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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유를 따르는 사람들 / 김 동 규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1983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여기에 재기를 담아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과 가정의 세계를 덧붙여 무늬를 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사로워 보이는 비범함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큰 성취를 기원한다.(조강석. 김혜순 시인)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이킹 / 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1987년생
▲영남대 국문학 박사 수료
[심사평]이번에 본심 심사 대상이 된 시의 경우, 소통하기 어려운 시가 많았다. 인간의 삶은 존재하지 않고 언어만 존재해서 그 언어의 유기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의 그릇에 제각기 놓인 추상적 관념적 언어를 통해 언어의 난무(亂舞)를 보았다. 삶의 내용이 내포되지 않은 시의 언어는 그 의미를 잃는다. 의미를 잃고 형식만 남음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시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한국 시의 위기다. 그러나 당선작 '바이킹'은 한 남녀가 놀이기구 바이킹을 타면서 한순간 겪게 되는 고통과 공포를 통해 우리 삶의 절망과 희망이 교직되는 순간순간을 절실하게 잘 드러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재적 삶이 바이킹을 타는 행위로도 재해석되었다.(문정희. 정호승 시인)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차도하 씨의 ‘침착하게 사랑하기’는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무엇보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서효인 시인)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세잔과 용석 /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1992년, 창원 출생
[심사평]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을 호명하며 이룩하고 있는 당선작의 기체(氣滯)적인 시 세계는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움직였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고자 했다.(신용목·김행숙·김현 시인)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자 숲과 검은호수 / 이원석
모든 것은 덤불 속에 감춰져 있지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둡고 어렵고 어리고
나뭇가지에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마른 잎들이 견디기 힘든
날들이 따라붙었지 매달리고 매만지고 메말라
찬 공기는 조금씩 뒤섞였어
침상에서 내려딛은 발은 문 앞까지 낡은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를 누르고 길고 고른 숨소리들
사이로 천천히 밀어내는 호숫가의 배
젖은 흙 다섯 발가락들 사이로 닿는 촉각 촉각 누르는
건반과 긴바늘 입술 위의 손가락
우거진 뿔이 덤불 속에 갇혀
머리를 숙이고 있지 포기하지 못한 자랑들이 엉켜 있는
낮은 덤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지 다물지 못하는 입으로
숨을 뱉으며 뒷걸음질 끝에 꿇은 무릎과 마른 잎 위의 몸뚱이
내가 들어 올리고 싶은 뿔은 덤불 속에 잠겨 있어
달리는 덤불을 보여 줄게
춤추는 작은 숲을
바닥을 움켜쥔 모든 뿌리와 함께
흰옷은 흙투성이
물은 차고 어두워 소스라치는 살갗
걸어 들어오는 고요와 잠긴 청각이 듣는 물소리
물속을 만지면 물이 몸을 바꾸고 뒤집는 모양은
얼굴과 얼굴이 흐르고 잠기는 기억
길게 줄어드는 음이 끊기지 않는
몸에 선을 긋고 지나가지 손도 발도 없이
물의 틈을 찾아 결대로 몸을 틀며 가라앉는 숨
접촉경계혼란
피아노의 가장 낮은 건반을 무한히 두드리는
바닥
놓지 마 놓지 마
춤을 추는 팔과 파란
뒤집힌 호수 바닥 위에 검은 숲
그림자 속 덤불과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젓는 우거진 뿔과 큰 눈망울
진저리치며 흩날리는 입과 잎과 입김
호수 위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검은 물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숲엔 부러진 뿔과 나뭇가지
몸뚱이 위로 끝없이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
▲1976년 서울 출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당선작으로 뽑은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는 투고자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짧은 시였다. 100행에 육박하는 시들을 신춘문예에 투고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패기와 스케일을 높이 사고 싶다. 당선작은 ‘접촉경계혼란’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숲과 호수의 데칼코마니를 통해 역동적으로 전개하면서 “달리는 덤불” 하나를 눈앞에 보여 준다. 앞으로도 그가 현실과 꿈과 무의식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어떤 새로운 모험의 결과물들을 우리 앞에 부려 놓을지 기대를 갖게 된다.(나희덕·안도현 시인)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릴케의 전집 / 김건홍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1992년 경북 상주 출생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심사평]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시적 압축미가 돋보였다. 당선작을 놓고 끝까지 겨룬 것은 송은유와 김건홍 작품이었다. 송은유의 ‘화분의 위의(威儀)’는 언어를 자기식으로 감각 있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수준급이고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대의 풍경들을 그릴 줄 안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반면 부분 부분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표현들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송재학·손택수·안현미 시인)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있다
▲1966년 충남 부여 출생
[심사평] ‘도서관의 도서관’은 사회적 소통이 단절된 당대 문제를 내밀한 정서 의식으로 예각화하면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자유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시인은 더욱 분발하여 한국 시단의 별이 되기를 바란다.(김경복·조말선 시인)
■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심사평] 함께 보내온 시편들이 일정하게 고른 높이를 보여주었고, 또 시 창작의 연륜이 느껴졌다. 시 ‘폐사지에서’는 허공에서 독경의 소리를 살려내고, 떨어진 낙엽에서 풍경의 소리를 복원하면서 절이 사라진 공간에 다시 절을 짓는, 멋진 정신의 노동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라고 말해 모든 생명 존재 그 자체에 법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대목과 있고 없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담대한 상상력은 당선작으로서의 풍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불교시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