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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 회고기
1974년 첫 훈련등반으로 나선 지리산 칠선계곡을 오르는 김영도 대장. 커다란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는 모습에서 대장으로서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에베레스트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그곳에 다녀온 지 35년이나 되는 지금도 나는 이 문제를 여전히 끼고 살고 있다. 나에게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 최고봉이 아니라 인생의 엄청난 드라마의 무대였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나에게 한꺼번에 닥치고 나는 그 일들을 한꺼번에 해치워야 했다.
나는 산악인 이전에 대장이었다. 산도 모르면서 에베레스트 원정을 맡았기 때문이다. 1971년 초의 이야기다.
1970년, 당시 집권당의 선전부장이었을 때, 내가 전국 유명 산에 산장과 대피소 35동을 지었다고 해서 대한산악연맹이 주목하고 느닷없이 나를 부회장으로 끌어갔다. 그 무렵 연맹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인 로체샤르(8,400m)에 도전하며, 그 길에 네팔 행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허가 신청을 냈다. 우리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산련에서 나를 끌어간 것은 이를 테면 눈앞의 로체샤르 원정과 후일의 에베레스트 도전을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회장(국회의원)이 있었지만 연맹에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무렵 나는 직장의 젊은이들과 서울 근교 산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산(遊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사회에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이 있는 줄도 몰랐다.
부회장이 되자 바로 이사회라는 것이 열렸는데, 이때 로체샤르 원정 이야기가 나왔다. 요는 총예산 1,200만 원 중 400만 원밖에 없어 못 떠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당으로 돌아와 대통령께 상신해서 800만 원 지원을 받았다.
이런 처지에 연맹에서 에베레스트를 가겠다고 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맹에도 일리가 있었다. 입산을 신청해도 언제 허가가 날는지 모르니 이 기회에 해둔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신청했던 입산허가는 1973년 늦게 외무부를 통해 통보가 왔는데, 그것도 77년 포스트 몬순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무렵 에베레스트를 포스트 몬순기에 성공한 팀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게 됐다. 당시 에베레스트는 그런 곳이었다.
피켈을 처음 만지는 수준에서 대장 맡아
나는 전국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대원들은 20대, 나는 50대인데 모두 열심이었다. 산을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의 기백은 대단했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피켈을 처음 만지고, 배낭에 달 줄도 몰랐으나 ‘에베레스트라야 별 것이겠는가, 필경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산악계에서 에베레스트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에베레스트 문제를 책으로 접근했다. 지금도 변함없는 것은 산악인은 책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며 내가 놀란 것은 산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빈트얏게(윈드재킷)와 휘테(산장)를 모르며, 5대륙 6대주의 최고봉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베이스캠프에 모인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영도 대장.
나는 책을 좋아해서 빠른 일본 등산 잡지 <山과 溪谷>, <岳人>, <岩과 雪> 등을 열심히 보았다. 국내에는 초라한 등산잡지가 나오고 있었는데 편집주간 혼자 일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유럽 알프스의 3대 북벽 이야기를 알고 혼자 흥분했으며, 알피니즘이라는 말을 산악계에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대산련의 모처럼의 로체샤르 원정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 원정의 공을 인정하고 싶다. 에베레스트가 그 일로 우리 앞에 다가오기도 했지만, 최수남, 박상열, 장문삼 등 유능한 리더들이 자랐고, 후일 그들이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위한 1차 지리산 훈련은 나의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등산계에 전혀 생소했던 내가 이 젊은이들과 깊이 사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후일 원정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 무렵의 장비란 한결같이 조잡하고 저질일 수밖에 없었으나, 우모복은 구경도 못 할 때였고, 군용 침낭은 지리산 추위에 견디기 어려웠다. 칠선계곡은 특히 설벽과 빙벽이 많았고, 대원들은 잡다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캠프를 전진시키는 훈련에 모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훈련을 통해 대원을 추려내는 일이 대장으로서 마음 아팠다. 그래도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연차 훈련에 지원해서 모여드는 것이 나는 눈물겹도록 기쁘고 고마웠다.
외국 등반 서적 통해 극한의 세계에 대해 공부
그러는 과정에 1976년 2월 16일, 설악산에서 눈사태로 대원들이 희생됐을 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일로 눈사태의 무서움을 비로소 알았지만 산악계가 눈사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외국 등산서적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다. 극한의 세계에서의 눈사태(snow avalanche), 고소적응(acclimatization), 컨디션 저하(deterioration) 등, 특히 히말라야 조건과 관련된 이 특수 용어들을 나는 이때 배웠다.
나는 이것들을 대원들에게 강의했다. 눈이 오면 다음날 절대로 움직이지 말 것, 고도순응 방법과 캠프 전진 때 일어나는 체력소모(하루 450g 체중 감소) 현상 등이 그것이다.
에베레스트는 대원정의 전형으로 대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원정대의 운용을 더욱 중요시 여겼다. 지난날 로체샤르 원정은 더욱 자금을 어렵게 마련한 처지에 대원이라 할 수 없는 군식구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 진입 과정에서 비행기로 가는 바람에 고소 순응에 지장이 있어, 결국 초반부의 고산병 문제로 원정은 큰 타격을 입었다.
나는 에베레스트에 최수남의 부인이 같이 가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시켰다. 남편이 그토록 좋아하던 히말라야를 그 미망인이 직접 가보려는 심정을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당시 이사들이 자비로 베이스캠프까지 가겠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일로 신경 쓰게 되는 것은 대원들이기 때문이다.
제 2캠프에서 대원들과 함께 식사준비 중인 김영도 대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나는 에베레스트가 아무리 높아도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다고 보았다. 문제는 아이스폴 돌파인데, 그 루트 공작에 원정대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말로리가 그 옛날 로라 능선에서 처음 내려다보고 “절대 통과 불능”하다고 말했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다리 제작에 신경을 썼다. 당시 국내에는 경금속이 없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물리적 충격 테스트를 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에서는 아이스폴 루트 공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등반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산소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 때 우리는 사다리 100개를 준비했는데, 98개가 사용됐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에베레스트 원정에서는 예외적이고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많았다. 1971년 봄에 신청한 입산허가가 1973년 가을에 나오면서 1977년 가을로 결정되었는가 하면, 1974년 가기로 돼 있는 프랑스 원정대가 준비가 안 됐다며 우리와 바꾸자는 연락이 왔었다. 결국 그 원정대는 그대로 갔다가 로라 능선에서 눈사태로 대장과 셰르파 4명이 희생되고 원정대는 패퇴했다.
우리는 국내에서 도움을 받을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당시 코오롱과 KBS가 지원을 거절했고,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이 혼자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은 국회의원이어서 더욱 손발이 맞았던지, 그때 장 회장이 나더러 정부에서 6,000만 원 지원받고, 자기 쪽에서 6,000만 원 부담하겠다고 했다. 당시 총 예산은 1억3,000만 원이었는데, 나머지 1,000만 원은 산악연맹에서 내라고 하고 대원들이 50만 원씩 냈을 뿐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내가 어쩌다 국회에서 재무위원회 소속이 되어 몹시 불만이었는데 이 때 화가 복이 된 셈이었다. 나는 그 인연으로 경제기획원장관을 알게 되어 바로 내 몫을 지원받았다. 그러자 장기영 회장이 과로로 타계해서 원정대 지원이 어려워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뒤늦게 장비를 일본에서 구입하게 되어 애로가 많았다. 이 때 가스 카트리지 1,500개를 속여서 공수했고, 프랑스 산소 50통이 그쪽 사정으로 서독제로 둔갑하는 바람에 우리가 준비한 레귤레이터와 맞지 않는 사실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비로소 알아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것도 프랑스 사정으로 수송이 뒤늦게 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산소통은 100개를 준비했는데, 1976년 2차 정찰대가 현지에서 미국대를 만나 그들이 비축했던 50통을 인수하고 나머지 50통을 프랑스제로 했던 것이다. 그 50통이 사용 불능케 됐을 때, 우리는 아이스폴에서 프랑스 산소를 13개 발견하는 행운으로 결국 고상돈이 정상에 오르게 됐다. 프랑스 가스 본사는 후일 산소 값 800만 원을 보내왔다.
나는 고산 등반에 담배가 해롭다고 보고 담배와 술을 장비에서 뺐었으나, 담배는 기호품이고 대원들의 기분도 생각해서 부산에서 선적 직전에 그곳 세관에서 프리 오브 택스(free of tax)로 3,000갑을 샀다. 전매청이 재무부 소관이라, 국회 재무위에서 전매청장과 친분이 있었던 덕을 본 셈이다. 한편 술은 대원들이 대장 눈을 피해 적당히 챙겼던 모양인데, 원정이 끝난 후 비로소 알게 되어 모두 웃었다.
대원들이 대장을 어려워해서 가까이 오지 않아 나만 외로웠다. 베이스캠프로 들어서기까지 380km 20여 일을 밤마다 천막에서 혼자 잤다. 원정 기간 중 현지인에게 지불할 돈(지폐)이 큰 가방 두 개였는데, 대원들은 이것을 대장 천막에 보관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며 나한테만 밀어붙였다.
김영도 대장(왼쪽)과 장문삼 등반대장이 수 많은 크레바스와 빙탑이 뒤섞인 아이스폴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케가 임금 들고 내빼자 포터들도 뿔뿔이 흩어져
원정대는 장기영 회장의 급서로 예비비 1,000만 원도 준비 못 한 채 출국했는데, 네팔을 떠날 때 현지 대사가 원정 성공 후 파티비용을 내놓고 가라고 해서 화를 낸 적이 있다. 위험지대로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대들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니까, 대사는 축하비용을 외무부로부터 받았다고 알려와서 한편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KBS가 지원을 거절하면서 슬그머니 취재기자를 보내서 출국 후 방콕에서 만난 나는 놀랐다. 그 일을 알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나한테 그 특파원을 받아들였다고 항의전화를 했다. 한국일보로서는 원정뉴스를 독점하려던 참이니 화도 날만 했겠지만, 난들 어찌 할 것인가. 헌법에 취재·보도의 자유로 돼 있으니. 이번엔 내가 화가 나서 “그런 문제는 한국일보가 KBS에 항의할 것이지 원정길에 있는 대장에게 무슨 소리냐?”고 대들었다.
KBS 특파원은 남산도 오른 적이 없다고 실토하더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심한 탈홍 증세로 쓰러져 죽는 줄 알았다. 의무대원 말로는 1주일 내 돌아가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고까지 했었다.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제일 고생한 것은 포터들 도망 사건이었다. 그들은 카트만두에서 영국인 마이크 체니가 차출한 것인데 인부들은 나이케라는 일종의 십장을 보스로 하고 있는 조직들로서, 이 십장이 부하들의 돈을 가지고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주인을 잃은 인부들이 도망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짐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주변에서 일손을 그때 그때 구해서 뒤늦게 짐을 날랐다. 원정이 끝나고 카트만두에서 그 영국인을 만나 포터 도망사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더니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신사라는 영국인에게 6·25 때 일선에서 미국 장교들과 살면서 배운 욕을 퍼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등정을 끝내고 베이스캠프에 내려오자, 캐나다 푸모리 원정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포터들이 장비를 훔쳐 달아났다”며, 원정이 끝난 한국대의 장비를 양보해 주었으면 했다. 마침 예비품들이 있어 주었더니, 그 값을 카트만두 영국인에게 받으라고 지불증서를 서명해서 주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마이크 체니여서 증서를 보였더니 자기는 그런 돈 맡은 적이 없다고 했다. 사인으로 통하는 그들 문명사회가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귀국 후 캐나다에 연락해서 그제야 그 문제를 결말지었다.
고상돈의 성공은 박상열의 실패의 덕이 아닐지도 모를 일
원정대가 네팔로 출국할 때(1977년 7월 2일), 국회에서 나더러 9월 20일 국회 개원일까지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대원들에게 원정대를 장문삼 대장에게 맡긴다고 했더니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 대장은 지난날, 로체샤르 원정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산악계를 떠나 있다가 최수남이 가고 나서 하는 수 없이 원정대 일을 같이 하자고 부탁해서 결국 뒤늦게 참가한 편이다.
그러나 장 대장은 2차 정찰대에서 미국대를 만나 산소통을 교섭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나는 하여간 이러저러 경험이 많은 장문삼 등반대장을 나 대신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떠났다가 기회를 봐서 국회 말대로 일찍 혼자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1차 공격에서 박상열 공격조가 8,700m 죽음의 지대에서 고립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사회가 온통 에베레스트에 쏠리게 됐다. 사실 우리가 서울을 떠날 때 국내에서는 거의 무관심했었는데, 이 소식에 국회가 놀라, 현지에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격려의 전보를 보내왔다.
1 1차 공격에 실패 후 8700m 고소에서 비박한 박상열 대원이 펨바 라마 셰르파의 부축을 받으며 캠프로 돌아오고 있다. 2 2차 공격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고 고상돈 대원.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1차 공격조의 박상열 부대장의 실패가 없이 그것으로 등정이 끝났더라면 우리 사회는 에베레스트 원정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거나 그토록 환성을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터지는 가운데도 머리를 쓰게 되는 것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성공적으로 무사히 오르는 일이다. 어느 원정대건 그 생각이 제일 앞서고 가장 중요하겠지만, 사실 대원들 가운데 누구를 공격조로 내세울 것인지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절대로 남과 의논할 수 없어 나는 그 기회만 보고 있었다.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서 행동에 들어가면서 대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무척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 선봉은 언제나 대구 출신 박상열이었다. 그는 지난날 로체샤르 멤버이기도 했지만 평소 말이 없고 조금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셰르파 우두머리 사다인 라크바 텐징에 물어보니, 셰르파들도 대원 중 박상열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나는 어느 날 조대행 의무대원에게 박상열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폐활량이 6,000cc라고 했다. 보통 4,000cc인데, 박은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베테랑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그가 언제나 선봉에 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이스캠프(5,400m)에서 ABC(C2·6,500m)로 올라가 장문삼 대장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박상열을 1차 공격조로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9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역사적인 등정을 기록할 생각을 했다. 나는 박상열에게 새삼 부탁할 이야기도 없고 다만 산소를 취침시에 잘 마시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1차 공격조의 진출은 순조로웠다. 드디어 C4 최종캠프까지 무사히 진출해서 새벽 2시에 깨워줄 테니 일찍 자도록 했다. 우리는 그날 밤 ABC에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새벽 2시가 되자 무전기를 들었다. 그러자 컨디션이 어떤가 묻기도 전에 박은 간밤에 산소를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힘이 들어도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기는 해발 8,500m 고지다. 간밤에 눈이 많이 왔다. 박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고 내리는 시간대는 낮 12시에서 늦어도 오후 2시 사이다. 공격조는 지금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 무전기가 울렸는데 그것은 박이 아니고 같이 간 셰르파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다급히 묻자, “노 악시전( No Oxygen)! 나는 죽는다!” 하고, 이 두 마디에 나는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죽는다!”고 소리 질렀다. 무전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가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8,700m 죽음의 지대를 생각했다. 걸친 방한복 외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오직 죽음의 비박! 그렇다고 구조대가 갈 수도 없다.
이것으로 기대했던 1차 공격은 무(無)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저 고마운 것은 다음날 그들이 살아 내려왔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었다. 동상으로 수족을 절단하는 일도 없었으니까.
나는 장문삼 대장과 2차 공격조를 검토했다. 원래는 고상돈·한정수로 했던 것이 마음이 안 놓여, 셰르파를 동행케 했다. 한 대원에게는 못할 짓을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저 한정수가 원정대를 위해 조용히 물러나주어 그저 고마웠다.
고상돈은 선배의 실패 원인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주의하거나 강조할 것도 없었다. 다만 정상에 중공대(中共隊)가 남긴 철의 삼각대가 있으니 꼭 사진에 넣으라고만 했다.
고상돈의 진출은 순조로웠다. 다행히 날씨도 좋았다. 이제 산소는 여기서 끝이니 이번에 성공 못 하면 우리 원정은 끝이었다. 그 엄연한 사실을 고상돈은 알고도 남았을 것이라 본다. 그는 자기에게 원정대의, 그리고 국민의 눈이 모두 쏠린 것에 힘입고 장도에 올랐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가 정상에 선 것은 9월 15일 12시50분. 그는 두 평도 안 되는 설봉에 삼각대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손발로 눈을 헤쳤다고 한다.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 서울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김영도 대장과 장문삼 등반대장.
그리고 그의 첫마디,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에 우리는 ABC에서 순간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눈물이 났다. 그때 한정수가 “우리는 8,849m에 올랐다!”고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인가? 눈이 1m 더 높았다는 괴변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1년 뒤 메스너 등정기에서 확인했다. 고상돈 사진에는 그가 우뚝 선 발밑에 삼각대가 약간 보였으나, 메스너는 1m나 설상에 나온 삼각대 옆에 앉아 있었다.
박상열은 8,000m 고소 사우스콜을 지나 로체 페이스를 내려오며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는 무전이 왔다. 나는 옆에 셰르파를 바꾸라고 하고, 박을 침낭에 넣고 끌고 내려오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날 밤 ABC에서는 모두 울었다. 박상열은 발뒤축이 시커멓게 동상을 입고 있었다. 조대행 의무대원이 식염수 주사를 밤새도록 놓았는데, 나는 그만큼 이야기한 산소를 자며 마시지 않은 박상열의 뚝심에 화가 나서 그의 병상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원정이란 무엇이며, 원정대 운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필경은 인간의 모임의 소산인가? 고상돈은 혼자 올라 원정대의 생명과 명예를 살렸지만, 캠프를 철수하며 외톨이가 되어 나와 장문삼과 셋이서 맨 뒤에서 말없이 천천히 그 먼 길을 내려오고 또 내려갔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고상돈의 성공은 박상열의 실패의 덕인 아닌가 하는 역설이었다.
특수 세계에서 개화하고 결실한 계기돼준 원정
인간은 남의 비운에 동정하고, 역경을 이기고 넘어섰을 때 감격한다. 우리의 에베레스트 원정이 이렇다 할 두드러진 기록도 없었는데 당시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전국이 환영일색으로 우리를 맞아준 데는 또 다른 사회적·정치적 분위기가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소위 미국에서 벌어진 박동선 로비 사건이었다. 그 국가적 치부가 빈곤하고 무력한 한국이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는 사실로 상대적으로 상쇄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 에베레스트 원정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정도였는데, 1977년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니까 마침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바로 일본의 경우를 생각했다. 패전에서 겨우 고개를 든 일본이, 마나슬루(8,163m)를 초등했을 때 그들의 수출이 100억 달러였다. 나는 대원정과 국력의 함수관계를 본다.
나는 후기 인생 30여 년을 산악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실은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제대로 모르면서 느닷없이 에베레스트로 비상하게 된 묘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이 세계 최고봉에 이어 북극권 그린란드까지 체험하며 수직과 수평의 세계를 알게 되고 남달리 대자연의 특수성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산보다 책으로 그 특수 세계에 들어가서 비로소 개화하고 결실했으며, 그것도 에베레스트가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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