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70년대에 매주 동아방송에서 하던 '유쾌한 응접실'에 고정 패널로 나온 양주동 박사를 나는 기억한다. 그때 그가 자칭 '우리나라 국보 1호'라고 하던 말도 기억한다. 어느 날인가 자기의 이름을 분석하면서 부모님께서 '동양의 기둥이 되라'고 주동(柱東)이라고 지었다고 너스레를 떨던 기억도 난다. 양주동박사는 많은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수한 해학으로 청중을 즐겁게 해준 ‘라디오 스타’였다. 스스로 ‘양주둥이’라는 농담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 때는 문학도의 길을 걸어볼까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구획정리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 양주동을 좋아하면 동국대로 가고 박목월을 좋아하면 한양대로 가라는 식으로 말하던 기억이 난다. 실력있는 애들은 신록예찬의 이양하가 있는 연세대로 간다고 우스게 소리를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 양주동(1977.2.4), 박목월(1978.3.24)이 거의 같은 시기에 타계를 해서 마음 아파하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번에 박목월 묘를 답사하다가 근처에 고향의 봄 작가인 이원수, 양주동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한번 찾아서 어렵게 답사한 곳이다. 학창시절에 흠모하던 두분을 한 곳에서 만나는 기분이 무척 흥분 되었다.
이원수 묘를 먼저 보고 급락하는 지형에 모셔져서 조금은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양주동 묘는 얼른 보고 왔지만 상당히 양명하고 중심맥을 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관리인의 안내로 찾은 곳이라 사진 찍기 바빠서 다른 생각은 안하고 왔지만 직감으로 느낀 것은 매우 양호한 터에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든다. 그런데 묘역에 풀이 나지 못하게 하려는듯 봉분을 없애고 화강암 덮개를 해놓아서 보기에 삭막한 느낌이 든다. 풍수에서는 봉분을 천기(天氣)를 받는 통로로 생각하기 때문에 없애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양주동박사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문자로 쓰여진 우리의 신라향가 25수를 완벽하게 해석하여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 ‘여요전주(麗謠箋注)’ ‘국학연구논고(國學硏究論考)’ 등이 있고, 시집 ‘조선의 맥박’, 에세이집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인생잡기’가 유명하다. 본인이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T.S.엘리엇 전집’ ‘영시백선(英詩百選)’ ‘세계기문선(世界奇文選)’과 같은 번역서도 냈다. 저서 중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술과 글과 벗 이야기를 재미있게 쓴 ‘문주반생기’이다.
학창시절에는 거의 암송하다시피 향가를 읆조리고 다녔었는데 지금도 그때 암송했던 우리의 시(詩)나 훈민정음 서문, 독립선언서, 고문에 나오는 가사문학 등등... 어릴 때 암기해서 그런지 잘 잊혀지지도 않고 술술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에 양주동박사의 기행도 많이 들었다. 그중에서 영어학원에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학원을 차렸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던것 같다.
아무튼 내 학창시절에 우상처럼 여기던 분들의 묘를 답사하고보니 요즘 아이들이 연예인, 스포츠스타를 보는듯 나도 상당히 흥분되었는데 너무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다른 것을 별로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다음번 다른 문인들 묘역을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다시한번 가서 좀 천천히 앉았다 내려와야겠다.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무애(无涯). 아버지는 양원장(梁元章)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황해도 장연에서 보냈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1928), 같은 해 평양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였다가 일제말 이 학교의 폐쇄로 그 자리를 물러나 1940년부터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1947), 중간에 수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것(1958∼1961)을 빼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학교 이외의 다른 대학들에도 출강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간접의 영향을 입은 후학들이 많았다.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인 및 문학이론가로서 문단에서의 활약이 화려하였으나,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부터는 주로 고시가(古詩歌)의 주석에 전념하는 국학자로 전신하였다. 『금성(金星)』 동인으로 등장하여(1923)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를 주로 썼다. 시집 『조선의 맥박(脈搏)』(1930)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데, 그의 시들이 가지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문예공론(文藝公論)』(1929)을 발간하며 시작된 양주동의 평론은 문학사가들에 의하여 절충론이라고 불린다. 염상섭과 박영희(朴英熙) 사이의 문학논쟁을 이어받아 경향파(傾向派)의 기수였던 김기진(金基鎭)과의 사이에 폈던 논전은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고시가에 대한 해독 및 주석에 대한 연구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이기도 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은 처음에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라는 이름으로 1942년에 간행되었는데, 뒤에는 단순히 『고가연구』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지금 표준으로 잡는 것은 1965년의 개정증보판이다.
1947년에 출판되어 나온 『여요전주(麗謠箋注)』는 『고가연구』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는 평소에 고시가연구를 3부작으로 간행할 것을 공언하였으나, 그 제3부에 해당하는 것은 끝내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5년에 출간된 『고가연구』 개정증보판에서의 증보부분에서 그 제3부의 일부를 볼 수 있다.
광복 후에도 그의 문필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으나, 왕년과 같은 문학평론의 자리에는 돌아가지도 않았으며, 시작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영문학분야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하여서도 거의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영문학 강의와 영시의 번역을 하며 작품집의 편저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영문학연구의 저술을 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주석에 대한 관심은 계속된 정정과 보충으로 지속되었다. 1962년에 나온 『국학연구논고 國學硏究論攷』에 실린 논문들에 새로운 의견들을 볼 수 있거니와, 『고가연구』나 『여요전주』의 개정판들에 그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산 64-4 |
관리자(연락처) | 용인공원묘지 관리사무소 |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위치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비... 흰색 대리석에 글자를 새겨 잘 보이지 않는다.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전경... 묘에 봉분을 없애고 화강암으로 덮개를 씌웠다.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를 돌아가면서 촬영했다.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후경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공원묘지에 이정도면 상당히 좋은 터라고 볼 수 있다. 묘역도 비교적 널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 현무에서 내려오는 맥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를 찾으려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큰 나무를 찾으면 쉽게 갈 수 있다.
▼ 주차장에서 바라볼 때 제일 큰 나무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묘가 있다.