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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믿지 마세요. 1
씬 1. 해뜨기 전 이른 새벽.
희뿌염한 어둠 속에서 장중하고도 성령 충만한 종교 음악을 배경으로…….
총 든 교도원이 지키는 전망대.
가시철사가 둘러진 담장.
외부와 차단된 두꺼운 벽과 철창이 보인다…….
그렇다.
이곳은 교도소다.
재소자 수감실.
새벽 6시, 아침이 시작되는 이곳.
꿈틀대며 일어나는 여자 재소자들, 익숙한 솜씨로 각을 맞춰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규율인 듯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교도관을 맞는 재소자들.
그 중 화숙(20대 후반) 과 명자(20대 중반), 둘러보는 교도관과 눈이 마주치면 화려한 아부성 미소를 날리기 시작하고. 반면 맨 안쪽의 참한 인상의 재소자, 교도관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유일한 재소자, 범상을 초월한 보살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마치 명상을 하듯 앉아 있는 그녀가 우리의 주인공 영주(20대 중반영주다!)
영주의 개인 사물함에 붙어있는 ‘어린 자매의 사진’이 슬쩍 눈에 띄고.
화장실.
청소중인 재소자들.
바닥을 박박 문지르는 영주.
간만 죽이고 있는 화숙, 명자등 다른 재소자들, 이런 영주를 보며 피식거리다가는 교도관이 나타나자 후다닥 청소 자세를 잡고!
우연일진 몰라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힘겨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전형적인 모범수의 모습인, 허리 펴고 손 올려 이마 땀 닦기 자세를 교도관에게 보여주고 마는 영주!
물론 이런 시간이 너무나 보람되고 있는다는 전형적인 착한 이의 미소도 잃지 않고!
역시 변모되어가는 재소자의 모습에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교도관의 따듯한 미소!
이런 모습을 화숙과 명자, 가증스럽게 바라본다.
목공예실.
열심히 작업 중인 영주.
아직은 모양이 투박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얼추 기러기 모양의 나무 조각품인 듯하다.
재소자 수감실.
저녁.
화숙, 종이를 찢어 접어 이빨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하고 명자, 옆으로 누워 허벅지 살 빼기 스트레칭을 하는데.
마치 ‘오늘도 무사히’에 나오는 어린 소녀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영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햇살로 인해 영주의 몸에 엷은 오로라가 생긴 것 같다.
이를 바라보는 교도관…….
화면, 천천히 어두워지면서…….
장중하고 느린 종교 음악 끝난다.
씬 2. 가석방 심사위원 실/아침.
나뭇가지에 앉아 표로롱 거리는 새.
심사위원: (소리) 교도관 평점이 너무 좋은데요, 주영주씨. 재활 교육도 지나치게 열심히 하고……. 혹시 가석방 심사가 있다는 걸 안거 아닙니까?
카메라 빠지면 창문 너머로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영주.
영주 앞에는 중년의 여자가 한명 낀 가석방 심사위원 네 명이 앉아 있다.
영주: (동요 없이) 예. 들었어요, 심사 있다는 거. (조금 술렁거리는 심사 위원들.) (담담). 저는 사기꾼에 범죄잡니다. 저 때문에 피해 받은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제가 지은 죄에 대해 충분히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도. 저 가석방 되고 싶어요. 제가 참 염치가 없네요.
영주, 착잡한 미소 들어가고.
영주: 그래도 할 수 없어요. 나밖에 없거든요. 우리 언니 결혼하는데. 가족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언니 옆에 서줄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어요.
심사 위원들, 영주의 서류를 뒤적여 본다.
영주: 재활 교육으로 목공예를 하고 있습니다. 언니 결혼 선물로 기러기를 만들고 있어요. 부모님이 해주시는 거라면서요. 그래야 잘산다면서요. 우리 언닌 제가 해줘야 해요.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는 영주.
숙연해지기 시작하는 심사위원들…….
영주: 돌아가신 아빠대신, 돈벌러간 엄마대신, 언니는 저한테 세 살 많은 아빠고 엄마였어요. 제 등록금 때문에 고등학교도 일 년이나 미루고 일하러 다니던 언니를 생각하면, 정말 언니한테는 뭐든 해주고 싶은데…….
영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진다.
영주, 그 눈물을 훔치며 애써 미소 짓는다.
영주: 죄송합니다.
햇빛 속에 앉아있는 영주의 조신한 태도.
눈물.
조근 조근한 말투.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주의 슬픈 미소.
스틸 잡히며 화면 하단에 꽝!
소리와 함께 ‘가석방’이란 도장 찍힌다!
씬 3. 재소자 수감실/낮.
보면, 영주를 앞에 두고 모두 슬프고 착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재소자들.
화숙은 벽에 기대에 이들을 한심한 듯 못 마땅히 바라보고 있고.
푼수 끼가 다분한 명자는 화숙의 옆에 앉아 있긴 하지만 다른 재소자들처럼 영주를 따라하고 있다.
영주: (답답한) 내면 연기. 오버하지 말고! 슬픈 듯 슬픔을 억제하는 그런 거. (명자에게) 넌 변비니. 여러분들, 그냥 포기하세요. 이 불신의 시대에 상대방으로부터 날 믿게 한다는 게 쉬운 건 줄 알아?
소리: (부르는) 주 영주!
영주: 예, 준비 됐습니다. (재소자들에게) 거짓말은 천부적인 거거든! 함부로 도전하지 말고 그냥 꾹 참고! (화숙, 명자를 가리키며) 여기 계신 두 분처럼 형기를 꽉 채우고 나가는 것도 속 편하잖아?
화숙: (심기가 좋지 않은) 가석방이 벼슬이다, 응!
놀리듯 미소를 날리고는 나가는 영주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화숙!
씬 4. 복도/낮.
명자, 복도를 내다보며 영주에게 소리친다.
명자: (친한 척) 야, 연락할게! 잘 가! (화숙에게) 쟤 진짜 재수 없지, 그지?
화숙: 빨리도 알아챘다.
씬 5. 타이틀.
‘그녀를 믿지 마세요!’
씬 6. 교도소 정문 앞/낮.
교도소 문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영주.
그녀의 경력을 얘기하듯 딱 붙는 겨울 진 바지에 허리 사이즈의 밍크코트 차림!
그리고 가방이 하나 들려있다.
짝퉁이 의심되나 그런 데로 세련되고 개성 있다 할 수 있는 코디긴한데…….
작열하는 7월의 태양!
영주의 뺨을 따라 땀방울이 뚝 떨어진다.
옆을 보면 다른 출소자들 마중 나온 식구들과 두부를 먹고 있고.
기대도 안했지만 자기만 혼자인 것을 안 영주, 애써 밝고 당당하게 밍크코트를 휘날리며 자리를 뜬다.
씬 7. 편의점 앞.
파라솔에 혼자 앉아 맥주 캔을 단숨에 들이는 영주!
영주: 캬, 시원하다!
씬 8. 공중전화 부스/낮.
전화를 하고 있는 영주.
웬일인지 신호음이 갈수록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망설여지고.
영주, 끊으려하면 이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남자: (소리) 주 영옥씨 핸드폰입니다.
영주: (망설이다간) 저기. 저 영주라고 하는데요, 언니.
남자: 누구요? 영주요?
영주: 네, 주 영주라고.
씬 9. 웨딩 샾.
웨딩드레스를 입고 핸드폰을 받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오는.
영옥: 누구예요?
남자: 글쎄, 영주라는데.
영옥, 순간 놀라며 핸드폰을 가로채고는 밖으로 나가며.
영옥: 여보세요?
씬 10. 다시 공중전화 부스.
영주: (반색) 짜잔! 언니, 나야 영주!
영옥: (소리, 당황) 어, 영주야. 웬일이야?
영주: 웬일은 나왔지! 나온 댔잖아 나! (장난치듯) 뭐야, 별로 안반가운가보네?
영옥: 응?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영주: (반응이 마음에 안 들지만) 나 깜짝 놀랐잖아, 남자가 받아서, 누구야? 형부 될 사람이야?
영옥: 으응. (여전히 당황스런) 으응, 얘기 했는데…….
영주: (소리) 잊어버렸나 보구나. 그 정돈 또 우리용서 하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쩔쩔매는 영옥을 힐끗거리고.
웨딩샾 안의 남자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영주: (소리) 준비는 잘 되가? 웨딩드레스는 나랑 같이 고르기로 한 거 알지? 절대 언니 혼자 고르면 안 돼! 웬만큼 촌스러워야 말이지. 나 지금 내려가거든? 내가 가서 죽이는 거 골라줄게 기다려!
영옥: (놀라는) 지금?
씬 11. 다시 공중전화 부스.
영옥의 반응에 영주 이제는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다.
영주: 왜 놀래? 웨딩드레스 벌써 골랐어? 입고라도 있나보지?
영옥: 아니, 저기. 뭐 준비할 것도 별로 없고, 여긴 시댁 식구들도 많아서 괜찮은데. 좀 쉬었다 오던지. 아님 여행이라도. 결혼식도 아직 남았잖아. 저기, 정말 난 니가 힘들까 봐 그런 거거든?
영옥의 부담을 눈치 챈 영주, 오기가 발동한다.
영주: 그럼 알지! 설마 언니가 내가 쪽팔려서 그러겠어? 그래도 내가 가야지! 그럼! 걱정 확 붙들어 매고, 우선 형부라는 사람한테 내 얘기부터 확실하게 해줘! 걔 성질이 드러워서 한번만 더 이름 까먹으면 무슨 일 벌어질지 모른다고!
영옥: (당황) 저기 영주야, 내 말 오해했나본데.
영주: 오해는 무슨 우리 사이에. 참, 그리고 꼭 유학중이라고 전해줘! 일본 미국 거쳐서 동남아 순방 유학 끝내고 오는 중이라고! 그래야 그나마 언니 가오가 살지! 안 그래? 언니 나 지금 떠날 테니까 핸드폰 꼭 켜놔! 아니, 뭐 꺼 놔도 어떻게든 꼭 찾아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영옥의 다급한 변명도 무시한 채 쾅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영주.
화를 참는 듯 숨을 고르다가는 문득 옆을 보면 참한 스타일의 정장 걸려있는 쇼윈도가 보이고.
망설이는 영주의 표정.
씬 12. 청량리역 대합실/낮.
전 씬의 정장으로 갈아입은 영주, 대합실 의자에 앉아 매표구를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다.
그녀의 손엔 역시 전 씬의 가방이 들려져 있고.
씬 13. 기차/낮.
영주, 교도소 사물함에 붙어 있던 어린 시절 언니와 찍은 사진을 본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지만 이내 무거운 얼굴이 되는 영주.
한숨이 새어 나오는데 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옆을 보면, 다섯 살쯤 먹은 남자 아이가 옆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다.
아이가 뛸 때마다 영주의 몸도 같이 흔들린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부부.
‘연예 영화 정보 신문’에 정신이 팔려있다.
젊은 엄마: (신문을 보며) 거봐, 내가 얘네 이혼한다. 그랬잖아, 3년 안에 끝난다고.
젊은 아빠: 그래, 너 용타.
영주, 여기 좀 보라는 듯 흠흠 기침을 하면 살짝 고개를 드는 젊은 엄마.
아이: (더 열심히 뛰며) 엄마, 나 좀 봐라.
젊은 엄마: (아들을 보고) 그러다 다쳐. (다시 신문을 보며) 성격차이 좋아하네, 바람 폈겠지?
영주: (열 받고) …….
마침 지나가는 홍익회.
영주: 여기요. 맥주 한 캔요. 카스로요.
건네받은 맥주를 살짝 흔들어 의자위에 올려놓는 영주.
아이가 뛸 때마다 캔 맥주 흔들거린다.
싸가지 없는 젊은 부부, 신문을 넘기려는 순간, 영주, 캔 맥주를 따는데 폭포처럼 뿜어져 나와 부부의 얼굴을 강타하는 맥주.
영주: (오버한다.) 어머, 어머! 어떡해요. 애가 뛰는 바람에 맥주가 흔들렸나 봐요!
자기 애땜에 그랬다는데 화내려던 젊은 부부 말은 못하고 맥주만 닦아내는데.
영주: (염장을 지른다.) 맥주 냄새 지독 할 텐데. 말 오줌 냄새 같은 게.
젊은 엄마, 아이의 팔을 잡아 당겨 엉덩이를 팡팡 때린다.
젊은 엄마: 엄마가 뛰지 말랬지. 왜 말 안 들어?
아이: (울면서) 왜 때려?
소리: 아, 거 시끄럽게.
소리: 조용히 합시다!
영주, 모르는 척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고.
시간 경과.
잠을 청해보는 영주를 둘러 싸 앉은 군인들.
만만찮은 수다에 몸을 뒤척이고.
시간 경과.
할아버지 두 분이 앞자리에 앉아 발을 영주 쪽으로 뻗고는 심하게 주무시고 있다.
발 냄새며 다리를 뒤척이시는 통에 영주, 잠 반, 짜증 반으로 인상이 구겨지고.
시간 경과.
잠시 정차되어있는 기차.
뒷모습으로 보이는 희철(20대 후반), 짐칸에 영주의 짐을 옆으로 하고 자기의 짐을 올려놓고는 자고 있는 영주의 앞자리에 앉는다.
반듯하고 순진한 지방 청년의 모습인 희철.
문득 생각이 났는지 확인하듯 안주머니의 반지 케이스를 꺼내어 보면 알도 작고 스타일도 구식이지만 작고 아담한 다이아 반지!
그것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가는 기차가 ‘덜컹’하며 출발하는 바람에 케이스를 놓쳐 반지가 빠져 굴러가 영주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리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영주를 깨우기가 난감한 희철, 할 수 없이 주위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여 영주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 넣으려하면 이때 문득 눈을 뜨는 영주, 희철을 보면 손은 이미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있고 얼굴은 무릎 사이에 뭔가를 관찰하는 듯 한 영락없는 치한의 모습이다!
‘으아-ㄱ!’
비명을 지르며 희철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는 영주!
사정없이 맞으며 비명을 지르면서 변명을 하는.
희철: 자, 잠깐만요. 그게 아니 구요!
시간 경과.
기차가 움직이고 있고.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눈을 감고 앉아있는 영주.
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하고 있는 희철, 짧은 시간에 많이 맞은 모양이다.
영주를 힐끗거리며 억울함을 지울 순 없지만 성격인지 사과하는.
희철: 하여간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만 오해는 푸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쪽에서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영주: (눈 감은 채) 어떻게 상습범들은 대사도 하나 안 틀리냐?
희철: (화를 참으며) 저는 용강이라는 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최희철이라고 합니다. 약사 최희철입니다. 나름대로 용강에서는 그래도 신임도 있고, 손님도 많고…….
영주, 대꾸도 없이 개 무시하자.
희철: 어차피 다시 볼 인연은 아니지만 누군가한테 그런 기억으로 남는다는 게 억울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그런 수준의 인간 아닙니다……. 그 반지 우리 어머니 반진데 지금 그걸로 프러포즈하러 가는 길인데, 그 중요한 반지가 거기에 떨어진 것입니다.
영주, 먼말이야? 표정으로 눈을 뜨면, 흥분한 탓에 두서없이 말한 희철도 무안한 듯 시선을 피하며 괜히 코를 비비면서.
희철: 에이. 코피나나 보네.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하면 영주, 콧방귀를 뀌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이때 대각선 자리에 앉아 이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 동시에 일어나며 희철의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빼내어 간다!
희철은 당근 아무 것도 모른 채 화장실로 가고.
이를 본 영주, 무시하고는 다시 눈을 감으려 하다가는 문득.
영주: (혼잣말) 설마 저 븅신, 날 물고 늘어지는 건 아니겠지?
기차가 서고,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이면 순간 치고 들어오는 FLASH BACK.
교도소 문을 나서기 전 소지품과 목각 기러기를 돌려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영주에게.
교도관: 가석방 중에 사고 치면 더블인거 알지? 아예 사고 근처에도 가지마!
개찰구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영주의 시선.
영주: (난감한) 에이 씨. 미쳐 내가!
씬 14. 개찰구.
소매치기가 개찰구를 막 나가려는 순간, 몸을 던지듯 부딪치는 영주, 그리곤 어느새 손을 썼는지 지갑을 내민다.
영주: 지갑, 기차에 놓고 가셨어요?
소매치기: 어?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요.
영주: 아니에요.
영주, 돌아서는데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고.
뒤를 돌아보면 소매치기는 잽싸게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고.
다시 돌아보면 희철이 창으로 영주를 보고 있고.
영주, 낭패스런 표정을 짓다가는 눈이 커지며.
영주: (놀라는) 어? 내 가방!
영주, 기차를 향해 허벌나게 달리기 시작하자 희철, 의아하게 바라보면.
영주: (소리치는) 야! 내 가방!
희철, 안 들리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
영주: 야, 가방 던져! 가방 던져 인마!
희철, 그제야 가방이란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입모양으로 ‘가방?’ 해보지만 기차와의 거리는 이제 너무 멀다.
숨을 몰아쉬며 멀어지는 기차를 난감하게 바라보는 영주!
씬 15. 역무원실/낮.
사무실 구석에 앉아 있는 영주.
역무원들은 그런 영주가 신경 쓰이는 듯 힐끔거리고.
영주, 초조하게 있다가는 반지를 꺼내어 원망스럽게 바라보면 의아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역무원 하나.
영주, 도둑 발 저린 듯 괜실히 반지를 손에 끼고는 시선을 돌리자 역무원도 하던 일을 하고.
영주, 반지를 빼려하는데, 빠지질 않는다.
이때 영주 앞으로 역무원이 다가와.
역무원: 아직 연락이 없는걸 보면 분실물 센터에는 접수를 안 시킨 거 같네요. 혹시 연락이 오면 저희가 전화를 드릴 테니까 돌아가 계시면.
영주, 난감하다…….
씬 16. 용강 역사 앞/낮.
‘제 12회 용강 고추 축제’란 현수막이 붙어있는 용강 역사.
그 앞에 선 영주.
이곳은 전형적인 시골 소읍이다.
낡고 촌스러운 간판에 ‘용강 통닭’ ‘용강 방앗간’ ‘용강 미용실’등 단층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한낮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땡볕 내리쬐는 보기만 해도 뜨거운 광장 앞을 개 한 마리가 느리게 지나갈 뿐.
둘러보던 영주, 짜증이 밀려오는지.
영주: (혼잣말) 어떻게 찾으려고 여길 온 거야? 미워, 주 영주.
한숨을 쉬는 영주, 개가 지나간 길을 가로질러 미용실로 들어간다.
씬 17. 미용실/낮.
아줌마1: 최희철? 희철이?
미닫이문을 열어놓고 발을 드리운 실내.
달달거리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파마를 말고 비닐 캡을 쓴 아줌마(50대) 와 그냥 놀러 온 아줌마(50대)가 수박을 먹다가 영주의 물음에 대답한다.
미용사(30대 후반 여)가 또 다른 아줌마의 머리를 말다가는 돌아보고.
영주: (반색) 어머, 아세요?
아줌마3: 거기 용강 약국 하는 희철이 아녀?
아줌마1: 그런 갑네, 교장 선생님네 아들내미.
아줌마3: 교장선생님네 아들이믄, 거기 큰 아들이랑 친구 아녀?
아줌마1: 왜 아녀, 우리 영득이 친구지.
아줌마2: 영득이랑 희철이랑 동갑인감?
아줌마1: 암만, 국민핵교, 중핵교 같이 나왔지.
아줌마3: 희철인 공부를 일등으로 허구 거기 아들은 쌈을 일등으로 혔지.
아줌마1: 지랄허네.
아줌마3: 내 틀린 말했어? 한번은 영득이가 희철이 마빡을 터뜨려가지고 그 집 할머니 난리 한번 났었잖어. 이마에 상처 나서.
아줌마1: 맞아, 그 집 할머니, 손자라면 끔찍허시지.
아줌마1: 워낙 아들이 귀한 집이잖아, 그 집 사모님, 아들 낳겠다면서 아들 많은 집 빤스 입으면 잘난다고 혀서 내 빤스 빌려가구 막 그렸잖어, 기억 안나?
쉴 새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아줌마 수다.
영주: 저기요.
아줌마3: 그려서 희철이가 지 할머니한테 그렇게 각별한 겨.
아줌마1: 보고 배운 거지, 교장선생님이 워낙 잘하시잖아.
아줌마들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
영주: 여러분?
아줌마2: 아들 달랑 하난가?
아줌마1: 딸 하나 더 있지, 그 집 사모님 딸 낳다가 돌아가셨잖여. 우리 만석이 낳고 얼마 안 있다니까 어이구 벌써 한20년 됐네.
아줌마2: 아, 기억나네, 그 집이 원래 대대로 아들 하나거든. 근데 할머니가 아들 하나 더 바랐다가 몸 약한 며느리까지 잃어가지구. 용심 많다고 욕 좀 드셨지 그때.
아줌마1: 에이, 모르고 하는 소리였지.
아줌마2: 그럼, 며느리한테 얼마나 잘하셨는데.
미용사: 어떻게들 그렇게 잘 아세요?
아줌마1: 몇 호나 산다고 여기, 숟가락두 세는데.
아무도 영주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영주, 짜증이 나는지 그냥 돌아서려는데.
아줌마1: (갑자기) 그런데 거기는 왜?
영주: 예?
아줌마1: 희철인 왜 찾아? 아까보니께 약국엔 없는 것 같던 디.
영주: 저기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 댁은 여기서 먼가요?
씬 18. 택시 안.
달리는 택시 안.
쌍꺼풀이 짙어 느끼한 인상인 택시기사(남.40대 중반) 가 룸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영주를 자꾸만 쳐다본다.
영주 그 시선을 느끼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택시기사: 내가 이 동네에서 10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아가씨 같은 이쁜 손님은 처음입니다.
영주: …….
택시기사: 탤런트해도 되겠습니다. 훤칠하니 각선미도 좋으시고.
영주: (소리) 아, 오늘 진짜 짜증 다양하게 올라오네.
택시기사: 구절 리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영주: 그냥요.
택시기사: 놀러오셨어요?
영주: …….
택시기사: 이 동네 좋은데 많습니다. 워낙 외져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시원한 계곡도 있고, 조용한 절도 있고.
룸미러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느끼하게 웃으면.
영주: (애써 미소) 상놈의 거,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택시기사: 구절리 어디로 모실까요?
영주: 교장선생님 댁이요.
택시기사, 순간 흠칫 놀란다.
영주 그 모습을 본다.
택시기사: (조심스럽게) 이장님 댁엔 무슨 일로…….
영주: 그 집 며느리 될 사람이예요! (하고는 속엣말) 그러니 닥쳐주세요, 제발.
인서트.
비포장 시골길.
휘청하는 택시.
다시 택시 안.
택시 기사, 느믈거리는 미소가 없어졌다.
가끔 긴장해서 룸미러 속의 영주를 쳐다본다.
영주, 만족한 미소로 한가로운 농촌풍경을 감상한다.
씬 19. 희철네 집 앞/낮.
드믄 드믄 떨어져있는 시골마을.
풍경은 아름답지만 진짜 시골이다.
비포장 길 하나가 길게 나 있을 뿐 제대로 된 길이 하나도 없다.
오래됐지만 단아한 느낌의 이층 양옥집 앞에 멈추는 택시.
영주, 돈을 꺼내는데…….
택시기사가 먼저 차에서 내리며.
택시기사: 잠깐만요.
택시기사 집 안으로 들어가고.
영주, 의아해하며 차안에서 내리는데.
소리: 어떻게 오셨나요?
돌아보면, 영주 코앞에 서있는 단정한 차림의 머리 하얀 할머니.
영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저기, 최 희철씨 찾아 왔거든요.
할머니: 희철이. (담담하게)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 희철 이는 작년에 죽었습니다. 오늘이 그 아이의 기일입니다.
영주, 입이 떡 벌어진다!
플래쉬.
미용실에 앉아있던 엽기적인 수다 3인방, 영주를 보듯 카메라를 보며 싸늘한 미소를 흘리고!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하자 경직되던 택시기사!
이제사 둘러보니 여기는 숲속 외딴집!
영주: (소리) 이거 공포물이야?
소리: 저.
영주, 더욱 놀라며 뒤돌아보면.
택시 기사와 함께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여자, 희철 셋째 고모다.
작은고모: 우리 희철이 찾아오셨다고요.
영주: (너무 놀라 사래가 걸린 듯 말이 잘 않나오는) 네, 그게 저…….
이때 작은 고모, 영주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곤 놀란 표정으로 택시기사와 귀엣말을 주고받으면.
영주: (이를 보곤, 무안한 웃음) 저기 사실은 이 반지가 어떻게 된거냐면요.
작은고모: (말을 자르며) 희철인 지금 없고요. 오빠, 아니 희철이 아버지가 약국에 계신데. 전 희철이 고모거든요.
이때 할머니, 다시 택시 기사에게 공손히 묻고 있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는지요?
택시기사: 어머니, 저 셋째 사위잖아요.
할머니: 너무 늦으셨습니다, 우리 셋째 사위는 작년에 죽었습니다.
영주, 그제야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걸 알고.
작은고모: 아유 엄마도 참, 손님 오셨는데. 치매기가 좀 있으세요. (택시기사에게) 당신 뭐해, 얼른 오빠한테 모시고 가지 않고!
택시기사: 으응.
영주, 갑작스럽게 부산해진 이들의 모습이 의아하다.
씬 20. 용강 도서관/저녁 무렵.
장마의 피해로 온통 아수라장이 된 낡은 도서관.
온통 젓은 책을 펴서 말리던 수미와 점자.
수미: (반색) 그렇게 예쁘데?
만석: 몰라, 하여간 우리 엄마 입에서 김지미 얘기 나오면 최곤거거든!
점자: 니네 오빠 능력 있다, 누구야?
수미: (들뜬) 나도 잘은 모르는데, 있어 약대 후배 언니! 잠깐만 이럴게 아니라, 오빠 오토바이 갖고 왔어?
씬 21. 용강 약국.
테이블 위에 반지를 내미는 영주.
그 앞에 앉아 있는 희철의 아버지, 전형적인 교육자의 모습이다.
그 뒤에 여전히 서 있는 택시 기사.
아버지, 갑작스럽지만 침착하려는 모습이고.
그런 아버지의 위엄에 영주 조금은 주눅이 들어있다.
아버지: 그래, 희철 이와 교제중인 사이라고 했다구요.
영주: 네? (택시 기사를 보곤 상황파악) 아, 네. 저기 그게 아니구요.
영주, 택시 기사가 있어 말을 흐리자.
아버지: 자네는 그만 가봐. (택시기사 나가고) 그게 아니라면, 그 반지가 왜 아가씨한테 있는 거지?
영주: 그 게요. 말씀드리기가 좀 복잡한데요, 그냥 제가 주웠다고 생각하시구요, 빨리 희철씨와 연락을…….
아버지: (의아) 주워요? 이 반지를?
영주: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제가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릴 형편이 아니거든요?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형님, 안 들어가십니까? 어? 손님이 계시네?
영주 보면, 꿈에도 가까이하기 싫은 경찰 제복, 용강 파출소장인 희철의 둘째 고모부가 약국으로 들어서고 있다!
순간 자동적으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영주!
아버지: (이해가 안가는) 아가씨, 아가씨는 지금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분명 우리 집에 있어야 할 반지를 들고 와 내 아들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 정확히 얘기를 해줘야 내가 앞뒤를 이해하지 않겠소?
순간 파출소장, 직업적으로 사태를 읽곤 눈빛이 날카로워지면 이를 본 영주, 더욱 주눅이 들며.
영주: 네, 그렇긴 한데요.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요. 저기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드님과 처음 만날 때부터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저도 잘못한 게 있긴 하지만 최 희철씨가 제게 실수를.
아버지: 실수를?
영주: (더 난감한) 아니, 그냥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전 이 반지를 돌려드리고 싶구요, 그분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파출소장: 우리 희철이가 아가씨 연락을 피한다는 말인가? 왜?
영주: (꼬이는 상황에 놀라는) 네?
아버지: (얼굴이 벌게지는) 아가씨 말로는 우리 애가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얘긴데, 난 그렇게 가르치질 않았소.
영주: 아뇨, 그, 그런 뜻이 아니라요…….
파출소장: 낯이 선데. 형님, 이 아가씨 누굽니까?
아버지: (의심이 짙어지는) 우리 애와는 어떻게 만났소? 아가씨는 누구요?
아버지와 파출소장인 고모부, 의심의 눈빛이 짙어질수록 영주 점점 더 난감해 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특유의 연기력을 과시하는 영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 당황하는 아버지와 파출소장!
영주: 너무들 하시네요.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세요. 으흑!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인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면 이때 들이 닥치는 수미.
수미: (반색)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영주, 난데없는 수미의 등장에 눈이 동그래지고!
아버지와 파출소장도 수미를 돌아보는데 수미, 오빠의 약대 후배라고 생각하는 영주를 만난 것이 참 반갑다!
씬 22. 부산 라이브 카페/저녁.
무대에서는 그룹사운드와 사람들이 노래를 연습 하고 있고.
몇몇은 조명을 보고 있고.
한쪽 구석에선 긴장된 얼굴로 종이에 뭔가를 쓰며 대사 연습하듯 중얼거리는 희철을 친구 하나가 웃으며 어깨를 치면서 지나간다.
씬 23. 경찰차 안/저녁.
달리고 있는 경찰차.
뒷자리에 난감한 표정의 영주를 가운데로 무거운 얼굴의 아버지와 그 눈치를 보는 수미가 양옆에 앉아있고.
마치 연행되어가는 느낌.
운전하고 있는 경찰 영득(30, 남) 옆에 파출소장이 앉아있고…….
파출소장,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는데…….
파출소장: 뭐라구? 지금 가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래, 희철이 색시될 분이랑. 그러니까 저녁 준비 제대로 하라고……. (이때 무전기에 칙칙 대면) 무전 왔다. 전화 끊자.
핸드폰을 끈 파출소장.
이번엔 무전기에 대고 오버스러울 정도로 목소리가 커지고…….
파출소장: 어. 나야. 뭐? 사기 절도? 이런 상놈의 쉐이들. 뭐. 젊은 여자야? 여자고 뭐고 봐줄 필요 없어. 시골사람 우습게 알고 그러는 것들은 따끔한 맛을 봬줘야 돼. 무조건 잡아 쳐 넣어!
무전 끊어지면…….
희철 부: 자네 언어 좀 순화 못하나?
파출소장: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형님. 이런 사기 절도는 무조건 거칠게 다뤄야지 안 그러면 되려 당하기 십상이예요.
영주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데…….
창밖을 보면 기차 역사가 보이고…….
영주: (순간 머리가 도는) 저기 수미씨.
수미: 네?
영주: 저기. 화장실 좀.
씬 24. 용강 기차 역 매표구.
영주: (다급한) 아무 표나 한 장 주세요!
영주의 득달같은 물음에 의아한.
매표원: 네?
영주: 그냥 아무 표나 한 장 줘요, 제일 빠른 걸로!
매표원: 장성께 하나 있는데. 앞으로 30분이나 돼야 오는데…….
영주: (급한) 여기 버스 터미널은 없어요?
매표원: 있지만 서두 거기도 배차 간격이 그 정돈 되요.
영주, 난감해하자.
매표원: (씩웃으며) 희철이네 오신 손님이지요?
영주: (허걱!) 어, 어떻게.
매표원: 여긴 동네가 좁아서 소문 다 났어요, 시방. 그리고 저쪽에서 수미랑 소장님이 찾으시네요.
영주, 놀라 돌아보면 의아하게 영주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영주, 방법 없다!
어지러운 듯 쓰러져버리는 연기!
씬 25. 병원 응급실 입구/밤.
도착하는 경찰차!
영주, 얼굴에 진땀까지 흘리는 고단수 연기를 선보이고!
파출소장과 운전병 영득, 놀란 얼굴로 이동 침대를 가지러 뛰어가면 아버지 역시 얼굴이 하얘져 경찰차 문을 열려 하는데 안 열리자.
영주: (신음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아. 그건 안에서 안 열려요, 밖에서. 아…….
아버지: (얼떨결) 그래? (창밖에 대고) 이봐, 문 열게, 문!
그제야 파출소장 문을 열어주고!
부산히 내리는 사람들.
시간경과.
응급실 앞 복도로 뛰어오는 고모들과 택시 기사.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고, 수미는 희철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되질 않는다.
둘째고모: (놀라)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파출소장: 몰라, 갑자기 저러네.
셋째고모: 이게 먼일이야. 아니, 희철인 도대체 어디 있어?
씬 26. 부산 라이브 카페/밤.
희철: (손을 번쩍 들며) 여기야, 여기!
테이블에 앉아 입구에 들어서는 재은을 부르는 희철.
마지막으로 주머니를 살짝 만져보고는(반지 함을 확인한 듯).
잔뜩 긴장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한껏 준비된 미소를 재은에게 날리고!
씬 27. 병원 응급실과 복도.
응급실 문이 조금 열리면서 영주 밖을 살피면 입구를 막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파출소장과 희철내 식구들.
점프.
다른 복도 비상구를 열면 문이 잠겨있다.
도망치려는 영주, 난감해하며 두리번거리고.
점프.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수미: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얼마 전부터 오빠가 가끔 이 언니 얘길 했던 것 같은데.
둘째고모: 근데 왜 그냥 갈려고 그렸디야?
큰고모: (뭔가 삐뚜름한, 수미에게) 걔가 걘지 어떻게 아니?
수미: 엄마 반지, 사실 오래 전부터 오빠가 갖고 있었거든요. 오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유치한 거, 자기는 그걸로 청혼한다구.
둘째고모: 오빤 좋겠네, 그렇게 며느리 타령을 하더니만.
희철 부: (헛기침을 하곤, 수미에게) 어떤지 좀 가봐라.
씬 28. 다른 복도.
다급히 복도를 빠져나오며 중얼거리는.
영주: (짜증) 그냥 형기 채우는 거였어. 가석방에 혼빙. 피박에 광박이네.
영주, 그러다가는 흠칫 놀라면 저쪽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걸어오고 있는 셋째 고모와 택시기사 부부.
영주, 돌아가려다 가는 마침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환자 하나 나오자 잽싸게 그리로 들어간다!
진료실 의사, 영주를 쳐다보면 머뭇거리던 영주, 특유의 기지.
영주: 음. 저기. 지금 나간 환자 보호잔데요, 이상 없죠?
의사: (의아) …….
그 문 앞을 지나는 셋째고모 부부.
영주, 타이밍을 맞춰 지나간 것을 알고는 문을 열고 반대편으로 나가면.
의사: (부르는) 저기요!
그 소리에 영주와 반대편의 셋째고모 부부, 동시에 돌아보고 눈이 마주치는 양쪽.
이들의 관계를 알리 없는.
의사: (영주에게) 3개월이면 지금이 한창 조심할 땝니다! 유산 위험이 높으니까 음식 제때 챙기시고요!
이 말에 어리둥절 하는 셋째고모 부부,
의사가 들어간 문의 푯말을 보면.
‘진료과목 산부인과’
영주, 셋째고모 부부: 허걱!
씬 29. 응급실 앞.
너무 놀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희철 부!
셋째 고모 부부가 자기들이 본데로 들은 데로 전한 것이다!
조금 떨어진 저쪽 의자에는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 앉아있는 영주와 그 옆에서 그런 영주를 안타깝게 내려 보고 있는 수미가 보이고.
둘째고모: (놀라며) 그래그래, 그럼 말이 되네! 그러니까 희철이가 저 아가씨를 거시기 해갖고 그래서 저 아가씨가 거시기가 되는 바람에.
파출소장: 맞아, 그래서 희철이가 실수를 하고 뭐 본인도 사실 잘못한 것도 있고 하드만. 희철이 이 노무 자슥 이거!
아버지는 충격이 큰 듯 멍한 얼굴이고.
천하의 영주도 방법이 없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미동도 없다.
오해한 수미, 이런 영주를 보는 눈빛이 더욱 안타깝고.
돌아버릴 것 같은 영주, 자기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 쉬면 그 소리를 필두로 선행되는, 샴페인 축포 소리!
씬 30. 부산 라이브 카페.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터져 나오고 손님으로 가장했던 희철의 친구들,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같이 불러준다!
카페 가운데에 서 있는 희철과 재은.
재은은 전혀 몰랐던 서프라이즈 파티라 즐거움과 함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희철: 생일 축하해, 재은아!
재은: (미소, 농담하듯) 축하, 올해까지만 하려고 그래? 무리한 거 아냐?
재은의 말에 희철,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룹의 음악, 희철의 프러포즈를 위한 배경음악으로 바뀌면서, 친구들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순간 재은, 당황하며 희철을 보면.
희철: (용기 내어, 시를 읇듯) 너를 위한 나의 준비가 부족하고, 너를 위한 나의 모습이 부족 하고, 너를 위한 나의 용기가 부족하고.
순지한 건지 유치한 건지, 노래를 하는 주위의 친구들이 가끔 킥킥대지만 집중한 희철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재은, 갑작스런 희철의 프러포즈에 잔뜩 긴장한 모습이고!
희철: 너를 위한 나의 생명이 부족하여도, 오로지 나는 너를 위한 나이길 기도하노니 나의 이 반지를…….
마지막 멘트와 함께 갑자기 음악 끊기고, 희철, 비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이 들어가고, 무언가 잡은 듯 겨우 미소를 짓다가 쓱 꺼내는데, 보면 귤이다.
소매치기가 반지 함을 훔치면서 귤로 대치한 듯.
토끼 눈을 하는 재은!
희철의 프러포즈를 위해 동원됐던 사람들도 모두 놀란 표정.
희철의 허옇게 뜬 얼굴.
희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지다가는 앉아있던 테이블까지도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하고!
웅성대는 친구들.
희철, 망연자실한 얼굴이다.
희철: 반지 없다!
순간, 정적.
잠시 후, 알게 모르게 나오는 재은의 작은 안도의 한숨.
씬 31. 희철의 집/안방/밤.
희철 부가 어색하게나마 영주에게 식구들을 소개시키고 있다.
희철 부: 여기가 큰고모님, 둘째고모님 내외 여기가 셋째 고모님 내외.
큰고모: (맘에 안 드는) 사정은 알겠지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건 예의가 아니지.
희철 부: (주의를 주는) 어허! 그리고 희철이 할머님은 낮에 인사 하셨다고.
영주: 네.
할머니: (영주에게) 어떻게 오셨는지요.
영주: (소리, 짜증) 어렵게 왔습니다.
희철 부: (할머니에게, 다정히 큰 소리로) 희철이 여자 친구예요, 어머니! (하고는 영주에게) 피곤 할 테니 먼저 올라가 쉬고, 수미야…….
영주: (말을 끊으며) 저, 사실은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시는 편이라.
희철 부: 아, 그렇지. 내가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연락처를 좀 줘요.
영주: (놀라) 아뇨, 그래서 걱정하시지 말라고 전화 드렸다구요.
이때 영주를 조용히 바라보던 할머니, 문득.
할머니: (따뜻한 미소) 이쁘다.
그 말에 적잖이 놀라는 식구들!
수미: (영주에게) 아주 가끔 정신이 드시곤 해요.
희철 부: (할머니의 반응이 기뻐) 어머니, 어머니 눈에도 예쁘세요?
할머니: (웬걸) 너무 늦었습니다. 이쁜인 삼년 전에 죽었습니다.
식구들, 실망하고.
희철 부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이 스치지만 이내 할머니를 따듯하게 바라보고.
그 모습을 본 영주…….
씬 32. 2층 희철 방.
방안을 후다닥 정리하던 수미.
영주, 뻘쭘하게 바라보고 있고…….
수미: 언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부자리 갖고 올게요.
영주: 저……. 잠깐만요. 제가 여러 일을 겪었더니 정신이 없어서. 저기. 오빠 핸드폰 번호가. 공일. 일. 아니.
수미: 공일일 맞아요. 011-000-0000이요. 언니 많이 힘드셨나봐요.
수미, 눈치를 보다가 나가면…….
영주, 급하게 방에 있던 전화기로 번호를 찍는데…….
통화음을 들으며 일단은 됐다 싶은 영주.
그런데 곧 띠리리~띠띠띠리리~하면서 트로트풍 가요 (‘여자 여자 여자’)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영주, 수화기를 든 체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면 벽걸이에 걸려있는 양복 호주머니에서 소리가 나온다.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넣어보면 역시나 딸려 나오는 희철의 핸드폰.
영주, 짜증이 폭발직전!
이때 수미, 영주의 이부자리를 갖고 들어오고…….
수미: 전화 해보셨어요?
영주: (잽싸게 휴대폰 다시 넣으며) 아뇨…….뭐 나중에 하려고요.
수미: 그래요. (이불을 깔아주며) 우리 집 식구들이 좀 별나죠? 무슨 일만 났다하면 우르르 몰려다니고…….
수미의 말은 건성으로 들으며 창문을 보면서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는.
영주: 다 좋으신데요, 뭐.
수미: (그 말에 힘을 얻은 듯) 다행이다. 사실, 학교 다닐 땐 그게 정말 싫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다들 한마디씩 하는 거예요. 으 끔찍해.
영주, 불안한 듯 여기저기 살피다가 문득 가족사진에 시선이 고정되고…….
영주, 유심히 쳐다보는데…….
수미: 제가 태어나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래요. 오빠, 어렸을 때 너무 귀여웠죠?
영주: 어머님이 굉장히 미인이셨네요.
수미: (표정 밝아지며) 모두 저보고 엄마 닮았대요.
영주도 수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데…….
이때 들어오는 희철 부, 수미에게 눈짓을 하면 자리를 비키고.
희철 부: 많이 불편하지요.
영주: 네, 뭐.
희철 부: 오늘 일은 미안해요. 우리도 상황을 좀 알아야 하겠고. 어차피 희철 이를 만나러 왔다니까 불편하더라도 희철이 오고 자세히 얘기합시다.
영주: (난감) …….
영주의 감정을 오해한 희철 부, 영주를 측은히 보다가는.
희철 부: 그럼 쉬어요.
영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님.
영주, 문을 닫으면.
희철 부: (가려다가는 문득) 아버님?
영주: (방안에서, 역시 문득) 아버님?
싫지 않은 듯 슬며시 희철 부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
방안의 영주 역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고!
씬 33. 라이브 카페.
재은은 이미 가고, 희철의 친구들만 남은 듯. 대부분 술이 어지간히 취한 표정이다.
“희철이 같은 얘한테 이런 거 시킨게 무리였어”
“그래도 프러포즈를 하러 온 놈이 반지를 안 갖고 오다니 말이나 돼!”
“그래도 재은이가 웃어넘겨 줬으니까 다행이지” 등등 귤 사건의 후일담인 듯.
이 사건의 주인공 희철은 입구의 공중전화에 있고…….
희철: (술이 약간 취한 목소리) 아버님, 저예요. 저 부산에 잘 도착했습니다.
씬 34. 희철집 거실.
희철 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종일 전화도 안받구.
희철: (소리) 네, 그게요. 제가 핸드폰을 집에 놓구왔나봐요.
희철 부: 정신을 얻다 팔고 다니는 거야?
희철: (소리) 죄송합니다.
희철 부: (한숨 한번 쉬고는…….) 너 사귀는 아가씨 있었냐?
씬 35. 부산 라이브카페.
희철: (놀라며) 아버님…….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희철 부: (소리) 긴말 않겠다. 내일 당장 올라와라.
희철: 아버님 원래 하루 더 있다가……. (딸깍) 아버님! 아버님!
씬 36. 희철방.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는 영주.
아래층을 보면 아직도 식구들이 가질 않고 있고.
파출소장: (강력히 주장하는) 하여간 무조건 희철이 올 때까지 저 아가씨를 붙들어 놔야돼요. 진위도 가려야 되지만, 진짜 이게 다 희철이 책임이면, 저 아가씨 혼자 어디 가서 애라도 띠면, 이거 우리 죄짓는 겁니다, 죄!
희철 부: (끄덕이는) …….
황당한 영주, 도망치는 게 여의 칠 않자 주위를 둘러보면 시골집들이 그렇듯 구석에 다른 집기들과 함께 놓여져 있는 동아줄 꾸러미!
희철의 방 창문 밖으로 던져지는 동아줄.
영주, 줄을 타고 내려 갈 요량으로 심호흡을 하고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소방 훈련하듯 동아줄을 허리에 둘러 조금씩 풀면서 내려오는데!
이때 현관문이 열리며 나오기 시작하는 희철내 가족들!
놀라는 영주, 중간쯤에서 그 자세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고 정지 상태!
둘째고모: 어쩌면 이런 게 다 잘되라고 생기는 일일지도 몰라요. 보니까 아가씨도 차분허니 가정교육도 잘 받은 거 같드만, 이 기회에 장가도 보내고 손주도 보고 하세요.
셋째고모: 당연히 그래야지 무슨 얘기야? 우린 그런 죄짓고 못살아!
손은 떨려 오지만 가족들이 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동안 신음 소리 한번 못 내고!
잠시 후, 식구들이 모두 가자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 내려가는데, 이때 1층 창문이 열리며 고개를 내미는 할머니!
영주, 놀라며 또다시 정지!
그 자세가, 영주의 엉덩이가 정확히 할머니의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해있다!
이젠 들켰다고 생각하는데.
할머니: (평화로운 얼굴로 멀리 저녁하늘을 읊조리듯) 소쩍새가 밤에 운다. 소쩍 소쩍. 부엉새도 밤에 운다, 부엉부엉. 뜸부기도 밤에 운다. 뜸뿍 뜸뿍 또……. 뻐꾸기도 밤에 운다. 뻐꾹 뻐꾹.
영주. 유격자세로 벽에 발을 대고 버틴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할머니: 소쩍새가 밤에 운다.
영주: (이를 악물고) 할머니! 소쩍샌 아까 울었잖아요.
도저히 안 되겠다.
영주, 할 수 없이 안간힘을 쓰며 다시 2층으로 오르기 시작하고.
끙끙대며 거의 2층 창턱에 다다를 무렵, 들리는 노크 소리!
영주: (당황, 간신히 소리 내는) 네에.
소리: 저 수미예요.
영주: 네에. 잠시 만요.
과일을 들고 문밖에 서있는.
수미: 근데 목소리가. 어디 아프세요?
영주: (소리) 아, 아뇨…….
그리곤 잠시 후 들리는 꽈당 소리!
수미, 놀라며 망설이다가는 문을 열까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몸은 온통 땀에 젖어 있고, 얼굴도 금방 땀을 닦은 티가 역력한 그녀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 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수미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영주: (둘러대는) 굉장히 더운 여름밤이네요, 그죠?
시간 경과.
샤워를 하고 수미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오는 영주.
수미: 오래된 집이라 샤워시설이 변변찮은데. 욕조라도 있었으면 좀 편하셨을 텐데, 그죠?
영주: (무심결) 시간 때문에 안 쫒기는 것만도 어디에요!
수미: ?
영주: (미소, 말을 돌리는) 욕조 얘기 들으니까 정말 뜨거운 물에 몸이나 좀 담갔으면 좋겠다…….
수미: 저기요, 아버지가 자꾸 언니 적적하다구 가서 같이 얘기나 하면서 같이 자라구 하셔서요, 저두 사실 언니랑 하고 싶은 얘기도 많구요, 저 언니랑 같이 자도 돼요?
영주: 제가 좀 잠자리를 가려서요, 우리 다음에 꼭 그렇게 해요!
수미: (조금 실망스럽지만 밝게) 맞아요, 언니 오늘 힘드셨을 텐데, 대신 약속 한 거예요? 창 문 꼭 닫으시구요, 여기 모기 독하거든요, 불편하면 저 부르시고. 그리구요.
영주: …….
수미: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니랑 오빠 안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수미에게 영주 친근감이 느껴지고.
수미, 영주가 웃어주자 쑥스러운 듯 웃으며 방을 나간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방안을 둘러보는 영주.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희철이의 가지런한 책이며 옷가지들, 그리고 가족사진 등에서 영주가 느껴보지 못했던 따듯하고 안정된 가족의 느낌이 전해지고…….
영주, 잠깐 얼굴에 그늘이 스치지만 이내 떨쳐내고는 다시 창밖을 보면 희철 부가 마당을 거닐고 있고.
영주 안 되겠는지 옆의 자명종을 집어 새벽 4시에 맞춰 놓는다!
씬 37. 희철방/아침.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카메라, 그 햇살을 따라가 보면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정말 행복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던 영주, 부스럭 소리에 잠깐 눈을 뜨고는 꿈인 줄 아는 지 다시 눈을 감다가는 벌떡 일어나며 자기도 모르게 교도소에서 보여주었던 정좌 자세를 잡으면 책상 위에 영주가 입을 옷을 놓고 조용히 나가려던 수미, 그 모습을 보고는 기절하듯 놀라고!
그제서야 여기가 희철의 방임을 안 영주, 후다닥 책상 위의 자명종을 집어 들면 이 모습을 보고는 놀라 말을 더듬는.
수미: 그거, 약 없는데. 근데 언니. 원래 아침에 그렇게 일어나요?
난감한 영주!
씬 38. 희철집/주방.
혼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영주.
수미가 식탁을 같이 지켜주고 있고.
거실에서는 어느새 모였는지 어제의 가족들과 몇몇 동네 아주머니들이 놀러와 목소리를 낮춰 영주를 힐끗거리며 즐거운 듯 영주에 관한 수다를 놓고 있고.
모른 체는 하고 있지만 영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이런 문화에 익숙한 수미는 재밌고.
희철 부, 헛기침으로 아줌마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괜히 주방으로 오며.
희철 부: 많이 들어요.
영주: 네. 말씀 낮추세요, 아버님.
기다렸다는 듯 터지는 아줌마들의 수다!
‘아이구, 아버님이랴’ ‘우리 이장님 소원 푸셨네’ ‘목소리도 어쩜 이뻐’.
희철 부, 얼굴이 빨개지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다.
점자엄마: 그려요, 말씀 낮춰야지, 이제 시방 거시기 되는데.
큰고모: (할머니 머리를 빗기다가는) 아니, 여편네들이 잔치 났나 지금, 사정도 모르고!
깨갱!
큰고모의 한마디에 분위기 이상해지자.
희철 부: 저기. 온천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영주: 네?
수미: 어제 언니가 목욕가고 싶다고 해서, 여기 유명한 온천 있거든요!
영주: 아, 아니예요. 그냥 한 얘긴데.
만석엄마: 아녀, 원래 시댁 식구랑 그렇게 가는 겨. 그래야 빨리 친해져!
둘째고모: 희철이 오려면 시간도 남았고 적적 할 텐데, 온천이나 가지.
영주: 아니오, 몸도 안좋구요, 전 여기 동네 구경이나.
만석엄마: 하긴 멀다 거기.
수미: 아니예요, 차타면 15분인데. 버스 터미널 옆에 하나 생겼잖아요.
영주: (번뜩) 터미널?
점자엄마: 요즘 애들 누가 시댁 식구랑 목욕을 가, 우리 때나 그렇지.
영주: (머리가 도는) 갈게요, 저. 온천!
일동: ?
영주: 할머니 모시구 가족 분들이랑. 저두 가고 싶어요.
오해한 아줌마들, 칭찬의 감탄.
희철 부, 그런 영주가 자못 대견스러운 듯 자기도 모르게 미소하나!
씬 39. 부산병원 야외.
자판기 커피를 들고 거니는 희철과 약사복 차림의 재은.
희철: (주눅 든 얼굴) 어제……. 정말 미안했어.
재은: 아냐. 재밌었어.
희철: 고마워, 이해해줘서.
재은: 며칠 있을 줄 알았는데, (놀리듯) 반지 가지러 가는 거야?
희철: 아니, 아버지가 빨리 오라고 하셔서.
재은: 희철 씨는 좋은 말로 하면 참 착해. 언제까지 아버님말만 듣고 살 거야? 희철씨도 내일모레면 삽 십이야.
희철: …….
재은, 잠시 생각하다가…….
재은: 오빠, 나 서울 제약회사에 면접 보기로 했어.
희철: 뭐? 나랑 상의도 없이…….
재은: 상의했으면 뭐라 그럴라 그랬는데?
희철: 잘했어. 네가 원하던 거잖아?
재은: 진심이야?
희철: (말을 돌리듯) 그나저나 용가엔 언제 올래.
재은: …….
희철: (설득하는) 정말 니가 한번 와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어! 그렇게 낙후된 곳도 아니 고, 또 부산이 아니라서 그렇지 경주나 이런 데는 그렇게 멀지도.
재은: (말을 끊으며) 갈께!
희철: (갑작스런 대답에) 어딜?
재은: 용강. 아예 이번 달에 월차를 내고 가급적 빨리 갈께.
희철: (희색이 도는) 야, 너 왜 그래? 너무 쉽게 얘기하니까 거짓말 같잖아, 너 농담 아니지? (신이 난) 언제 올껀데? 응? 언제?
씬 40. 봉고 차 안/낮.
왁자지껄하다.
영주는 자리가 불편해 어색한 미소만 짓고.
셋째고모: 하여간 어릴 때부터 ‘네 엄마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큰고모요’이랬다는 거 아니니.
아들: (운전하며) 한때 전 희철이가 정말 이모 아들인지 알았다니까요.
영주를 못 마땅히 여기는 큰고모만 빼고.
영주, 큰고모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둘째고모: 영주씨, 언니한테 잘해, 그게 희철 이한테 잘하는 거야.
영주: (모기 소리) 네.
희철 부: 이서방도 온다. 그랬다구?
둘째고모: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그 인간이 언제 식구들끼리 뭐한다는데 빠지는 거 봤수?
영주, 웃고는 있지만 정신은 도망갈 궁리에 빠져있고.
씬 41. 수리온천 주차장.
봉고에서 내리는 식구들.
영주 내리려 하자 둘째 고모와 셋째 고모 양쪽에서 잡아 주며 호위를 하면 영주, 어쩔 수 없이 임산부 연기!
큰고모: 유난들 떤다, 참.
입을 삐죽거리며 영주를 눈짓으로 안심시키는 고모들.
유니폼을 입은 만석이가 뛰어 오고.
만석: 오셨어요?
희철 부: 우리 때문에 네가 수고하는구나.
만석: (오버하는) 교장 선생님도 참, 제가 여기서 일하는데 당연하죠. (그리곤 영주를 알아보곤) 안녕하세요, 형수님! 전 수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수미: 뜨거운 물에 디었나, 웬 헛소리야? 준비 다 해놨지?
만석: (호기 있는) 그럼! 이리들 오세요!
만석을 따라가는 사람들.
영주는 여전히 기회를 노려보지만 엉겁결에 밀착 마크 꼴이 된 두 고모님들이 부담스럽다.
씬 42. 용강 역사 출구.
희철이 출구로 나와 역장에게 표를 내민다.
역장: 빨리 왔네?
희철: 네.
역장: (씩 웃으며) 애인보고 싶어서? 국수는 언제 먹여주나?
희철: ?
씬 43. 역 앞.
핸드폰을 하며 걸어 나오는.
희철: 왜 아무도 안 받는 거야?
이때 부르는.
소리: (셋째 고모부의) 희철아!
희철, 보면.
택시를 옆에서 눈에 띄게 곱지 않은 인상으로 희철을 보고 있는 셋째 고모부.
희철: …….
씬 44. 탈의실.
옷을 벗고 있는 고모들과 영주, 수미.
둘째고모: 근데, 희철인 니 몸 상태 아니?
영주: 아뇨, 아직.
셋째고모: (정색하는) 왜 그랬어! 그런 건 얘기해야 해! 그래야 남자가 마음을 잡는 거야!
마치 자기 일처럼 상기되는 셋째 고모가 이상하지만.
영주: 네. (그리곤 눈치를 본 후) 저 화장실 좀.
셋째고모: 그래? 같이 가자!
영주: 아니에요, 저 혼자.
둘째고모: 무슨 소리야, 한참 조심해야할 때, 얘 수미야! 언니랑 화장실 좀.
영주: (미치겠는) 아니예요, 그냥 벗을게요.
씬 45. 택시 안.
셋째 고모부.
운전하다가 옆자리의 희철을 보고는 씩 쪼갠다.
희철: 근데 왜 갑자기 온천에는 들 가셨어요?
셋째고모부: 희철아!
희철: 네?
셋째고모부: 너 보기와는 딴판이더라.
희철: 네?
셋째고모부: 솔직히 네가 부럽다.
희철: 뭐가요?
셋째고모부: 내가 말실수 좀 했는데, 여하튼 예술이더구먼.
희철: 네?
셋째고모부: 근데 성깔은 쫌 있어 보이더라.
희철: 누가요?
셋째고모부: 누군 누구야! 니 색시지!
희철: (황당) 누가 제 색시에요?
셋째고모부: (능글맞게) 에이. 응큼시럽기는. 둘이서 벌써 얼라까지 만들었슴시롱 시방 오리 발 내미는 거여?
희철: 네?
씬 46. 수리 온천 주차장.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득달같이 내리는 희철, 화가 잔뜩나 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만석을 발견하곤 뛰어간다.
만석: 어, 오셨어요?
희철: 그 여자 어디 있냐?
만석: 누구요?
희철: 내 애 가졌다고 사기치고 다니는 여자!
만석: 형수님이 애를 가졌어요?
희철: (버럭) 누가 형수야, 인마! 너 우리 수미 그만 만나고 싶어?
만석: (이제야 상황을 알 것 같은, 삐딱한) 사기 치는 여자는 모르겠고요, 형수님은 안에 계시네요.
희철: 이게 어디서 자꾸 형수, 형수야.
희철, 만석을 쥐어박으려다가는 급한 김에 뛰어가면.
만석: (희철을 보고는) 야, 또 이런데서 인간성 확인 되네…….
씬 47. 모래찜질실.
모래를 덮어쓰고 잠이 든 고모들.
영주, 확인하고는 조용히 일어나 나간다.
씬 48. 주차장.
후다닥 뛰어나오는 영주, 어떻게 튈지 고민하다가는 무작정 방향을 잡으려는데, 이때 들리는 안내방송.
소리: 손님 중에 최희철씨, 최 희철씨 약혼자를 찾고 있습니다. 최 희철씨 약혼자 되시는.
씬 49. 방송실.
희철: (버럭) 약혼자를 사칭하는 이라니까요!
남안내원: (진한 사투리) 아따 그놈, 오래 간만에 나타나서 소리나 땍땍질러 쌓고잉. (다시 표준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 희철씨 약혼자를 사칭.
씬 50. 모래찜질실.
소리: 하는 분께서는 지금 바로 안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고모: (부시시 깨며) 뭔 소리야, 시방?
셋째고모: 글쎄? (놀라는) 어, 얘가 안보이네?
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