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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게 된 독자 여러분은 새롭게 접하게 될 용어 하나를 ‘반드시’ 이해하고 외워둘 필요가 있으실 것 같다. ‘반드시’라는 단어는 무언가의 지시를 내리거나 특정한 의무를 부여하는 것 같아 사용하기에 주저되긴 했지만, 그래도 불손한 언어가 아닌 권유와 부탁의 의미라며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좋을 듯하다. 그만큼 획기적인 아이템이 등장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아르브뤼(Art Brut)’라는 용어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된다. 프랑스어인데, ‘브뤼(Brut)’는 ‘원시적인·가공하지 않은·순수한’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아르(Art)’는 무슨 뜻일까? 영어의 단어와 똑같은 배열이기에, ‘예술’이라고 받아들이시면 되겠다. 원시적인 예술이고 가공하지 않은 예술이며, 순수한 예술이라는 이 용어가 왜 중요하다는 걸까? 이번 호의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내용들이 하나씩 둘씩 베일을 벗으며 드러날 것 같다.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미술 장르인 ‘아르브뤼’의 작품으로, 프랑스와 일본에서 먼저 극찬을 받은 화가 주영애 씨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됐다. 그 대화 내용과 진솔한 느낌을 여기에 활자로 옮겨 심는다.
갑자기 닥친 정신적 부담감 때문에… “어렸을 때는 생활하는 게 굉장히 좋았어요. 편안했고 진짜로 마냥 좋았어요. 친구들과의 생활도 좋았고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지금은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해서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 커서 제가 몸이 아프다 보니까… 어린 시절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어린 시절에는 제가 알지 못했던, 잊고 지냈던 좋은 기억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구나 하는 그런 거….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산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죄악과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미리 밝혀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주영애 씨가 간직하는 자신의 옛 기억은 자세한 부분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듯했다. 또한 같은 의미의 언어를 되풀이하면서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게 확실한 더 깊은 생각의 꼬리를 붙잡지 못하는 안타까움 비슷한 여운도 전해졌다. ‘아르브뤼’의 대한민국 대표적 화가인 주영애 씨는 자신의 장애를 정신장애 2급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죄악’이라고 했던 그의 표현은, 그 자신이 지금껏 풀어내지 못한 내용을 담은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 싶은 궁금증을 처음부터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직감은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조금씩 확신으로 바뀌어간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낡은 철근 같은 걸 파는 철공소 같은 공장이 집 앞에 있었어요. 거기서 애들하고 놀이를 하며 지냈죠. 그게 참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들하고 같이 성당에서 막 놀기도 했죠. 성당에서 놀다 보면, 신부님이 공책 같은 걸 선물로 주시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런 시절이 참 그립고, 정말 마냥 좋았다는 것이 새삼 새록새록 느껴져요.” 그렇다면 ‘아프다’고 표현한 그 장애증상은 어떤 모습으로 표출이 되는 걸까? 망상(妄想)이 많이 떠오른단다. 게다가 환청(幻聽)도 들린다고 한다. 그게 어떤 연유에서 들리는 건지는 본인도 잘 모르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면 누군가를 막 미워하게 될 때가 있단다. 의심을 하게 되고 의혹 같은 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 신부님한테 불필요한 말을 자주 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는데,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된 발언 때문에 후회 또한 많이 반복했던 모양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목포에서 병원 근무를 했는데요. 그런데 병원 근무하면서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도난사건이 있었어요. 서무과에서 600만원이 도난당했는데, 그날이 저의 철야근무 날이었거든요. 업무상의 모든 책임이 저한테 맡겨져 있었던 상태였는데…, 그 책임이 결국 저한테 전부 전가가 됐어요. 집에 가서 잠을 자려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잠이 안 오면서 머리가 막 이상하게 복잡해지는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그런 증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거든요.” 그 이전까지는 정신적인 이상증세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살았다던 그는,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한마디 언급을 덧붙였다. “그때 병원 근무할 때 그렇게 안 아팠더라면, 지금도 안 아팠을 텐데….” 아마도 순식간에 불어 닥친 정신적 심정적 충격이, 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게 아닐까 싶은 여운이 남겨졌다. 대화를 잠시 접고 어두운 표정을 짓는 그에게, 그 과거의 상처를 되살아나게 만들었다는 점이 못내 아쉽고 미안해지기만 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림 그리는 자체가 좋았다는 거 그 증상의 악화는 결국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과 수도권 모처의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지게 됐단다. 자신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처음 듣게 된 시기 또한 그때였단다. ‘정신장애 2급’이라는 판정과 함께 말이다. 그렇다면 화가 주영애에게 ‘그림’이라는 인생의 대상이 최초로 등장하게 된 건 언제였을까? 어느 순간 갑자기 ‘난데없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생활 속의 분위기가 그에게 미술이라는 분야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놓았던 것 같다. 아버님께서 취미 삼아 동양화를 늘 그리며 지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영애 자신의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됐다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참 좋아하며 많이 그렸단다. 그런데 주된 그림 속 주제가 무엇이었는가 물으니까, 예상치도 않았던 전혀 다른 대답이 전해졌다.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고, 아주 무서운 괴물 같은 그림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는데…, 글쎄, 이런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한복 입은 남자와 여자 그림도 자주 그렸고요. 조금 더 큰 다음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 그림들을 주로 많이 그렸어요.” 웨딩드레스라…. 조심스럽게 물으니까, 본인은 아직까지 미혼이란다. 그림 자체에 자신의 심리적 상황과 욕망을 투영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습성이라면, 주영애 씨의 그림 속 테마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듯했다.
“꿈이라는 건 늘 그렇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포괄적으로 느끼는 그런 꿈과 희망 같은 건, 저 또한 늘 간직하며 지냈어요.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외교관도 되고 싶었고, 또 변호사나 의사가 되고 싶기도 했죠. 물론 하나도 못 이루기는 했지만….”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지만, 그의 대답은 ‘모든 게 안 좋았다’는 결론 하나로 모아지기만 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분위기를 바꿔야 할까. 해답은 그의 독백 아닌 독백으로부터 풀어지기 시작했다. 취미생활이 아니라 그냥 그림 그리기 자체가 좋았다는 거, 무엇이든 그리고 싶으면 그냥 공책에 그렸고 시 같은 글도 적으면서 지냈다는데, 그걸 보시던 선생님들의 반응이 꽤 호의적이었던 모양이다. 더불어 친구들의 반응 역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단다. 너무 좋고 너무 잘 그렸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다.
비움으로써 가득 채우기 “아버지는 저한테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가난하게 산다고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항상 아침에 세안을 하신 다음에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걸 옆에서 항상 바라보며 지냈는데, 아버지는 저한텐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그림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고요.” 그런데 어머니께선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셨던 것 같다. “저를 굉장히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어요. ‘너는 기술이 있으니까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항상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어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궁금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볼펜 하나만으로 완성한 그의 초기작 대부분은, 화폭 가득 여성의 나신(裸身)들이 담겨져 있다. 무한한 소재와 주제 중에서, 왜 하필 여성의 몸에 집착을 한 것일까? 그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인 그의 미소뿐이었다. 개인적 짐작일 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원치 않는 입원생활 속에서 잃어가는 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 또는 그 내적 몸부림 같은 게 화폭 안에 표출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집중의 과정이 바로 ‘자연인’ 주영애를 ‘화가’로 재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잡지 같은 걸 보다가 예쁜 여자 사진이 있으면. 그걸 오려서 보관하다가 한 번씩 그려봤어요. 남자를 그리면 좀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 부드러운 선을 가진 여자를 집중적으로 그리게 된 것 같아요. 눈으로 본 것에서 영감을 얻는 게 많지만, 꿈에서 영감을 얻을 때도 자주 있어요.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서 그림의 소재를 떠올리기도 하죠.”
이 대목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질문 두 가지를 풀어놓았다. ‘왜 하필 크레파스인가?’라는 질문이 먼저 던져졌다. 수채화나 유화 등 미술적 표현방식은 다양한데도, 주영애의 작품은 크레파스 하나로 밑그림이 그려지며 모든 색감이 완성된다. 작품 크기 자체가 1미터에서 2미터에 이르는 대형 사이즈인데, 그 모든 걸 크레파스만으로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들은 그게 더 어렵지 않느냐고 묻곤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기에 크레파스를 애용한다고 한다. 물감을 사용한 적도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느낌이 나오지 않아, 결국 크레파스 하나에 집중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인 ‘작품 속 인물에겐 눈, 코, 입이 왜 없는 건가?’를 물었다. 윤곽을 잘 못 그리기 때문에, 그냥 빈 공간으로 놓아둔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윤곽이 뚜렷한 이미지일 때는 예쁘게 나오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구도대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그리지 않게 됐다는 건데… 글쎄, 그건 100%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대답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게 바로 화가 주영애만의 작품 화법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눈과 코와 입이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부여하는 근원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 보통의 작가들은 자신이 간직한 메시지를 다 보여주고 싶어 더 많은 내용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이 빠짐으로써 감상의 여지를 더 크고 깊게 남기는 게 주영애의 작품을 관통하는 힘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자의 이런 의견이 정답일 리는 없겠지만, ‘윤곽을 잘 못 그려서…’라는 대답에 감춰진 그의 본심은 그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남 몰래 남겨졌다.
회귀와 극복을 욕망하다 “저는 주로 해질 무렵인 저녁에 그리기 시작해요. 낮에는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려야 할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여섯 장의 밑그림을 먼저 그려놓은 뒤 한 장씩 채색 작업을 완성해 가요. 예전에는 밑그림과 완성을 한 번에 다 했었는데, 이젠 밑그림과 색 작업을 따로 진행하고 있어요.” 밑그림이라 함은 전체적인 구도를 잡는 기본 스케치를 의미하는데, 그걸 대여섯 편이나 한꺼번에 미리 그린다는 건 독특한 방식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렇게 그리는 게 버릇이 됐다 하는데… 혹시 모를 일이다. 예전 병원생활을 할 때 간호사들의 눈을 피해 서둘러 그리던 습성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싶어 농담 삼아 물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주영애 씨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인간 주영애’에게 있어서, 그림이라는 건 어떤 가치를 담고 있을까. 그림이 없다면 자신에겐 직업이 없는 거라면서, 그는 솔직함이 묻어나는 대답을 꺼내놓았다. “저는 특별나게 잘하는 게 없어요. 남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 갖고 살아간다지만, 저는 직업으로 할 수 있는 게 그림 그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나도 뭔가 한 가지를 이루었다!’ 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내게도 업(業)이라는 게 있어서, 이것을 천직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실감을 느끼게 돼요. 단 한 가지라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 그리는 작업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먼저 호평을 얻은 바 있기에, 그는 이미 국내의 무대를 벗어난 평가를 받는 중심적 인물이 됐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더 많은 관심이 쏟아질 게 분명한데, 이러한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어져 온 내용 그대로였다. 자신이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 - 그래서 핵심을 캐내듯 한 가지 사항을 다시 물었다. 본인의 그림에 불만이 있다면 뭐가 있는 건지, 자신의 부족함은 무엇이라고 스스로 파악하는지를 알고 싶다 했다. “진짜로 잘 그린 다른 분들의 그림을 보면 욕심이 나요. 저도 저렇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떠오르는 거죠. 서로의 성향과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그림을 보면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을 늘 하게 돼요.” 겸손인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영애 씨는 시종일관 자신의 부족함을 언급했다. 앞으로의 목표를 물어도 ‘아직 잘 못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분야를 물어도 ‘아직도 약한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 화제를 전혀 다르게 바꿔서, 그림 활동 이외에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던진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림 아닌 다른 일이라면… 꿈이 있기는 있는데,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잘 모르고 있어서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어요. 제가 병원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다시 근무를 해보고 싶거든요. 예전처럼 회계분야나 현금을 만지는 일이 아니라…, 치료를 하는 계통으로 일을 해보고 싶은데… 그게 어려울 것 같아요. 몸이 아프니까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심리치료 전문이 아니더라도 대인상담의 경험이 많이 있다면, 위의 언급 안에는 매우 커다란 화두가 담겨 있음을 포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적잖은 상실감을 안겨줬던 ‘바로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것, 그것도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복귀하고 싶다는 것! - 다시 말해서 ‘병원에서 근무’라 함은 장애 이전의 어린 시절 및 젊은 시절을 의미하고, ‘치료 계통의 일’은 자기치유를 통해 어린 시절로부터 단절됐던 장애의 기간을 극복하고 싶다는 내적 욕망을 드러내놓았음을 의미하게 된다.
여러분이 바로 내일의 작가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등장해야 할 건, ‘아르브뤼(Art Brut)’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답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말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규정한 미술 장르로써,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과 재소자 및 어린이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의 미술을 지칭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 또는 ‘보더라인 예술(Borderline Art)’이라 하여, 주류미술과 다른 파격적인 예술작품까지 그 범주 안에 포함시킨단다. 아르브뤼가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는 학술적 저술이나 각종 기고를 통해 드물게나마 드러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이 글을 정리하는 입장에서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풀이하고자 한다. 장 뒤뷔페가 그 범주를 한정적으로 정의한 ‘정신장애인, 재소자, 어린이’의 공통점은 아주 단순한 지점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환경 안에서, 가장 진솔하고 가장 직접적인 내적 갈등이나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장 강조하고 싶은 진심을 있는 그대로의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것, 그건 어떠한 가식이나 포장 따위의 과정이 필요치 않는, 말 그대로 ‘원시적이고 가공하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를 끄집어냄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그런 절대적 진실성의 표출이 ‘낙서’라는 단순잣대에 의해 빼앗기고 버려지며 무시된다는 현실적 상황, 그 점이 큰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볼펜으로 그린 원 하나가 인생의 전체적 상실감이나 그리움을 묘사한 것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다란 직선 여러 개가 가장 큰 위안 또는 극대치의 절망을 표현한 절규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절대적 몰입의 결과인 하나의 그림이, 시간낭비나 소일거리 같은 ‘낙서’ 수준으로 폄하된다는 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게 된다. 사회적 통념이나 비장애 우선의 관점에선 읽어낼 수 없는, 한 인간의 인생 기록이 무조건 폄하되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첫 시작 부분에서, ‘아르브뤼’라는 용어를 ‘반드시’ 외워두시기를 강조하며 기대한 이유가 그것이다. 장애 비장애 여부를 떠나, 개인의 어떠한 기록이든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 더욱이 장애를 가진 입장이라면,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림만큼 효과적인 해소(해결) 방법 또한 없다. 그 그림의 객관적인 완성도가 어디까지인가 여부는 기성의 잣대로 평가내릴 일이 아니기에, 독자 여러분 모두는 ‘아르브뤼’라는 장르의 훌륭한 작가가 이미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서 ‘반드시’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사용했던 것 같다. 여러분은 이미 인생 그 자체를 새하얀 화폭 위에, 깨끗한 지면 위에 그림으로 표현하며 지내셨을 것이다. 그걸 여러분 스스로 낙서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건 정말로 낙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다고 판단하신다면,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아르브뤼’의 의미를 잊지 않고 간직하신다면, 여러분은 최고의 화가(작가)가 될 가능성과 함께 살아가고 계신다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시리라 기대가 된다. 주영애 씨를 비롯한 한국의 아르브뤼 화가들이, 8월 초에 서울 인사동에서 작품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편집 상 여건이 된다면, 그 소식과 일정을 다음 호 <함께걸음> 안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왜냐, 전시회장 안에 선 이들은 아르브뤼 화가들이지만, 그 자리를 찾는 분들은 미래의 아르브뤼 예비작가들이 될 테니까 말이다. ‘낙서’인가 ‘작품’인가, 그 여부는 여러분 마음 안에 담겨 있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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