨알의소리 1970.4월 창간호
저작집30; 2-271
전집20; 1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