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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 제9권 / 칠언절구(七言絕句) / 학사루하 매화시개 병중음시 이수(學士樓下梅花始開病中吟詩二首)
김종직(金宗直)
학사루 앞에 홀로 선 신선 / 學士樓前獨立仙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매 옛날과 다름없다 / 相逢一笑故依然
견여가 지내려 하여 다시 잡고 뒤로 하나니 / 肩輿欲過還攀慰
금년의 봄 바람은 너무 과히 미쳤다 / 今歲春風犬劇顚
봄 게으름에 병을 겸해 청명을 지나노니 / 春慵和疾過淸明
관황이 암암하여 잠이 쉽게 들었노라 / 官況愔愔睡易成
시를 읊으며 매화 곁으로 가매 그윽한 흥이 움직이는데 / 吟到梅邊幽興動
이서들이 다투어 사군이 깨었도다 / 吏胥爭道使君醒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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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歲春風犬견劇顚 ->太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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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게으름에 병을 겸해 청명을 지나노니 / 春慵和疾過淸明->이하 제2수이니 사이 칸 띄울 것
*칠언절구(七言絕句) 학사루하 매화시개 병중음시 이수(學士樓下梅花始開病中吟詩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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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7권 / [시(詩)] / 학사루 아래 매화가 처음 피었으므로 병중에 두 수를 읊다[學士樓下梅花始開花病中吟得二首]
학사루 앞에 홀로 서 있는 신선이여 / 學士樓前獨立仙
서로 만나 한번 웃으니 예전 그대로일세 / 相逢一笑故依然
견여 타고 지나려다 다시 잡고 위로하노니 / 肩輿欲過還攀慰
금년엔 봄바람이 너무도 거세게 부는구나 / 今歲春風太劇顚
춘곤에다 병까지 겹쳐 청명을 지내노니 / 春慵和疾過淸明
벼슬살이 조용하여 잠 이루기도 쉬워라 / 官況愔愔睡易成
매화 곁에 가서 읊다 그윽한 흥치 일어나자 / 吟到梅邊幽興動
이서들이 서로 사군이 깨었다고 말하네 / 吏胥爭道使君醒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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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 제4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학사루(學士樓) 아래 매화 한 그루가 있는데, 비록 반이 말라 썩어졌으나 가지만은 오히려 늙을 수록 단단하여 해마다 가장 일찌기 꽃이 피었었다. 내가 신묘(辛卵)년 봄에 이 고을에 와서 보고 사랑하여 시를 짓기를, “학사루 앞에 오뚝 선 신선,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니 의젓하구먼.
김종직(金宗直)
교자 타고 지나다가 걱정도 되네. 금년은 봄바람이 하도 세어서.” 라 했으니, 대개 그것이 바람에 꺼꾸러질까 두려워함이었다. 또 극기로 더불어 이 매화마무를 두고 시를 지은 것이 몇 10여 편이나 되었었다. 금년 3월 초 9일 사시에 서풍이 몹시 부는 바람에 휙 쓰러져 넘어졌기로 가까이 가보니, 그 낙이 의지하여 꽃을 피우던 줄기는 지름이 겨우 두어 치 뿐이요, 그것도 중심이 역시 썩었다. 이렇고도 오히려 여러 해를 지탱하다가 오늘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으니, 아, 이 어찌 수가 아니랴. 이에 시를 지어 조상하고 써서 국기에게 부치니, 그는 지금 경락에 있다[學士樓下有梅一株雖半枯朽而枝梢猶老硬每歲開花最早佘辛卯春到郡見而愛之題詩云學士樓前獨立仙相逢一咲故依然肩輿欲過還攀慰今歲春風太劇顚盖懼其爲風所倒也又嘗輿克己賦詠畿十餘篇今年三月初九日巳時西風甚顚劃然摧倒就而視之則所倚以敷榮者徑僅數寸中心亦朽矣如是而猶支持許多年今日乃萎絶焉噫非數耶於是作詩吊之書以寄克己時在京洛]
다락 서편 매화나무 백여 년 되였는데 / 樓西梅樹百許年
뿌리와 줄기 움츠러들고 가지 잎사귀 쇠하였으나 / 根幹縮蹙柯葉耗
연못 가에 중심이 반쯤 남아서 / 臨池賴有半心存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네 / 歲歲開花費天巧
동산에 여니 꽃나무들 수선한 중에 / 空園卉木自紛挐
창연한 의상으로 버젓한 자세 / 裙帨蒼然如寄傲
3년 동안 익우가 시 읊조리니 / 吟哦三載得益友
유군이 내 좋아함을 꼭 알았네 / 兪子實知余所好
봄님이 마음 먹고 만물을 소생시킬 때 / 東君着意方生物
차마 바람 시켜서 난폭하게 하였는고 / 忍使封姨更飄暴
외로운 여윈 바탕 힘으로 싸우기 어려워 / 竛竮瘦質難力爭
꽃이 도랑에 떨어지고 문득 쓰러졌네 / 花委溝渠忽摧倒
내가 어린 자식 잃고 눈물이 겨우 말랐더니 / 我失幼子淚纔乾
다시 이 나무가지 쓸어지니, 슬프지 않은가 / 復此龍顚寧不悼
몇 해 전 걱정했던 건 우연한 일 / 往年攀慰偶自尒
영괴가 운명이니 누가 미리 알리리 / 榮壞有數誰預報
곁의 두 그루도 내가 손수 심고 심은 것 / 傍邊二株手所植
가지는 벌어졌으나 옛된 모습이 없구나 / 縱有繁枝無古貌
어쩌면 유군이 돌아와서 / 何當兪子歸去來
맑은 시를 빌려 이 시름을 쓸어 버릴꼬 / 倘借淸詩愁且掃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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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시집 제9권 / [시(詩)]
학사루 아래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어 비록 반쯤은 말라 썩었으나 가지 끝이 아직은 단단하여 해마다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그래서 내가 신묘년 봄에 이 고을에 부임하여 이 나무를 보고 사랑한 나머지 시를 써서 이르기를 “학사루 앞에 홀로 섰는 신선이여 서로 만나 한번 웃으니 옛벗이 의연하구려. 견여 타고 지나려다 다시 붙잡고 위로하노니 금년의 봄바람은 너무도 거칠게 부누나” 하였으니, 대체로 나무가 바람에 넘어질까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또 일찍이 극기와 함께 이 매화를 두고 십여 편 가까이의 시를 지어 읊기도 했었다. 그런데 금년 삼월 초구일 사시에 서풍이 매우 사납게 불어 획연히 꺾이어 넘어졌으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여태까지 의지하여 꽃과 잎을 피웠던 것은 겨우 지름 수 촌쯤이었고 중심 또한 이미 썩어버렸었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허다한 햇수를 버텨오다가 오늘에야 말라져 끊어진 것이니, 아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이에 시를 지어 매화나무를 조상하고 이를 써서 극기에게 부치다[學士樓下有梅一株雖半枯朽而枝梢猶老硬每歲開花最早余辛卯春到郡見而愛之題詩云學士樓前獨立仙相逢一笑故依然肩輿欲過還攀慰今歲春風太劇顚蓋懼其爲風所倒也又嘗與克己賦詠幾十餘篇今年三月初九日巳時西風甚顚劃然摧倒就而視之則所倚以敷榮者徑僅數寸中心亦朽矣如是而猶支持許多年今日乃萎絶焉噫豈非數耶於是作詩吊之書以寄克己] 극기는 이 때 서울에 있었다.
학사루 서쪽의 백여 년 된 매화나무는 / 樓西梅樹百許年
뿌리와 줄기 쭈그러들고 가지 잎새 쇠했으나 / 根幹縮蹙柯葉耗
못가에 서서 반 심쯤 남은 것을 힘입어 / 臨池賴有半心存
해마다 꽃을 피워 하늘의 기교를 부려왔네 / 歲歲開花費天巧
빈 동산 꽃나무들은 서로 엉클어졌는데 / 空園卉木自紛拏
치마와 수건창연히 오만한 자태 뽐내었지 / 裙帨蒼然如寄傲
삼 년 동안 읊조리면서 좋은 친구 얻었으니 / 吟哦三載得益友
유자는 실로 내가 좋아하는 걸 잘 안다오 / 兪子實知余所好
봄은 한창 생물하기에 뜻을 두고 있는데 / 東君著意方生物
차마 바람 귀신이 횡포를 부리게 한단 말인가 / 忍使封姨更飄暴
외롭고 파리한 자질 힘으로 버티기 어려워 / 竛竮瘐質難力爭
갑자기 꺾여 넘어져 도랑에 꽃을 버리었네 / 花委溝渠忽推倒
나는 어린 자식 잃고 눈물이 겨우 말랐는데 / 我失幼子淚纔乾
또 이 용이 넘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 復此龍顚寧不悼
지난해에 붙잡고 위로한 건 우연이었는데 / 往年攀慰偶自爾
영고 성쇠의 운명을 누가 미리 알리었던고 / 榮壞有數誰豫報
곁에 있는 두 그루는 내 손수 심은 것인데 / 傍邊二株手所植
비록 가지는 번성하나 예스러운 운치가 없네 / 縱有繁枝無古貌
어떻게 하면 유자가 이 곳에 돌아와서 / 何當兪子歸去來
혹 좋은 시를 빌려 이 시름 씻어버릴꼬 / 倘借淸詩愁且掃
[주-D001] 치마와 수건 : 본디 오얏꽃의 희고 깨끗한 모양을 형용한 말로, 한유(韓愈)의 이화시(李花詩)에 “큰 여인과 향기 높은 부인이 사방에 나열하여 흰 치마와 마전한 수건이 서로 등차가 없구나[長姬香御四羅列 縞裙練帨無等差]”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매화에 전용하였다. 《韓昌黎集 卷五》[주-D002] 유자 : 자가 극기(克己)인 유호인(兪好仁)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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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종직(金宗直)
○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숙자(淑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前後)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
○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총각 때에 벌써 시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매일 수천 마디를 기억하였고, 나이가 약관(弱冠)도 못 되어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다. 〈지서(志序)〉
○ 친상을 당하여 복상을 마치자 금산(金山) 황악(黃岳) 밑에 서당을 짓고 그 옆에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 놓고 서재의 이름을 경렴당(景濂堂)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무극옹(無極翁 주염계)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그 안에서 시만 읊고 세상일에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비서(碑序)〉
○ 공이 일찍이 승무원에 들어갔는데 함종군(咸從君) 자익(子益) 어세겸(魚世謙)이 본원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가사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게 하더라도 달게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비서(啤序)〉
○ 공이 경연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는데, 말이 길지 않으나 뜻이 통하여 강독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사랑이 그에게로 쏠렸다. 〈비서(碑序)〉
○ 공은 몸집이 작았으므로 어자경(魚子敬 어세공(魚世恭))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 만약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아이만 남을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상동
○ 공은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들어 야위매 공이 상심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지었다. 상동
○ 공의 아버지는 길재(吉再)에게서 배웠으며, 한때의 선비들이 모두 종직(宗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모아 끼리끼리 서로 따랐다. 이승건(李承健)이 그때 한림(翰林)이었는데 사기(史記)에 쓰기를, “남인(南人)이 서로 도와서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스승을 기리어 스스로 한 당을 만들었다.” 하였더니, 그 후 이극돈(李克墩)이 승건(承健)의 사초(史草)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 칭찬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점필재(佔畢齋)가 답계역(踏溪驛)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스스로 초회왕(楚懷王)이라고 하면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침강(郴江 호남성에 있음)에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깨어서 말하기를, “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차이가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내 꿈에 와서 나타나니 이 무슨 징조일까.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이다.” 하고, 드디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슬퍼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연산군 4년) 7월 17일의 전교(傳敎)에 이르기를, “한 비천한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임금의 총애가 조정의 으뜸이었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편수한 사초(史草) 속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의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기재하고 말하기를, ‘충성과 의분의 뜻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종직이 속으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니, 해당하는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7월 27일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하여 죽이고 종묘에 아뢰었다. 본전(本傳)
○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그 고을 원에게 현판에 새겨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무오년의 화가 일어나매 선생이 무덤 속에서 극형을 받고 아울러 〈환취정기(環翠亭記)〉도 철거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함양에서 현판의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 하였다. 본전(本傳)
○ 함양군에서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바쳤으나 이 고을에서는 차가 나지 않으므로 매양 백성에게 부과하니, 백성들은 돈을 주고 비싸게 사서 바쳤다. 점필재가 처음 이 고을에 와서 그 폐단을 알고 손수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다가 신라 때에 당 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하기를, “고을 함양 이 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에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하고는, 여러 늙은이들에게 찾아 가서 물어 보았더니 과연 암천(巖川) 북쪽 대밭 속에서 몇 떨기를 얻었으므로 차밭[茶園]을 그 고장에 마련하게 하였더니, 몇 해가 안 되어 원내(園內)에 두루 번식하였다. 선생이 다원(茶園) 시 두 수를 지어 기록하였다. 본집(本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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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고을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학사 최치원(崔致遠)이 군수로 있을 때에 올라가 즐겼던 곳인데, 훗날 사람들이 이름 지어 학사루라 불렀다. 누각 아래에 매화 한 그루가 있는데 반은 마르고 썩었으나 가지는 아직도 정정하여 해마다 맨 먼저 꽃이 피었다. 점필재가 이 고을에 와서 보고 사랑하여 드디어 시를 지었는데,
학사루 앞에 홀로 섰는 신선이여 / 學士樓前獨立仙
만나보고 한 번 웃으매 옛모습이 의연하구나 / 相逢一笑故依然
가마 타고 지나다가 부여잡고 위로하노니 / 肩輿欲過還攀慰
올해는 봄바람이 너무 심하구나 / 今歲春風太劇顚
하였으니 이는 바람에 넘어질까 두려워해서이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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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강(黃山江) 상류에 도요저(都要渚)가 있다. 강가에 사는 백성이 거의 백 호나 되어 집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울타리가 서로 이어 있는데, 농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배를 부려 고기를 잡아 팔아서 재산으로 삼는다. 그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오면 여러 집에서 술과 찬을 준비하기를 예의로 삼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있어서도 모두 다 그러하였다. 만일 음란한 행동을 한 계집이 있으면 물가에 모여 의논하여 그 아낙을 배에 실어 물에 띄워 내쫓았다. 상동
○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를 지었는데, 1, 회소곡(會蘇曲), 2, 우식곡(憂息曲), 3, 치술령(鵄述嶺), 4, 달도가(怛忉歌), 5, 양산가(陽山歌), 6, 대악[碓樂 방아타령], 7, 황창랑(黃昌郞)이다. 상동
○ 〈일본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送人日本詩]〉에 이르기를,
오랑캐 네 길거리가 정연히 세 거리로 갈라져 있도다 / 蠻衢井井分三町
하였고, 주(註)에, 일본 도시의 도로가 모두 사방으로 통하는데, 정정(丁町)마다 중로(中路)가 있고 세 정(町)이 한 조(條)가 되고, 조 가운데는 큰 길이 정연하며 모두 9조가 있다. 상동
○ 점필재 시의 〈오매유장진(烏昧劉將盡)〉의 주(註)에, 오매초(烏昧草)는 동인(東人)이 오을배(烏乙背)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하전(下田 토질이 좋지 못한 밭)에 나는데, 어떤 것은 손가락 크기만 하기도 하고 혹은 탄환같이 생긴 것도 있어 삶아서도 먹고 날로도 먹을 수 있다.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굶주리면 캐어다 먹는데, 이것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진상한 오매초가 아닌가 한다. 매(昧)와 배(背)는 같은 음이니 동인의 말이 전하여 오을배(烏乙背 을방개를 말하는 듯)라고 한다. 상동
○ 공에게 〈일본 벼루〉라는 시가 있는데,
구리에 새긴 옥골(매화의 별칭)이 추호 같이 미묘하니 / 銅鑴玉骨妙秋毫
배에 싣고 들어와 해마다 부르는 값 비싸도다 / 海舶年年索價高
빛깔은 마간홍(짙붉은 빛) 같아 발묵을 잘하고 / 色似馬肝能潑墨
용미보다 미끄러우니 날아 올라갈까 두렵도다 / 滑勝龍尾恐飛騰
하였다. 그 주에, 벼루의 네 모퉁이에 밤나무 잎을 새겼는데 그 가장자리와 밤나무 잎이 극히 기교적이다. 상동
○ 귤(橘)과 유자[柚]는 제주에서 나는 것인데, 해마다 서울에 와서 바쳤다. 공이 〈탁라가(乇羅歌 탁라는 제주의 옛이름)〉를 지었는데,
집집이 열린 귤 흰 서리가 겨운데 / 萬家橘柚飽淸霜
대바구니에 따 담아 바다 건너 왔구나 / 採著筠籠渡海洋
대관이 받들어 대궐에 올리니 / 大官擎向彤墀進
소담스레 빛깔과 맛과 향기를 보전하도다 / 宛宛猶全色味香
하였다. 상동
○ 오매(烏梅)ㆍ대모(玳瑁)ㆍ흑산호(黑珊瑚)와 부자(附子)ㆍ청피(靑皮)는 세상에 이름난 물건인데, 물산(物産)으로 동국의 곳간일 뿐 아니라 정기(精氣)가 모두 사람을 살리도다. 점필재가 탐라 노래 14편을 지어 풍토와 물산을 대강 기록하였다. 상동
○ 나월상인(羅月上人)이 늘 소라 한 개를 품고 다니면서 혹은 산속에서 혹
은 성읍(城邑)에서 문득 불곤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곧 상인(上人)이 온 것을 알았으므로 스스로 나승(螺僧)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다음날 홍류동에 들어가게 하면 / 他年許入紅流洞
소라 소리 울리며 푸른 산에서 나오리라 / 須遺螺音出翠嵐
하였다. 상동
○ 강인재(姜仁齋 강희안(姜希顔))의 《양화록(養花錄)》에 이르기를, “서울 지방에서 매화를 접붙이는 것은 모두 천엽(千葉) 홍백 매화로서 짝이 많은 열매를 맺는데, 곧 화보(花譜)에서 이른바 중엽매(重葉梅)라는 것이다.” 하였는데, 점필재가 말하기를, “담 밑에 한 꽃이 있는데 천엽도(千葉桃)와 같다. 빛깔은 연하고 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곧 천엽홍매(千葉紅梅)라고 말하나 매화와는 같지 않다.” 하였다. 상동
○ 지리산(智異山) 서북쪽에 저연(猪淵)이 있어 고기가 여기에서 나는데, 매년 가을에는 용유담(龍游潭)으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도로 저연으로 올라온다. 고기잡는 이가 바위와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두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안으로 떨어지는데, 등의 무늬가 가사(袈裟)와 같으므로 가사어라고 부른다. 점필재의 〈가사어〉라는 시가 있다. 상동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말이 죽자 후원에 묻었다. 사람들이 그 조부의 풍도가 있다고들 하였다. 점필재 시에,
청백한 것을 참으로 그 자손에게 물려주었구나 / 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상동
○ 남을 위한 〈전원사시영(〈田園四時詠)〉이 있는데, 1, 매파춘색(梅坡春色), 2, 죽창하풍(竹窓夏風), 3, 국정추월(菊庭秋月), 4, 송대동설(松臺冬雪)이 그것이다. 상동
○ 금강산은 동쪽의 으뜸이고,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의 으뜸이요, 구월산(九月山)은 서남쪽의 으뜸인데,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오르면 눈 안에 이상의 으뜸가는 세 산이 오히려 작은 언덕 같이 보인다. 《유산록(游山錄)》
○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에 화답하다.〉라는 시에,
유유의 찬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뺏음)의 죄를 치고 / 誅劉裕纂弑之罪
연명의 충분의 뜻을 펴도다 / 發淵明忠憤之志
하였다. 본집(本集)
○ 유면(兪勉)ㆍ전가식(田可植)ㆍ정지담(鄭之澹)등과 선산부(善山府) 연봉리(延鳳理)에 살면서 모두 장원에 뽑히었으므로 그 동네를 장원방(壯元坊)이라고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마을 사람이 예부터 교육을 중히 여기어 / 鄕人從古重膠厗
뛰어난 인재를 해마다 조정에 바치네 / 翹楚年年貢舜廊
한낱 성서의 연봉 마을을 / 一片城西廷鳳里
오가는 이들이 장원방이라 가리키네 / 行人指點壯元坊
하였다. 상동
○ 최 선생 한공(漢公) 태보(台甫)가 점필재 계온(季昷)과 함께 회시(會試)에 갔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재주가 비상하니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나 나는 부기(附驥 후배가 선배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음)의 가망이 없다.” 하니,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손근(孫僅)과 그 아우 하(何)가 같이 시험을 보아 형은 장원이 되고 아우는 둘째를 하였는데, 우리 두 사람도 어찌 근과 하가 안 될지 알겠는가.” 하고,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못가의 봄 풀은 비 흔적도 많은데 / 池塘春草雨痕多
남들은 우리를 손근과 손하 같다고 말하네 / 人逭吾行是僅何
문 앞을 지나며 봄빛이 늦었다 말하지 말라 / 莫道過門春色晩
성안의 도리는 아직 피지도 않은 것을 / 滿城桃李未開花
하였는데, 이해에 모두 급제하였다. 《소문쇄록》
○ 점필재가 비로 말미암아 증약역(增若驛)에 머물면서 시를 지었는데,
증약역에서 큰 비를 만났으니 / 增若驛中三日雨
무술날 밤중에 천둥소리 요란하고나 / 戊戌夜半一聲雷
의관도 벗지 않고 앉았으니 / 不辭衣服冠而坐
기한과 갈증이 한꺼번에 찾아드네 / 其奈飢寒渴幷來
하였다. 또 한식날 비오다[寒食日雨]는 시에,
고향에 벼슬한 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 / 休誇故里印纍纍
작서(하찮은 벼슬아치들)가 설치니 감히 헤아릴 수 없도다 / 雀鼠紛紜莫敢窺
마흔 일곱 해에 머리는 세려는데 / 四十七年頭欲雪
동지 뒤 1백 5일 날 [한식] 보슬비 내리네 / 一白五日雨如絲
하였는데, 앞에 시는 기련(起聯)이고 뒤에 것은 영련(領聯)인데 모두 측자[仄字]를 놓았으나 시어(詩語)는 타당하다. 상동
○ 성화(成化) 임인년 무렵에 개령(開寧) 사람이 밭을 갈다가 돌부처를 얻었는데, 귀ㆍ눈ㆍ입ㆍ코가 다 없어진 채 밭두렁에 놓여 있었다. 우연히 천식(喘息)을 앓는 사람이 절을 하였더니 병이 약간 덜한 것 같았다. 이에 영험하다 하여 남녀가 좋은 천과 향촉(香燭)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밤낮으로 끊임이 없었고, 중도 내왕하였으므로 금산 태수(金山太守) 이인형(李仁亨)이 그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잡아다가 쫓아버렸다. 점필재가 시로써 태수를 치하하기를,
풀밭에 버려져 세월도 모르는 / 抛擲田萊不記春
미욱한 돌덩이에 무슨 신이 있단말고 / 頑然拳石有何神
처음에는 밥이나 얻으려던 목거사가 / 初如求食水居士
차츰 돈을 긁어모으는 토사인이 되었구나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이나 전하여 물들었던고 / 男女幾家傳汚染
향등 켠 한 마을이 우물쭈물하는데 / 香燈一里欲因循
바로 우리 원이 빈주의 태수인 양 / 我侯直是邠州守
요사를 쳐부셔 사방을 진동시켰네 / 擊破妖邪震四隣
하고, 스스로 주석하기를, “옛날 왕사종(王嗣宗)에 빈주(邠州) 태수가 되어 귀신의 사당 밑에 있는 요사스러운 여우를 잡아 죽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훌륭히 여겨, ‘성조(聖朝)에 바야흐로 영웅이 있음을 믿겠네[聖朝方信有英雄]’라는 시구까지 있었다. 이번의 돌부처는 그 괴이함이 요사스러운 여우보다 더하거늘 요골(妖骨)을 잡아 내쫓고 지전(紙錢)을 불살라 버려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밝게 그 잘못을 알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특한 일이다.” 하였다. 상동
○ 점필재가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함양(咸陽)의 원이 되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시로써 전송하기를,
가상타 그대 청반을 마다하고 군수를 바라니 / 多君乞郡阻淸班
기쁘게 어버이 계신 곳에서 즐거움 다하리 / 好向庭闈罄一歡
오정이 예로부터 짝을 앎을 어이할꼬 / 五鼎從來知匹奈
영원토록 사모하여 추반이 울 것일세 / 終天永慕泣錘瘢
하였는데, 추흔(錘痕)에 울었다는 옛일을 빌려다 쓴 것이다. 《진산세고(晉山世穚)》
○ 대궐 안의 흰 따오기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붉은 여귀 푸른 이끼 하얀 옷에 비치니 / 紅蓼蒼苔映雪衣
대궐 개천 맑고 얕아 위험치 않구나 / 御溝淸淺欠危機
가을 바람에 살며시 은하수를 살펴보니 / 秋風偸眼省雲漢
옛 짝은 아스라이 어디 메를 나는고 / 舊侶微茫何處飛
하였는데, 주에, “사물을 인하여 자기를 비유한 것이라.’ 하였다. 《시격(詩格)》
○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고 시를 더욱 잘하였는데, 정심하고 넉넉하며 세속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 근대의 시조(詩祖)로 추앙된다. 성종이 친서로 칭찬하기를, “문장과 경제(經濟)가 아울러 훌륭하다 하겠다.” 하였다. 상동
○ 〈수오(睡晤)〉시에,
오늘 벼슬 없어 내 처음으로 되돌아오니 / 今日無官返我初
창 안 그윽한 꿈에 화서국에 이르렀도다 / 小窓幽夢到華胥
화로에 창출을 피워 글자를 쏘이며 / 一爐蒼術薰書字
바람에게 부탁하여 책을 덮었다 폈다 하게 하네 / 分付淸風自卷舒
하였는데, 그때 병으로 벼슬을 물러나고 마음이 한가로웠었다. 동상
○ 두류산(頭流山)에 해유령선암(蟹踰嶺船岩)이 있는데 전해 오기를, “상고(上古) 적에 바닷물이 넘었을 때 배를 이 바위에 매었는데 방게[蚄蟹]가 지나갔으므로 이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물가의 산과 바다의 섬이 어떤 것은 전부 드러나고 어떤 것은 반쯤 드러나 있어 마치 사람이 장막 안에 있으면서 그 상투만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유두류산록(游頭流山錄)》
○ 판원(判院) 이변(李邊)이 늘 강직하다고 자부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에 남을 속인 일도 없거니와 벼슬한 뒤로부터 한 번이라도 거짓 병으로 결근한 일도 없었다.” 하였다.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병이라고 임금께 핑계한 사람도 전과 후에 수두룩하였는데 이 말은 좀 지나친 말인가 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공은 문장과 도덕이 당대 진신(搢紳)의 영수였으므로 조정에 일이 있을 때에도 그에게 물었고, 학자로서 의문이 생겼을 때에도 그에게 질문하였었다. 《추강집(秋江集)》
○ 김종직은 후배 학도들을 권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높았고,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조위(曹偉)ㆍ유호인(兪好仁) 등은 문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 밖에도 길을 열어 주어 이름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무오사적(戊午事蹟)》
○ 공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한 책을 지었는데, 먼저 족보의 도표[譜圖]를 싣고, 다음에 기년(紀年)을, 또 그 다음에는 스승과 벗 및 평소 벼슬에 임하여 행한 일과 그 훈계의 말이 가묘(家廟) 제사 의식의 법도로 삼을 만한 것을 실어, 제목하여 《이준록(彝尊錄)》이라 하였으니, 이는 《예기》의 ‘겨울 제사 때 이정(彛鼎)에다 명문을 새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본서(本序)
○ 점필재는 우애(友愛)의 천성이 지극하였다. 맏형이 종기를 앓는데 의사가 지렁이의 즙이 가장 좋다고 하므로 공이 먼저 맛을 보고 먹였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묘지(墓誌)〉
○ 견우의 사는 곳 은하가 관문이 되니 / 河皷之居河爲關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구나 / 相望脈脈一水間
1년 3백 60일 중에 / 一年三百六十日
이 밤을 제외하고는 길이 홀아비로다 / 除却此宵長爲鰥
〈칠석(七夕)〉
○ 우리 나라 사람은 시의 격률(格律)이 신라 말기에서 고려 말엽에 이르는 동안에 무려 세 번이나 변하였다. 그 동안에 풍교(風敎)를 기록하고 미자(美刺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함)를 나타내어, 개폐(開閉) 억양(抑揚)이 깊이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어, 당송(唐宋)과 견줄만하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것이 또한 적지 아니하다.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ㆍ괴산(槐山) 최해(崔瀣)ㆍ석간(石澗) 조운흘(趙云仡)이 각각 선집(選集)이 있는데, 석간은 간략하고, 쾌헌은 잡박(雜駁)하며, 오직 괴산의 편저(編著)만이 자못 체재를 얻었다고 하겠다. 〈풍아서(風雅序)〉
○ 우리 나라 병신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여러 선비들이 건의하여 문신으로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였는데, 채수(蔡壽)와 권건(權健) 등 여섯 사람이 뽑혔다. 늘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하였다. 본집주(本集註)
○ 영일현(迎日縣) 동쪽 10리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그 들에 해와 달의 못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라 때에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일컫는다. 〈영일현기(迎日縣記)〉
○ 고려의 혜종(惠宗)이 얼굴에 방석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왕(皺王)이라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탁금강변은 외숙의 마을인데 / 濯錦江邊舅氏鄕
흥룡사 안에는 상서로운 빛이 피어오르네 / 興龍寺裏藹祥光
지금 어른들은 유덕을 품고 / 至今父老懷遺德
퉁소 불고 북 치며 추대왕을 즐기네 / 簫皷歡娛皺大王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주-D001] 유유 : 남송(南宋)의 초대 왕인 무제(武帝)의 이름인데, 그가 일찍이 도연명과 사귀었으며, 진(晉) 나라의 환현(桓玄)을 치고 공제(恭帝) 때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주-D002] 오정 : 옛 제도에 사(士) 벼슬을 한 자는 삼정(三鼎)의 음식을 먹고 대부(大夫)는 오정(五鼎)의 음식을 먹는다고 하였다.[주-D003] 화서국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화서국에 가서 그 나라의 태평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화서국은 태평한 나라를 말하고, 낮잠을 화서지몽(華胥之夢)이라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