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게릴트 휘터 지음 <존엄하게 산다는 것>
존엄(尊嚴)
‘산다’는 것.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손을 번식하고 사랑을 나누고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 물론 지구에 살고 있는 칠십 억 인구가 다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겠지. 처지와 상황에 따라 열악하고 비참하게 살기도 하고, 누구는 너무 많이 가진 것에 눌려 권태와 우울 속에 지내고 있을거다. 그러나 보통은 나름의 사단칠정을 가지고 살아갈 터. 위선과 위악 속에 자신을 던져 가며, 가끔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건지 고민하며 살 것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물신성, 탐욕과 기만, 전쟁과 환경 파괴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지역과 종교, 사상과 집단적 경험에 따라 해법은 다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존엄성’있게 삶을 견지하면 되지 않겠냐고 묻는다. 여기서 존엄은 도덕 윤리의 당위성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온 나침반으로 뇌신경 세포망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존엄은 <세계인권선언> 제 1조에 나와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수로 살아 갔던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도 이렇게 말했다. “결코 앗아갈 수 없는 정신적인 자유가 마지막 호흡의 순간에까지도 자신의 삶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어갈 방법을 찾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 ‘정신적인 자유’가 존엄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존엄의 개념을 ‘자연과학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저명한 뇌과학자인 그가 말하는 존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열역학 제 2법칙
모든 에너지는 엔트로핀(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뇌 신경 활동도 이 법칙에 따른다. 휴식기에도 포도당 에너지원의 20%를 사용하는 뇌는 외부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에너지를 소비한다. 문제는 이 자극이 너무 과하면 폭발한다는 것. 하여 뇌는 외부의 복잡성에 단순성을 부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예를 들어 수영을 배운다 치자. 처음에는 자세를 잡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영법을 구사한다. 이를 뇌 신경의 상위 세포망을 새롭게 형성했다고 한다. 사상과 가치 개념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옳다는 것도 단순성 작업의 결과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변화에 공동체 누군가 대응하고, 이를 호의적으로 보는 성원들이 따라하면서 집단적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러다 사회 전체 성원의 행동 원리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그 사회가 당연히 따르게 되는 이념과 제도, 윤리가 된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이 원리에 따르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우리 인간 두뇌의 처리 능력을 넘어선 정보를 폭식하고 있고’, ‘개인의 의도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있다. 사람들이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 자신의 존엄을 무너뜨리고’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최적화하도록 사용’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현대인이 모르고 있을까? 아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편안함에, 안일한 대처와 단기적인 대책으로 큰 흐름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뇌의 가소성과 개방성
인간의 뇌는 태어나면서 형성된 신경망이 없다. 망아지처럼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걷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생아는 누군가에게 배우고 시범을 보고 스스로 연습하고 익숙해지면서 생존하기 시작한다. 이 특징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이 것이 뇌의 가소성이다. 개방성은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외부의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배운다. 외부의 자극에 둔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뭔가 믿을만 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인간은 신체, 정신구조상 그렇지 못하다.
인간 뇌의 가소성과 개방성은 개별적 공동체 안에서 인간을 ‘애정과 보호’를 받으면서, ‘주체성과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만든다. 이 것이 뇌신경학이 보는 존엄의 정체이다. 인간은 ‘집단 소속감’과 ‘자율성’이 침해받지 않을 때 건강하고 행복하다. 이 것이 일상적으로 해치는 사회는 존엄한 사회가 아니다. 왜? 나의 존엄이 중요하면 남의 존엄도 중요하니까. 이 주장은 사실 매우 익숙하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성경의 황금률, 논어의 서(恕)가 그 것이다. 존엄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간이 가진 고유한 성질’이다.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그로 인해 에너지 소모가 크다. 이렇게 가다간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내 놓은 대책들은 단기적이었고 실패했다. 대부분 전쟁과 기아, 문명의 파괴였기 때문이다. 현재 인간이 내 놓은 대책 중 하나가 화성 이주다. 그러나 탐욕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인류가 화성에 간 들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질서의 원칙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그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인식하고 개인의 삶을 그리고 타인의 공존을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진화론의 선구자인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서 적자생존을 끄집어 낸 것은 후대들의 오독이다. 다윈은 오히려 인간의 이타심을 강조했다. ‘이기적 유전자’도 틀린 말이다. 애초 신생아 뇌의 신경세포망은 그려지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도 있다. 인류보다 더 진화된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한다면 그 생명체는 인간보다 더 이타성이 강한 존재들일 것이라고. 왜? 이기심으로 똘똘뭉친 존재는 진작에 멸종했을 터이니까.
책 익는 마을 원 진호
첫댓글 살짝 화단에 눈이 쌓여 있는, 춥다기 보다 시원한 느낌의 겨울 아침 출근하면서 곰곰이 책을 복기한다. 뇌의 가소성과 개방성,신생아들의 신경망 형성 부재, 열역학 제 2법칙, 개별적 공동체로서 '소속감'과 그 안에서의 '자율성'에 대해.
- 인간은 자신의 경험(실패와 실수를 동반한 반복된 노력)과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자아가 형성되고 인격이 완성되어 간다.
- 문제는 어떤 경험,어떤 타인과의 교류를 하는가이다. 처지와 환경이 개판이면? 히틀러 같은 데마고기에 걸리면? 반공이데올로기에 꼼짝없이 갇히면? 저자도 그럴 수 있다고 한다. 그 것도 인간이 현재를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대책일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러나 그 대책들의 결과는 비참했다. 해서 그 대책들은 단기적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장기적인 대책은 존엄을 중심에 두지고 하는 거다. 여기서 핵심은 나의 존엄이 중요한 만큼 남의 존엄도 중요하게 여기자는 거다. 그래야 개인과 사회의 소속감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래야 인류의 생존이 보장되는 것이다.
- 여기까지 이해가 되지만, 왠지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학적인 근거로 이야기 한다지만 당위와 도덕과 윤리적 주장으로 들린다. 그래서 맘 한 구석이 허허~헛헛!하다. 쓸쓸한 아침 출근길이 되었다.
손주들과 함께 살면서 뇌의 가소성이란 말을 실감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일어나고 계속 반복하다가 걷는것을 보면서 생존하려는 몸부림을 봅니다.
저도 생존의 몸부림을 보면서 저를 돌아보곤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 저존감의 3대 기본 축- 자기 효능감(자기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자기 조절감(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자기 안전감(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능력).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자전거 타기에 비유. 반복해서 연습하면서 익숙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
슈테파니 슈탈의 <심리학,자존감을 부탁해>,갈매나무: 99:1세상에서 자기 성취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스스로 잘 못한다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해서, 스스로에 대한 인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가장 먼저 삶을 스스로 제어하며,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우연에 인생을 내맡기지 말자
앞으로 인간의 경쟁자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다. 기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창의성(상상력), 편집력(큐레이션),사회적 지능이 필요하다. 그 중 사회적 지능이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상대방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직관적인 이해를 통해 알아냐는 능력이다. -한국 출판계 키워드 2010/2019 에서 인용
뇌의 가소성과 관련 인간은 평생 공부하는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김진애박사의 <왜 공부하는가>, 다산북스. 여기서 저자는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이유를 찾아 공부하'자고 한다.
<공부하는 삶>, 유유. 이 책에서는 앎의 기쁨을 다루었다.
<공부하는 인간>,예담. 세계 여러나라의 학습현장을 살펴본다. -한국 출판계 키워드 2010/2019 에서 인용
그렇다면, 교육 현장은 어떤가?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 지향>(민들레): 생기를 잃고 성장을 거부하고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교육공동체벗): 학교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기록.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현장에서 소진되어 버리는 교사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한국 출판계 키워드 2010/2019 에서 인용
- 어제 모임에서 앞으로 10년 후 학교에 안 가는 학생이 반은 된다는 촌장님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약에 쓰려 해도 어디 한 군데 쓸모가 없는 것이 학교'라는 말에 맘이 씁쓸하다. 책마을의 지향이 '공부'에 있음을 다시금 느낀다.
저도 책 { 에이트} 이 지성지음-차이정원 출판 읽었는데 2045년쯤 되면 99%의 직업이 인공지능으로 바꿘다 합니다.
그 위기를 이겨 내려면 공감능력.창조적상상력.기부.봉사.인권.철학.등등을 실천하면 인공지능에 지배당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수 있다 합니다. .
그래도 위안이 되는것은 책익는 마을처럼 독서토론으로 공감능력.창조적상상력.철학등을 깨우칠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책모임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기회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